병장 윤정기   2009-09-11 09:13:43, 조회: 200, 추천:0 


1.
나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 그러한 환경이 아우르는 보편적인 유년의 세월을, 나는 어떤 모종의 <초월적 법칙> 속에서 뒤척이며 보냈는지 모른다. 요컨대 그 법칙이란, 나에게 주어진 ‘보편’이라는 삶의 궤적이었고, 그 원심력에 의한 궤도를 벗어나지 말라는 일종의 암시이자 억압이었다. 그리고 그 법칙이 내게 ‘초월적’이 되어야 했던 것은, 도무지 내가 그 법칙을 일방적으로(자의적으로) 규정짓는 짓과, 그 법칙으로부터의 해방을 끊임없이 꿈꾸는 짓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한데, 나는 이러한 내 행동에 대해 암묵적인 자기암시를 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의 나는, 이런 자기암시를 통해 세상이라는 무시무시하고 거대한 ‘경험’의 덩어리를 해체하여, 분해하고, 그 자체로 행복이라는 감각을 느끼거나, 아니면 분절된 경험을 통해 그 법칙이라는 것을 깨어 부수는 것 자체를 나의 사명으로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어떤 <쇼킹한> 사건들을 가끔 저질렀는데, 그것은 결코 타인에게 나의 현존을 다시금 올바로 인식시키려는 노력이었기보다는, 바로 그러한 과정을 통해 인식되는 존재의 방식을, 그 법칙을 깨어부수려는 노력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우리가 가진 기억이라는 시스템의 본질적 오류는, 바로 그것을 완벽히 로딩하려는 프로세스의 ‘과부하’적인 논리구조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내게도, 그  논리적 구조로부터 약간은 자유로운 기억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도둑질’에 관한 기억이다. 

그날 아침도 나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도 모를 푸성귀같은 가방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도 모를 책을 쑤셔넣고는, 그것보다는 소중한 아침밥을 챙겨먹고, 집을 나섰다. 까마귀 한마리가 느닷없이 울었고(이것은 분명하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재수가 없다고 생각하다가, 어? 왜 재수가 없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다가 ㅡ 그것이 고정관념에서 비롯되었고, 세계의 ‘법칙’속에 은닉하는 인식이라는 것은 분명해졌다 ㅡ 그 재수없음을 인식하는 나 자신의 생각이 매우 재수없음을 탄식하다가, 결국 문방구 앞에 서서 ‘재수없는’ 한 문방구의 주인을 쳐다보았던 것이다.
당시 학교 앞에는 문방구들이 줄지어 3개쯤 있었는데 모두 비슷한 물건들을 팔고 있었으나, 문방구마다의 특색이 조금씩은 나뉘어 있었다.(먹는 곳, 학용품  사는곳, 이상한 곳? 등등.) 그 중에서도, 그 때 내가 앞에 섰던 문방구의 주인은 ‘저글링떼’스러운 초딩들을 그의 분명한 태도로 혐오하면서도, 그들에게 물건을 팖으로서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는 ‘속물적인’ 사람이었는데, 이것은 분명 라스꼴리니꼬프(이하 ‘로쟈’)가 고리대금업자 ‘할망구’를 쳐다보았던 시선과 부분적으로 흡사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분명 세계 속에서 ‘고리대금업자’, 즉 <이>같은 존재의 양식과, 그 위치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양심불량하게도 불량식품을 팔아 아이들에의 치아와 건강을 해치고 있었으며(흥!), 고무지우개 하나에도 지나칠만한 이윤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담합’이고 ‘독점’이었는데, 그것은 시장경제의 활성화를 저해하고, 다른 근방의 구멍가게들과 슈퍼들의 입지를 초라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수완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들은 선생님이 대체 왜 하는지도 모를 수업시간(특히 미술)의 그 수많은 작업들의 준비물을 그 곳에서 <모두> 구입해야 했으며, 그 주인이라는 녀석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한 면면의 미소를 띠며, ‘얼른 사라’는 눈짓으로 그 준비물들을 무한정 내다 팔고 있었던 것이다. 
젠장! 그것은 분명 잘못되었다!
나는 생각했고, 그것은 곧 내게 깨부수어야 할 세계의 법칙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곧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재수없는 문방구의 주인은 또한 어떤 방면으로의 “선량한 장사치”라는 입지를 굳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없다면? 우리는 조금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서 어쨌든 그 많은(왜 많아야 했을까?) 물건들을 조금 더 먼 곳에서 사야 했고, ㅡ 그것을 소설 속 고리대금업자 할망구에게 어쩔 수 없이 돈을 빌렸던 수많은 가난한 자들과 비교해보자 ㅡ  그가 설파하고 있었던 수많은 학업내용에 관한 밀담들 ㅡ 이건 좀 많은 얘기가 필요한 문제지만, 여하건 그들은 어쩐지 학업내용의 미래마저 간파하는 대담성을 보여주었으며, 무려 그것을 조정하기도 했다! ㅡ 을 잃어야 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한창 소심증과 자폐의 문들을 앞에 둔 나 같은 초라한 초딩에게는 분명 거대한 벽같은 존재였고. 그것을 ‘깨어부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고, 새로 시작하자는 ㅎㅁ과도 같은 모험정신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은 분명히 ㅎㅁ이었다.

