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내글내생각] 대한민국의 88만원 세대여 단결하라!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8-06 03:39:14, 조회: 548, 추천:22
여기서 나는 마지막으로 책마을에 대해, 혹은 이곳에 존재하는 소통의 장에 대해 이야기해 볼 것이다. 그리고, 이번을 마지막으로 기해, 더 이상 모종의 저자의 권위를 빌린, 훈계조로 이야기하지 않을 텐데, 그것은 나에게도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도 부당한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그러한 폭력성에 매우 직접적으로 의존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책마을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시에, 나 자신의 매우 사적이고도 개인적인 포부를 밝히는 것을 병행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1. 담론과 텍스트 사이-행복한 조잘거림과 성욕의 부재
내가 책마을에 기대하는 것들은 정확히 무엇인가?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그것은 여기가 '담론'Discourse를 생산해내는 하나의 거점이 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러한 바램은 여기서 앞으로 사람들이 자신만의 '텍스트를 생산'해내길 바란다는 말로 표현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바램을 조금 더 정확히 한정해 본다면, 그것은 책마을이 20대의 소통의 공간이 되길 바란다는, 올해 저녁하신 고 김민규 선생의 유지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 소통은 20대만의 어떤 세대담론(88만원 세대론, 비판적인 담론들, 자기 성찰적 글)이 창출되길 바란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고, 또한 '20대다운' 어떤 텍스트들(소녀시대, 환상문학, 대중문화를 아우르는 문화적 감수성을 담지하는 서브-컬쳐, 동아리 문화)이 생산되었으면 한다는 바램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담론'과 '텍스트' 사이의 어떤 미묘한 차이와, 이 둘 사이에 형성되었던 긴장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담론이란 분명히 표준적인 어떤 참조점(현실에 대한 비판적 의식, 권위적인 참조문헌을 논하는 행위)을 가지고 수행되는 것인 반면, 텍스트란 점점 더 그러한 '참조점'을 잃고, 그 자체로 자족적인 소재와 의식 그리고 감성을 담지하는 초점을 잃은 '글쓰기'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가 철 들기 전까지만 해도, 인구에 회자되었던 '텍스트의 해방', '저자 없는 글쓰기'가 추구했던 것은, 권위적인 담론에 대한 거부이자 아즈마 히로키가 말했듯 아버지의 권위가 서려 있는 공공의 영역으로부터 자신의 리비도를 철회하고,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 서브컬쳐의 영역에 그것을 재투여하는, 전면적인 탈-오이디푸스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내가 지젝을 따라 언제나 비판적으로 들뢰즈(와 히로키)를 참조했듯이,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리비도와 욕망을 구해내려는 그러한 해방적 시도에서 잃는 것은 '욕망 그 자체'라는 것이다. 저번에 책마당에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던 양동훈 씨 자신의 유사-성적 체험담을 조금 짖궂게 인용하자면, 죄의식 없이 성적 유희를 즐기는 젊은 커플의 에로티시즘적 실천에서 잃는 것은 '삽입'의 과정 그 자체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과거의 오이디푸스적 공적 공간에서처럼 삽입이 '금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요점'을 잃어버리고 아예 무의식에서조차 지워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시대 혹은 우리 세대의 만연한 우울증을 설명해 준다. 홍명교님은 이러한 우울증을 매우 정확한 언어로 표한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우울증을 겪는 주체가 '타자의 욕망'(다시 말해 자신에 대한 타자의 부당한 기대)을 알고 있는 한에서 분열된 주체라고 명명했다. 말하자면 가부장의 역할을 욕망하는 여성에 대해 자신이 기대에 미치지 못함을 고백하는 무력한 남성의 역할을 떠맡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홍명교 님의 경우는 사실은 타자의 욕망(가부장의 권위) 같은 건 이미 중요하지 않은게 되어버린, 쿨한 자유주의자에게 고유한 우울증이라고 해야한다. 그는 타자의 욕망을 거부하는 한에서, 자신의 욕망마저도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전형적인 후근대적인 악순화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라캉이 자신의 <세미나 11>에서 청중들 앞에 다음과 같은 다소 짖궂은 발언을 했을 때, "저는 여러분들 앞에서 섹스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 섹스에 준하는 만족을 느끼고 있습니다." 물론 그는 자신의 세미나(남근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는)에서 뿜어져나오는 알 수 없는 에로티시즘에 대해 언급하는 게 아니라, 앞서 말한 극단적인 '탈성욕화'(행복한 '조잘거림' 속에서 '삽입'에 대한 욕망이 대체되어버리는 전도현상) 과정을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60년대 초반에 세미나를 진행했을 때, '텍스트를 해방하자', 혹은 '저자'나 '공적 권위'에 대해 '텍스트'를 우위에 두자는 구호들이 이미 터져나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아마 라캉은 그러한 분위기를 염두에 두고 저런 짖궂은 발언을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에 준하는 것을 책마을에서도 말하고 싶은 충동마저 느끼는 바이다.
