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롤랑 바르트
>>오랜 만에 어떤 이유에서, 롤랑 바르트를 다시 읽었다. 내가 접한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의 즐거움>을 쓴 롤랑 바르트이다. 초기의 구조주의 기호학 연구와 이에 기초한 신화학 및 이데올로기 비판 작업으로 유명세를 탄 이후, 후기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의 연구가로 혹은 에세이스트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의 후기 작품들은 <텍스트의 즐거움>, <S/Z>, <글쓰기의 영도>, <기호의 제국>과 같은 보다 넓은 의미의 '텍스트의 기호학'이라고 할 수 있는 넓은 연구영역으로 확장되어 간다. 이와 동시에 바르트는 자신을 쾌락주의자이자 유희하는 텍스트의 실천가로 스스로를 위치짓는 것을 즐겨하는 경향이 농후해져 갔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우리는 그것의 '징후적인 성격'을 너무나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러한 방향에서 손 쉬운 득점을 얻기보다는, 바르트 자신이 그러한 '자기PR'을 내세운 내적 원인을 곰곰히 생각해보는 것이 더 생산적일 듯 싶다. <텍스트의 즐거움>에는 사실상 도처에 바르트 자신의 자기PR들이 널려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예문을 통해서 전적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해서 문학은(이제부터 글쓰기라고 부르는 편이 좋을 것이다) 텍스트에 (그리고 텍스트로서의 세계에) 하나의 <비밀>을, 최종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를 거부하면서, 이른바 반신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활동을, 진정으로 혁명적인 그런 활동을 분출시킨다. 왜냐하면 의미를 고정시키기를 거부하는 것은, 결국 신과 그 삼위일체 위격인 이성, 과학, 법칙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절들을 통해 롤랑 바르트를 읽으면서 (바르트와 '동일한' 텍스트에서 '법칙'과 '과학'을 발견한) 프로이트-라캉을 읽은 독자들이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그는 역시나 그다지 엄밀한 사상가 내지는 비평가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가 엄밀하지 않다는 것은 텍스트의 사상가인 그가 정작 '텍스트'라는 개념을 엄밀하게 사유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혹은 그것을 제대로 직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사실 바르트 없이도 우리는 이미 텍스트라는 개념을, 저자와 작품의 위계질서를 가로지르는 익명적 언어적 실천의 유희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말하자면 '텍스트'는 저자에 의해 체험된 삶과 내적 관념들을 담아내는 것으로 간주되는 '작품'과 그것을 기록한 저자와의 일의적, 특권적 관계를 모순에 빠뜨리는 언어적 과잉이다. 바르트는 그러한 자동사적인 언어, 텍스트 속에서는 저자조차도 텍스트를 구성하는 허구적 요소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텍스트는 의사소통에 대한 모든 [진리성, 정당성, 진실성, 이해가능성으로 표현되는 하버마스적인] 수행적 합의와 '코드'Code를 초과하는 지점에서 출현한다. 즉 글쓰기의 과잉된 실천들이 우리가 '읽을 수 있거나', '쓸 수 있다고 가정된 것들에 대한 암묵적 규칙들이 더 이상 '뜻이 통하지 않게 되는' 한계지점에 치달을수록, 우리는 '텍스트'라는 익명적 언어에 더욱 가까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여기에 새로운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혹은 이러한 한계지점이 오늘날에는 역으로 새로운 수행적 규칙의 일부분으로 전도되지 않았는가? 우리는 뜻이 통하지 않는 단편적이고 유희적인 글들이 더욱 더 올바른 '문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나는 이 '새로울 것 없음'을 가라타니 고진에게서 배웠다. "따라서 이로부터 마치 언어의 임의적 차이화가 대상세계를 마음대로 바꿔버린다는 식의 사고가 생겨난다. 이것은 칸트 이후의 관념론이 생겨난 것과 평행한다. 즉 세계를 산출하는 '자기'(피히테)나 '정신'(헤겔)이 출현한다는 식이다. 오늘날에는 그것이 '텍스트'라고 불리고 있다. 이런 사고가 소비사회에서 어떤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가라타니 고진, 역사와 반복 172p)
