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한 고백, 정치적 올바름의 추구 
 병장 진규언 06-19 10:54 | HIT : 216 



 책마을에서 회자되는 수많은 단어중 인기를 끄는 몇몇이 있습니다. 단연 '폭력'이 독보적입니다. 집단으로부터 야기되는 미시적인 일상에서의 폭력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에서 벌어지는 거시적인 폭력 또한 마찬가지로 책마을의 단골 소재입니다. 내무 부조리는 엄연한 폭력이며, 군대 어르신들의 가르침 또한 그것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일상을 폭로한 언론을 접하면서도 뚜렷하게 '사용자의 가학성' 내지는 '노동현장에서의 부조리함'을 인식하는 것 또한 손이 닿는 영역에서의 폭력입니다. 책마을 주민님의 글을 읽고 댓글로 '님이 고발하신 내용은 명백한 폭력입니다'라고 답글을 다는 것은 이제 소소한 일상이 되었습니다.

 자동차 기업 노동자의 파업을 이야기 합니다. 정치적 파업은 이제 지양해야 한다고 합니다. 사용자님들은 각 노동자의 가정에 '가정통신문'을 발송했다고 합니다. 대략 이런 내용이겠지요. "회사가 어렵습니다. 이대로라면 세계 자동차 산업의 대형화와 세계화의 추세에 발맞춰 따라가기도 힘든 실정입니다. 우리나라가 일구어낸 한강의 기적, 그 최전선에 서있던 자동차산업이 고사 직전에 있습니다. 원엔 환율은 역사상 최저점에 이르렀으며, 원달러 환율 또한 수출 채산성을 맞추기에 무리가 있습니다. 세계 유수의 자동차 기업들과 치열한 경쟁을 펼치려는 이 때에 파업은 온당치 않습니다. 한미FTA 결사반대라는 정치적?분규를 할 때가 아닙니다. 사내 복지와 급여 부분에 대한 논의는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라는 완곡한 어투를 예상합니다. 오히려 애절하기까지 합니다. 
 극명하게 갈립니다. 구태여 일일히 예를 들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반론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하나의 개체에 불과한 노동자가 거대 권력과의 일전을 벌이려면 연대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이에 기업별 노조는 물론이거니와 산업별 노조의 조직과 활발한 활동은 자연스레 뒤따르는 결과물입니다. 세계를 횡행하며 온갖 부조리함을 양산해내는 자본주의의 폭주를 막기 위해서라면 비급여적인 부분에서의 '정치적 파업'을 하는 것은 노동자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이야기 합니다. 노동자들의 대표도당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일개 노동자 집단이 이룩해내야 한다고 하기도 합니다. 