아, 하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것이 나의 사명이므로. 그래서, 나는 꽤 조숙했던 나의 사유로 말미암아, 하나의 소심한 방안을 선택해 냈는데, 그것은 분명 어떤 종류의 소극적 ‘실천’이 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동시에 나 자신에게 꽤 위협을 가할 수도 있는 것이었는데, 바로 ‘훔치기’였다. 도둑질 말이다. 왜 그런 방법을 떠올렸는지는 모르지만, 이제 와서 돌아보면 누구든, 어떠한 종류든, 정도가 조금씩 다른 ‘도둑질’을 한번 정도는 감행해보았을 것이라는 공동체적인 유대가 나를 더욱 부추겼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한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가졌는데, 도둑질을 ‘한다’라는 것이 문방구 주인이 가진 세계 속 무형의 ‘권위’들을 해체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물질적인 피해를 입혀 그에게 금전적인 타격마저 줄 수 있었다! 더욱이 그 행위가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것이 만들어낼 결과가 문방구 주인의 선행으로 보이는 그 판매행위와 밀담에 저항하고, 세계 속에서 악행으로 까발리기 위한 초석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지금에서야 고백하건데, 나는 분명 나의 그 최초의 행위에 대해 일종의 ‘희열’을 느꼈다. (아. 그렇다고 나는 도적이 될 생각은 없다. 그것도 ‘의적’은 더더욱.) 로쟈 또한, 자신이 벌인 살인에 관하여 그것이 과연 <죄>인가를 놓고 자의식속에서, 수많은 논쟁속에서 그의 주장을 토로했는데,(그것은 그가 쓴 범죄에 관한 ‘논문’에서 비롯한다.) 그것이 자신을 <비범한> ㅡ 로쟈는 그의 논문에서 죄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사람을 두 가지로 분류하는데, 그것은 <비범>과 <평범>이다. <비범>한 사람들은 시대의 낡은 도덕률을 폐기하고, 앞으로 나아갈 ‘권리’(죄에 관한)를 인식하는 존재들, <평범>한 사람들은 그저 번식의 수단과 생존을 주체로 인식하는 이들로 말이다. ㅡ  사람으로 생각하고, 세계를 위한 작업을 선행함으로 인하여 어떤 권리를 함축하고 있는 수많은 범죄들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는 종류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것의 예로 그는 ‘나폴레옹’에 관한 얘기를 꺼내는데, 쉽게 말하자면 나폴레옹의 살인과 그의 살인을 동일시할 수 있는 그러한 권리, 그러한 정당성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된다. 그리하여 나는 소설을 읽은 후, 어쩌면 모든 인간은 자신이 가진 죄에 관한 권리에 대하여 <침묵할 수 없는 의무>를 가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 <비범한>사람은 권리를 가지고 있다······. 즉 공식적인 권리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양심상······ 모든 장애를 제거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