포스트모더니즘 속의 불만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한국 판타지 문학 지평에서 이미 조우한 바 있다. 최초에 독자들이 직면한 '이영도'라는 고유한 작품들의 신선한 충격은, 점차 그의 '손'에서 떠나 더 이상 이영도라고조차, 혹은 환상문학이라고조차 할 수 없는 기괴한 혼합물[가령 시간 떼우기 용도의 고등학생용 대여점 소설들]로 변형되어 갔다는 사실에 대한 무수한 개탄들을 보라. 나는 이것을 지극히 고유한 한국적 맥락에서, 문단문학 바깥의 종언담론 내지는 '환상문학의 종언'이라고 파악한다. 이것은 내가 새로 만들어낸 어떤 관념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환상문학 1세대의 추억을 간직한 사람들이 흔히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흔히 요새의 판타지 장르라는 표제를 달고 생산되는 텍스트들이, 환상문학의 '획일화'라고, 대량생산 속의 규격화에 불과하다고 개탄하곤 한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획일화이기는 커녕, 분산적인 비획일화된 변용에 더 가깝다. 혹은 오늘날 범용하게 생산되는 환상문학들은 어찌보자면, 발터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로 파악한, 자신의 최초 기원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무표정한 복제물들과 유사한 위상을 차지한다. 결국 바르트가 '텍스트Text'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기원적 아우라가 무감각한 불모적인 모방과 패러디의 실천 속에 내맡겨졌을 때 상실되는, 종언의 역동적 '과정'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한다면, 나는 비-문단 문학의 영역에서, 문단문학의 외부에서, 비권위적인 장르적 문학 공동체 속에서조차,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프로이트적인] <불만>이 존재한다고 파악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불만을 낳는 전도과정 자체는, 즉 문학의 '텍스트화' 과정에는 일차적으로 좋고 나쁨의 문제가 배제되어 있다. 그것은 어찌보면 최초의 주관적 언어적 기획이 망각 속에 빠지고 탈맥락화되어 파탄에 이르는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런데 역으로 그러한 귀결을 막기 위해서라면, 언어적 기획이 주관적인 기획 너머의 '무언가'를 포착해야만 한다면 어쩔 것인가? 그것은 비평가로서 발터 벤야민의 생각이었다. 언어에는 분명 주관성을 초월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은, 칸트에서 라캉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사상적 계보를 통해 고수되는 테제이다. 따라서 우리는 진정으로 프로이트가 말한 <문명 속의 불만>에 준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속의 불만>을 진지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것은 저 낭만적인 탈구축적 사고 속에서 망각되고 있는 '언어-텍스트'(이것은 점차 오늘날 공동체의 전이지점을 떠맡는 대타자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가령 냉소적인 장르 문학 애호자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이야기'에 온전하게 몰입되고 즐거워하는 순진한 독자가 필요하듯이 말이다) 속에 있는 저 불화不和의 핵심으로 뛰어드는 모험을 요구한다. 자크 랑시에르는 바로 그러한 시도를 '문학'에 대한 분석 속에서 감행한다. 하지만 서투른 반-권위주의자들은 아직도, 심지어 자크 랑시에르를 다룰 때조차, 그러한 사실을 직면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롤랑 바르트를 서투른 반-권위주의자라고 매도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반-권위적 태도, 혹은 포스트모던한 태도가 도달하는 아포리아를 명확히 드러낸다.
유사-현상학적 개념으로서 <텍스트> 내지는 <언어게임>
>>텍스트라는 것은, 바르트가 이야기하듯이 저자라는 특권적 심급을 해체하는 한에서 작품을 가로지르는 익명적 상호-텍스트성이자, 수많은 '인용문'들의 임의적 짜임새로 드러난다. 최초에 바르트는 여기에 어떤 주관적 의미부여도 미리 개입될 수 없다는 투로 이야기한다. 다소 현상학적 어조로 돌아가자면, 이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생활에서 원초적으로 드러나는 언어적 [현사학자들이 말하는] '사태'이다. 우리는 발화된 텍스트에 대한 해석적인 기의記意를 의식하지 않으며, 단순히 그것의 결 그대로를 '즐긴다.' "안녕 잘 지내니?"라는 인삿말 정도로도 우리는 충분한 사례를 든 셈이다. 바르트가 말하는 <텍스트의 즐거움>도 그러한 일상적 언어적 사태에 놓인 발화주체의 실존적 연루됨Implication의 태도를 의미할 따름이다. 바르트 자신이 <텍스트의 개념>을 체험 속에서 포착했다고 자신만만하게 공언하는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바르트는 마치 후설-하이데거 류의 현상학 비슷한 태도를 취한다. 바르트의 다음과 같은 보고는 이론적 태도에 선행하는 선반성적인 원초적 체험의 지평에서, 어떻게 하나의 실정화된 이론적 건축물이나 사고물이 솟아오르는지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과 흡사하지 않은가?"
