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준연님의 <새 여성학 강의> 후기를 읽고 떠오른 생각이 제 멋대로 가지를 친 결과물입니다. 한 마디로 '잡초같은 글'이라는 소린데요, 히히. 저의 글쓰기는 여전히 아마추어적입니다. 논리적 고찰보다 순간순간 떠오른 '발상'에 의존한다는 말이지요. 제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이 글을 쓴달까요. 여튼, 태클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단상. "여성성" 개념의 허구에 대하여.




영어권에서는 남성을 Men이라 지칭하고 그 앞에 'wo-'를 붙여 여성(Women)을 지칭한다. 보통 Men이 남성 뿐만 아니라 사람 일반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는 지극히 남성 기준의 언어이며(언어의 남성성이라고 하기도 하..던가?) 고로 '여성'이라는 이름은 차별 속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이름의 탄생이 그렇다고 해서 여성이 탄생부터 남성의 그늘에 있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여성을 구속하는 것은 그녀들에게 갈빗대 하나 떼어주듯 이름을 지어 주었던 기존의 헤게모니이므로. 

정치적으로 올바른 단어를 사용하자는 운동에 힘입어 언어는 적극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사람'을 뜻하는 단어 또한 마찬가지인데, 이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Men 대신 'People'을 사용하자고 주장한다. 조금 배웠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설득력을 얻는 주장이지만, 나는 이것이 윤색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단어는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표현"의 단어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People을 입에 담으면서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Men을 떠올리며, 이 때 언어는 걸러지지 않는다.(그러므로 이것은 그저 표현의 차이로 전락한다.) 물론 세대가 흐르면 해결될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더욱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하는데, 바로 이렇게 한 번 걸러진 단어가 세계의 모순을 의도적으로 은폐하는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정치적이다.) 여성의 정체성 문제는 이름을 고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이 상황에서 이름이 반영하는 것은 표면일 뿐이고, People이 무시하고 있는 Men의 세계가 문제의 진원지임을 잊으면 곤란하다. 

'여성성'은 그녀들의 특성이다. 정확히 말하면 사회가 부여한, 그녀들에게 '어울리는' 특성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위에서 설명했던 '여성'만큼이나 모호한데, '여성'이 '남성'에게서 나왔던 것처럼, '여성성'이라는 개념이 포섭하는 특성들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남성성'에 대한 고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성 개념"이 갖고 있는 한계가 발견된다. 이를테면 '힘, 능동성, 적극성' 등의 속성들을 '남성성'이라는 가방 안에 집어넣으려 발버둥치다 보면 많은 예외를 발견하게 된다. 남성적인 가치를 갖고 있지 않은 수컷들도 많을 뿐더러, 오히려 이런 속성들을 암컷이 갖는 사회 집단 또한 존재한다. 

이렇게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남성성은 여성적이지 않은 것"이고 "여성성은 남성적이지 않은 것"일 뿐이다. 이래서야 정의는 커녕 개념의 존재 자체를 의심할 수 밖에 없다. 남녀가 유별했던 조선시대나 통금이 존재했던 쌍팔년대라면 남성성이나 여성성의 존재 대해 인정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동화 속 임금님의 O라인 몸매가 만천하에 드러난 건 그가 착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마법의 옷을 입었기 때문이고, 우리는 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백성들이 믿었던 것처럼.(결국 그들은 옷의 존재또한 '믿는다.') 그러나 메트로섹슈얼과 하이브리드가 판치는 지금 이 개념들은 쓰레기통에 쳐박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혈액형에 따른 성격만큼이나 쓸모없는 이 개념이 존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물음의 답은 간단하다. "바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바꿀 필요가 없다는 말은 당연히 '바꿀 수 있는 주체'를 가정한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주장을 들이대려 한다. 굳이 형용모순의 남성성을 형용모순의 여성성과 싸우게 만드는 "헤게모니"가 존재한다는 게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헤게모니가 존재한다는 점이 아니라, 그 이전에 여성성의 문제를 '성(性) 밖의 것'으로 해석하려 한다는 점이다. 쓸모 없어진 개념의 틀은 오직 그 뒤에서 문제의 본질을 은폐하려는 자들만이 필요로 할 뿐이다. 

멀리 돌아왔는데, 나는 이 문제에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대립항을 제거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여성의 문제와 억압받는 그녀들의 특징은 근본적으로 권력의 문제이며, 남성과 여성 개념은 그 뒤에서 화살을 피해 숨어 있던 '헤게모니를 쥔 집단'의 존재를 효과적으로 숨기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남성성'이 포섭하는 가치는 사실 '강자의 논리'가 집약된 결과물들 뿐이다. 만약 세상을 쥐락펴락했던 자들이 수동적이고 부드러운 것을 통해 권력을 얻을 수 있었다면 오히려 그것이 '남성성'에 포섭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남성과 '권력을 가진 자들' 은 교집합이 (크게) 존재할 지언정 동일하지는 않다. 모든 남성이 힘을 가진 것은 아니며, 힘을 가진 자들이 모두 남성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들을 보라. 그녀들은 '거시기 안 달린 남성'이다. 이 때의 남성은 XY염색체를 가진 수컷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헤게모니 위에 선 자'를 의미한다.)

'여성성'의 모순은 그 개념적 불순함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여성성이라는 동질성을 기준으로 뭉친 여성 집단이 존재해서 이들이 남성 집단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실은 여성성을 가진 동일한 여성이라는 개념 속에 왜곡되어 기존 체제에 의해 착취당하는 파편적인 '그녀들' 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녀들은 뭉칠 수 없는 개념을 통해 뭉치려 하기 때문에 뭉쳐 있다고 믿을 뿐 뭉치지는 못하며, 싸우되 진정한 적과 싸우지 못하기 때문에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타겟을 찾지 못한 채 자본논리와 정치적 의도에 수시로 휘둘리는 모습이, 그녀와 그녀들의 현실이다.

요즘은 생물학적 성에 근거한 단어인 Men/Women보다 인성적인 측면의 성(=젠더)에 근거한 Male/Female의 사용을 권장하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이 단어마저도 여성(Female)이 남성(Male)에서 분화되었음은 주목할 만 하다. 이는 현재 여성의 위치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예가 아닐까. 그녀들은 존재할 수 없는 '여성으로서의 자신'이 아니라 순수하게 '사회적 소수자'로서 개성과 다원성을 보장 받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 여성성의 강조는 이를 왜곡하는 정치적 수사일 뿐이며, 그녀들은 '여성성'을 버려야 그녀들을 조종하고 있던 진정한 적을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