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별곡(大學別曲) 1
대학시절은 써클 지도교수님께서 친히 파쇼라 명명하실 정도로 강성(强性)이었다.
고난한 여고시절을 지내온 나에게 도대체 이런 면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나도 알 수 없는 내 안의 파쇼가 폭발하던 꼭지점 이었던 시절이었다. 언젠가 밝혔듯이 우리 써클의 목적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무지하게 술을 밝히는 주제에 떳떳하게 마셔보겠다는 무식한 목적을 위해 철학적 사유를 표방한 철학 연구회였다.
회장은 남해에서 아버지가 고기 잡아 유학을 보내 준 별명이 ‘멸치 장학생’으로 사람이 좋아 거절을 모르고 여학생들과 선배들 사이에 언제나 인기가 만발이었던 헐렁헐렁한 사람으로 모난 구석은 없었지만 추진력과 딱 부러지는 맛은 없어 언제나 뒤치닥거리는 나의 몫으로 한편으로는 그를 인간적으로 좋아했지만 나도 모르게 지쳐서 약이 바짝 올라 있었다. 변명 같지만 주변에 깔린 이런 몇 가지 요인도 무시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교수님께서는 우리를 야외로 끌고나가기를 좋아하셨는데 한달에 두 번 정도는 꼭 산에를 가거나 그도 아니면 밤낚시를 다녔다. 교수님 실에는 항상 텐트와 코펠, 버너가 상비되어 있었고 교수님이 ‘이번 주다’ 하시면 우리는 잽싸게 장을 보고 짐을 꾸렸다. 그때는 국립공원이라도 산에다 텐트치고 밥도 해먹을 수도 있었고 지금은 상수도 보호원이 되어버린 그 저수지에 배를 띄워 붕어나 잉어낚시를 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그 시절의 학교는 강의를 하는 날보다 강의가 없는 날이 더 많았고 오후가 되면 닭장차가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고 잔뜩 지쳐 쉬고 있는 전경들 틈에서 동기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 슬그머니 피하곤 하던 슬픈 날 들이었다.
과제도 없고 휴강에 놀러다닐 시간은 많았지만 우리는 너무 가난했다. 시골에서 등록금에 달랑 책값만 들고 상경한 친구가 대부분 이었고 왜 그렇게들 딸린 동생들 많고 버스타고 비포장 도로 삼십분은 들어가야 몇 채 나오는 산골 오지 출신들은 또 그리도 많은지...
아마도 교수님께서 친히 데려온 이이들 대부분이 그러했으니 이상하게도 우리 써클은 지역출신보다 타 지역 출신들이 더 많아 주말에 시간이 팽팽 남아도는 그런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MT를 간다고 따로 회비를 거둘 수도 없고 교수님께서 얼마간 내 놓으시면 돈 있는 몇 사람이 추렴하고 회장이 좀 메꾸고 선배들이 찬조 좀 하고 내가 집에서 어머니 몰래 쌀도 퍼오고 김치도 퍼오는 식으로 준비를 해야 했다.
모인 현금에서 차비를 빼면 금방 달랑달랑 해지는데 술은 꼭 사야하고 또 쪼개서 반찬거리 좀 사고 그래도 몇 천원이라도 남으면 담배를 샀다. 2박 3일쯤 있다보면 각자 가져갔던 담배가 떨어지고 금세 금단증세를 보이며 포악해지는 남학생들 배급용이었는데 내가 하루 몇 가치씩 이런 식으로 배급을 하니 선배고 동기고 모두 나를 게슈타포라 불렀다.
나야 억울하지만 그렇게 2박3일 동안 고삐 풀린 망아지들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는 최고였던 셈인데 내가 잠시 한눈을 팔면 금방 배낭을 뒤지기 때문에 항상 호주머니에 넣어 다니느라 옷에 생 담배냄새가 베어 여학생들이 싫어했다.
한번은 지리산에 갔는데 교수님 포함 우리가 여덟이어서 상표 없는 공사장 막소주를 대병으로 5병을 사고 혹시 몰라 비상용으로 나폴레옹 큰 것을 배낭 제일 밑에다 꼬불쳐 놓았다. 산에서는 해가 지면 금방 밤이 찾아오는데 10월의 지리산은 정말 추웠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안주삼아 라면을 끓여 기울인 술잔이 무르익을 때 저녁에 출발했다는 선배가 손전등을 들고 배낭에 술을 잔뜩 짊어지고 나타나서 우리를 환호하게 만들었다. 추워서 취하는 줄도 모르고 부어라 마셔라 했는데 어느새 술이 떨어져 내일 천왕봉을 가야하니 그만 마시고 일찍 자자고 했더니 선배가 벌떡 일어나 손전등을 들고 산을 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술기운에 가물가물 잠이 들기 시작했는데 선배가 또 술병을 들고 나타나 결국 우리는 밤을 꼴딱 세워 술을 마시고 아침 해가 떠오를 때 모두 장렬하게 전멸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천왕봉을 1시간 거리에 두고 눈물을 머금고 비틀거리며 산을 내려오고야 말았다
그래도 영 공부를 안 한 것은 아니어서 한달에 한번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세미나를 하고 발표가 끝나면 주제에 맞게 난상토론을 했는데 늘 격렬한 논쟁 끝에 마음이 상했다. 내가 주제를 얘기하고 나면 꼭 나와 반대의견을 말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딱히 그 주제가 자신의 의견과 틀려서가 아니라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사사건건이었다. 결국은 서로 볼펜을 집어던지다 책을 집어던지는 격렬함으로 변하면 주변에서 뜯어말리다 황급히 폐회를 선언하고 우리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나 역시 내 의견과 틀리면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결코 동조하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나보다 한살이 많은 그 동기 녀석도 정말 만만치 않았다. 내가 그를 얼마나 미워했냐면 학교에서 그의 모습이 50m쯤에 나타나면 건물을 빙둘러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고 써클룸이건 교수님 방이건 그가 보이면 나와 버릴 정도였다. 간혹 술자리에서 그가 나에게 술이라도 권하면 나는 그를 벌레 보듯이 경멸하며 외면을 했다. 그도 내가 자신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알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폭발을 했다.
