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성과 공평성 

경제학만큼 오해와 편견에 뒤덮인 학문도 사실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런 흔한 오해 중 하나가 '후생경제학'에 대한 것이다. 후생은 일본의 후생성에서 알 수 있듯이, 흔히 복지에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따라서 후생경제학은 주류 경제학과는 조금 다른 복지정책에 관련한 학문 분과인 것 같은 오해를 준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재정학이 거시경제학의 분과라고 믿는 것만큼 오해일 뿐이다. 후생경제학은 주류경제학의 분야일 뿐이며, 복지 정책에 가장 거리를 두고 있는 학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보통 이름은 대상을 징상하도록 붙여지는 것이 통념임에도 그렇게 된 이유는 실은 간단하다. 현재의 경제학 자체가 그렇기 때문이다. 오늘날 경제학은 효율성에만 집착하고 있으며 공평성에 대해서는 별다른 합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즉, 사회의 총효용을 높이는 성장에만 시선을 집중시킬 뿐 배분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류 경제학의 총아인, 혹은 그 역이 성립하는 세계 경제는, 그리고 한국 경제는 배분에 대해서는 상당한 거부감을 보이면서 성장 위주의 사고를 오늘까지도 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효율성에 대한 연구는 그리 어렵지 않다*1. 앞의 챕터들에서 익히 말했듯이 효율성이란 최적 효용량을 도출해낼 수 있는 상황을 뜻한다. 인간의 시간은 제한되어 있고, 따라서 여가와 노동간의 예산제약식은 단순화하여 나타낼 수 있다. 노동에 따른 소득함수는 단순화하여 도출될 수 있고, 소득수준에 따른 소비의 무차별곡선 또한 모형화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생산자의 경우, 한계비용과 가변비용 등 *2의 추출은 기존 회계체계 내에서도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것이 아니며, 따라서 손쉽게 가격과 최적생산량의 함수를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효율성은 '최소 비용으로 최대 생산'이라는 원칙을 말하며, 따라서 본질적인 회의주의자들을 제외하고서는 효율성의 내용에 대해 큰 견해차이를 보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평성은 다르다. 기본적으로 '어떤 것이 공평한 것인가'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먼저 내려져야 가장 공평한 분배를 위한 경제 체제에 대한 연구가 이어질 수 있을 것인데, 그 대답부터 내려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라면 아마도 정부 개입이 전혀 이뤄지지 않는 시장을 원할 것이지만, '최소 소득자의 효용수준이 사회 총 효용'이라고 주장하는 롤즈의 경우에는 모두가 완전히 동일한 소득을 점유할 때 공평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효용은 계산될 수 있으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가장 긍정적이라고 말하는 공리주의라면 이들 양 극단의 사회총효용에 대한 이해의 중도에 있는 함수를 주장할 것이다. 복지주의자라면 조금 더 빈자들의 이해를 추구할 것이고, 극단적인 환경주의자라면 생명체 전부의 최대효용을 주장할 수도 있다. 어떤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긍정적인 공평성인지는, 당장 총효용조차 합의되기 힘들다는 점에서 도출되기 지극히 어려운 대답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경제학에서는 공평성의 문제는 비교적 도외시한 채로, 가장 효율적인 경제 체제에 대한 연구에 보다 중심을 두고 있다. 후생경제학에서 말하는 후생이란 파레토최적에 대한 연구, 즉 가장 효율적인 경제 상황에 대한 분석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옳을 것이다. 후생경제학에서도 분배를 연구하지만, 이것은 '그러 해야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가장 효율적인 시장에서라면 당연히 이렇게 분배가 된다는 식의 내용 이해에 한정된다. 실제로 경제학에서는 가난한 자를 위한 그 어떠한 연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돈 받아 봤자 술을 사 먹을 것이 뻔한 알콜 중독자 극빈자'가 최대 효용을 술에서 얻는다면 그에게 환전할 수 없는 쌀을 주기 보다 돈으로 소득을 보전하는 것이 경제 총효용을 증대시키는 것이며, 이는 소비자 주권에 대한 보전이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를 '모르면서 하게 만드는 것'이라 규정했지만, 현대 사회에서의 이데올로기는 지젝의 말에 더 가까운 '알면서도 하게 만드는' 그런 것에 더 가깝다. 강력한 수학적 기반을 바탕으로 한 현대 경제학은 이데올로기 자체를 거부하는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가 개입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가장 효율적인 경제 여건'에 대한 논의는 분명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이는 수학적인 당위의 도출이며, 필연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공평성에 대한 어떤 논의도 사실상 부정하고 있는 태도는, 실제로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를 양산하고 있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도 그 이데올로기에 전적으로 포섭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일 것이다. 


*1. 물론 경제상황은 단 백명만 모여있는 사회라 할지라도 충분히 복잡하며, 측정해야할 변수는 우리 이해를 넘어설 정도로 충분히 많다. 그러나 그 모든 복잡함은 언제나 우리의 접근을 불허할 정도의 복잡함은 아니며, 우리는 모형을 통해 단순화시킬 수 있다. 

*2. 이 단락에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처음 보는 단어들은 나중에 다른 챕터에서 모두 설명될 예정이다. 지금은 그냥 읽으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