2. 우울증과 권위
다시 '담론'으로 돌아가 보자. 그것이 '권위'와 결부되는 것은 그것이 명확히 어떤 '저자'와 '1차문헌'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담론은 동시에 1차문헌들에 대한 2차문헌의 생산이다. 역으로, 그렇다면 담론과 텍스트 간의 구분은 그렇게 자명하지 않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텍스트 역시 언제나 스스로를 2차적인 것으로, 파생적인 것으로, 즉물적인 것으로 스스로를 내세우기 때문이다. 담론 역시 언제나 수사적이고 유희적인 계기들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권위를 체현한 1차문헌 역시도 사실은 2차적인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것은 그 자체로 다른 텍스트들에 대한 인용과 패러디 그리고 변형들로 가득하지 않은가? 그것 역시 직관적인 아이디어로 번뜩이지 않은가? 이러한 반문들을 쏟아내는 '텍스트의 해방'이라는 구호는, 곧바로 '권위' 다시 말해 '타자의 욕망'을 거부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물론 욕망의 문제이다. 저자의 욕망, 그리고 1차문헌이 지닌 욕망을 유지하는 것으로 자신의 욕망을 담론으로서 유지하던 것은 오늘날 불가능한 게 되어버렸다. 다시 말해 담론은 이제는 맹목적인 텍스트로 분해된 채, 자신의 욕망을 상실해버렸다. 우리는 어떤 저자들을 상상 속에서 사랑하는 것은 가능하더라도, 그러한 저자들이 원하던 것을, 그들이 정말 욕망하던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들의 작품과 삶에 참여하지는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성경조차도 에세이와 다를 바 없게 된다. 환언하자면, 오늘날 남자들은 여자를 좋아하는 건 가능해도, 그녀를 사랑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남자들이 여자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한다는 것을 상상하는 게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 나의 고민은 윤리적인 어떤 지점을 향해 있기보다는, 매우 개인적인 것, 즉 어떻게 하면 스스로를 우울한 시대적 압력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권위적인 저자에 대한 참조가 진실로 자유로운 삶과 사유에 대해 억압적이었다면, 오늘날의 감각적인 텍스트들은 예외 없이 우울증으로 귀결된다. 과거의 가부장이 노이로제 증상에 시달렸다면, 오늘날 리버럴한 남자는 우울하다. 이것은 여전히 우리가 한 때 과거의 첨예한 문제였던, '권위'의 문제를, 혹은 '억압'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가령 과거의 병영의 가혹한 일상들이 여전히 오늘날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장면들은 여전히 심리-상담실에서, 항우울제에서, 자기개발 서적에서 여전히 자신의 자취를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이미 아버지-독재자를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긍정적인 방향제시를 주기는커녕 오히려 모호한 방향상실로 빠져드는 것은, 또한 권위에 대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오늘날의 젊은 세대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여기서 본인의 주장은 단순하다. 권위가 사라졌다는 게 문제라면, 단순히 그 권위를 자신의 편에 가져오면 되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권위는 언제나 '타자'의 문제로 생각되었다. 말하자면 권위는 아버지의 형상으로만 생각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권위가 '아들'의 편에 다시 말해 '주체'의 편에 존재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지난 날에는 아버지의 권위를 파괴하는 것이 정치적 상상력에 걸려 있던 모든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권위의 새로운 형상을 상상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의 정치적 상상력에 걸린 근본적인 과제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권위를 우리에게 외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상상하길 거부하는 것은, 결국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하더라도, 일종의 순응주의에 불과한 게 되고 말 것이다.
3. 자기 스스로가 '권위자'가 되라!