"골짜기 아래에는 급류가 흐른다. 그가 인지하는 것은 이질적이고도 분리된 실체와 전망에서 오는 복수태적인 환원불가능함이다. 빛, 색채, 초목, 열기, 공기, 미세한 소리의 폭발, 새들의 가냘픈 지저귐, 골짜귀 건너편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목소리, 지나가는 소리, 몸짓, 가까이 혹은 멀리 있는 주민들의 옷차림, 이 모든 사건들은 반쯤 알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것은 기존의 약호Code들로부터 온 것이지만 그 배합은 유일하며, 그래서 산책을 차이로서만 반복될 수 있을 뿐인 차이로 설정한다. 텍스트도 마찬가지이다. 텍스트는 그것의 차이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 독서는 일회적인(이것은 텍스트에 대한 모든 연역적-귀납적 과학들을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텍스트의 문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것이지만, 전적으로 인용과 지시물 메아리들로 짜여진다."
바르트의 텍스트라는 개념을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과 같은 개념에 등치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우리가 의식하기도 전에 이미 몰입되어 있는 언어적 맥락의 사태들: 눈-앞에-있음의 이론적 태도(지시, 재현, 화행의 언표기능들에 대한 언어학적 탐구)들은 수 많은 언어게임들 간의 지시연관의 그물망에 사로잡혀 있는 언어적 현존재의 손-안에-있음이라는 원초적 사태의 파생물에 불과하지 않은가?]도 역시나 동일한 현상학적 어조를 체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가 말하는 <텍스트의 즐거움>이니, <글쓰기의 영도>니 하는 것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현상학적인 사태, 내지는 의식지평에 원초적으로 주어지는 생활세계의 우위에 대한 유사한 단언이 아닌가? 그렇다면 롤랑 바르트가 엄밀한 사상가이기를 그치는 지점은, 그가 이러한 <텍스트>라는 본연의 중립적 개념에 (마치 자본에 의해 식민화된 '생활세계'라는 정치적 모티브를 제안한 위르겐 하버마스처럼) 어떤 '해방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말하자면 어느 순간부터 언어적 사태에 대한 중립적인 체험의 범주였던 <텍스트>는 반토대주의적이고, 반권위적이며, 반순응적인 어떤 저항의 가치로 탈바꿈하기 시작한다. 사상가로서 바르트는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진부해지기 시작한다고 해도 좋다. 가령 후일 파시즘과 같은 정치적 파국의 원천으로 드러나게 되는, 프로이트가 말한 <문명 속의 불만>이라는 정서적 전도과정이 생활세계 자체에 이미 내재되어 있다는 통찰로부터 후퇴하는 하버마스가 진부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텍스트 속의 불만
>>그런데 사실 (환상문학에 대한 불만이 환상문학 공동체에서 제기된 것처럼) <텍스트> 자체에 대한 어떤 '전도과정'이 있다고 하면 어찌할 것인가. 사실 텍스트라는 것은, 바르트 자신의 수많은 정의들을 통해 볼 수 있듯이, 그 자체로 정의될수 있는 것이기보다는 부정적 감수성을 통해서만 일별할 수 있는 것이다.(즉 텍스트는 일단 무엇이 아닌가로서만 일별할 수 있다) 일상적으로 소통하고 공감하는 생활세계라는 그 자명한 사태(예를 들어 책마을과 같은)를 지탱하는 것은 가정과 지역공동체의 파멸을 다룬 수많은 장르의 할리웃 영화에서 형상화되었듯이 사실상 부정적 감수성(원한의식, 애매성, 혼란, 방향상실, 모호한 자기파괴적 충동)이 아니냐고 반문한 슬라보예 지젝처럼, 바르트가 텍스트의 (지극히 정신분석적 의미에서의) '향유'Jouissance(고통스러울 정도로까지 과도하게 즐기는 것에 대한 프랑스 단어)라고 말하는 것(동일선상에서 이는 통상적은 텍스트의 즐거움이 극단까지 추구되면서 드러나는 새로운 차원이다)은, 일상적인 혹은 '즐거운' 텍스트의 유희를 지탱하는 바로 이런 부정적 감수성들이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사망 