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해 드립니다." 
병장 이승일 01-10 23:54 | HIT : 186 
 

 


  
  요즘 각종 대행업이 유행이라고 한다. 은행 업무 대신해주기와 같은 고전적 대행 서비스는 물론이거니와, 연애 편지 대신 써주기, 이별 고백 대신 해주기, 옷 대신 골라주기, 데이트 코스 대신 짜주기, 대리 출석, 게임 케릭터 레벨 대신 올려주기(이건 아무리봐도 진짜 찌질하다) 등과 걋?다양한 대행 서비스가 유행이라고 한다. 애인, 키스 대행서비스 등은 이미 널리 알려져있다. 
  뉴스에서는 대행업에 뛰어드는 젊은이들의 증가와 대행업 시장의 확대가 장기화된 청년실업의 직접적 결과라고 분석하고 있다. 물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청년들이 '몸으로 때울 수 있는' 대행업에 뛰어드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대행 서비스의 공급자가 아무리 넘쳐난다고 하더라도 그 수요가 충분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상황은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행서비스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수요증가라는 일반적인 사회 분위기가 오히려 구직에 실패한 청년들을 유혹했다고 보는편이 더 타당할 것 같다.

대행 서비스가 성행할 수 있게끔 만든 사회 분위기란 어떤 것인가? 이 분위기란 분명 개개인이 점점 더 익명화되어간다는 진부한 사회학적 흐름 속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 같다. 무언가를 다른 사람이 얼마든지 대신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사회에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 수행 자체이지 그것을 수행하는 주체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수행의 주체는 다른 누구로도 대체될 수 있으며, 이 대체가능성이야 말로 대행서비스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기반이다. 

이러한 상황은 궁극적으로 개개인의 수행이 그만큼 규격화되고 제도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연애 편지를 쓰는 일, 이별을 고하는 일, 데이트를 하는 일, 여가를 즐기는 일, 학업을 이행하는 일 등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대부분의 업무는 이미 정해진 문화적 틀 안으로 편입되어있다. 개개인이 그러한 업무를 수행하면서 발생하는 특이성과 개별성은 점점 줄어들었다. 글재주만 있으면 그 누구의 연애편지라도 써줄 수 있고, 약간의 뻔뻔함만 있으면 양식화된 이별 선고 쯤이야 가뿐하게 해치울 수 있으며, 이런 저런 센스만 있다면 정형화된 데이트코스 짜는 것은 일도 아니다. 우리는 대강 비슷비슷한 자극을 입력받고, 대강 비슷비슷한 방식으로 일상을 살아나가기 때문이다.

획일화된 수행이 어째서 주체를 익명화시키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언어습관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문장들은 대개 주어와 술어(동사)의 구조를 갖고 있다. 주어는 어떤 행동을 수행하는 주체를 지시하며 술어는 그 수행, 혹은 수행의 방식을 가르킨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수행이 뻔하면 뻔할 수록, 주어는 더욱 쉽게 생략되곤 한다. 궁대 안에서 이루어지는 발화를 살펴보라. "청소 다 끝났습니다" "작업 다 끝났습니다." "보고서 올렸습니다"  ...  대개의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수행이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이지 누가 그것을 수행했는가가 아니다. 

  고도로 발전한 사회일 수록 수행의 종류는 정형화 될 것이고 주어는 술어에 의해 은폐될 것이다.(그럼으로 대행업은 분명 앞으로도 유망한 사업이다.) 사회는 점점 더 개별 인간들의 집합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수행과 기능들의 집합이 될 것이다. 심지어 이러한 현상에 대한 비판이나 자성마저도 그 집합의 원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개념도 신화적 공상물로 여겨지리라는 것 역시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UCC 와 같은 매체들 역시 이러한 상황에 기여해왔고 또 기여할 것이 분명하다. 과거에 많은 사람들은 정부가 모든 것을 감시하는 '빅 마더' 가 등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여전히 그럴 가능성은 남아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직접적이고도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일반 대중들에 의한 자기 감시, 즉 '빅 브라더'의 등장이다. 모든 곳에서 대중들의 카메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기록은 모든 곳에서 행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현장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의 주관적 인상에 따라서 그것에 대한 진술이 달라지곤 했다. 그러나 모든 상황이 규격화된 매체에 의해 기록되는 지금 혹은 앞으로의 사회에서 그러한 주관성은 더 이상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이며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더 이상 숨겨진 관점, 새로운 관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사건에 대한 동일한 이미지가 사람들의 머리속에 저장되며, 이는 그들이 수행하는 행동을 동기화시키는데에 크게 기여한다. 사람들은 같은 것을 보고, 같은 방식으로 느끼고, 같은 방식으로 판단하며, 결국 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 

