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기록, 명랑한 김강록 씨의 화답입니다. 12 
 
 
 
 



당신이 있어 즐거웠습니다.

강록 씨 앞에서 침묵하는 것이 당신을 가장 적절하게 알아채고 또 표현하는 방법임을 알면서도, 불완전한 소통의 기록을 이곳에 남깁니다. 나는 당신을 좋아했으며 그것은 책마을 회원 대다수가 그러했으리라 믿습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 질문 & 답변





병장 유동선

글에서 느껴지는 자신있는 그 필체

질문 1. 강록님의 당구실력이 궁금합니다 

☞ 입대 전 기준으로 공식 150, 상대에 따라 비공식 200이며, 지수의 염도를 결정하는 기준다마는 서울다마의 표준정규분포standard normal를 따릅니다. 당구는 고1 시절부터 지금껏 쳤지만 기간에 비하면 무지하게 향상이 더디었던 편입니다. 아직 주변 또래 집단에서 당구가 비교적 선진 문물에 속하던 고교 시절에는 제가 당구장으로 끌어들인 이들에게서 제법 '선구자'니 하는 소리도 들었지만 이제는 大영일고등당구스쿨 공채 24기 최프로, 정프로, 신프로 등의 무리─대충 저랑 똑같은 놈들이 몇 명 더 있다거나, 혹은 그보다 더한 놈들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사이에서 최하수로 전락해버린 상태입니다. 여전히 저는 종종 '선구자'라 불립니다만 이제 그건 어디까지나 비꼬는 의미일 뿐입니다. 의미는 사용에 있나니…….

그래도 아직까지 대학 친구들 사이에서는 무시씩이나 당하고 다닐 정도는 아닙니다만, 우정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같은 가치들이 오직 극복의 대상으로서 그 신성을 상실하게 되는, 혹독한 말겐세이가 쉬임없이 오고가는 강호의 특성상 저는 꽤 구박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물론 저도 말겐세이라면 어디 가서 손해는 안보고 다니는 편입니다만, 진정 강철의 당구인인 그들과 함께 엎치락뒤치락 교학상장 환난상겐 초무투전 하면서 저 자신을 단련할 수 있었던 것만은 확연한 사실이며 그것이 저의 소중한 자산임에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2. 혹시 동생을 소개시켜주실 생각은 없으신지.. 

☞ 저희 동생을 진정으로 위해주고 아껴주실 분이 계신다면 저도 대환영입니다만, 사실 저희 동생은 건강이 그리 좋은 편이 못됩니다. 보다 건강해진 몸으로 활기차게 또래 친구들과도 어울려 다니면서 영화도 보고 쇼핑도 하고 여행도 하고 할 수 있게 되는 게─그 와중에 제게도 콩고물이 하나씩 떨어지고─우선이며, 제가 동생에게 다른 사람을 소개시켜준다거나 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그 이후에 생각할 일이 아닐까 합니다. 



병장 송희석 

아직 실력이 검증되지 않은 당구인 

질문 3. 곤돌.푸우등등 유독 책마을에서 별명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실제 학교다니던 시절 별명은 무엇이었나요 

☞ 으음. 일부 별명들이 그 성격상 제 입으로 말하게 되면 대충 몇몇으로 좁혀지는 특정한 무리를 주축으로 하여 反김강록 언론플레이가 준동할 것 같기도 합니다만, 진실은 피해갈 수 없는 법. (음화화화화) 

초등학교 6학년 시절 별명은 '차인표'였습니다. 운동회 때 6학년은 단체로 율동을 맞춰 탈춤을 추었는데, 저는 문방구에서 파는 보편적인 플라스틱 탈 대신에 당시 신드롬의 주인공이었던 차인표 대형 브로마이드에서 얼굴을 오려내 눈을 뚫고 끈을 묶은 수공예 제품을 쓰고 나가 대량생산 문화의 획일적인 감수성이 자라나는 꿈나무들의 요람인 초등학교에까지 침투해 들어오는 것에 맞섰습니다. (그 이외에 이른바 '이쁜 남자'가 주목받는 이 시대의 트렌드를 10년 이상 앞서나가는 진취성 덕분에 얻었던 '강순이'라는 별명이라든지, 철저하게 상투적이며 창의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한심한 작품인 '압록강'이라든지, 뭐 좀 더 거슬러올라가면 유년기 주변 또래 집단의 구강 구조 미성숙으로 기인한 준準 자연사적 별명인 '강냉이' '깡통' 등도 있습니다만 역시 중요한 건 차.인.표.입니다. 음하하하하하)

고교시절은 당구에 입문하면서 이른바 '별명의 르네상스'을 맞이하게 된 시기입니다. 당구와 관련된 여러가지 별명이 있는데, 그걸 하나로 합친 것이 바로 여러분이 지금껏 알고 계시는 축약형의 원안原案이 되는 '풀네임full name'입니다. 저의 풀네임은 '자랑스러운 大영일고등당구스쿨 공채 24기, 폭풍다마 매직시네루 목동의 기데왕 김프로'입니다. 그중 가장 유래가 깊은 것이 '폭풍다마'인데, 이에 호응하였던 이들로는 번개다마, 매직다마, 폭발다마 등의 놈팽이들이 있습니다. 당구와 관련된 별명들은 대개 자칭으로 시작되었으나 제 성격상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저는 자칭으로 시작된 별명도 거의 공공의 동의를 얻어내는 편입니다. (그밖에 저랑 한 친구랑 여자 하나를 놓고 싸웠다는 소문이 난 후 실제로 그 여자분을 확인한 일부 호기심많고 할일없는 놈팽이들에게서─번개다마 포함─'전교에서 제일 눈 낮은 놈'이라는 칭호를 잠시 얻기도 했습니다만, 그런 것들은 지극히 사소한 헤프닝에 불과합니다.)

대학 와서는, 제가 고교시절부터 뿔테 안경을 고집해왔는데 그래서인지 머리가 길었을 때는 성시경, 짧았을 때는 김태우(GOD) 등의 별명을 얻었습니다. 이에 발끈하여 일어서는 분들이 계실 듯 한데 단서를 달자면 성시경은 머리가 길고 지금보다 10㎏ 적었을 때, 김태우는 머리가 짧고 지금보다 10㎏ 적었을 때의 별명입니다. 물론 그렇더라도 통상적으로는 거의 '김프로'로 통칭되었습니다. (그밖에 단지 목동에 산다는 것 외에는 달리 특별한 하등의 의미가 없는 'K. Morx'라든지 역시 마찬가지로 목동에 산다는 것 이외에는 달리 특별한 하등의 이유가 없는 '목동자'라든지, 전혀 저와는 동떨어져 있으며 따라서 음모론으로밖에는 추론할 수 없는 '간신배'라든지, 혹은 특정 지역의 국제분쟁에 대한 저의 입장이 녹아든 특정한 헤어스타일로 인해 '터번머리'라는 풍문도 간혹 었었습니다만 역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군에 와서는, 정말 단언하건대 결코 그 어떤 별명도 어느 하나 얻은 것이 없습니다. 음화화화화화화!