                                                                                                                   「죄와 벌」P.377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여하건 나는 결단을 내렸다. 거사의 일시, 방법, 종류, 그리고 그 다음의 처리방법까지 나는 내면으로 이미 ‘이미지트레이닝’ 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사는 흐린 날이어야 했고, 아이들이 문방구 앞에 북적거리는 타이밍이어야 했다. 흐린 날은, 어쨌든 문방구 주인이 허리를 부여잡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앉아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도둑질의 종류는 지우개, 볼펜, 학종이(?!) 등으로 정해졌는데, 그...것에 관한 이유는 아마도 개인적 취향이었거나 가판대 앞에 있고, 작은 물건들이라 훔치기 쉬웠다는 것일 게다. 거사의 방법은 당연히 ‘은밀해야’ 했다. 목격자는 있을 수 없었다. 소매치기처럼 조용하고 은밀하게. 소리없이 이루어지는 손기술에 대하여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처리방법이었다. 내겐 훔치는 작업보다는 그것의 ‘처리방법’이 중요했다. 여하건 나는 그것을 훔쳐 나 자신의 영달을 위해 쓸 생각은 그다지 없었으니까. 로쟈가, 훔친 장신구와 돈을 돌 밑에 숨겨놓고 고민했던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로쟈가 그러했던 것처럼, 나는 그 행위 자체를 도덕률에 있어서는 부도덕하다고 인정했으나, 사회적으로는, 그러니까 나의 심대한 해체의 작업이라는 사실로서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지 않기로 하였다. 어쨌든 그게 마음 편하잖나.

까마귀가 울던 그 날 아침으로부터 시작하여, 나는 약 3차례 정도 그 해체의 작업을 감행했다. 그 순간들에서 느낀 감각은 지금도 제법 생생한데, 그리해서는 안되겠지만 나는 로쟈가 살인의 현장에서 듣게 된 그 공포의 <종소리>처럼 퉁탕거리는 내 심장소리와 함께 그 작업에 몰두했고, 그것이 끝나면 왠지 흥분이나 카타르시스 따위의 것들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몇 차례의 작업이 있고 난 후의 그 결과물들을,(노획물이라고 해두자) 나는 ‘사용’하지 않고 고이 내 책상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하지만 결과는 미미했다. 나는 내게 있어 이 해체의 권리가, ㅡ 즉, 문방구 주인의 물건을 훔치는 행위가 ㅡ 세계의 법칙에 대한 어떤 ‘안티테제’를 만들어 낼 것으로 기대했으나, 주인은 오히려 침착했다. 내가 원하던 것은, 그가 화를 낸다는 사실, 그리고 앞으로의 판매에 있어서 신중을 가하고 아이들을 불신의 눈초리로 쳐다볼 때, 더불어 그 사실이 선생님들의 귀에 들어가 우리에게 피드백되어 돌아올 때, 바로 그때! 나는 녀석에게 보낼 익명의 쪽지와 노획물들을 통해 한 방 먹이고 싶었던 것이다. 
“당신이 가진 수단들이 우리의 목적을 만들어갈 순 없어.”
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결국 우리나라의 교육과 지역경제에 대한 한 초딩의 소심한 ‘실천’이었던 셈이다. 




2.
어쩌면 이것은 그저 우스갯소리같은 기억의 편린들일지도 모른다. 아니, 이건 분명 과거에 대한 현재의 마름질이며 재해석이고, 정당화작업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쟈가 자신의 행위를 나폴레옹에 비견했듯이, 나는 로쟈의 행위에 나의 과거를 비견시켜 현 시대의 도덕률에 대한 생각을 반추시키고 환기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이것이 우리의 <죄의식>이라는 주관적 감정을 ‘분열시키는’ 탈권위적인 소스를 제공해주는 일이라면.

해체의 작업은 해체되었다. 권위를 해체시키기 위한 작업의 내면에는, 어차피 또 다른 권위가 대체되기 마련일까? 나는, 결국 덜미를 잡히고 말았던 것이다. 