이러한 사회 변화속에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해야할 것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우리 세대는 자신의 자유와 실존에 관해 본질적으로 고민한 마지막 세대가 될런지도 모른다. 아니, 그러한 세대는 이미 역사속으로 사라졌으며, 우리는 단지 몇 몇 잔여물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우리는 철학적 문제의식과 그에 대한 답변마저도 규격화된 사회속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어떤 철학책을 읽어야하냐고 질문하며 이러저런 책을 추천받는다. 아마도 그러한 문제의식 조차 사회적 수행들의 집합의 원소 (물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원소)에 불과한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씁쓸하다고 표현하는 것 조차 이미 맥락을 상실한 것 같아서 정말로 씁쓸하다. 






 
IP Address : 54.2.9.70   
 
병장 심승보 
54.12.7.21   음, 특히 마지막 단락은 매우 씨니컬하게 들리는군요. '그러한 문제의식 조차 사회적 수행들의 집합의 원소에 불과한 것 같다.' 그 심정을 헤아려 볼 때, 저도 일정 부분 공감이 가는 구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 그런 사람들도 꽤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설사 그렇게 시작했다손 치더라도 얼마 안 가 지금 이승일님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식을 깊이 자각하고, 아주 의미있는 작업을 시작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전체적으로 글의 흐름이 과도하게 비관으로 치달은 것은 아닐까 함께 생각해 봅니다. 01-11 * 
 
병장 김효진 
48.3.4.68   "더 이상 숨겨진 관점, 새로운 관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에 대해 제 생각을 말해보겠습니다. 우선 예외적으로 새로운 관점을 탐색하는 개인은 여전히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탐색에 대한 이미지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어, 기존의 관점(이것들은 예전에 새로운 관점으로 제시되었던 것을 포함하는 것이겠습니다)과 새로운 관점의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유사점을 발견하는 것만으로, 저장된 이미지를 호출하여 그 이미지 안으로 새로운 관점을 수렴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새로운 관점과 기존의 관점의 차이, 탈주와 변화의 단초가 될 수 있는 여지가 여기서 잘라져 나갑니다. 그렇다면, 당연한 귀결로, 선결과제는 이 이미지의 해체 또는 비판이 될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현상황에서 새로운 관점은 생성될 수는 있으나 유의미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생성에서 결과에 이르는 메카니즘에 왜곡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시할 수 있는 두 가지 해결책의 첫째는 이 왜곡된 메카니즘을 폐기하고 새로운 것을 세우는 것이며 둘째는 왜곡된 부분을 정정해나가는 것입니다. 
현상황에 대하여 씁쓸하다고 표현하는 것, 씁쓸한 이유를 규명하는 것은 이 두가지 해결책을 예비하는 드러냄이라고 봅니다. 01-11 * 
 
병장 이승일 
54.2.9.70   승보 / 뭐 비관적인거야 아마도 태도의 차이이겠지요.(아마도 뉴스를 보자마자 열받아서 써서...) 승보님께서 의미있는 작업을 시작할 수 있다면 아주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효진 / 그러한 왜곡은 우리 사회의 물리적 하부구조인 매체 - 디지털 매체 - 에 의해 행해진 것이기 때문에, 왜곡을 제거/수정하기 위해서는 매체의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일부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그러한 왜곡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할 수야 있겠지만, 사회 전체적인 왜곡은 매체의 변화 없이는 수정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여기서 문제가 되는것은 왜곡 그 자체라기 보다는 획일화된 왜곡이 아닌가 하네요. 어떤 방식으로건 왜곡은 항상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01-11 * 
 
상병 김지민 
18.16.13.19   똥오줌 못가리는 수요가 왜 그리 많아지는 건가. 
빌어먹을 01-11 * 
 
병장 홍지욱 
54.12.5.122   무언가 획일화되고 있을 때, 더 이상 돌파구가 없을 거라고 생각을 했을 때,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오는 법입니다. 그렇게 인간을 발전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대행업이 유행한다고 해서 그것은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자체가 새로운 직업의 확장을 열수도 있는 것입니다. 