다시 책마을의 문제로 돌아와 본다면, 나는 책마을에 상주하는 가상의 수신인에게 이렇게 말하고만 싶다. 예컨대, 허지웅과 한윤석 같은 20대 논객들(나는 하마타면 논개라고 쓸 뻔 했다)처럼 단순히 기성의 담론생산에 자신도 한 몫 끼는 것에 안주하는 것만으로도 불충분하다면(그들 논객이 쓰고 사유하는 것은 사실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저널리즘적인 글쓰기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이미 존재하는 기성담론의 지분을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결코 이게 아니다), 그리고 또한 언제나 웹툰이나 환상문학의 영역에서처럼 '텍스트'들(이들은 사실 얼마나 천편일률적인가!)을 생산했던 것만으로도 불충분하다면, 그렇다면 유일한 대안은 자신의 글이 "1차 문헌"이 되도록 전력투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늘날 알아주는 한국의 권위 있는 저자들만큼, 조선일보 주필들(그들은 펜 끝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 않는가?)만큼 영향력 있는 글을 쓰고 논리를 개발할 수 있다는 점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증명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나 개인에게는, 아주 단순하게 철학적-이론적 비평에 관한 책을 출판하는 것이다. 혹은 다른 이에게는 다른 방식이 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 자신이 1차 텍스트를 생산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해방의 고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부당한 요구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정신나간 말처럼 보이는데, 가령 20대들에게 오늘날 주어진 자본주의적 특전들, 가령 연예인으로서 화려한 생활을 영위하거나, 각자의 영역에서 '마린보이'나 '얼음소녀'가 되는 것이 얼마든지 '상상 가능한'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20대가 자신만의 목소리로, 결코 기존의 언론매체에 전혀 보도된 바 없었던 독창적인 철학적-이론적 비평을 수행하는 장면은 '사고 불가능'한 영역으로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혹은 체제의 입장에서 생각만 해도 끔찍하기 그지 없는, 그래서 '사고 금지'된, 그러한 영역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우리에게는 가장 발랄한 연애가 허용될지라도, 단지 우리의 독자적인 비평 혹은 담론을 생산하는 것은, 그것만은 절대로 아니될 일이다!
여기서 우리가 극복해야하는 것은, 담론의 영역에서의 권위자들에 대한 냉소와 불신에 손쉽게 빠지는 경향이다. 우리가 흔히 그렇게 생각하듯, 정말로 그렇게 타인들의 권위가 깨지기 쉬운 사기에 불과하다면, 흔히 알려진 자기개발서의 공식대로라면, 왜 그러한 '사기'를 자신의 편에서 또 한 번 반복하는 것을 감히 시도하지 않는가. 사기도 그만한 능력이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오늘날 사람들이 '권위'에 대한 양가감정 사이에 분열되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말하자면 한편으로는 그러한 권위의 외관에 대한 순진한 매혹과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외관을 떠받히는 메커니즘에 대한 냉소적인 통찰 사이에 분열되어 있다는 것. 오늘날 우리는 그러한 분열을 축출해내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과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분열이야말로 오늘날 지배의 책략이다! 그러한 분열은 우리가 권력의 무대를 소녀시대 퍼포먼스 감상하듯 응시하는 무력한 위치에 있을 때에만 전면적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진정한 과제는 다시 말해, 권위를 더 이상 타자에게 전가하지 않고, 그것을 스스로 떠맡을 수 있음을 모두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럴 때야 비로소 권위에 대한 우리의 양가감정, 무력한 분열, 모순된 매혹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권위를 타자에게 전가하고, 우리에게 허용된 작은 울타리 안에서 자족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나는 이러한 현상이 매우 구조적이라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저자들의 권위 그리고 어떤 작품과 담론이 지닌 상징적 권위가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생산'된 것에 불과하다면, 그리고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더욱 참이라면, 문제는 그러한 메커니즘을 몇몇의 '젊은이'들이 접수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형이상학적인 이야기가 아닌데, 아주 구체적으로 말해서, 나는 각자의 젊은이들이 각자에게 황석영이 되고, 백낙청이 되고, 우석훈이 되며, 심지어 리영희를 능가하는 글쓰기들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지금 당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물적토대(그것이 어떤 유무형의 재산이든, 심지어 우리 부모님의 용돈이든 간에)로도 결코 그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더 희망적인 소식은, 오늘날 좌우를 막론하고 담론을 주도해 가는 기성세대 자신이 (그들이 유신세대이든 386세대이든 419세대이든 무관하게) 우리들보다 더 글을 딱히 더 잘 쓰거나 더 잘 사유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실은 형편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집합적인 '사유'란, 우리의 얼마 안되는 용돈과 더불어, 우리들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우리들 중에서 (그리고 책마을에서) 과연 어떠한 '사유의 분위기'가 성숙되어가고 있음을 나는 목도하고 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삶에서 가장 익숙했던 것은, 어둡고 고독한 독서실의 딱딱한 의자가 아니었는가. 논술교재의 현학적인 텍스트는 우리의 가장 친숙한 벗이었다. 그러므로 어떠한 담론이 '어렵다'고 하지 마라. 당신은 적어도 '어렵다'는 말을 다른 백마디 천마디로 표현할 줄 안다. 그러한 점에서, 아직 우리들에게는 어떤 희망이 있는 것이다.