 한국 사회가 1930~40년대보다는, 60~70년대보다는 성숙했다고 믿습니다. 고로 오늘날의 파업을 바라보는 시각이 당시 일어났던 모든 파업들이 영산당의 모략이라고 도매급으로 매도 당했던 상황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언론들이 그렇게 호도하더라도 실제로 그러하다 라고 믿는 시민들은 많지 않습니다. 다만 정치적으로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세만큼은 우리들의 80년대보다는 후퇴했다고들 합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범람 때문일까요. 아니면 이로 인한 글로벌 유동성의 증가 때문에 발생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일까요. 개인으로선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정치적인 올바름보다야 당면한 과제들의 해결에 모든 노력을 쏫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이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한 일이고 다가오는 파도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용기있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며칠전 9시 마봉춘 뉴스에서는 강남 모 백화점 비정규직 노동자의 파업을 조명해주었습니다. 7월 시행예정인 비정규직 법안의 맹점이 여기서 드러났는데요. 사용자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노동을 비용의 측면으로만 보는 것을 적극적으로 찬동하는 것은 아니나, 얼토당토 않는 역지사지의 마음으로야 '마음은 아프지만 어쩔 수 없다'라는 그들의 시각이 그럴수도 있겠구나 하고 끄덕여 지는것도 사실입니다. 분명한 것은 생존권을 침탈 받고 외부 용역 업체에 의하여 사적 폭력을 경험하고 있는 비정규직자들의 입장에 서서 정치적인 올바름을 이야기 하는 것이 개인에게 '상식적인'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대다수가 노동자가 될 개연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유목생활이었다면 저는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굳이 서구를 지배했던 그리고 지배하고 있는 앞으로도 지배예정인 다위니즘의 '자연도태'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가진 신체적인 힘이 미약하고 그렇다고 생긴 모양새가 남자답지도 않을 뿐더러 후손에게 유리한 유전자를 물려줄 공산이 크지도 않은 저는 누가 보아도 자연스럽게 궁벽한 정착민으로 남아 일생을 보냈을 것입니다. 달리 현대에는 지식근로자, 지식노동자라는 핑계거리가 생김으로써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새록새록 솟아납니다. 먹고 사는 걱정을 우선 해야만 하는 입장에서 정치적인 올바름을 이야기 하는 것은, 꾸울꺽 촌음을 아끼는 행동에 대한 훌륭한 알리바이를 제공합니다. 언젠가 저 자신이 지식을 팔고, 행동을 팔고, 생각을 팔아야만 입에 풀칠하는 날이 도래한대도 올바름을 추구할 수 있다면 한 단계 도약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마 노동자가 될 것입니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50%넘는 비율의 그들에 속한다면 제1금융권 대출도 까다로워지고 부당한 이유로 지방직 발령을 받을지도 모르는 등 생활이 곤궁해지는 것은 눈에 불을 보듯 뻔한 이치니까요. 
 태초에 시장은 거기에 있었다고 이야기 하네요. 가까이 홍세화 씨의 글을 보더라도 외나무 다리는 그 자리에 있었으며, 다리 건너의 세상 또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다만 변한 것은 이쪽 편의 사람들이며 그것이 현재의 폭주를 야기했다 라는 그의 생각을 존중합니다. 이 외나무 다리를 폭파시킬 힘도 용기도 없습니다. 좀더 솔직하자면 폭파시킨 다음의 세상이 쉽게 상상이 되지 않으며, 꿈꾸어 봄직한 세상이라는 확신 또한 없습니다. 강가의 흔하디 흔한 돌무더기 처럼 이 한몸 던져 버리는 것은 자기애에 대한 명백한 폭력이기도 합니다. 

 외국계 기업에 입사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을 개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고 있는 기업들 조차 야만의 주식회사에 편입되는 모습들을 보면 환멸감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환경경영, 윤리경영을 표방하는 모 기업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가 봅니다. 저 소득층을 위한 소액대출의 활성화로 지난해 노벨상을 수상한 모 은행의 총재 또한 외국 기업입니다. 선택 가능항의 집합으로 보았을 때에 학자를 표방하지 않는 이상 일련의 선택된 노동자의 입장에서 현실을 보아야만 합니다. 기업의 입장이든 정부의 입장이든 기실 절대 다수가 노동자가 되는 것이 현실이고 그렇기 때문에 보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일터를 선택하는 것이 개인으로서는 최선이며, 작업장에서의 업무 자세 또한 강요된 폭력을 지양하지만 추구하는 가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옹호하는 것보다 먹고 사는 일을 우선 해결하는 실천적인 방식으로 일구어 내는 것이 상식적인 일일 것입니다. 이 편이 훨씬 행복감을 느낄 것 같습니다.

 저는 일개 노동자가 될테지요. 사회의 알력 다툼 속에 희생되는 자가 될 수도 있지만 결코 바라지 않습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폭력자가 되고 싶지 않고, 그것을 조장하고 방조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자가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 입에 풀칠할 권리를 획득하고 정치적인 올바름을 블로그의 독자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 선에서 그칩니다. 언제고 여행 떠날 수 있는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고액 연봉이 탐날 것이며, 지위가 주는 만족감을 위해 높은 자리가 탐날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주 가까운 미래에 돌아갈 학교에서는 높은 학점을 바랄 것이며, 공인된 외국어 실력을 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업의 총수들로 구성된 단체와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것이며 때로는 그들로부터 인정 받기를 원하기도 할터입니다. 훗날 오롯이 바로 설 수 있을 때에는 대다수의 학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정치적인 올바름을 추구할 것입니다.