진단서를 받은 한국문단을 지탱하는 것은, 텍스트 자체에 내재해 있는 동일한 '전도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이 지점에서 조영일 씨를 겨누어서 발언하고 싶은데, 나는 동일한 전도과정과 '불만'이 바로 문단 밖에 엄연히 상존하는 것이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문단(문명Civillization)이 존속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단의 외부로 나아간다고 해서 문단문학의 대안이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문명 밖의 야생상태에서 문명의 파괴적 측면이 해결되는 게 아니듯 말이다. 조영일 씨가 파악했듯이, 문단 내지는 민족국가를 묶는 것은 긍정적 감정이기는 커녕 부정적 감정이기 때문이다. 저 문단 바깥에 만연해 있는 부정적 감정들을 보라! 황석영의 입담에서 드러나는 한국문단의 외설적 자기탐닉은 바로 우리의 생활세계의(디씨인사이드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언어적 조건을 사로잡고 있는 도착의 이면에 불과하다.
동시에, 롤랑 바르트의 진부함은 <텍스트>를 한편으로는, 말라르메와 프루스트와 같은 전위적 언어적 실천의 지평에 놓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말라르메와 프루스트를 한가하게 읽는 귀족적인 에세이스트적 취향의 지평에 놓는 데서 발생하는 개념적 긴장을 제대로 직면하지 않는 바르트 자신의 안일함에 응축되어 있지는 않은가? 내가 프로이트의 <문명-속의-불만>을 패러디하여, <텍스트-속의-불만>(바르트는 이를 텍스트의 즐거움을 넘어선 텍스트의 향유라고 부른다)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은, 바로 이 '긴장'에 함축되어 있는 데도 말이다! 텍스트의 즐거움은 텍스트 내부에 만연해 있는 모종의 팽팽한 불만족 내지는 리비도적 긴장감(디씨인사이드 게시판 도처에서 볼 수 있는)에 기초해 있다는 궁극적인 프로이트-라캉적 사태에 대한 통찰은 바르트 자신이 최초로 내비친다. 바르트 자신이 인정하듯이, 점차 오늘날 명백해지는 현상은, 말라르메와 프루스트의 유일무이한 전복적 텍스트들은 점차 희귀해지고 있는 반면, 이런 것들을 일상 속에서 선반성적으로 반추하고 즐기는 텍스트의 즐거움만이 흔해지고 점차 진부해져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르트 자신은 이 긴장감을 '직면'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고 해도 좋다.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라는 것조차, 사실은 자연스럽고 자명한 대상이기는 커녕, 어떤 전도과정에 의해 드러나는 '현대성'의 지평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롤랑 바르트를 읽을 때 우리가 재빨리 캐치해야하는 것은 바로 그런 점이다! 바르트는 말한다 :
"나는 프루스트, 플로베르, 발자크를 읽고 또 읽는 것에 커다란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알렉상드르 뒤마조차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 즐거움이 아무리 생생하고 또 모든 편견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소비의 즐거움이다. 왜냐하면 그 저자들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오늘날 그들처럼 다시 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소간에 서글픈 이 인식은, 그 작품의 멀어짐이 내 현대성을 상정하는 바로 그 순간에, 나를 그 작품의 생산으로부터 분리시키기에 충분하다."
텍스트란 결국 마치 우리의 일상생활의 자연스러운 지평(그리고 이것조차도 얼마나 폭력적이고 불안정한가?)이기는커녕, 프루스트, 플로베르, 발자크 등속이 죽고 난 지평에서야 비로소 '가능한' 현대성이다. 이들을 읽는 텍스트의 즐거움에는 필연적으로 이러한 '불만족'이 내재해 있는것이다.