나의 마지막 작업이, (그러니까 주인의 아무렇지도 않다는 무신경한 태도에 결국 굴복하고, 해체의 작업을 중단하기 위해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자는) 즉, 도둑질의 ‘환원’작업(!)이 진행될 즈음 나는 중대한 실수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어쨌든, 내 품속에는 그동안의 노획품들이 들어 있었고, 그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작업은 결코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굉장히 귀찮아졌고, 아마도 그래서 주의력이 떨어진 환원작업의 도중에 내 팔목을 격하게 움켜잡는 주인의 손길에 화들짝 놀라고 만 것이다.(이건, 정말 억울한 사연이며, 바보스런 사연이라고 할밖엔.) 당연히 나는 도둑으로 몰렸고, 주인의 분노한 노성에 그날 아침, 주변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잿더미같이(말 그대로 나는 절망했으니!) 변해버리고 말았다. 

“어린노무 쇄끼가!!”
분노한 문방구 주인은 내 손목을 자국이 생기도록 움켜잡으며 그동안의 도둑질에 대해 다 안다는 듯이 몸을 움찔움찔거리며 설명하고는, 아이들이 왔다갔다하는 문방구의 문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들게 했다.(경찰과 선생님을 부르겠다고 협박한 사실은 넘어가자.) 어쨌든 그것은 그에게 중대한 <범죄>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시대의 도덕률은, 그 죄를 그렇게 가볍게 보지 않았다. 어쨌든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는 거란다. 나는 소를 훔친 것 같은데······. 나는 얼마 후, 부모님과 선생님에게 그야말로 혼이 빠지게 혼난 것은 물론, 동네 슈퍼 아줌마에게까지 도둑으로 불리며 얼마간 의심을 받아야 했다. 죗값은 쉬이 씻기지 않았다. 

그것은 「죄와 벌」처럼 비극적 요소를 가져버린 사건이었던 것이다. 




3.

[보다 많은 것을 무시하는 자만이 그들의 입법자가 되고, 더 많이 해치울 수 있는 사람이 그 누구보다도 옳은 사람이 되는거야!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거야! 눈먼 사람들만이 그것을 모를 뿐이지! ]

                                                                                                                   「죄와 벌」P.613

[어떻게 지금까지 이 불합리한 세상을 헤쳐나가면서 꼬리를 붙잡아 던져버릴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을까. 그리고 왜 지금도 그러지 못하는가라는 생각이 태양처럼 명백하게 떠오른 거야! 그래서 나는······ 내가 감행하고 싶었어. 그래서 죽였어······.]

                                                                                                                   「죄와 벌」P.614



[······인간이 <이>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제기한 걸 보면, 이미 <내게 있어서> 인간은 <이>가 아니라는걸, 그리고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고,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일 없이 곧바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에게만 인간은 <이>라는 사실을 내가 몰랐다고 생각하느냔 말이야······?
나폴레옹이라면 그 일을 저질렀을까 아닐까의 문제를 가지고 내가 몇일 동안 고민을 했다는 건, 내가 나폴레옹이 아니기 때문이란걸 나는 분명히 느꼈어······.
······난 말이야, 소냐. 궤변없이 그냥, 자신을 위해서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서 죽이고 싶었어! ]