그 시절 나는 니체에 심취해 있었는데 그리스 로마 신화를 좋아하던 나로서는 그의 저서 ‘비극의 탄생’에 대한 해석이 미숙했던 나의 세계관을 확고하게 해주었고 우리의 음주문화에 대한 변명으로 그의 근원적인 음악정신이나 충동적이고 파괴적인 디오니소스적 도취가 나에게는 구원의 빛처럼 느껴졌다.
세미나에 발표할 더할 나위없는 훌륭한 주제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거의 한달을 그의 책을 읽으며 자료를 준비하는데 매달렸다. 그러나 그날 내 주제발표가 끝나기 무섭게 벌어진 난상토론에서 다시 한번 그와 맞붙게 되었다.
이론과 이론이 맞붙고 가설과 가설이 충돌했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세계관이 있겠지만 그것을 인정하기에 내가 너무 어린 탓도 있었고 비교적 호의적인 사람들 틈에 끼어 살아온 탓인지 나에게 이렇게 극열하게 반대하는 사람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는 전생에 서로를 죽여야만 했던 원수였을까. 나는 가만히 그를 노려보다가 벌떡 일어나서 다가가 뺨을 한대 때렸다. 그도 놀랐고 사람들도 놀랐겠지만 나는 침착했다.
‘넌 괴물이야’
일주일 후 방학이 되었는데 개학을 하고 학교를 나오니 그 친구는 휴학을 하고 군대를 갔다고 했다.
극렬 했던 것과는 달리 나는 쉽게 그를 잊어버렸다.
써클 친구들에게 몇 번 편지가 와서 서로 돌려 가며 읽었지만 나는 보지 않았다. 누군가 그가 나의 안부를 물었다고 했지만 나는 전혀 궁금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코웃을을 쳤을 뿐이다.
어느 날 집에 와보니 편지가 한통 와 있었다.
겉봉투에 적힌 그의 이름을 본 순간 나는 펼쳐보지도 않고 찢어버렸다.
그 후로 두 번 더 편지가 왔지만 역시 그대로 휴지통으로 던져버렸다.
‘나 영재다’
‘어 그래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넌 목소리가 그대로네’
‘내 전화 번호 어떻게 알았어’
‘응... 내가 학적부 뒤져서 너 네 집으로 전화했더니 어머님이 가르쳐 주시더라’
‘네가 미쳤구나. 졸업한지 10년도 넘는데 전화 번호 바뀌었으면 어쩌려구’
‘그럼 할 수 없지 뭐’
얼마 전 우리는 어제 헤어진 사람들처럼 30분도 넘게 통화를 했다.
세월이 그 분노를 삼켜 버린 건지 그와 통화를 하면서 전혀 껄끄럽지도 않았고 오히려 사뭇 즐겁기까지 했다.
우리는 생각나는 모든 사람의 안부를 묻고 웃으며 언젠가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여운이 남아 책장에 꽂혀있던 그 시절 읽었던 철학책과 노트를 꺼내 뒤적여 보았다.
후루룩 넘기던 노트에 빨간 볼펜으로 휘갈겨놓았던 글이 보였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봤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 볼 테니까.’
그 시절 괴물은 그가 아니라 나였던 게 아닐까
병장 이상준 (2006/03/31 17:49:09)
'모난 구석은 없었지만 추진력과 딱 부러지는 맛은 없어 언제나 뒤치닥거리는 나의 몫으로 한편으로는 그를 인간적으로 좋아했지만 나도 모르게 지쳐서 약이 바짝 올라 있었다. 변명 같지만 주변에 깔린 이런 몇 가지 요인도 무시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하지연 님의 글을 항상 즐겁게 읽고 있는 책마을 회원입니다. 그런데 이번 글의 첫번째 문단에 있는 이 부분은 정말이지 독해불가능인데요, 혹시 글을 옮겨오실 때 사소한 착오가 있었지 않나 싶어서 댓글을 답니다.