텍스트와 근대문학의 종언(-지속)
>>그렇다면 롤랑 바르트를 읽게 만드는 그만의 미덕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이 엄밀함이라기보다는 정직함에 있다고 본다. 그 정직함은 말하자면 '기회비용'에 충실할 수 있는 태도이다. 달리 말하자면 바르트는 맹목적 텍스트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면, 더 이상 <작품>에 대해서 혹은 <저자>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문학>의 기획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충실한 것이다. 그래서 그가 최초로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취한 사상가라고까지 말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가 각종 대담에서 분명히 밝히듯이, 오늘날 "발레리와 말라르메 그리고 발자크 플로베르를 쓰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다소 서글픈 어조로 되뇔 때마다, 그는 사실상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직면하기 거부하는 외상적인 사실, 즉 '문학의 비실존'에 대해 매우 정직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닌가? 다시 말해 사람들이 자명한 대상으로서 혹은 장르로서 간주해온 문학이라는 것은, 결국 텍스트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어떤 역사적 합의로서만 존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텍스트라는 무의식적-몰역사적 심급에서 이러한 '합의'를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아주 저속한 사례 하나만을 들자면, 니체의 야심 찬 아포리즘들이 고3수험생의 자기위안적 주문으로 사용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이런 사례는 '생활 속의 인문학'이라는 기획이 얼마나 자살적인 것인지 대강 알려준다. 우리는 같은 것을 문단문학(일상의 공감과 소통을 지향하는 개방된 문단문학)과 더불어 환상문학(전범적 작품의 아우라를 벗고 인터넷 공간에 노출된 환상문학)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바르트의 미덕(정적성)을 바르트에 대한 한국적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수용'에 대한 비판적 준거점으로 삼을 수 있다. 우리는 바르트를 어떤 언어적-문학적 기획이 '끝났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러한 기획(문단문학 바깥의 보편적 한국문학 내지는 세계문학)을 주관적으로-심미적으로 정당화하는 어떤 방편으로 흔히 써먹지 않았는가? 혹은 더 근본적으로, 바르트 자신이야말로 자기 스스로를 그러한 방식으로 전유하고 있는 에세이스트라면 어찌할 것인가? 이러한 바르트적 관행은 정작 순문학 영역에 특히나 만연한 것이어서, 바르트는(바르트적 태도는) 문학적 기획이 어떤 역사적-사회적 요청도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한낱 주관적 실존(문학은 삶이다 기타 등등)을 담보하는 보증인 정도로 여겨지지는 않는가?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회적-역사적 요청에 응답하는 언어적 기획이, 그것이 준가하는 역사적 요청에서 멀어진다면, 물론 소설과 시는 여전히 쓰이고 팔리겠지만, 그것은 '제도적 대상' 내지는 '학적 대상'로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바르트의 표현대로라면 그것은 '작품'도, '저자'도, '문학'도 아닌, '텍스트'로서만 존재한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문학과나 문단과 같은 학적-연구 기관들 및 이에 결부된 생계집단(심지어 이들이 얻는 정당한 이윤마저도 외설적이다)의 존재이유를 내적으로 붕괴시킨다. 바르트는 우선 그것을 명확히 할 줄 알았다. 근대문학이 끝난 이후에도 별 다른 심각성 없이 여전히 존속하는 문예창작과 교수들과 국문학과 그리고 문단은 '데카당스Decadnce' 그 자체인 것이다. 바르트를 소비하기는 쉬워도, 이런 위기의식을 공유하기란 힘들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바르트는 그 자신만의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문학계>의 '즐긴다고 가정된 주체'의 위상을 차지하지 않았는가? 