                                                                                                                   「죄와 벌」P.615


로쟈가 소냐에게 살인을 처음 고백하는 이 부분은, 그것이 죄를 ‘씻는’ 행위로서 작용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어쩔 수 없는> 그의 이런 고백이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는가!>하는 선언에 대하여 번민하게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살인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렇다고 하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수많은 사람을 ‘살인’했다.(여하건, 위대한 이들은 위대한 살인자이며, 로쟈의 말처럼 ‘위대한 슬픔’을 느껴야 하는 것일지도.) 어쩌면 그가 살인한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이>일 지도 모르지만, 죄에 대한 ‘권리이자 의무’를 가진 <비범한> 인물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래서 로쟈의 말은 옳은 것처럼 들린다. 사실, ‘보다 많은 것을 무시하는 자만이 우리들의 입법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죄의식’을 해체할 ‘권리’를 가지는가.>
본인의 과거이야기에서, 훔치는 행위는 과연 <죄>로써 성립된다는 말인가. 다분히 사법행정적인 입장에서가 아니라, ㅡ 미성년자의 범죄에 대한 규율일랑 차치해버리자 ㅡ 과연 그것이 <죄>로써 성립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의 지배를 받을 것인가. 우리 사회의 도덕률은, 과연 얼마나 우리들을 <죄>의 관념속에서 지배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깨어부수는 ‘권리’는 과연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 <이>도 아니고, 나폴레옹도 아닌 <인간> 그 자체로써, ‘자신만을 위해서’ 죽여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할 권리와 혹은 의무마저 가져본 적이 있었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목적이 수단을 대체할 수는 없겠는가? 그럼, 나폴레옹은 살인을 위한 수단이 되나?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바로 그 지점 ㅡ 수단과 목적이 만나고 대체되는 바로 그 지점 ㅡ 에서 우리가 ‘가져버린’ 죄의식을 분열시킬 수 있지는 않을까. 

수많은 물음들 속에서, 나는 어린 시절을 다시 회상한다. 나는 죄를 지었다. 그리고 벌을 받았다. 어찌되었든 나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것 정도는 안다. 나 자신이 바로 그 명제를 위한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4. 
얼마 전에, 여성부에서 ‘혼인빙자간음’에 대하여 헌법재판소에 위헌소송을 냈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 법이,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박탈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란다. 즉, 여성들에게는 그 법률이 ‘권리’로써 작용하지 못하고 ‘의무’로서만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이 느낄 ‘죄의식’이란 결국, 그 의무에서 발현하는 것이리라.

네바 강을 쓸쓸히, 하지만 불타는 사유로 자신을 잠식하며 걷던 라스꼴리니꼬프가, 결국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뽀르피리의 도움(?)을 받아 감옥에 가기까지의 여정은, 결국 우리에게 목적을 만들어가는 수단들에 대하여, 그 모종의 권리들에 대하여, 사실은 그것이 권리가 아니라 의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그것들은 때로, 우리의 ‘죄의식’ 속에 숨어 본질을 드러내지 않는 ‘선과 악’의 상대성에 관한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죄의식’을 해체하고 분열시켜 그 속을 뜯어보게 하는 시도들은, 바로 그러함으로 인해 우리들의 ‘인식’자체를 변화시키고, 현상을 조금 더 올바르게 바라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그는 당시에 아무것도 의식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다만 느꼈다.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했고, 의식 속에서 무언가 전혀 다른 것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

                                                                                                                 「죄와 벌」P. 809 

‘인간애’는 변증법의 세계로부터 탈피한다. 우리가 가진 진정한 ‘권리’는 자유, 평화, 사랑 같은 것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삶’ 그 자체에 관한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더불어, 우리의 삶이 <위대한 패배자>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해 본다. 누군가가 그랬듯, ‘용기를 가지고 패배하는’것 말이다. <유로지비>(세상속에서는 바보스러우나, 영적으로는 지혜로운, 신학적인 의미의 위대한 인간상)라고 하던가? 




5.
여하건, 이 글은 「죄와 벌」에 관한 독서후기이되, 개인적인 과거사에 대한 주저리이며, ‘죄의식’과 ‘권리들’에 관한 잡생각들일 것이다. 「죄와 벌」을 독해하는 데는 수많은 방법론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라스꼴리니꼬프와 스비드가일로프의 관계 ㅡ 악마적인 라스꼴리니꼬프 자신의 분신이자 허무주의nihilism의 관점에서 ㅡ 나, 도스또예프스키 소설 자체의 ‘심리적인 서사기법’ ㅡ 나는 이 소설이 대학가에서 유명한 ‘범죄심리학’ 수업에도 충분히 차용될 수 있다고 본다 ㅡ 은 분명히 독자에게로 하여금 어떤 ‘영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사유의 지평을 제공할 것이다. 

