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대 전에, 나는 하루에 여섯갑을 피웠다. 이는 폐를 깎는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하여간 나는 폐를 깎는 노력을 통하여 여섯갑 흡연량에 도달하였고, 당당하게도 입대 시 쓰는 이상한 문서들에 '흡연:흡연량 일일 6갑'이라고 기재한 덕에 꼴초니 육갑이니 하는 별명들이 붙어 다녔지만 나는 입대 후 뼈를 깎는 노력을 하여 흡연량을 반 갑 정도로 줄이고 말았다(뼈를 깎는다고 깎였던 폐가 다시 붙어나는 건 아닌 것 같지만). 여기에, 세 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다. 일단은, 담배를 피울 일이 없다. 여기서는 마감글을 써야 하는 일도, 마감기사의 오탈자를 잡아내야 하는 일도, 아니 기본적으로 '글'이라는 것을 쓰게 될 일 자체가 별로 없었고, 술자리는 많았으나 함께하면 즐거운 사람들과의 술자리는 아니었기에, 그러나 그들은 시중을 원하였기에 술자리에서도 담배를 피울 일이 없었다. 두 번째로, 건강이 문제였다. 피울 이유가 없는 담배를 피우느니 차라리 좀 줄이고 건강이라도 챙겨두자, 는 심보였다. (이를 위해 심지어 조깅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이유는, '군대에서 흡연이 가지는 제문제'들 때문이다. 이에 나는 글을 쓴다. 

'나눠피는 담배 속에 몰아치는 우리 우정' 이라는 말이 국어 사전에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한국의 흡연 및 담배 배분 문화는 특별하다. 담배에는 주인이 없다. 사유 재산에 대한 관념이 투철한 친구들이라 할 지라도 담배의 경우에는, 공동 소유 해버리고 만다. 담배 한대만 빌려줘, 라는 발화는 '죽어버려'와 유사한 빈도로 사용되곤 한다. '죽어버려'라는 말이 대개는 내가 너를 죽인다, 는 행위를 수반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담배 한대만 빌려줘, 라는 발화에는 결코 '갚는다'는 행위를 전제화하지 않는다. 사유 재산에 대한 관념이 뛰어난 내 친구 고 박모군은 다른 친구 최모군에게 '빌려간 담배 왜 안갚아'라고 대들었다가 다음 날 목이 잘린 채로 2호선 시청역 화장실에서 발견되었다. 기본적으로 나는 담배 한대만 빌려가서 갚는 녀석을 여지껏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는 단순하지 않다. 특정인이 언제나 담배 없이 생활하며 '담배 한대 빌려줘'라는 주문을 남발하고 다닌다면, 그는 흡연가 세계의 규칙을 어긴 댓가로 '흡연가의 이름으로' 배에 단검이 꽂힌 채 한강 밤섬 옆에서 떠오른다거 하게 되는 것이다. '담배 한대만 빌려줘'는 이처럼 단순히 '담배 한대만 줘'도 아니고, 협의의 의미에서 '담배 한대만 빌려줘, 갚을테니'도 아니다. 

차라리 이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 증여'에 가깝다. '비록 지금 신에게는 담배가 없고 짐에게는 담배가 있지만, 세상이 노란 깃발로 뒤덮히는 그날, 신에게는 담배가 있고 짐에게는 담배가 없을 것이니 지금의 내게 담배를 주시오'라는 것이다. 이 관계는 철저히 신뢰에 의해 유지된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할 지라도 한 쪽이 계속 한 쪽에게 담배를 착취당하게 되는 경우는 없다. 그런 식의 착취의 하부구조가 친구관계라는 상부구조를 혁명적으로 붕괴시키고 말기 때문이다. 물론 혁명이란 쉽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에, 무수한 이데올로기가 이에 중층적으로 작용하는 것이기에, 필연적으로 혁명이 발생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일테면 입대 전 나는 한 李가놈에게 무한히 담배를 빼앗겼으나 그와의 관계를 혁명적으로 정리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것이다. 

이것이 '담배 한 대만 빌려줘'가 담지하는 일상적 상호 작용의 메커니즘이다. 베버가 '근대 서구 사회에서 발달한 특수한 형태의 자본주의'의 한 특성으로 서술한 '합법적인 틀 안에서 상호 신뢰에 기반한 자신의 이익 추구' 누군가는 이러한 행위를 두고, '담배 한 대만 빌려줘'는 해방적 증여행위의 정치적 상징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담배화함으로, 해방된 세상을 건설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의 먼 친척 되시는 초기 사회학자 모스의 '증여론'은 사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쓰여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 외쳐보자. 권력을 빌려줘. 애인을 빌려줘. 가족을 빌려줘! 라고 분석하기도 하였으나 대충 개소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담배 한 대만 빌려줘'는 차라리 극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신용 사회의 한 표상이라는 것이 적절한 분석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나저러나 해 봐야 이것은 사회의 이야기이며, 비교적 평등한 관계를 맺은 사람들 간의 이야기다. 