질문 4. 첫질문은 가볍게 하고, 조금 반 진지한 이야기로 넘어가볼까 합니다. 비트겐슈타인과 니체를 좋아한다는것은 이미 글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과 니체는 일반적인 철학서만 봐도 서로 소통이 불가능한 철학자일것입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어!'라고 비트겐슈타인에게 이야기해봤자 비트겐슈타인은 '말할수 없는 것에는 침묵이나 해!'라고 대답할께 뻔하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강록님은 이 두 철학자를 좋아하니 이 견해에 대해 반박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대체 어떤 책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니체와 비트겐슈타인은 둘 다 기존의 철학이 '문법적 착각'(니체), 내지는 '언어의 잘못된 사용으로 비롯된 오해'(비트겐슈타인)의 산물임을 말한다는 점에서 하나입니다. 심지어 알맹이 없이 현학적이기만 한 사조나 경향에 대해 두 사람이 보이는 감정적인─신경질적인─반응까지도, 둘은 의심할 여지없는 하나입니다. 설령 이 두 사람이 그렇게까지 신경질적이진 않았더라고 하더라도, 그 존재론적인 피로감 때문에 저는 일단 신경질적입니다. 


질문 5. 마지막 질문이고, 조금 귀찮은 질문이며, 말도안되는 질문일수 있고, 일반화 오류를 일으키고 있다는점을 미리 밝히며, 질문에 들어갑니다. 보통 여동생을 갖고 있는 오빠의 경우 페미니즘 논쟁에서 유독 여성입장에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물론 누나를 갖고 있는 동생에 경우도 비슷하긴 하지만 말이죠. 그런데, 이런 여동생을 갖고 있는 오빠들이 말은 여성권위에 힘쓰자! 하면서 정작 자신의 여동생한테는 보수적인 여성상을 기대합니다. 

이것은 매우 재미있는 현상이죠. 물론 가족이기 때문에, 걱정이 되서 여동생이 밤늦게 다니는것을 반대할수도 있고, 남자친구를 사귀는것도 자신이 남자이므로 다 늑대라는 착각속에 반대할수도 있고, 기타등등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모든것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자유롭게 내버려둘수도 없는법.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페미니즘을 실현할려면 적어도 자신 스스로가 실현해야 하는데, 자신의 여동생 혹은 누나에 대해 그 어떠한 보수적인 견해를 피력하지 않을수 있을까요 아 전 누나도 없고 여동생도 없기에 진심으로 궁금해 물어보는 바입니다. 좋은 대답을 기대하는 바입니다. 

☞ 이 문제에 대해 제가 내놓을 수 있는 새로운 답은 없습니다. 네, 저야말로 바로 그 여권 신장에 대해 제법 호의적이고 제법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축에 속하는 듯 하면서도 여동생에 대해선 철저히 보수적인 그러한 전형적인 캐릭터입니다. 세상은 험하고 동생은 물 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은지라, 혹 동생이 진학이라든지 또는 여타의 이유로 서울을 벗어나 지방에서 자취생활을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저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만사를 집어치우고 쫓아가서 사감 노릇을 할 요량으로 있습니다. 여기에 논리를 대입하려는 시도는 모독입니다. 학교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데 저만치 보이는 동생의 책가방과 실내화주머니가 바닥에 내팽겨쳐져 있고 주변에 몇몇의 남자아이들이 둘러싸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 동생이 울고 있다면, 그들을 도륙하는 데 있어서 이 마당에 도무지 불필요한 다른 뭔가를 고려하느라 1초라도 지체하는 자체가 기만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동생이 보다 주체적이고 어른스러워졌다는 판단이 서게 되면 개선의 여지가 없지는 않겠습니다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동생이 실제로 주체적이고 어른스러워지는 일과 제가 그렇게 판단하는 일이 어느 정도는 별개의 일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부모 눈에는 자식이 언제까지고 물 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로 보인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 논리는 결국 자승자박적인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만. 제 삶은 바로 그러한 오류 속에 있었습니다. 저는 그냥 그렇게 살아왔고, 거기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기에 요구하시는 새로운 답변은 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상병 김민성 

강록씨에 대한 평  서로 모르는 사이이고, 만난 적도 없는, 먼 발치에서 바라본 사람이지만 충분히 눈부신 분. 기억에 남는 글은, 전부다. 

질문 6. 인간과 세상에 있어 이건 정말 중요하다.라고 생각하시는 가치 10 가지만 알려주세요. 

☞ 여러가지 형태의 답변이 가능한 질문입니다. 자유 평등 박애, 와 같은 추상적 가치를 뜻하는 단어들 몇 개를 나열할 수도 있고, 혹은 여동생, 일기장, 보물상자, 김종서의 노래 tape, 같은 보다 형이하학적인 항목들을 나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질문과는 약간 딴 소리를 하는 이상한 버릇이 있어서 그만. 제가 보기엔 몇 가지 항목을 평면적으로 나열하는 방식보다는 '행복'이라는 하나의 항목에 약간의 토를 다는 형태의 답변이 보다 질문의 의도에 부합할 것 같군요. 제가 생각하는 다른 중요한 가치들이 있더라도 결과적으로 '행복'을 둘러싼 수단적이거나 부수적인 것들이 될테니까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행복한 삶을 원합니다. (그야말로 시중에 널리고 흔해빠진, 그런 시시하고 소박하기만 한 행복을 저는 진정으로 원합니다.) 하지만 행복을 원한다는 것은 제게 무엇이 행복일까, 지금 이 순간에 나는 정말 행복한 걸까, 하는 항시적인 의심의 시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세상은 부, 명예, 여자 등과 같이 행복의 요건을 너무나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늘 의심스럽습니다. 부모가 너는 커서 판검사가 되어라, 의사가 되어라, 하는 말을 할 때 반발심을 느끼게 만드는 힘은 쓸데없는 겉멋이 아니라 진짜 행복을 향한 본능적 감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러한, 누구에게나 있듯이 제게도 있는 그 감각의 촉수를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는 거짓말들에 하나씩 가위표를 그어나가는 것, 그리고 그 거짓말들의 무식하고 맹목적인 폭압에 맞서 싸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제가 행복한 삶을 찾기 위해 걸어갈 평생의 여정이 될 것이며, 또한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제가 사회과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될 것입니다.