4. 새로운 <88만원 세대> 선언의 예비적 초고
그러나, 우리들이 우리들만의 사유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몇 안되는 저널리즘적 범주들에 의존해야한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가장 커다란 어려움이다. <88만원 세대>라는 우리들의 자기규정 자체부터가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어떤 세대보다, 심지어 우리의 아래 세대보다 운신의 폭이 더 좁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88만원 세대여 단결하라!"라는 선언이 다른 어떤 역사적 선언보다 취약한 기초 위에 서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이다. 예컨대 유럽의 <천 유로 세대>라든지, 일본의 <프레카리아> 세대라든지 하는 범주들 자체도 그렇다. 없다. 그러므로 나는 감히 "단결하라!"고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자신을 두고 "단결하라!"고 종용하는 것은 사실 "쁘띠들이여 단결하라!"라는 말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쁘띠들에게도 나름의 단결이라는 게, 혹은 쁘띠들의 어소시에이션, 혹은 '인터내셔널'이, 왜 없겠는가?
분명 어떤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계층의 젊은이들은 분명 '문제적인' 지점을 차지했었고, 앞으로 상이한 젊은이들이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막연한 역사적 순환을 상기하는 것보다, '우리들'로 초점을 한정해 보자. 어느 시점 이후로 우리들은 더 이상 '문제적인' 세대가 되기를 멈출 것이고, 보다 동질적인 사회적 재생산의 메커니즘에 흡수될 것이다. 앞으로 결국 그러하게 될 것이다. 관건은, 그러한 사회적 관성에도 불구하고, 각자 자신이 내가 속했던 세대를 대표하여 한 시대의 진정한 이름으로 불려지는가의 여부이다. 사실 한국 역사의 가장 신비로운 점은, 우리나라의 역사적 세대들이 거의 예외 없이 어느 정도 계속 자기 계층의 '문제성' 혹은 동질적 현재성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대한민국 헌정 역사상 최초로, 그러한 동질성을 유지하기 어려워진 세대가 되었다. 명예롭게도 역사상 가장 의식 없는 자들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한에서 우리들은 <저널리즘적 비평>의 가장 커다란 관심사, 혹은 손쉬운 비평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겠다. 무엇보다 우리들은 저널리즘 비평의 가장 손쉬운 먹잇감이다. 88만원 세대라는 낙인은 바로 그러한 비평의 상흔에 다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가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말했듯, '철학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유지되는 동안에만 존속한다, 따라서 철학은 철학 자신의 자기소멸을 목표로 해야한다'는 테제를 뒤집어 볼 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88만원 세대인 우리들은, 필연적으로 이런저런 즉물적이고 모호한 저널리즘적 범주들에서 (문자 그대로) 태어났고, 이러한 범주들 자체가 우리 자신의 "존재 자체"에 각인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또한 우리의 삶 주변을 아우르는 저널리즘적 감수성들, 가령 동방신기 해체설을 둘러싼 가십과 특유의 팬클럽 문화에 대한 이런저런 착상과 직관들, 혹은 새로운 미디어 환경 속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통찰력을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의 언어적 무기로 삼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명제를 뒤집어, '저널리즘은 언제나 사유의 결여를 먹고 자란다. 따라서 저널리즘적 비평은 저널리즘 자신의 자기소멸을 목표로 해야한다'는 명제가 언제나 우리들 가운데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시대적 감수성 가운데 소녀시대나 동방신기를 논하든,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구조를 얼마나 예리하게 포착하든 그것은 단지 말 장난에 불과한 게 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모든 말은, 88만원 세대의 구성원은 88만원 세대라는 자기 규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각자의 소임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8-24
15:45:10
병장 손근애
오, 이런 맙소사.
가지로.
다른 의견은 조금 뒤에 다시 달죠. 2009-08-06
08:37:01
병장 손근애
몇번이고 다시 읽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원익씨의 글을 읽어오면서 '결국 이사람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하는 생각을 가진적이 있습니다. 많은 문제제기는 분명 명확했으나, 결국 그것에 대한 방안은 그렇게 제시 되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논의와 논쟁을 통해 방안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겠지만 결국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있는이상 그 답변을 이끌어내기 위한 논의 이상은 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아, 물론 원익님의 글에 데여서 덧글을 통한 소통 자체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까닭도 크겠지요.(웃음)
그 와중에 올라온 이 글을 보면서 저는 이제서야 원익씨 글에 대한, 원익씨에 대한 제 생각을 다시 재조정합니다. 정말로, 통쾌한 글입니다.
현재 우리 20대에게 정의된 단어와 생각들 중 과연 우리가 주체가 된게 무엇이 있을까요.