나는 그리고 제군들은 사회에 있지 않으며, 비교적 평등한 관계를 맺는 사람들 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더욱 더 많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다. 제군들은 군복 입은 민주시민이다. 모두들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점에서, 욕망의 평등이 전제된다는 점에서 제군은 모두 민주 시민이며, 그러나 나는 말년병장 김병장에게 담배를 빌려달라고 했다가는 눈 앞에 번쩍 하는 불까지 동시에 빌리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군복을 입고 있다. 

이곳에서 '담배 한 대만 빌려줘'는 사회와는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 당연히! 언어는 사회적 관계망 속에 존재하는 것일 테니까. 사회에서 앞 사람을 보고 'see발'이라고 하면 대체로 항상 안좋게 끝난다. 이곳에서는 두 가지 경우가 생긴다. 1앞 사람이 선임일 경우. 뒤통수를 강타당해 튀어나온 눈으로 'see 발(발을 보기)'하게 되거나, 2앞 사람이 후임일 경우. 그쪽이 뭔가 죄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see 발'하는 자세(고개를 숙여 발을 보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담배 한 대만 빌려줘, 도 마찬가지다. 이는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사용할 수 없는 표현이며,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사용할 경우 그 의미가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혁명적으로 변혁되는 그런 표현인 것이다. 이를테면 이 문장의 의미는 이렇게 변한다. '나 담배 없고 앞으로도 당분간 없을 예정이다. 담배 한 대만 줘. 다음에도 잘 부탁한다' 그리고 이러한 발화는 두 가지의 대답을 전제한다. '없습니다' 혹은 '여기 있습니다'. 동기간에 사용되는 '담배 한대만 빌려줘'는 대체로 외부 사회와 마찬가지의 용법으로 사용되고는 한다. 다만, 표현의 문제에서 좀 거칠어진다거나 하는 정도의 마이너한 변화가 생기거나 하지만. 

그런데 말이다. 사람이 담배를 피우다 보면 때로 담배가 다 떨어지는 상황에 봉착하기도 한다. 이는 신의 뜻일 수도 있으며, 혹은 북괴도당의 술수에 말려든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는 정말로 담배를 빌려야 한다. 그런데 동기중에 흡연자가 없는 당황스런 상황이라면? 방법은 하나다 : 하급자에게 담배를 빌린다. 혹 여기서 방법이 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지나친 상상력/모자란 논리력으로 인하여 앞으로의 미래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조심스런 충고를 하고 싶다. 그러면 담배를 빌려야 한다. 후.임.에.게. 

이것 참 미안한 일이다. 후임에게 가서 담배 한대만 빌려줘. 후임도 담배 피고 싶을텐데. 내가 가져가는 담배 한 대 때문에, 그가 정말 죽고 싶은 기분에서 담배 한 대 피우려고 담배갑을 열었는데 담배가 다 떨어져서 온 몸에 신나를 들이붙고 담배 대신 자기 몸에 불이라도 붙이게 되면 어쩌지? 나야 후임들에게 빌리면 되지만 그녀석은 후임도 얼마 없는데. 아. 저놈. 당찬 놈이었지. 당차게 고참한테 담배라도 빌리다가 집합걸리면 나도 see발자세로 서있어야 되는데. 뭐. 이런 생각들이 짓쳐오며 나는 지치기 시작하고, 지치면 더 담배를 피고 싶어지는 게 인간 심리고, 해서 결국 으아악 야 나 담배 한대만 빌려줘. 꼭 갚을께. 하고 일갈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꼭 갚을께. 가 핵심이다. 이는 군복 입은 민주 시민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그래서 나는 담배를 꼭 갚는다. 왠만하면, 결코 개피로 빌리지 않는다. 갑으로만 빌린다. 그쪽이 갚기에 편하다. 개피로 빌리게 되면 아쌀하게 담배 없을 때마다 그녀석에게 빌린 다음에 다음 달에 한 갑으로 준다(흡연자라면 다들 아시다시피, 가끔가다 개피로 하나씩 빌려서 한 달에 한갑 절대로 안 된다). 내가 꼴불견이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리하여 결국 나는 담배를 줄이게 되었다. 양 손으로 눈을 가리면 기관총을 쏠 수 없는 것처럼, 이것저것 복잡한 것들로 연기나는 머릿속에 담배연기를 밀어넣는 일은 힘든 일이니까. 그리고 이러한 이유들로 아마 제대하고 나면, 담배를 더 피우게 되겠지. 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