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모방범을 읽고. 
 상병 김현진 05-05 22:52 | HIT : 149 



 살인은 유희의 과정에 개입할 수 있을까. 아니, "살인은 유희일 수 있을까." 23년간 날 가르친 사회는 ('윤리'의 이름으로)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이런 생각을 금기시하라고 말하지만, 역사는 종종 다른 말을 한다. 노예들이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모습, 살기 위해 서로를 죽여야 하는 검투사의 전투는 로마 시민 최대의 축제였고 마녀사냥이나 혁명기 단두대의 제물 또한 당시 군중들에게 있어 흥미진진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피의 광기'는 오늘날 TV 뉴스로 이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콜로세움과 화형대와 단두대와 뉴스는 역사적인 친족 관계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우리는 TV를 통해 타인의 고통과 슬픔, 존재 위기를 (궁극적으로) 즐긴다.

 그렇다면 '타인의 죽음'은 구경거리가 될 수도 있는 건 아닐까.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존재의 위기'를  실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슬픔이) 공포가 우선되지만 먼 사람의 죽음은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는' 자극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 같으니까.

 우리는 '살인 금기 윤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지금의 사회 체제에 기대어 살고 있다. 그러나 그 윤리가 위태로워 보이는 지금, 만약 그게 무너진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병장 이승일 
 타인의 죽음이 만약 유희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 주는 기쁨의 종류가 어떤 종류인지 먼저 생각해봐야할 것 같습니다. 미국의 모 그룹 콘서트에서는 한 사람이 나와서 권총으로 자살했대요. 그게 공연의 한 부분으로서 계획되어있던 거라고 하더군요. 관객들은 엄청난 충격과 함께 열광했다고 하네요. 故 김선일씨 동영상 같은 경우도 참 인기(?)가 많았죠. 

 타인의 죽음이 주는 기쁨이란 우선 금기에 대한 파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거야 뭐 당연하겠죠. 그 다음엔 일종의 '평형감각' 으로 인한 것이 아닌가 해요. 심리학에서는 우리가 세상을 볼 때 기쁨과 슬픔의 총량이 같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고 말합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있어야하고,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이 있어야하고 등등. 그래서 제물을 바치고 나면 나쁜 일이 사라졌으니깐 좋은일을 기대하게 되고 뭐 그런식으로 설명할 수 있겠죠. 때문에 타인의 죽음은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나의 죽음의 가능성을 낮추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불쾌에 대한 예방주사' 라는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일부러 고통스러운 상황을 미리 생각해봄으로써, 그것이 실제로 닥쳤을 때의 충격을 완화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타인의 죽음에 익숙해짐으로써 나의 죽음이나 내 지인의 죽음이 가져다 줄 허무감, 상실감을 줄이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군요. 그래서 세상의 고통에 대해 자신감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보면, 타인의 죽음에 대해 인간이 느끼는 '긍정적 감정' - 그런게 만약 있다면 - 은 , 사실은 어디까지나 자기 방어적인 것이 아닌가 해요. 금기라는 억압기제로부터의 탈출도, 나 대신 타인을 제물로 삼으려는 심리도, 고통의 예방주사를 맞으려는 심리도 모두 자기 방어적인 마음이지요. 따라서 이것은 어떤 적극적인 기쁨이라기 보다는 삶의 고통과 부조리에 대항하는 한 방식에 불과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런 소극적인 요소들은 결코 승리할 수 없고, 사회를 지배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경계해야할 대상임에는 분명하지만, 두려워해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이러한 경향 속에 내재되어있는 두려움과 나약함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해야하겠죠. 모든 악한 것은 또한 약한 것이니까요. 05-08 * 

 상병 김현진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특히, 타인의 죽음은 아무 근거 없지만 자신의 죽음 가능성을 낮추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는 부분이 인상적이군요. 

 살인 금기 윤리가 무너지면 현재의 사회 또한 무너져 버리겠지요. 다행히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