 빌린 생각들
 앨빈 토플러 <부의 미래>
 박노자 <당신들의 대한민국01>, <당신들의 대한민국02>
 김동춘 <1997년 이후 한국 사회의 성찰 - 기업사회로의 변환과 과제>
 자크 아탈리 <미래의 물결>
 노엄 촘스키외 <야만의 주식회사 G8을 말하다>
 박민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플라톤 <국가론>
 폴 크루그먼 <경제학의 향연>
 장정일 <공부>
MBC 9시 뉴스
 매일경제신문
 매경 이코노미
 그리고 [책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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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병 박준연 
 규언씨의 제목을 보고 있자니 문뜩 주간 잡지에서 보았던 
' 정치적으로 올바른 커피를 파는 까페'라는 문구가 생각나네요. 
 절대적 잣대의 정치적 올바름은 없다고 생각해요. 
 살아가면서 체득하고, 공부함으로써 더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규언씨의 정치적 올바름을 먼훗날 신문에서 기대하겠습니다! 
 참, 저의 정치적 올바름을 생각하는데 글로써 좋은 도움 주셔서 감사해요.(웃음) 06-19   

 병장 허익준 
 형님뉴스의 "그" 발언을 보면서 마음이 착잡했던 건 저 뿐 아니었나봅니다. 06-19   

 상병 김현진 
 한국의 기업들이 자본 논리만큼이나 신념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신념이 저와 맞는 곳이 있어서, 그 곳에서 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노동이 인간의 가치를 증명한다면, 그런 곳이 천국이 아닐런지. 

 조금 핀트가 어긋나지만, 우리는 갖고 있는 걸 다 버리고 사람도 버릴 수는 있어도, 손에 쥔 천원짜리 한 장은 버리지 못합니다. (쓰거나, 쓰라고 줬으면 줬지)'돈을 버린다'는 생각 자체가 우리 뇌에는 없는 것 같아요. 이것이야말로 진짜 불편한 진실이겠지요. 06-19   

 상병 박준연 
 현진/ 아시리라 사료되지만 유한킴벌리가 현진씨가 말한 노동이 인간의 가치를 증명한다는 말에 어느정도 핀트가 맞을 듯 싶어요. <대한민국 희망보고서 유한킴벌리> 그리 구체적인 경제논리나 논리적 전개로 적힌 책은 아니지만 조금이나마 이 회사를 아시는데 도움이 될 듯 하네요. 06-19   

 일병 임승관 
 정치적 올바름은 준연씨가 말한 것처럼 절대적인 잣대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게다가 진규언 병장님이 쓰신 글에서처럼 요즘 정치는 대부분 정치 단독이 아닌 경제, 과학 등과 얽혀있기 때문에 어떤 판단을 내린다는 것도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자신의 잣대에 맞는 정치적 가치관과 경제적 가치관을 옹호하는 것이 다 일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서 한가지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제 잣대에 맞는 가치관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로 인해서 내가 피해를 볼 때.... 
 과연 어떻게 하는게 옳은 행동일지... 
 대학생활 내내 그런것에 대해 조금씩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전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하나 봅니다.(땀) 
 진규언 병장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06-19   

 병장 배진호 
 이 글은 꽤나 정치적인 글이군요?... 노린 것인가요? 
 뭐 그냥 그런 인상을 받았습니다. 올바른 정치라는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르죠... 06-19   

 일병 정영목 
 박준연 님// 유한킴벌리, 저도 추천합니다. 그들도 당연히 극선은 아니지만, 한국에선 그나마 '매우 희망'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핀란드'도 한 번 알아보시길. 소국과민의 현대판 버전인 나라입니다. 

 임승관 님//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로 인해서 내가 피해를 볼 때. 제가 나름대로 수립한 전략은 '당하면 갚기 갚으면 잊기'입니다. <이기적 유전자>의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 ESS(Evolutionary Stable Strategy)>에서 영감을 받고, 살면서 이리저리 적용해 본 건데, 직접적 사례를 소개해 드리긴 뭣하지만, 제가 아주 흥미있어 하는 부분이라 뭔가 썰을 풀고 싶군요. 준비해야 할 듯. 

 제가 이래서 정치에 관심을 가지나 봅니다(땀)(하하). 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