88만원 세대라는 것도 우리 자신이 주체가 되어 정의된 말이 아니지요. 어느순간 우리는 주체의식을 잃고 있습니다. 원익씨의 말대로, '의식없는 자들의 세대'입니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서라는 변명은 분명 진부함에도 어쩔수없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게끔 되는 말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 현실의 벽 또한 남이 제시해준 벽과 우리 자신이 스스로 사유하여 인지한 벽과는 그 높이가 다를겁니다.
그러한 사유를 통해 1차 문헌을 생산해야 한다는 원익씨의 생각에 깊이 공감합니다. 그동안 저 역시도 2차, 3차 텍스트만을 생산하게 된다는 것이 큰 고민거리였기에 원익씨의 이 글에는 반갑다 못해 소름이 돋는군요. 분명 1차 텍스트를 생산하는 주체가 우리가 된다면 그 파괴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이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고민을 하고 있던 차에 말끔하게 정리된 글을 읽으니 머릿속이 개운해지는군요.
어떻게 보면 원익씨의 이 글은 그동안 올라온 20대에 대한 글들 중 가장 긍정적이고 가장 희망적인 글임에 틀림없습니다.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이네요. 2009-08-06
09:13:31
병장 이 원
흠.. 전 프린트 해서 읽어보고 답글달게요 허허 2009-08-06
09:23:53
병장 김예찬
번쩍번쩍 번개가 치는 것 같군요. 이 글이 단순히 '포스'로 이미지화 되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생깁니다.
권위에 대해 이러지도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군요. 저는 다른 리버럴들이 그러하듯 '생활관 정치'에서부터 '진보 정치'에 대한 고민들까지 모든 정치적인 것들에 관하여 탈권위/반억압이라는 모호한 문제를 붙잡고 있을 수 밖에 없는데, 이러한 것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무기력을 낳을 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현실로 나타나는 폭압적인 권위를 대면할 때면 '위계화'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 스스로 내면적으로 훌륭한 엘리트주의자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 그런지도 모르겠네요.
스스로 주인이 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시대인 만큼 어떻게 권위를 새롭게 상상하느냐는 문제는 정말로 중요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새로운 권위는 당당하고 단호한 제스쳐와 동반되어야 하겠죠. 그 것은 원익님의 말씀처럼 '사고 금지'의 영역을 침범하고, 독자적인 비평과 담론, 혹은 우리 세대의 새로운 기표를 찾아내는 것이겠습니다.
다만 맨 앞의 우려와도 연결되는 부분이지만, 제가 계속헤서 자문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작업 자체가 과연 얼마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입니다. 어떠한 담론을 '어렵다'고 받아들이는 것 자체는 오히려 자못 희망적인 반응 아닐까요. 적어도 어떤 목소리에 최소한 눈과 귀를 들이댔다는 이야기니까요. 저는 '스크롤의 압박'이라는 단어가 생겨난 것이야 말로 좌절스러운 현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무의식적으로 눈과 귀를 막는 사람들 - 저는 사실 책마을 역시 이 것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습니다. - 이 대부분 상황에서, 누군가는 '스크롤의 압박/혹은 로그인의 압박을 이겨내고' 눈과 귀로 반응할만한 떡밥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게 요즘의 제 생각입니다. 물론 그러한 떡밥 투척이 결과적으로 고기를 낚아올리지 못하고 연못을 더럽힐 뿐이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만... 2009-08-06
09:31:43
상병 윤정기
오이디푸스의 삼각형,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탈피와 변화하는 근본동력들.
권위를 넘어서는 '권위자'로서의 주체성.
정말,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되는것 같습니다.
1차 문헌의 생산에 관한 원익님의 '친절한'(웃음) 생각이 책마을 주민분들에게 잘 이해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더불어, 저 자신 또한 앞으로의 글쓰기에 약간의 '소명(!)'같은 것을 첨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세대를 둘러싼 자기규정에서 벗어난, '자신의 글과 담론과 비평'을 볼 수 있는 책마을. 그리하여 저도 '타자'의 편이 아닌 '주체'의 방향에서 글을 쓰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네요.
'어려운' 글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개인에겐 '어려운'글이 되어야 할 것 같은,
책마을이 나아가야 할, 아니, 우리 20대가 나아가야 할 인식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글인 것 같습니다.