질문 7. 최근에 읽은 책중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 안타깝게도 제가 책을 그렇게 다독하는 편은 아니라서 그만. 최근이래봤자 올해 전반기를 통틀어도 얼마 되지 않긴 합니다만, 개중에서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토니 마이어스 作)를 가장 열을 올리며 읽었습니다. 평소 사회과학에 관심이 있으면서 그와 연계하여 정신분석학에 발을 들여놓고 싶으신 분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해드리고 싶은 책입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갖은 포스트모던한 잡동사니들을 공부하면서 먼 길을 돌아가서야 긴가민가 하며 얻을 수 있는 엑기스들을 손 안대고 코 풀듯이 날로 먹을 수 있도록 페이지마다 뚝뚝 떨어뜨려 놓았으므로, 성격이 급하고 공짜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가히 적격입니다. 그리고 참고로 한 마디만 더 하자면 이 책은 Critical Thinkers 시리즈라고 하는 문고의 제 1권인데, 이 문고는 제 좁은 소견이긴 하지만 정말 요새 나오는 것들 중에 동급 최강이니 심심할 때 한번 검색해보시면 유익합니다.


질문 8. 니체에 대한 강록님의 총평을 듣고 싶어요. 

☞ 제가 어찌 감히 니체에 대해서 무려 '총평'씩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가능하다면 그것은 단지 '김강록의 니체'일 뿐……. 따라서 그것이 어디까지나 '김강록의 니체'라는 전제 하에 말씀드리자면, 제가 생각하는 니체의 철학이란 기본적으로 인간 스스로에 대한 긍지와 애정입니다. 태초에 인간이 있었습니다. 인간에게는 위대하고 강인한 면모와 저열하고 나약한 두 가지 면모가 동시에 있었는데, 인간은 어느덧 전자의 것을 '신'의 영역으로 테두리를 긋고서 그 나머지 부분을 '인간'의 영역으로 국한시키게 되었습니다. 즉 니체에게 '신'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빼앗긴 인간의 영역이며, 그것을 되찾아 인간을 본연의 위상으로 복권시키고자 하는 마음의 밑바탕에는 인간을 향한 니체의 무한한 애정이 자리잡고 있다고 봅니다.

니체의 '초인'이 흔히 인간을 극복한 인간 이후의 무엇, 즉 그 이면에는 인간에 대한 비하적 의미가 담긴 것으로 얼핏 이해되기 쉬운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인간이되, 그것은 특정한 조건 속에서만 인간입니다. (푸코의 말을 빌자면 '인간'은 고작 근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탄생하지 않았습니까.) 인간을 인간이 되도록 하는 그 조건이라는 것은 바로 이 시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양식입니다. 그렇다면 '초인'이란 결국 다른 삶, 더 나은 삶은 사는 우리의 미래를 말하는 거겠지요. 따라서 초인을 향한 니체의 열망도 인간이 더욱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애정어린 바람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겁니다. 



병장 유승현 

눈을 즐겁게 만드는 분 

질문 9. 사람이 산다는 것에 대한 의미와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 어려운 질문입니다. 삶은 비탄이고 죽음은 안식이다, 라는 투의 이야기를 예전에는 꽤 즐겨하는 편이었습니다만, 요즘은 그조차도 공허한 구호로 여겨지는군요. 지금 기분으로는─그렇습니다, 기분입니다─그보다는 삶과 죽음이라는 것은 거창하고 심오한 추상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철저하게 적나라한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오히려 그것을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인 과제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를 삶으로부터 소외시킬 수가 있습니다. 삶에 대한 고민은 대개 훌륭한 것이지만, 다짜고짜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발화로 시작되는 일련의 이야기들이 결코 오늘 점심 먹고 무슨 아이스크림을 먹을까라는 질문에 비해 더 가치있는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더운 한낮에 아이스크림을 하나 먹고 서늘한 실내에 누워있는 것이 분명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반면에,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한 고민은 늘 그 실효성이 의심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어느 정도의 고민을 안고서 스스로를 괴롭히며 사는 일이 경험상 불가피다고는 하여도, 그 가운데 만약 우리에게 어떤 고민을 해야 할지를 선택할 권한이 있다면, 저는 저를 보다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고민을 하겠습니다. 철학은 해답을 주는 학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이유는 어떤 문제와 씨름하는 것이 우리에게 보다 적실하게 필요한 일인지를 가르쳐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질문 10. 강록님이 생각하시는 자신의 존재가치는 어떤 것인지 

☞ 한 사람의 가치를 규정하는 것은 지극히 공적인 차원의 문제인지라, 우선은 우리 시대의 가장 객관적 가치라 할 수 있는 당장 과외를 구했을 때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적인 페이, 후에 제가 직장을 구한다고 가정할 때 기대되는 연봉 수준과 같이 수량화된 교환 가치를 참고할 수밖에 없네요.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현님께서 요구하시는 스스로 평가한 자기 가치라는 것에 대해 답변하자면, 그렇더라도 위의 사항을 고려하지 않을 순 없습니다. 어차피 가치란 공적인 것이고, 굳이 그와 구분시키고자 만들어낸 독자적인 가치라는 것도 결국은 동시대가 제시하는 가치에 대한 반발과 투쟁의 산물일테니까요.

저의 가치요. 이 세계는 항상 자신이 가장 우월하고 이상적임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가공의 유토피아입니다. 훗날 제가 벌이고자 하는 어떤 싸움이 성공한다면 저는 그러한 성공에 의해 인정되는 새로운 가치를 누리겠지만, 행여 무기력하게 살다가 끝내 실패한다 해도 그것은 이 세계가 실패한 모델이라는 증거로서의 실패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의 삶은 곧 어떻게든 세상에 대항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을 것이고 저는 따라서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질문 11. 책을 읽는다는 것 그리고 글을 쓴다는 것은 강록님께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인지 이렇게 3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 책을 읽는 이유야 저라고 특별히 다를 게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재미, 시간죽이기, 그밖에 약간의 정보 내지는 지식 습득, 뭐 그런 정형적인 이유들이겠지요. 제가 책읽기를 제법 좋아하고 즐기는 편이긴 하지만 주변에 종종 보이는 책을 정말 많은 읽는 사람들에 비하면 그저 생각날 때 잠깐씩 꺼내보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물론 책읽기를 자신의 삶에 있어서 전면적인 사업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매진하는 것도 분명 멋진 일이라 생각합니다만, 하지만 저의 경우에는 책은 나에게 이러이러한 의미가 있다고까지 결연한 어조로 말할 수 있을 만큼의 수준은 아닙니다.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은, 그저 달리 특별한 취미 생활이 요원한 상태에서 마치 입이 심심할 때 담배를 찾는 것처럼 일종의 습관적인 소일거리라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아니면 뭐, 한창 스트레스를 받을 때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거나 관심을 딴 데로 돌리고 나면 마치 반찬도 없이 꾸역꾸역 맨밥을 먹다가 냉수 한 잔을 마신 듯한 개운함을 느낀다고 말씀드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남는 시간 중에 글 쓰는 시간의 비중이 많은 편이긴 하지만 역시 그렇다고 해서 굳이 의식적으로 뭔가 거창한 이유와 동기를 가지고서 쓰는 건 아닙니다.