좀더 포괄적으로 본다면, 특이한 종류의 프로슈머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01-11 * 
 
병장 이승일 
54.2.9.70   지욱 / 동감합니다. 분명 새로운 페러다임이 등장하겠지요. 저의 씁쓸함이란 단지 이미 사라지고 있는 페러다임에서 나온 씁쓸함이며, 때문에 '이미 맥락을 상실한' 씁쓸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01-11 * 
 
병장 조주현 
22.96.3.105   아, 잘읽었습니다. 01-11 * 
 
병장 황금성 
22.65.35.110   대행업이요? 그만큼 대행업이 발전하면, 현 시점의 우리나라에서는, 


일자리 창출, 청년실업 해결, 그리고 그 대행업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시간비용 절감, 대행업을 하는사람들의 만족, 

뭐 이런것들이 생기지 않을까요? 01-11 * 
 
병장 김효진 
48.3.4.64   한 시대가 저물고 다른 시대가 도래한다고 해서 그 시대가 꼭 지금 시대보다 발전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도래할 다른 시대에 대한 제 거부감, 그것이 더 발전적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은 순전히 현 시대의 가치기준에 따른 것이지만, 전 아직 현 시대의 가치기준이 폐기당해 마땅할만큼 충분히 검토 받은 것이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또 도래할 시대라는 것이 현 시대와 완전히 단절적이라고 볼 수도 없으며 오히려 연속적인 면이 더 많다고 봅니다. 도래할 시대는,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이행해가는 것이 아닌 이상에는 지금 시대와 한 흐름, 같은 페러다임에 속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01-11 * 
 
병장 황금성 
22.65.35.110   단점으로는, 그 대행업을 이용하는 자들의 의식이나 대행업을 행하는 자들의 의식 문제가 있겠군요. 이건 너무 포괄적이라 Pass! 01-11 * 
 
병장 김효진 
48.3.4.64   대행업은 분명 이전까지의 윤리감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어 단절적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현 시대의 조류인 대중화, 익명화, 획일화의 한 흐름에 있으므로 새로운 페러다임의 징후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01-11 * 
 
상병 김지민 
18.16.13.19   대행업도 대행업 나름이지요. 
그리고, 대행업 성행하다간 그 쪽으로 빠졌던 사람들 싸그리 죽어나게 될겁니다. 나중엔 그거 다 로봇이 대채할 테니까요. 하기사 그쯤되면 어떤 직장이 위협받지 않겠냐만은. 아무튼간. 
정말 '머리좋은' 대행업이 아닌 이상, 신개념,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규정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싶네요. 특히나 위에서 비판받는 대행업들같은 경우에는, 절대로 긍정적으로 볼 수가 없는걸요. 똥 대신싸주기 정도로 비유해도 무방할 것 같아요. 
자기 똥은 자기가 싸야죠. 

제일 가관은 대신 연애편지 써주기, 이별 고백 대신하기 등의 작업이네요. 인간 말종이 이런건가 싶고. 01-11 * 
 
병장 이승일 
54.2.9.70   똥 대신싸주기 좋다.. 창업해볼까... 똥 대신 싸주겠다고.. 01-11 * 
 
병장 조주현 
22.96.3.105   소형 공간이동 장치를 장 내에 설치한 후, 똥을 바깥으로 트랜스포트. 
이거, 항문이 사라질법한 센세이션한 연구겠다! 01-11 * 
 
 병장 김청하 
52.2.6.71   똥 대신 싸주기라니 섹스 대신해주기랑 비슷한거 아닙니까. 배설이야말로 쾌락인데. 01-11 * 
 
병장 이승일 
54.2.9.70   근데...섹스는 둘이 하는 반면 똥은 혼자싸죠(끙) 
제가 대신 똥싸드릴게요 (먼산) 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