허나 한 가지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은,
예찬님이 위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의 머릿속에 생겨난, 혹은 이미 생산되어 있을 이러한 '동력'을 우리가 얼마나 잘 '분출'해 내는가 하는 것은 개인의 의지와 능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으므로, 그것을 이룩할 수많은 시행착오와 고정관념/무의식적 행위의 제거 같은 필연적 요소들이 요구된다는 점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동력'을 끄집어내는 '작업' 같은 것들이 선행될 필요성이 제기되는 현실을 말씀드리는 것이죠. 저의 고민 또한, 이러한 주체적인 작업들을 과연 어떻게 해야 잘 나타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009-08-06
11:00:36
상병 윤정기
그리고 저도 이 글은 가지로 갔으면 좋겠네요.
가지로- 2009-08-06
11:03:22
병장 이기범
시원한 글이 군요. 위에서 많은 분들이 말씀해 주신것처럼, 결국 문제는 각 개인의 의식과 행동을 어떻게 뽑아 낼 수 있는가- 정도로 귀결 되는 것 같습니다. 개인의 의지와 능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라는 말은 조금 슬프군요. 결국 고민해야 하는건 어떻게 하면 우리들의 구미를 당길 수 있는 담론을 제시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어떤 소재를 선정하는가 부터 어떤 형식과 방법으로 제시해야 '스크롤의 압박'을 이겨내고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입니다.
우리들 모두가 스스로 권위를 가지고 저널리즘적 비평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 나아가 우리들만의 새로운 기표를 우리들 스스로 세워야 한다는 것. 다시한번 깊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가지로- 2009-08-06
11:34:23
병장 양동훈
"나는 하마타면 논개라고 쓸 뻔 했다" 아. 원익씨 글 답지않은 이 이중적 상쾌함. 킬킬.
우리가 무엇을 어려워해야 합니까?
원익씨의 글이 어렵다고 칭얼대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저 글이 어려울 뿐이라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진정 어려워해야 하는 건, 그 속에서 진정한 사유에의 담론을 이끌어내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어려움은, '아악 어려워 쉬팜!!' 하는 어려움이 아닌
'나 쉬운 여자 아니야' 할 때의 쉽다의 반댓말인 어려움이 되어야겠지요.
일단,
가지로-
한방 쏘고,
결국은, 우리 20대는 스스로 20대여야 합니다. 무가치하다고 여겨지던 몰가치하다고 여겨지던 간에, 답습이 아닌 창조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너무도 경쾌한 이야기입니다. Wow.
그런데, 전 어디로 가야 할까요. 킬킬킬. 걍 일딴 껴서 놀아야지. 2009-08-06
14:06:50
병장 양동훈
아 그리고, '죄의식 없이 성적 유희를 즐기는 젊은 커플의 에로티시즘적 실천에서 잃는 것은 '삽입'의 과정 그 자체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과거의 오이디푸스적 공적 공간에서처럼 삽입이 '금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요점'을 잃어버리고 아예 무의식에서조차 지워지는 것이다' 아. 전 왜 제 글을 보고 쓴 원익씨의 이 말이 왜 잘 이해가 되지 않을까요. 으악. 2009-08-06
14:24:21
상병 선해성
대단한 이야기인것 같습니다. -가지로
20대 라고 하면, 이 아니라 모든 세대들도 자신이 자신의 삶에 주체가 되야겠죠, 그것을 이루기 가장 쉬운 것이 20대 이기도 하고요. 여기있는 사람들의 목표라면 스스로 주체가 되어 2차적 텍스트가 아닌 1차적 텍스트를 생산해 내는, 아니, 권위주의에서 탈피해, 그 권위를 우리가 스스로 '권위'가 되어야 겠네요.
흠, 어렵군요 역시... 2009-08-06
15:46:48
일병 김용균
엄청난 추천수와 덧글들, 읽기를 잘했다고 제 스스로를 칭찬하고 싶습니다.
가지로-
web 2.0이 도래한 이후 각 개인의 사유를 공유하기에 적합한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툴이 제공되어 왔습니다. 1인 미디어라고도 하는 블로그도 그렇고 싸이월드, 다음 아고라, 페이스북, 미투데이, 트위티 등 직관적으로 자신의 생각, 글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공유를 통해 일궈낸 다양한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도 많고요. 하지만 늘 개발자들끼리 하는 말이 커뮤니케이션 툴은 더욱 뛰어나지만 그 툴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을 더 줄어들고 있다는 겁니다. 즉 다방면에서 공유가 가능해 장벽이 낮아졌고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로 쉽게 자신의 생각을 표출할 수 있게 된 것이 역장벽을 만들고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그 속도감으로 인해 깊은 사유는 눈밖에 나고 좀 길다 싶으면 앞서의 덧글과 같이 "스크롤의 압박"이란 표현으로 결국엔 고립됩니다.
<88만원 세대>가 왜 이런 엄청난 글을 쉬이 쓰지 못하는지 고민하다가 이렇게 끄적거렸습니다.