……휴, 50번까지 나온 질문을 쭉 훑어봤는데 승현님 질문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뭔가 막연히 대단한 것을 기대하시는 듯한 질문에 덩달아 그에 상응하는 뭔가를 내놓아야 한다는 유혹을 떨쳐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덤으로  질문 12. 진짜로 82년생 이신가요 

☞ 제가 82년생이라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습니다만─동사무소를 비롯하여─저는 굳이 이 문제에 대해 개입하지 않겠습니다. 판단은 결국 여러분의 몫입니다.



병장 고계영

강록씨란 내가 알지 못했던 것을 알고 있는 사람. -당구. 니체. 비트겐슈타인. 여동생. 한 여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 -근영양- 이 정도.. 

질문.13.-니체에 대한 총평은 위의 질문들로 어느 정도 나올 것도 같으니.- 니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분들에게 '니체의 원서'아닌. 강록님만이 알고계신 개론서나 설명서! 정도의 숨겨져 있는 비기의 책이 있으신지. -참고로 고병권님의 '니체, 천개의...','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투라..'를 제외한. 책마을에서 많이 거론되지 않은 서적으로 부탁드립니다.- 

☞ 숨겨진 책은 없습니다. 저도 고병권 씨의 책이 손에 쥔 패의 전부입니다. 제 생각엔 이미 고병권 씨의 책을 읽으셨다면 이제 슬슬 직접 원전을 읽어보셔도 될 것 같은데.


질문. 14. 리장, 촌장 자연계열 양대 산맥의 정파도. 이제는 어느정도 개념잡힌! 사파도 아닌 저의 입장에서 봤을 때. 강록님은 책마을에서 잘 보이시지 않습니다. 책마을에 자주 못 오시는 것인지. 아니면 모니터만 보고 계신것인지. 다른 곳에 계신 것인지. 단순. 인트라넷을 자주 안 하시는 것인지. 지금 이 시간에도 무엇인가를 하고 계실 강록님의 행보가 궁금합니다. 즉, 책마을에 안 계실때는 뭘 하십니까 그리고 자주 못 뵙는 이유는 

☞ 특별한 게 있겠습니까. 일을 하고 있겠죠.


질문 15.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그 차이점은 더 나아가서. 강록님은 자신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 스펠링 차이,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러면 미워하겠죠 (음화화화) 개인적으로 '~란 무엇인가라는 형태의 이른바 플라톤식 접근법을 썩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니체를 좋아한다면 이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그런 근본적인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면에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라는 단어가 대립항을 이루면서 주로 사용되는 어느 정도 구체적인 맥락이 없는 것도 아니므로, 또한 전혀 답할 수 없는 문제도 아닐 겁니다.

사실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나 집단에게 '이기적이다'라고 말하는 일은 그다지 저의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이를테면 생명의 존엄성이 분명 중요한 가치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자를 '살인자'라고 부르는 일이 B급 뉴스거리에 불과한 것과 마찬가지라고나 할까요. 제가 관심을 두는 것은 대체로 넌 이기적이야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며, 그들의 그러한 발화가 어떤 목적과 어떤 기능을 의도하고 있느냐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제가 보기에 '이기주의'란 단어의 용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다고 말할 때의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신화적인 언급입니다. 이때의 이기주의라는 것은 딱히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으며, 워낙 신화적이기에 우리가 함부로 가타부타해선 안될 것 같은 어조를 풍깁니다. 다른 하나는 '이기주의'란 말을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할 때입니다. '개인 이기주의' '집단 이기주의'와 같은 언급이 그 예입니다. 

주목할 점은, 두 가지 용법이 서로 상충되는 의미의 긴장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인간의 본성은 이기심이다라는 식의 발화에서 드러나는 '이기심'의 의미는 그 말이 나오게 된 역사적 배경을 놓고 보건대 오히려 다분히 긍정적으로 고려되고 보편적인 진리로서 권장되던 것입니다. 반면에 '집단 이기주의'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는 이기주의의 의미는 어떻습니까. '이기심'은 이 시대가 권하는 보편적인 진리이자 각 개인이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권리로서 제시되기도 하는 반면에, 또한 이렇게 사회의 공공선에 반하는 부도덕함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와 같은 모순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의 유물과 새롭게 유입된 가치관의 충돌로부터 기인한 우연적이고 과도기적인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이 시대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기적인 욕구의 추구는 오늘날 시민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보편적인 권리로서 간주되곤 합니다. 하지만 실천적 국면에서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환경이 공공선으로서 지지받는 반면에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는 반사회적인 집단 이기주의로 매도 당한다면 그것은 그러한 보편적인 구호가 단지 허공의 메아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의 반증일 것입니다.

이러한 '이기주의'의 이중적인 용법은 누구의 것입니까. 자기 자신들의 욕구는 정당하고 보편적인 것인 반면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인내와 희생을 강요하는 이들은 누구입니까. 역사를 돌이켜 보면, 시민 혁명기 이전의 시민 계급이란 소수의 준準 특권 계급이었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왕과 귀족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면서 비로소 시민 계급의 가치관과 사고 방식까지도 보편적인 이데올로기로 둔갑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시민이란 호칭은 모두의 것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1류 시민과 2, 3류 시민의 차이는 존재합니다. 

누구에게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음을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배타적이고 특권적인 이기주의는 결국 소수의 1류 시민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묵은 원리입니다. 진정으로 모든 이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제각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서로 공존할 수 있는 다른 원리가 필요할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건강한 개인주의'라는 이름을 붙이겠습니다. 결론은 단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서 펼친 전개가 무의미하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거의 다 했습니다.

어느 시기에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오늘날에도 역사는 여전히 미완성인 채로 우리의 손에 넘어왔습니다. 비전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 몫의 역사를 온전히 충실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앞으로 제게 남은 많은 나날들이 제 가족과 친구들, 함께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삶이 지금보다 더욱 행복해지도록 작은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저 또한 그걸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나저나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답변하다간 언제 끝날 지 모르겠군요. 서둘러야 할텐데. 제가 좀 급할수록 나태해지는 성격이라 그만.


질문 16. -사적인- 
어떻게 하면 곤돌푸우와 같은 몸매를 유지할 수 있는 건가요 
절대 강록님의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놀리려는 것이 아닌. 언제나 마른 체형으로 ‘빈티’의 딱지를 늘 붙이고 다니는 저의 이 몸뚱아리를 위한 것이니.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 제 생각엔,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의 마음 속에는 대개 분출하고자 하는 어떤 에너지가 있는데, 그것이 해소되지 못하면 질량-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따라 모두 질량으로 화化하는 모양입니다. 즉 억눌리고 좌절하고 끙끙 앓으며 살아온 지난 몇 년의 시간이 몸매의 비결이라고나 할까요. 보다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폐인'이라는 지극히 뻔한 생활 양식의 산물입니다. 대개 삶이란 어느 정도 고착화되어 있기 마련이기에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든 아니면 그보다 조금 더 확장된 영역이든 혁명적인 사업이며, 그 둘이 결코 온전히 분리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고려해볼 때 저의 몸매는 곧 이 시대의 산물이자 시대의 정신이며, 또한 그 균열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이러한 몸매는 저처럼 몇 년을 쓰레기 같은 몰골로 지내다 보면 자연히 주어지는 것인데, 그다지 권장하고 싶진 않습니다.



