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사람 (7급 하지연/060106) 
 
 
 
 
후배 K는 똑 소리 나게 일 잘하고 매사에 끊고 맺음이 분명한 후배이다. 

유난히 추운날씨에 따뜻한 점심을 먹고 차를 몰고 신호대기에 서있는데 버스 타는 곳에 감 몇 개와 귤 무더기를 놓고 파는 할머니를 보았다. 
“아유 추운데. 내가 저기 앞에 차 댈 테니까 네가 좀 사와”
“그냥가요 저런데서 판다고 별로 싸지도 않아요 슈퍼에서 사면되는데 뭐 하러 추운데 나가요”
“음... 그럴까”
신호를 받아 출발하면서 백미러로 쳐다보니 할머니는 정말 추운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매정한 것’ 나는 후배를 살짝 흘겨보며 불편한 마음을 달랬다.

사실 내 5년 전의 모습도 별로 다르지 않다.
내가 이 후배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질질 끄는 법 없이 똑 부러지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은 냉철함 때문이다. 흔히 여자들의 직장생활 중 이해할 수 없는 부분 중의 하나가 자기감정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직장인의 본분을 망각한다는 것이다. 나쁘게 말하면 직장생활을 여고 생활의 연장선에 놓고 사춘기 여고생들에게나 있음직한 일련의 행동양식을 보인다는 점이다. 그에 비해 K후배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또 일에 있어서 그 프로패셔널한 면모가 마음에 쏙 들어 흠 잡을 곳이 없었다.
어떤 일에 K후배와 내가 나가야 했던 일이 있었는데 K는 부당하다며 그 일을 거부해서 나 혼자 했던 적도 있는데 나는 K의 배짱에 감탄을 했다. 그래서 K를 만날 때면 나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나이가 들면 바뀌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일단 행동이 느려진다. 생각이 많아서는 아니고 게을러서가 대부분이지만 새해가 되어 열 가지쯤 목표를 세우면 기껏 서 너 개 채우기도 힘이 든다.
그리고 머리 아프게 깊이 생각하는 일을 자제하게 된다. 자의식도 엷어져 논쟁이나 토론에 집중할 수가 없고 가끔 감정조절이 안돼 울컥하기도 하고 별 일 아닌데도 괜히 섭섭해지기도 한다.
(가깝게 주변 어른들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수도 있겠다)
       .  .  .
그리고 다정한 사람이 좋아진다.

누구에게 손해 보는 일도 아닌데 다정한 사람이 된다는 건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다정함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시선을 자기에서 타인으로 돌릴 때 가능해 진다. 다정하다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감안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말하고 싶다. 상냥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은 남에게 싫은 소리 어려운 얘기를 하지 못해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게 되지만 다정함이란 이미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체득하고 극복한 이후에 나타낼 수 있는 감정이라 생각한다. 연인이 다정한 이유는 그 사람의 단점까지도 사랑하기 때문이고 어머니가 자식에게 다정한 것은 남들에게는 미운 뒤통수마저도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다정한 사람에게는 마치 후광처럼 부드러운 아우라가 느껴진다.

독한 사람에게 질책을 당하거나 쓴 소리를 듣게 되면 입술을 앙다물고 독기를 품게 되지만 다정한 이의 한마디는 빗장 문 제풀에 열리듯 스스륵 풀어져 눈물마저 글썽이게 된다.

다정한 사람이란
아침마다 깍듯이 인사하지 않아도 눈 마주치면 따뜻하게 웃어주는 사람. 내 머리위에 앉아 있지만 결코 힘으로 나를 누르지 않는 사람. 내 뒤를 따라오며 흘린 휴지를 주워 무안하지 않게 호주머니에 감추는 사람. 정신없이 바쁠 때 따뜻한 차한잔 저어주며 재미없는 농담을 던지는 사람. 항상 일정한 거리에서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어주는 사람이다. 
대충 틀린 소리해도 시시콜콜 따지지 않고 무안하지 않게 슬쩍 눈감아주는 사람을 보면 내가 먹으려고 꼬불쳐 놓은 사탕 몇 개라도 호주머니에 넣어주고 싶다. 몇 년 전이었다면 명백히 내가 잘못했어도 큰 소리치고 눈감아주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이가 무능해서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때 고마웠습니다’
‘음... 뭐가?’

나는 누구에게 다정한 사람이었던가.

입으로는 염려를 하지만 눈빛에 그 살뜰한 마음을 담았던가.
꽃이 시드는 걸 슬퍼하는 대책 없는 순정을 비웃지는 않았던가.
세 번쯤 틀려서 주눅 들어 새파랗게 질린 후배를 비웃으며 닦달하지는 않았던가.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친구를 모른 척 하지 않고 기어이 놀려먹지 않았던가.
벼랑 끝에 선 사람을 몰아세워 기어이 떨어뜨리지는 않았던가.