글쓰기가 편해진 만큼 나태해진 것 같아서, 이렇게 글이 풀려나갔나 봅니다.
쓰고 나니 왜 쓴지 모르겠네요. 허허. 2009-08-06
17:31:50
일병 박준우
용균//커뮤니케이션 툴이 뛰어나짐에 따라 커뮤니케이션이 줄어든다기보단, 커뮤니케이션의 양적 팽창과 질적 하락이라고 보는게 더 적절하지 않을까요?
결국에는 쉽게 표현하는데 익숙해져서 진지하게 표현하는법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죠. 2009-08-06
18:42:02
상병 박원익
손근애/사유를 통해 1차 문헌을 생산해야한다는 원칙에 곰감해주시니 큰 힘이 됩니다! 사실은 지금까지 저 자신도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지 스스로에게도 명확하지 못했는데, 이제야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사실은 이것 역시 어떤 의미에서 '선언적'인 의미에만 머물 수 밖에 없겠지요. 방법은 각자가 찾을 수 밖에 없다는 것, 그게 우리 세대의 한계이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다음 세대를 위한 토양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이름을 굴욕 속에 놔두지 않을 유일한 길이겠지요.
김예찬/'피뢰침'이 있어야, 번개도 약발이 먹히겠지요.(웃음) 사실은 우리 각자가 자신에게 이미 엘리트주의자인지는 너무나 오래 되었지요. 제 주위에도 보이는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아들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절로 들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각자가 정직하게 대면하지 못했을 따름이지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담론의 영역'도 사정이 여의치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거기 역시도 사회의 룰이 적용되는 장소이니까요. 그럼에도 그곳이 가장 '약한 연결고리'인 것만은 사실이지요. 바라건대, 우리들 중 누군가가 그곳을 뚫고 들어가, 스스로가 시대의 기표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비평적인 담론의 권위를 생산해내는, 그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어렵지 않은 딱 그만큼(20대가 전경련 회장이 되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쉽겠지요), 가장 상상하기 힘들다는 것, 라캉이 말한 '실재'라는 것이 바로 그런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상황 내부에서 '사고 불가능한' 지점이야말로, 가장 위험하고 불온한 '가능성'이라는 정신분석의 통찰을 상기해야할 때입니다.
윤정기/'타자'의 편이 아닌 '주체의'의 방향에서 글을 써야한다는 방향에 공감했다는 말씀에 사실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 말씀하신대로, 각자의 작업들을 어떻게 진행해야할지는 많은 논의 속에서 또 다른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 제 방향은 아주 소박한 차원에만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많은 지도-편달을 부탁드린다는 말씀을, 방금 전의 지극히 오만하게 들리는 선언과 함께 전달해야겠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쓰기' 이전에 어떻게 '읽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점은 여전히 남습니다.
이기범/우선 우리 스스로가 스크롤의 압박에서 벗어난다는 게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자크 랑시에르 역시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노동자들이, '사회적 소설'이나 '정치 팜플렛'을 읽고 의식화되었던 게 아니라, '고급문학'을 읽으면서 정신적으로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요. 이러한 '예기치 못한' 지점에, 우리에게도 '해방'의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겁니다. 그리고 '기표'라는 문제를 언급한 것도 사실 반갑기 그지 없습니다. 사실은 지금 현재의 첨예한 문제를 어떻게 강력한 '기표'로 분절해내느냐가 관건이라고 하겠습니다.
양동훈/양동훈님의 경쾌한 글 사실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제가 저번의 글을 '야하다'고 말했던 것은, 제가 체리보이여서가 아니라, 글 자체의 농염한 에로티시즘 때문이었지요(웃음) 질문하신 그 구절은, 말 그대로, 우리들에게는 이미 성적 죄책감이 사라졌다는 것이지요. 그게 '억압'된 게 아니라, 애초에 의미를 잃어버린 한에서, 우울증으로 변해버린 것이지요.
선해성/사실은, '글'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세운다는 게 쉬운 듯하면서도 언뜻 와닿는 이야기는 아니지요. 사실은 이 제안 자체는 제 개인적인 지극히 사적인 목표를 염두에 두고 씌어졌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 스스로 '주체'가 된다는 것도 애매한 이야기이지요. 그 대답은 무엇보다 '쓰기' 자체보다는 '읽기'에 걸려 있는 게 아닐까 저는 스스로에게 반문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앞으로 천착하는 것은, 지금과 같은 '선언'적 글쓰기라기보다는, 1차 텍스트에 대한 '독해'가 되겠지요. 사실 글에 포함하지 못한 내용이지만,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가 1차 텍스트에 대한 독해를 감행할 용기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김용균/사실 글쓰기가 쉽고 편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과거 소설가들이 자필로 쓴 원고를 조각내서 다시 이어붙이던 시대에 비하면 정말로 편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역기능에 비해 많은 강점을 지니고 있다고 저는 믿고 싶습니다. 2009-08-06
21:07:28
이병 서 원
제가 생각하던 문제점과 많은점이 일치하는거 같습니다.