병장 조용준 

질문 17. 50으로 시작해도 게임을 1시간 이상 끌어버리는 저같은 당구 둔재(...)에게 해주실 말씀.(웃음) 

☞ 인간은 신과는 달라서 유한성과 불확실성의 동물입니다. 전지전능하고 뭐든지 완벽한 신이 당구를 친다면 아무 재미도 없겠죠. 당구는 맞기도 하고 안맞기도 해야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놀이일텐데요. 즉 당구는 다분히 인간적인, 전적으로 인간을 위한 종목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를 유희의 대상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당구는 위대합니다.

혹시 용준님께서는, 신이 되기 위한 당구를 치려 하진 않으셨습니까. 조금만 욕심을 버리고 인간 본연으로서의 당구를 치고자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신보다도 더욱 위대해질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18. 현재 책마을의 대세가 되어버린 안습대형, 페도형진, 원조용준(...)등의 호칭에 대한 짤막한 의견 부탁드립니다. 뭐어, 이제는 포기해버린지라.(...)

☞ 유감스럽게도 작금의 지극히 조잡한 사태에 반해 저는 지극히 고상하고 독야청청한 사람이기에 딱히 이렇다할 커멘트를 할 필요성을 아직까지는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가 가서 뭐하겠습니까. 물론 저도 가끔 심심한 건 사실입니다만. 으흐흐흐


19. 전역하고선 펼치고 싶으신 포부, 혹은 원대한 망상(!!)에 대해 듣고 싶네요.(땀) 

☞ 특별한 건 없습니다. 일단 여행을 많이 다니고 싶고, 아르바이트와 같은 경험을 많이 쌓고 싶습니다. 물론 제가 하고자 하는 공부도 예전보다 더욱 진지하게 할 거구요. 결국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저는 어쨌든 불가피하게 부지런해져야 합니다. '포부'씩이나 되는 거창한 명칭으로 불릴 만한 계획은, 너무 지나치게 계획적인 삶은 오히려 재미가 없잖아요. 하지만 비록 제가 약간 논다니라고는 해도, 무턱대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사는 편은 아니니 너무 걱정은 마세요. 저는 항상 진실되게 살 겁니다. 그렇게 매순간에 충실하며 진실되게 살다가 이르게 될 그 모든 지점이, 바로 저의 포부이고 꿈입니다.



병장 박진우

김프로. 탁월한 명랑함의 소유자. 

20. 나는 당신이 보운씨에게 이야기했던 애정이론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이고 그에 대한 예시를 듣고싶은데요 

☞ 제 입장에선 '애정 이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염치 이론' 내지 '4가지 이론'(음화화화)이라고 부르는 게 말하고자 하는 의도에 보다 부합할 거라 생각됩니다. 이를테면 이런 거지요. 내가 실제로 진보적이고, 개방적이고, 페미니스트이고, 하는 문제와 나는 진보적이고, 개방적이며, 페미니스트이다라고 자기 입으로 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겁니다. 후자는 한 마디로 염치, 내지는 네 가지가 없는 행태입니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우리는 주변에서 이런 유형의 캐릭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입으로만 진취적인 체 하며 그걸로 자기만족을 얻는 대학생이라는 캐릭터를 말입니다. 그들이 낳는 부작용은, 무시하고 넘겨도 되는 경우도 많지만 또한 심각하고 위험한 경우도 많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을 구절을 빌어 한 마디 하자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마 76)

하지만 이런 식으로만 결론을 내리는 일도 온전히 책임있는 행동은 아닐 겁니다. 그러한 캐릭터들의 발생 요인을 성격이라든지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로 환원시켜버리기에는, 그 수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라면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규율하는 사회의 보편적 조건에 대해서도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지나친 개인 환원주의는 오히려 구조의 문제를 은폐하는 결과를 낳게 될 뿐이니까요. 

즉, 그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행태이되, 그 원인은 개인에게서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의 조건에서도 찾아보아야 한다는 게 저의 결론입니다. 20대의 나이에 한창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의기충천하는 성향에 대해서는 그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적절하게 표출해낼 행위 양식을 이 사회는 충분히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혼란이 시작됩니다. 결국 제가 단서처럼 달아놓은 이 이야기의 뒷부분을 보운님께서 특히 주목하셔서 어떤 '끌어안음'으로 받아들였던 것이 마침내 '애정 이론'이라는 이름으로 향간에 떠돌게 된 것인데, 진우님께서는 이걸 다소 '알콩달콩한' 내용으로 기대하고 계셨던 게 아닌가 합니다. 


21. 강록씨는 문학을 읽으면서도 사회과학적인 분석의 틀을 사용하시는지, 종종 저를 놀라게 하더군요. 문학에 대한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으시면서요. 예를 들면 은희경씨의 비밀과 거짓말이라던가, 박민규씨의 카스테라 같은. 그런 당신의 통찰력은 타고난건지 노력으로 얻어낸 결과인지 책을 어떻게 읽어야 그런 색다른 시각을 얻을수 있는지 궁금합니다요오- 

☞ 저를 대단히 좋게 평가해주셔서 그 점에 대단히 감사를 드립니다만, 실상은 그저 단순히 제가 아직 문학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걸 수도 있습니다. 저도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은 학생입니다. 다만 그러한 와중에도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다면, 저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손에 쥐고 있는 얼마 안되는 패를 가지고서도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그다지 주눅들지 않고 달려들 수 있다는 점에서만큼은 어느 정도 단련된 편이 아닌가 자부하기도 합니다. 저는 문학을 잘 모르고 사회과학에 있어서도 역시 아직 미숙한 편이지만, 은희경의 '비밀과 거짓말'을 읽기 이전에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한 명의 아들이었고 박민규의 '카스테라'를 읽기 이전에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한 명의 자취생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쥐고 있는 패가 무엇인지를 알았고 그것이 대단찮다는 걸 알았지만, 굳이 더 이상 머리를 굴리지 않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내밀고자 했을 뿐입니다.


22. 강록씨의 스크랩에 대한 비밀을 듣고싶어요. 신문 기사도 스크랩 하시는지 궁금하고, 책 문구를 스크랩하면 한 공책에 정리하는지 도 궁금하고... 전 책 문구 스크랩하다가 너무 많이 쌓여서 지금 정리를 포기한 상태거든요. 스크랩을 당하는 문구 또한 어떤 기준에 의해 뽑는지도 궁금하네요. 흐흐. 이정도라면 강록씨에게 뽑아낼건 다 뽑아낼수 있겠군요. 

