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의 탐구주제(3) 

누구를 위해 생산할 것인가. 결국 경제학을 둘러싼 논쟁과 논의 중 많은 것은 이 세번째 질문에 닿아있는 것들이다. 경제학적인 생산과 소비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어야 하며, 이 사회의 경제 체제는 누구를 위해 조직되어 있어야 하는가. 

흔히 호사가들에 의해 말해지듯 20세기는 인류에 의한 공산주의 대 실험이 실행되었던 세기였다. 어떻게 말하든, 90년에 소련은 붕괴하였고 91년 동구 공산주의 국가들은 대대적으로 연쇄 붕괴를 일으켰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 체제를 주장했던, (혹은 역사적 필연을 외쳤던) 중앙계획경제체제는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고 완전경쟁체제를 피력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승리한 것으로 또한 알려졌다.

실제로 중앙계획경제체제가 실패했는지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고, 명확한 결론은 나지 않은 상황이다. 공산주의는 스스로가 주창했던 노동자독재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또다른 왕조에 불과했으며, 아직 좌익 경제체제는 현실 속에 도입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떠한 사회주의적 체제도 경쟁성을 박탈하거나 공공재 생산에 문제를 보이는 극단의 선택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하는 이도 있다. 확실한 것은 현재 세계 경제는 자본주의 체제에 명백히 포섭된 상태이며 명확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안은 사실상 없다는 것이다. 유럽 북구 지역 등에서 도입되었던 복지경제체제 역시 현재 점차적으로 힘을 잃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전 세계, 혹은 전세계 경제의 권력을 쥔 계층이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누구를 위해'에 공감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3부에서 말했듯이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가장 높은 효용을 보이는 이'를 위해 생산한다. '리모컨'이라는 재화를 가정하자. 이 재화의 사용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내 마음에 드는 채널 선택'이라는 이름의 효용일 것이다. TV를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는 무시하지 못할 높은 효용치를 의미하며, 따라서 서로 리모콘을 점유하기 위해 경쟁할 것이다. 이때 보통은 입대한지 오래된(쉽게 말해 기수가 높은) 병사가 리모콘을 최종 점유하게 되는데 이건 지극히 경제학적이다. 이를테면 전입신병인 이등병은 리모콘 점유 행위에 대해 높은 기회비용 (선임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진 않을 것 같다, TV 시청 뒤가 두렵다 기타 등당)을 가지며, 다른 한편으로 TV 시청 행위 자체가 높은 효용을 보장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등병은 선임이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리모콘을 점유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병장이라면, 설사 선임병이 있더라도 리모콘을 점유하려 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이 병사가 리모콘에서 획득하는 효용이 높기 때문이다. 만일 보다 더 선임인 병사가 있고 리모콘을 점유하고자 한다면 경쟁이 발생하며, 이 경쟁에서 더 높은 효용과 더 낮은 비용을 갖는 측이 결과적으로 리모콘을 점유한다. (보통은 선임병이 승리하는데, 아무리 병장이라도 후임이라면 '선-후임 관계'라는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현상이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쌀이 있다면, 쌀에 대해 높은 효용을 느끼는 이가 그에 합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쌀을 점유하여 소비할 것이다. 현재 가용할 수 있는 돈이 5만원 뿐인데 쌀 값이 10만원이라면 이 사람은 쌀에 대해 높은 효용을 보이지 못하는 것으로 치부된다. 정말로 쌀에 대해 지극히 높은 효용을 갖고 있다면 이 사람은 화폐를 융통하여 (사채를 쓰든 대출을 받든) 소비 행위를 선택할 것이며, 따라서 효용을 극대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 소비에 합당한 대가를 융통해내지 못했다면 효용이 낮은 것이며, 따라서 더 높은 효용을 느끼는 이들에게 물품의 점유-소비권을 양보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현실에서는 소비자이론적인 융통능력을 보이지 못하는 '제한된 유동성'을 지닌 대다수 저소득층의 생계가 문제가 되고, 그렇기에 도출되는 이론이 복지적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이론이다. 

대안적 경제체제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 *1으로 불리우는 이들 이론에는 언제나 중앙집권적인 경제 운영 체제가 내포되는 경향이*2 있다. 이들은 소비와 생산에 대해 우선순위를 인위적*3으로 부여하고, 최소 생계와 최소 효용을 보장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에 중심을 둔다.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흔히 내포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가치 전도 현상을 지양하고, '보다 인간적인 삶'을 담보하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는다. 이들 이론은 대부분 '최소한의 삶'을 위해 생산할 것을 주장하며, 그를 뒷받침하는 논리들을 연구한다. 하지만 현재 한국 내에서 대안적 경제 이론들을 찾아보기는 불가능*4에 가깝다. 세계적으로도 다보스 등 주류경제이론이 세계 경제이론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상황이며, 이는 우파 정치인, 사상가, 기업인들로부터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다. 시카고 학파로 대표되는 엄정한 수학적 방법으로 도출하는 경제이론들은 현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력한 아성을 쌓고 있으며, 이들은 '누구를 위해 생산하는가'에 대해 전술한 바와 같은 답변을 내리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꼭 문제인 것만은 아니다. 





*1. '대안 '이란 이미 중심적인 이론이 있고 그에 대한 보완적 이론이라는 어감을 내포하고 있다

*2. 평의회라거나, 단위 공동체 등의 분산적인 정치 체계를 바탕으로 하는 사상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 경우에는 분산 체제 자체가 하나의 거시경제주체로 작동하며, 따라서 마찬가지로 중앙집권적 경제운영체제라는 지적은 그대로 성립한다

*3. 인위적이라는 표현에도 문제는 있다. 완전경쟁시장은 인위적이지 않은가? 무수히 많은 인간들이 한계비용과 수익을 조정해 나갈 뿐, 인위적이긴 마찬가지다. 생태주의와 환경주의,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 아래 자라난 우리는 인위적이라는 어휘에 부당한 편견을 갖고 있는 편이고, 따라서 인위적이라는 표현에 잘못 반응할 여지가 많다. 하지만 최소한 사회과학의 범위 아래에서 인위적이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4. 현재 연세대학교 경제학과에 한명, 서울대 경제학과에 한명, 영남대 경제학과에 한명, 대구대 경제학과에 한명의 교수가 주류경제학 이외의 경제학을 전공했다고 알려져있다. 참고로 연세대학교 경제학과에는 총 22명의 교수가 있으며, 국내에는 100여개 이상의 경제학과가 존재한다. 연세대 김 모 교수와 서울대 홍 모교수가 담당하고 있는 강의는 학부에는 없거나 혹은 단 한개 정도인 실정이다. (주 : 이건 타이퍼 본인도 정확히 확인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둔다. 비주류경제학을 전공한 선배가 알려준 얘기이다) 따라서 글쓴이 본인도 비주류 경제학에 대해 학습한 바가 없으며, 전적으로 주류경제학에 대한 학습의 결과로서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밝혀둔다. 알려진 바로는 비주류 경제학에 대해 국내에 출판된 책 중 최신 저작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