세상의 진리, 혹은 무궁한 가능성을 깨닫기엔 미디어에 의해 통제된 삶을 살고있고
단순한 2차생산, 혹은 소비로 단순화된 삶을 사는 자본주의 시대의 대다수의 20대를 논하는점에 대하여 상당히 공감했습니다.
다원화된 사회의, 다원화된듯하지만 일원적인 삶의 행태를 띤 20대가 단결하여 목소리를 내야하는게 가장 큰 과제인거 같습니다. 2009-08-07
09:24:59
상병 양제열
우연이겠지만, 원익씨의 글들은 제가 읽고 있는 것보다 한 발자국 더 나간 지점을 알려주네요. '국가'에 대한 해체론적 비판을 읽고 있을 때 원익씨의 헤겔과 국가에 대한 글을 보게 되었고, 허지웅과 한윤형의 저널리즘적 글을 보고 있을 때 또 이런 글을 보게 되네요.
1차 텍스트에 대한 독해는 제가 요즘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건데, 사실 1차 텍스트를 설명하는 수많은 입문서만 맴돌고 있는 저를 발견했기 때문이에요. 평생 남들이 만들어 놓은 것만 소비하다 가면 안 될텐데 말이죠.
여튼 감사합니다. 2009-08-07
10:58:21
상병 장동욱
제 짧은 생각으로는 더이상 20대, 20대만을 규정하고, 20대의 목소리다. 20대의 단결력이다, 이런것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생각됩니다. 또다른 매몰일 뿐이지 않겠습니까.
단체로 단결하면 그 단체의 목소리가 날 뿐, 진정 원하시는 '담론'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책마당이라는 곳은 그 '마당'이 되면 족할 것이며, 책마당의 목소리, 라는 것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감히 합니다. 그것은 또다른 권위의 부여일 것이고, 또다른 작은 목소리의 죽음과 비명이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새로운 시대가 있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말하는 것이 묻히지 않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말하는 것이 똑같은 권위와 무게를 얻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다색다양한 주장들이 뭉쳐 이 거대한 적의의 세계를 바꾸어놓는데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2009-08-08
16:13:38
병장 윤현상
아, 맙소사. 온몸에 전율이 이는군요. 어쩌면 제가 생각하고, 제가 말하는 모든 것들은 원익씨가 말하는 이 글 속에서 유래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또한 마구잡이로 적어 남깁니다.
스스로의 언어로 말하는 것. 스스로의 담론을 이야기하는 것. 스스로의 기준을 세우는 것. 이 모두는 지극히 필요한 것이지만, 또 어찌나 행하기 어려운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남이 가르쳐주는 것을 학습하는데 익숙하기만 할 뿐, 스스로 사고하는 법을 잃어버린 우리세대에게, 그것은 그 자체로 ㅎㅁ이겠죠.
또한 우리들이 역사상 가장 의식없는 자들이 된 배경을 생각해봅니다. 저는 우리세대들의 의식이 68ㅎㅁ때의 20대들의 의식보다 부족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선배세대들이 눈에 보이는 지배세력과, 눈에 보이는 억압과, '강요되는 획일화된 그 무엇'과의 싸움을 통해 단결했고, 일부 성공을 거두었다면, 우리는 그 일부분의 성공의 열매를 먹을 수 있었던 대신, 성공의 남은 실패의 조각들로 인해서 더욱 은폐된, '더 어려운 무엇'과의 싸움을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다원주의와 더불어 분산된 사람들의 목소리 속에 은밀히 숨어, 우리세대들이 동질성을 유지하기 어렵게 방해하고 있는것은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그것의 극복은, 결국은 원익씨가 주구장창 이야기했듯이 '전세대의 언어'가 아닌, '새로운 우리 20대들의 언어'를 창조해냄으로써 인식하고 극복해 낼 수 있는 것이겠죠. 언제 어느 세대라도 그랬겠지만, 우리는 선배세대들이 이루어 낸 달콤한 열매 뒷편에 숨어있는 벌레들과 싸우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2009-08-12
07:41:58
상병 조태혁
음... 짧게 읽고 단숨에 어떤 코멘트를 달기엔 생각을 많이하게하는 글이군용. 덕분에 또 많은 생각거리를 얻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