☞ 이 질문에 관해선 별도의 글을 통해 찾아뵙겠습니다, 라고 짧게 말하고 싶었지만 정말로 그걸 실현시킬 여건이 가능할지에 대해서 다소 회의적이기에 여기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스크랩의 대상은 뭐든 가능합니다. 주된 대상은 일간지이지만, 철학책, 소설, 각종 사회과학도서, 심지어 맥심까지도 단순 물리적인 차원에서의 '스크랩'이라는 행위 양식을 적용시킬 수만 있다면 특별한 범위의 제한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오려내거나 출력한 것들을 위한 바인더를 별도로 가지고 있고, 직접 손으로 베껴적는 건 일기장에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구분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오려서 바인더에 넣기도 하고, 그렇게 바인더에 철해넣으면 될 일을 굳이 베껴적기도 하고. 너무 엄격하게 '자신만의 스크랩 법칙' 같은 걸 설정하여 그 범주 속에 끼워맞추려다 보면 그것이 제 사고를 가두는 틀이 되어버릴 수 있으므로, 정형화된 구분은 의식적으로 가지지 않으려 합니다.

중요한 것은 스크랩의 목적입니다. 신문을 보면 세상 돌아가는 큰 줄기를 알고, 이것저것 유용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고, 하는 등등의 이유도 다분히 긍정적인 것입니다만, 우리는 아직 어리거나 혹은 젊습니다. 우리는 한창 장래에 대한 고민이 많고 자신이 어떤 분야에 관심과 재능이 있는지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는 나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생활기록부 작성과 같은 경험의 누적에 의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는 주로 이런 것을 좋아한다, 라는 답변이 어느 정도 항상 마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게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일까, 하는 의혹으로부터 여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신문 스크랩을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보다 객관적이고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스크랩을 통해서 세계는 둘로 분리됩니다. 내가 택한 세계와, 그렇지 않은 세계. 그것을 얻기 위해서 다른 무엇을 버릴 수 있는 세계와, 다른 무엇을 얻기 위해 그것을 버릴 수 있는 세계. 그것들을 발견해나가면서 우리는 이 시기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작업 중 하나를 보다 용이하게 진척시킬 수 있을 겁니다.


☆23. 그제나저제나 밥은 언제쯤 사주실... 

☞ 음화화화화화! 지구 끝까지 쫓아와 보십쇼. 그럼 사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지구는 둥급니다……. 좋습니다, 만약 지구에 끝이 있다면 그건 물리적인 어떤 지점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으로서의 막다른 골목일 것입니다. 저를 거기까지 몰고 가면 밥을 사줄 것이냐, 하면 글쎄요. 그 정도 궁지에 몰릴 때쯤이면 저는 마치 고양이를 무는 쥐와 같은 각성 상태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무는 일이야, 물론 이미 역사적으로 익히 증명된 현상입니다. 그러니 자,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가 사는 밥을 꼭 먹어야겠습니까. 정 그렇다면,



병장 김동환

언어의 오류크하이들을 항해 큐대를 들고 돌진하는 주황색 체련복의 곤돌프. 

24. 어떤 마음가짐으로 니체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대하고 계신지 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세요. 

☞ 제가 이 질문에 대해서 자신있게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이미 그 내용은 답변을 쭉 작성하는 동안에 자연스럽게 드러나 있을 겁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여기서 동환님께 애써 이러쿵 저러쿵 말해봐야 지극히 궁색한 몸부림에 불과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자신있습니다.


25. 일병때부터 쭈욱 지켜봤지만 유난 강록씨에게서는 사랑얘기를 엿볼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실례지만 실례가 안된다면 스물 다섯 살, 강록씨의 현시점에서 보는 사랑을 간단한 경험과 섞어서 풀어주시면 좋겠습니다. 

☞ 실례지만 실례가 안된다면, 이라니 그런 고급한 어법을. 

저는 이 질문에 대해 별로 대답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연애 이전에 시시한 짝사랑 이야기─가령 몇 년 전에 어떻게 아는 누굴 좋아했었다느니 하는 류의─조차 옳게 가지지 못한 저로서는 궁색한 답변이라도 드릴 게 없습니다. 얼마 전에 혹자는 저를 두고 세상에 사랑은 없다, 는 식의 극단적 회의론자를 연상시킨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결코 그런 극단적 회의론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회의라는 것은 어느 정도 논리적이거나 혹은 존재론적인 고민을 필요로 하는 일인데, 마치 새로 나온 mp3 player 모델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저는 사랑에 대해 이렇다할 idea가 없습니다.

물론 연애는 이 시대의 보편적인 대인관계 양식이고 저는 말씀드렸다시피 극단적인 회의론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학기 초 술자리에서 으레 등장하는 이른바 '엮어 들어가는' 이야기에 늘 따분함을 느꼈고 이쁘장한 여자후배가 당구 가르쳐달라며 살갑게 건내는 말에 순전히 '보다 수준높은 경기'를 목적으로 도망다녔습니다. 이쯤 되면 얼추 제 캐릭터가 보이지 않습니까

사랑을 원한다면 그것은 앉아서 기다릴 일이 아니라 보다 능동적으로 저 자신을 변화시켜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사안이든 거시적인 사안이든 변화는 언제나 혁명적인 문제입니다. 변화를 위해서는 그만한 동기가 있어야 할텐데, 제게는 이제껏 사랑이란 것이 제 삶에 보다 충실할 수 있는 방편이나 혹은 그 목적으로 자리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필요 이상으로 이런저런 잡다한 일들에 얽매여 살아왔거나, 또는 역시 필요 이상으로 답답하게 살아왔기 때문일 겁니다. 


26. 강록씨는 커서 머가 될지(웃음) 전혀 그려지지 않는 분들중 하난데요. 어떤 종류의 일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지 미리 생각해두신게 있다면 살짝 가르쳐주세요. 