상병 조용준 (2006/03/31 18:11:49)
와우. 마지막 말은 가끔씩 저도 느끼는 부분입니다.
우후후, 지연님 글은 언제나 탐독 1순위!(...)
상병 송희석 (2006/03/31 18:19:54)
상준/ 제맘대로 해석
모난구석은 없었지만 : 성격이 둥글둥글 함.
추진력과 딱 부러지는 맛이 없어 언제나 뒤치닥거리는 나의 몫으로 : 결국 모든일은 하지연님이 주도하며, 처리함
한편으로는 그를 인간적으로 좋아했지만 : 감정적으로는 좋아했는데, 혹은 그 사람은 착했는데, 등등
나도 모르게 지쳐서 약이 바짝 올라 있었다 : 이성적으로 내가 뒤치닥거리를 너무 하다 보니 힘들었다.
정도 인듯!(역시 제맘대로 해석임)
병장 김광현 (2006/04/01 04:20:05)
대학교 신입생때 선배들과 친구들과 갔던 지리산 생각나네요. 그때 저는 딱 두번 죽을뻔했는데.
다시 가고 싶다.
병장 김동환 (2006/04/01 17:11:01)
아. 좋아요. 즐거운 간접경험!(웃음)
상병 안대섭 (2006/04/01 18:30:38)
엇, 그러고보니 제목에 숫자 1이 붙어있네요. 이..이거!
상병 박종민 (2006/04/01 18:43:22)
훗훗. 클릭하기 전부터 2탄을 기대했습니다만,
아아 역시 (러브)
병장 김대현 (2006/04/01 18:58:26)
지연님이 몇학번이신지가 정말정말 궁금합니다. [초롱]
상병 이동일 (2006/04/02 00:16:03)
글을 읽어 가는 동안 뜨끔뜨끔.
직장부터. 심장까지 뜨뜨시해지는것이
앙숙중에 앙숙이였던 , " 괴물" 같은
그녀가 생각이 나는군요,,
아니 " ㄱㅗㅣ ㅁㅜㄹ " 이었던.
지금은 어디서 뭐할려나?
궁금하기도 하군요.
언제봐도 하지연님의 글은 따시하군요
하사 윤석호 (2006/04/03 01:08:23)
음.. 연륜이 느껴지는 글.
언제나 그렇듯, 지연님같은 글을 쓰려면,
얼마나 많은 논설을 써야 하는 건지. 얼마나 많이 철학적으로 사유해야 하는지.
얼마나 많이 나에게 실망해야 하는건지. 가락도 못 잡겠어요(웃음)
하사 윤석호 (2006/04/03 01:09:44)
그러고 보니 이 글, 대학별곡'1' 이군요!
그렇다면 이제 지연님도 씨리즈로 나가시는 겁니까?
이거이거, 트렌드군요!(웃음)
상병 이준요한 (2006/04/03 02:57:22)
이 새벽에 읽고 매우 즐거워하였습니다
병장 박소윤 (2006/04/03 04:14:09)
정말 즐거운 글입니다.
마지막 말이 가슴에 남는군요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상병 이영준 (2006/04/03 11:27:10)
잘 읽었습니다.
일병 김현동 (2006/04/03 13:40:09)
아, 복학하고 싶어라!
병장 이석현 (2006/04/03 20:59:51)
지연님은 독한 구석이 있으신거 같아요.
읽지도 않은 편지를 찢어버릴수 있다니.
아무리 미워도 전 궁굼해서 못 그럴것 같거든요.
병장 조민성 (2006/04/05 14:16:42)
저도 모르는 새에 완전 빠져버렸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병장 이영규 (2006/04/07 08:59:40)
해가 뜨고 해가 지듯이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은,
꽃 처럼 하루동안 감정을 피우고 하루 해가 지면 감정도 지듯이 하루를
살아가고, 해가 뜨면 다시 처음이란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싶지만!
하루하루를 기억하는 사람으로써는 아주아주아주 극복하기 힘든 과제가
아닐까 생각생각 되네요. (신음)
병장 이유석 (2006/04/07 14:13:47)
"형 우리 괴물은 되지 말자" -생활의 발견 中-
병장 신현준 (2006/04/09 16:25:53)
편지에 이름을 보고 펼쳐 보지도 않고 찢어 버렸다는 부분에서 웃음을 터트리고 어떤 기분이였을지 대충 짐작 가네요. (웃음)
상병 김형훈 (2006/04/13 10:57:16)
편지를 찢어 버리신거 너무 하신거에요..(아쉬움)
상병 김형훈 (2006/04/13 11:58:42)
편한게 좋습니다 엮시
무슨 주제를 가지고 있던 그아이템이 다른사람으로 하여금 어떡해 평가되건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엮어내림과 매듭을 푸는 일은 설득시키고
'나 이정도 잘났어요~' 하고 보여주기식 보다는
말그대로 '경험담'
그속에서 울어나오는 아지랑이 같은 진한 회상의 (결코 화려하지 않은) 마법 같은것
'그게 하지연씨.'
난 어e든 그런게 좋으니깐.(피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