이제 똑똑한 사람보다 겸손한 사람이 좋고 재미있는 얘기를 많이 알고 있는 사람보다 재미없는 내 이야기에 환하게 웃어주는 사람이 더 좋다. 밥맛없어도 억지로 같이 먹어주고 좋은 일 보다 나쁜 일에 더 열심히 나서 주는 사람이 미덥다. 불우이웃돕기 바자회에서 사왔다며 천 원짜리 촌스런 색색깔의 양말을 선물이라고 내미는 정 일병의 다정함이 사랑스럽다.

아아 정녕 나는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





병장 한상천 (2006-01-06 17:42:13)  
내가 다정한 사람인지 독한사람인지 알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지연님의 글을 보니 궁금해지는군요  

병장 이가후 (2006-01-06 17:44:22)  
역시 사람은 사람 냄새 나는 사람이 좋습니다.  

상병 이경준 (2006-01-06 17:57:11)  
하지연님의 글이 하나씩 늘어갈때마다 역시 저희와 같은 평범한 두뇌를 가지신 분이란걸 느낍니다.
그리고 왠지 모를친밀감이 더해지네요..: )  

병장 이 혁 (2006-01-06 20:26:13)  
하하 지현님 정말 반해버리겠어요~~. '매정한 것' 흠. 그렇군요(하하하. 그냥 웃음이 나와요 죄송.)
하지만 다정한 사람은 늘 손해보는 걸요.지현님의 글에는 그걸 초월한 사람이라고 했지만요.  

병장 정준화 (2006-01-06 22:19:41)  
저는 다정함이 열등함이 되어버리는 이곳이 싫습니다.  

병장 박민균 (2006-01-07 06:53:05)  
다정함이라. 참으로 그립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짜증이 날때마다 느끼곤 합니다.
내가 왜 이렇게 변했나?
언제부터인가 내 웃음이 어색해 질때 마다 느끼곤 합니다.
내가 왜 이렇게 변했나?

예전에는 다정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다정함과 착함의 차이에서 이리저리 허우적거리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왠지 푸념이 많은 날이네요.  

상병 김희곤 (2006-01-07 09:33:03)  
저도 정녕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군요..  

상병 박 찬 (2006-01-07 16:02:13)  
저도 정준화님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상병 김석윤 (2006-01-08 04:55:43)  
제가 아는 후배 S양도 그러하답니다.. 정말 솔직하고 담백해서 S의 말이라면 그냥 믿어버리고 마는 믿어버리고 싶은 그런 마력의 소유자거든요. 얼마전 휴가 나가서 S와 자립심 강한 여자들에 대한 예찬을 늘어놓으며 한참 수다를 떨었더랬죠.. K를 보니 S가 생각나네요..

각설하고. 
항상 후임들에게 덕을 쌓으라고 강조해요. 계급을 떠나서 밑에 후임들에게 덕을쌓으라고요. 
무엇이 덕이옵니까? 라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막막했었는데
하지연님 글을 읽고 나니 제가 생각했던 그 덕이 '다정한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가 아닐까 싶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병장 김우중 (2006-01-07 09:08:48) 
아, 난 다정한 사람이 아닌가 보다.
쉬우면서도 어려운게 다정한사람이네. 

상병 박상일 (2006-01-08 14:02:38)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이미 다정한 사람이 되있지는 않을까요? 

상병 김정환 (2006-01-08 15:26:45) 
너무 공감가는 글입니다 낮잠자고 일어났는데 이런 좋은 글이 눈에 들어오다니
오늘이 거의 다끝나가지만 참 좋은 일입니다(웃음)  

일병 박진영 (2006-01-09 14:33:54)  
다정한사람 이고 싶은 마음은 저 역시도 그러하니
사람 모두다 다정한 사람이고파 그려러니 노력하면
거참 즐거운 새상이 될 듯 싶습니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병장 박상훈 (2006-01-11 22:47:21)  
제가 어릴적부터 가장 많이 들어온 말중에 하나가 다정하다' 란 말인데, 다정함을 느낄수 있는 존재들은 한정되어있어요.

그러니까 딱 주변인들 말고 모르는이들에게 베풀긴 힘들죠. 베풀어도 그건 친절을 넘어서긴 힘들구요.  

일병 윤제호 (2006-01-15 17:50:15)  
다정한 사람, 내가 말하기 보다는 상대방의 말을 들어줄 줄 아는 사람 
그러면서도 같이 있으면 지루하지 않는 사람 
상대방의 단점이나 잘못을 지적하지 않는 사람
그러면서도 상대방을 자신의 스타일안으로 끌어들일 줄 아는 사람 

제 인생의 목표입니다.   

  
 
 
 
병장 정연범 (2006/01/27 05:21:00)

언제나 따뜻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지만 
마음먹은 만큼 쉽지않은것이 사람인가봐요. 
다정한 사람이 되기란 많은것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생길테니.. 
적어도 무늬만이라도 가식적이지 않은 범위에서 다정한 사람이 되고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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