☞ 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 나이가 서른이 넘으면 마음대로 살거나 죽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책임져야 할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서른이 넘어서도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면 이는 그러한 책임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고 난 이후의 일입니다. 인생은 다소 불확실하고 절망적인 것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욱 스릴있고 또한 능동적인 편이므로, 저는 너무 섣불리 제 인생을 잘 짜여진 계획표상의 이야기로 묶어두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조하건대 저는 결코 자기 인생을 함부로 방치해두는 부류의 사람은 아닙니다. 인생의 문제는 대개 그것이 자의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최선을 다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최선의 성취는, 동시대의 편의에 의해 만들어진 줄세우기에 불과한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그것이 온전한 행복을 담보해준다고 보지 않습니다. 만약 제 모든 인생을 바칠 만한 어떤 과업이 있다면, 불확실함과 그로 인한 불안함, 유사 낙오자를 바라보는 내외의 시선, 절망감과 무기력함, 그 모든 것들을 짊어진 채로도 저는 확신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저는 지금 제 인생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걸러내기 위해 일종의 실험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그러한 종류의 실험이라는 것은 평생을 걸쳐서 결코 중단되어서는 안될 성질의 것이지만, 젊은 시기에 이미 많은 것들이 결정되곤 하는 주변의 통례상 20대의 반환점을 돌아서는 현 시점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의 한 단계를 일단락지어야 할 현실적인 요구가 있고 제 경우에는 다행히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온전히 자기 몫의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저는 비로소 제가 짊어져야 할 온갖 부수적인 책임들 역시 받아들일 수 있을 텐데, 그 역시 저는 대체로 낙관합니다. 저는 서른을 넘어서도 여전히 살아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거기까지야 좋습니다. 그러니까, 빙 돌리지 말고 구체적으로 뭐해먹고 살 거냐구요. 비밀입니다, 워낙 필살의 아이템이라. 우리 동환이형 약오르지롱. 음화화화화화화



병장 김태경 

보운님 말대로 강철같은 유치함, 재기넘치는 언변, 미확인 당구예찬론자, 곤돌푸우. 

27. 희석씨 표현대로, 비트겐슈타인은 '말할수 없는 것에는 침묵이나 해!'라고 했다죠. 제가 비트겐슈타인에 대해서 잘 몰라서 생긴 의문같기는 한데, 사람이 확실하게 말할수 있는게 얼마나 될까요 

보운님의 빠른 러시가 있더라도 제가 강록씨의 답변을 못볼 확률이 높기 때문에 이만할께요. 그냥 인사 겸 질문이었어요. 

☞ 인간의 감각이 가진 불확실성에 대해서 붙들고 늘어지자면 끝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확실한 것은 없고 오직 사람이 그렇게 믿을 뿐이다'라는 유의 절망을 품게 되는 것─즉 그것을 절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제 생각엔 다소 불필요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어차피 인간의 앎이라는 것은 믿음이라는 양식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가령 나에게는 두 개의 손이 있다라는 사실은, 그저 지극히 단순하고 명백한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놓고서 나는 손이 있다는 걸 안다  나는 손이 있다는 걸 확실히 알지 못하지만 그렇게 믿는다라고 애써 구분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회의란 대개 불분명한 것을 명확하게 하기 위한 일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문제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렇잖아도 고민해야 할 더 중요한 일들이 많습니다. 아무데나 닥치는 대로 달려드는 것은 진짜 철학이 아닙니다. 진정한 철학을 하고 싶다면, 지금 정말로 필요한 고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어느날 밤에도 화롯가에 앉은 데카르트에게 슬램덩크 단행본을 쥐어주었다면 그저 즐거운 하룻밤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제법 똑똑한 척 하고 싶은 중고생들이 일기장에 코기토 에르고 숨─이하로 끄적끄적 애써 작문─참고로 저는 '작문'이라는 단어를 대개 비하의 의미로 사용합니다─하느라 쓸데없이 힘을 빼는 일도 없었겠지요. 



병장 강승민 

강록,책마을의 셀러브리티, 그래서 사생활에 유독 관심을 가지게 되는. 나보다 2살이나 더 나이가 많은,소년, 

28. 저는 사랑말고 가족에 대해서 묻고싶어요. 강록씨에게 가족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말하기 싫으면 돌려서라도 썰을 풀어주셨으면 해요 

☞ 가족에 대해서라면, 그것도 '의미'씩이나 되는 질문에 대해서라면, 저로선 그저 no idea입니다. 제게도 어떤 지향이 있고 그리고 있는 미래상이 있긴 하지만, 그 상상의 풍경 속에 가정은 언제나 없었습니다. 제가 제 삶에 보다 충실하고자 할수록 그것에 대해 저는 적대적인 자세를 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 손에 쥐어져있던 것은 항상 개선보다는 파국의 동기였습니다. 저도 행복한 삶을 원합니다. 하지만 저의 행복과 가족을 연결시키는 방법은 제게 처음부터 주어져있지 않았거나 혹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은 일이었다면 저는 그것에 대해 책임이 없습니다. 그리고 행여 그것이 정녕 배워야 알 수 있는 것이라면, 이는 이미 그것이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닙니까. 저는 모르겠습니다.


29. 또 치사하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요구하지만.. 강록님에게 삶의 변화를 준 사람은 누구예요 그러니깐 이미 육신의 시간이 다해 제사말고는 달리 기억할 방법이 없는 고인들말고 살냄새 풀풀 풍기는 진짜 사람 말이에요. 저는 결국 인간은 인간으로서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거든요. 

☞ 제 삶에 변화를 가져다준 사람은 없습니다. 저의 삶은 늘 고착화되어갈 뿐이었고 따라서 저의 유일한 의지는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 삶의 발목을 잡고 그것을 고착화시킨 사람들을 몇몇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싶진 않습니다.


30.그리고.뭐 요즘 뭐하세요 글도 안쓰시고 흐흐 
요즘 뭐해요~ 

☞ 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습니까. 일합니다, 열심히. 요새는 홍수 때문에 작업하러도 많이 다닙니다. 아무 생각없이 개콘이나 X맨을 보면서 시시덕거리기도 하구요. 다소 멍청해보이는 풍경이지만, 그 모든 근심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는 활동이 제게는 중요합니다.



일병 김지민 

일침. 재치. 늙은이 같으면서도 소년스러운 강록형. 

31. 그 날카로운 재치는 어떻게 발전 시킬 수 있는 겁니까. 수행방법이 따로 있는 건가요 

☞ 그렇게 말씀하시니 쑥스럽습니다. 제게 만약 재치라고 부를 만한 게 있다면 그것은 이 세계에 모욕을 주고자 하는 삐뚤어진 심상의 표현일 겁니다. 따라서 저는 그저 일그러진 웃음을 지을 뿐입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한점의 그늘도 없는 환한 미소를 동경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굳이 수행방법이라고 한다면, 제가 집에서 하는 대화의 90%는 동생과 나누는 대화인데 다시 그 90%는 서로 놀리고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구는 주로 경기 외적 측면에서 전쟁처럼. 그리고 자포자기가 최선의 선택으로 제시되는 몇 가지 여건들 속에서 저는 자폭을 꽤 즐기는 편입니다. 그 외에는 특별한 게 없습니다. 


32. 치열한 투쟁. 그 가운데는 어떤 염원이 있습니까 무엇이 투쟁을 하게 하는 겁니까 단순한 불만족 혹은 체제 변화에의 욕망 어쩌면 오만함 신념 

☞ 그것이 충분히 치열한 모습인지는 모르겠지만, 동기가 있다면 그것은 철저히 사적입니다. 저는 정말이지 시시하고 소박하기만 한 행복, 누구나 당연하다고 여기는 보잘것없는 행복을 진정으로 원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행복은 세계 속에서 주어지기보다는 대개 세계로부터의 이탈을 통해 주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행복을 원하고, 저의 행복은 지금의 이 세계와 함께 하지 못할 것이기에 그래서 싸웁니다.