러시아어로 범죄prestuplenie는 ‘어떤 경계(아마도 도덕률)를 뛰어넘는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무엇을 향해 뛰어갈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뛰어넘을 것인가.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10-21 10:56)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10-01-27
13:24:05 



상병 강진석 
  처음 죄와벌을 읽고 벽에 기대어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기억이 나네요. 저도 라스꼴리니코프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로쟈의 생각과,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겪는 로쟈의 변화, 그 모든 것에 완벽한 감정이입이 됐어요. 
죄가 하나의 일탈 비슷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정상적인 궤도에서 벗어나는 것. 처음엔 타인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하지만 한 번 벗어나보면 결국 자기를 위해서라도 필요한 의무라는 걸 알게 되는. 

윤정기님 본문 재미있게 읽었어요. 초등학교 시절 때 일이 너무 재해석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웃음) 3번 5번 부분(이라고 불러야 되나)이 특히 공감 많이 되었네요. 2009-09-11
09:37:25
  



상병 진수유 
  잘 읽었어요. <죄와 벌>을 읽고 처음으로 러시아 문학에 매력을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저 개인에게 있어서 선-악 대결의 최신 이야기는 배트맨 인데요, 지금 갑자기 또 보고 싶어지네요. 흐흐.. 2009-09-11
09:48:21
  



병장 차종기 
  러시아 문학은 좀 우울한 경향이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무튼 정기씨의 필력에 또한번 감탄하게 되는군요. 
그 책을 읽으면서 나폴레옹과 자신을 비교하던 라스콜리니노프를 비웃었는데. 
허허헛. 그는 스스로 노파를 '이' 라고 단정 짓고 살인을 저지르는데, 
그의 양심(?)이 책이 끝날 때까지 그를 괴롭히는 모습을 봤죠. 
로쟈의 여러번 변하는 마음이 아주 인상깊었던 것 같네요. 

가지로. 외치고 가요. 2009-09-11
10:18:59
  



상병 정성근 
  죄를 저지른 순간, 그에 따르는 대가와 책임은 그 자신에게 낙인처럼 새겨지게 되지요. 
뭐, 운이 좋거나 혹은 사회적 지위로 회피해가는 자들도 있습니다만.(笑) 

어쩌면 러시안 문학을 관통하는 하나의 획은, 인간에 대한 사랑일지도 모르지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간" 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사랑 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느낌? 2009-09-12
05:09:03
  



병장 김지호 
  종기님 말대로 그런 경향이 없잖아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러고보니 각 나라별로 글에도 맛이 있는게 분명합니다. 음식 맛도 각각이듯이 글도 읽는 맛이 또 다른 거 같아요. 

죄와 벌을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정기님처럼 치밀하게 기억이 잘 안 떠올라요(울음) 2009-09-12
09:41:11
  



병장 윤정기 
  진석 / 물론, 모든 죄가 그런 의미를 가지지는 않겠지만, 사회적인 도덕률과 비일상적인 연관을 맺는 <죄>들은, 확실히 일탈적인 면을 가지고 있겠지요. 러시아로 죄라는 단어가 나타내는 의미처럼. 

종기 / 로쟈의 심경변화는 정말 이 소설의 일품인 것 같아요. 죄의식이라는 정신적 기제가 변화하는 모습을 이렇게 섬세하게 그린 소설은 드물겠지요. 

수유 / 저도, 다크나이트에 나오는 '조커'의 대사를 들으며 '선-악'이라는 관계에 대해 필요충분조건이 성립된다는 것에 대해 놀란 기억이 나네요. 수유님이 글로 한번 표현해보심은 어떠신지? 헤헤. 

성근 / 예. 저도 '인간애'가 러시아 문학을 관통하는 하나의 획이라고 봅니다. 그것만이 인간이라는 조건에 가까워 지기 위한 모습인 것 같아요. 

지호 / 제 기억력은 거의 금붕어 수준이랍니다. 허헛. 저도 얼마전에 다시 읽었기 때문이지요. 2009-09-14
08:28: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