오로지 텍스트만이 가능하다고 하면, 문학계라고 있는 일종의 '공동체'는 사회적 결속(작가와, 평자와, 문학교수와, 작가 지망생과, 독자와, 문예부 기자 기타 등등)의 가장 '느슨한 연결고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문단이 실질적으로 해체된 다음에 남는 것은 해방된 글쓰기 공간이기는커녕, 외설적 자기-향유의 원환고리로 폐쇄된 (오타쿠화된) 이들의 모호한 공동체이리라. 정신분석학이 드러내듯, 이러한 공동체의 결속이 최소한의 '전이'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물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알려주듯, 이 전이는 반드시 어떤 부정적 감정을 지렛대 삼아 작용한다. 우리는 전이의 지점들 중에서, '즐긴다고 가정된 주체'라는, 사실상 '즐거운 나의 집'(공지영 소설의 제목) 내부의 초대받지 못한 섬뜩한 이방인으로서 '즐거움의 너머'에 있는 구성적 타자가 있음을 알고 있다. 정신분석에서는 이를 초자아라고 부른다. 비슷한 연유에서 바르트 자신이 이 '전이' 과정이 얼마나 약하고 불완전한지를 반복해서 말한다. 우리는 전이의 효과를 지탱하는 타자의 보다 '절대적인' 판본을 <기호의 제국>이라는 또 다른 바르트의 후기 저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을 다룬 그 책에서, 바르트는 '즐거움' 속의 긴장감, 결락감, 그리고 간극이라는 여전히 '오이디푸스적인' 서구문명적 지평에서 해방된 기표의 순진무구한 즐거움('그들' 일본인들이 차려놓은 소박한 밥상, 다도 의식, 분재 정원, 하이쿠, 심지어는 격렬한 학내운동의 소요 속에서도 발견되는 무위無爲의 미학)을 발견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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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에 여행을 다녀오면서 롤랑 바르트가 퇴행한, '일본'이라는 궁극적인 포스트모더니즘적 전이지점(사실상 우울증에 걸리지 않고서도 맹목적으로 즐길 수 있는 저 섬뜩한 순진무구성으로서의 타자성이라는 일본의 저 문화적 위상은 매우 오랫동안 반복되어 왔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롱 테이크로 미래 첨단도시의 불가해한 신비로운 정경을 직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솔라리스>의 유명한 숏은 단순히 도쿄의 도심을 달리면서 찍은 것이다)은, 역사적-시대적 소명所名을 상실한 근대문학의, 궁극적으로 언표주체들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우울증적 퇴폐일 것이다. 나는 한국적 상황에서 이를 '90년대 이후의 퇴폐' 혹은 일본화로 보고 싶기도 하다. 감히 이렇게 말해볼 수 있다면, 서태지 이후의 힙합과 락 그리고 대중음악, 김영하 이후의 장르화된 한국문학, 이영도 이후의 고등학생용 대여점 소설, 홍상수 이후의 (홍상수 자신의) 한국영화, NL/PD 논쟁에서 자유로운 학생운동 기타 등등. 이 슬프도록 유명한 사례들은 경직된 사회 분위기를 뚫고 나온 최초의 사회적 분출 이후, 그것들은 소리 소문 없이 오타쿠화-박제화된, 모종의 기적적인 '전이의 효과'(내가 새내기 때 운동권 분위기의 학내조직에 기웃거렸던 것은 단순히 책에서 읽은 68혁명에 대한 동경심 때문이었다) 없이는 존립할 수조차 없는, 창백한 모조물로 변해가지 않았는가?
물론 소명이라는 것을 오늘날 '문자 그대로' 취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명동 거리의 포교자들과 같은) 정신증적인 주체이리라. 그러나 그것은 가라타니 고진이 이야기하듯, 지금-여기의 언어적 지평에 주어져 있는 유일무이한 짜임 그 자체, 단독성의 역사적 지평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흘러간 옛 유행처럼 여길 필요는 없다. 자크 랑시에르조차, 19세기 말 프랑스 문학의 '소명'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히 드러낸다. 우리가, 마치 '텍스트'만이 존재하고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투의, 저 교양 있는 반-권위주의자인 '바르트'를 선택하는 기회비용은, 바로 랑시에르(그는 문학이 '민주주의'라는 당대의 정치적 기획과 필연적으로 결부된 언어적 기획이었음을 단언한다)가 탐구했던 언어적 기획의 지평에 주어져 있는 '소명' 그 자체이다. 물론, 오늘날로서 소명이 무엇인지를 그 자체로 아는 것은, 다시금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 온 저자들과 작품들 그리고 언어를, '공부'하는 것 뿐이다.
우리에게 진실로 흥미롭고 다급한 것은 '텍스트'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