33. 앞으로의 삶은 차후 20년까지의 계획이 듣고 싶습니다. 

☞ 글쎄요.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은 언제나 곤혹스럽습니다. 세상은 워낙 우연의 요소가 많은 곳이기에, 혹은 저의 지향이 어떤 구체적인 계획상의 항목으로 들어갈 만한 사항들─가령 특정한 직장이라든지 하는─로부터 한발짝 비켜 서있기에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렇게 따지자면 누군들 자기 앞날을 알겠습니까. 하지만 말입니다. 사실 저는 굳이 계획이나 목표와 같은 구호로 스스로를 위안하려 하지 않아도 이미 확신으로 가득한 사람입니다. 앞으로 추호의 흔들림없이 살아갈 자신이 있다면 계획이니 목표니 하는 말로 자신을 다잡으려 하는 시도는 스스로에 대한 모독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제게 주어진 최선의 삶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저 자신을 충분히 믿기에, 스스로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미래의 일은 미래의 선택지로 남겨두려 합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여 그 시험을 통과했을 때, 저는 비로소 온전한 제 자신의 삶에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병장 박원홍 

강록씨- 라고 하니깐 되게 친해 보이네요.하하-에 대한 평이라면. 
아주 예전에 나들이를 갔을 때 였습니다. 바깥에 있는 책마을에 들렀다가 즐겨찾기에 있는 강록씨 홈피를 들렀었죠. 내가 관심을 갖고 읽고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기도 했었고 - 이렇게 말하면 무슨 스토커 같으니깐 - 사실은 즐겨찾기가 되어있는 곳을 들리다가 가게 되었는데. 중요한 것은 메인사진을 봤을때 전혀 '곤돌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학원 선전물에서 볼 수 있는 카리스마 있는 수학선생님에 가까운(허걱)이미지를 느낄수 있었습니다. 거 있잖아요. 45도 각도로 서서 한쪽 손을 내밀고 고개를 살짝 내리 깔아서 날카로운 눈빛을 내뿜는 패기있는 젊은 학원 선생님. 혹시 얼짱 각도인가요(웃음) 글에서 볼 수 있었던 포스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답니다. 마을 사람들이 아무리 곤돌이라 해도 저에게는 씨알도 안먹혀요. 에. 그러니깐 결론은 “강록씨에게서는 '곤돌이'를 넘어서는 그 무언가를 느낄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34.현재 강록씨의 전공은 통계라고 들었습니다. 어디에서 봤는지 모르겠는데 나가시면 통계가 아니라 철학이나 사회과학을 하시겠다는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통계에서 철학, 사회과학이라. 어찌보면 이전에 선택했던 길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길을 선택하시게 된 것 같은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 계기는 없습니다. 단지 현재의 전공이 제게 새로운 계기가 되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35. 하고 싶은 것을 찾고 새로운 길을 선택을 하기 위해서 많은 고민을 하시고 자신을 극복하셨을텐데. 그 고민과 극복에 대해서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 극복할 것은 언제나 자신이 아니라 저를 둘러싼 외부의 세계였습니다. 날 때부터 삶은 전쟁터였고, 전쟁터에서 가용한 고민의 수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제 점점 나이를 먹어가고, 전선의 향방에는 별다른 진전이 없으며, 새로운 삶을 상상할 수 있는 여지는 계속해서 줄어만 갑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거부하고자 하는 저의 욕망은 여전히 제 삶의 원동력이고 저는 그렇게 하여 제게 주어진 유일한 방식의 삶을 사랑합니다. 

답을 찾지 못해서 고민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답이 너무나 빨리 나와서, 당장 답으로서의 기능을 못하는 게 문제였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저는 건너뛸 수 없는 삶의 어떤 과정들─저는 제 삶의 어떤 특이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들은 대개 우리 세대 공통의 체험이었고 저도 또래에 비해 별반 다르지 않은 흔한 청년입니다─을 그저 소일로서밖에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삶의 문제는 그것이 지겹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삶은 몸부림이고 그러한 몸부림이 비록 아름다울지언정, 어느 정도는 맹목적인 춤사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저 견디기 위해서라도 저는 저의 몸부림을 사랑합니다. 아니면, 그것이 충분히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기에 저는 오늘도 꿋꿋이 견뎌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36. 제가 새내기였을 때 기쁨 마음으로 봄을 맞이했고 올해도 역시 부대에서 희망찬 봄을 맞이했습니다. 전역 후에도 여전히 봄은 찾아 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찾아오는 것처럼 보이는 봄도 사실 표면일 뿐이라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는데요, 이렇게 몇 번의 봄을 거치는 와중에 국민 여동생 문근영은 더이상 ‘국민 여동생’이라 부르기 힘든 상황에 처한 것 같습니다. 물론 전국 60만 국군 장병 아저씨들에겐 아직 국민 여동생으로 남아 있을수 있을 시간이 더 남아있겠지만, 쉬지않고 돌아오는 봄 앞에서 우리의 근영양은 약해질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올 봄을 더욱 희망차게 맞이하기 위해 우리 근영양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 그거라면, 근영 양과 마주앉아서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이 내뿜는 하얗고 아름다운 열기를 면전으로 맞으며 단둘이 당사자에게 직접 귀뜸해줄 생각입니다. 으흐흐흐흐흐



병장 김희곤 

제가 책마을을 접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 제가 책마을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 당구와 문근영을 필두로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것만 같은 사람. 그의 이름 목동의 김프로. 

37. 이미 제가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이 나와서 더이상 질문할 무언가가 떠오르지 않는군요.(원홍씨, 여전히 저와 비슷한 당신!) 실천의 영역에 있어서 강록씨는 욕망의 실현이라고 얘기하셨는데요. 그 구체적인 욕망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장래희망이라고 보기는 그렇고 인간 김강록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점적으로 보는 무엇인가 가 궁금하다고 할 수 있겠군요. 어쩌면 강록씨의 존재의 의의를 두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가 될 수도 있겠구요. 사실. 강록씨의 칼럼이 더 보고싶다. 란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어떤 욕망이 아니라 욕망한다는 사실 바로 그 자체입니다. 욕망은 특정한 조건 속에서 비로소 구체화됩니다. 가령, 자본의 욕망은 이윤이고 생물의 욕망은 번식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때로 진리이기도 합니다. 진리는 거짓말이다, 라고 말해도 이 경우에는 소용없습니다. 특정한 조건 상의 인간이라는 전제 하에, 인간의 욕망은 진리입니다.

궁극적이고 원천적인 욕망이란 없습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찾게 되고 배가 고프면 밥을 찾게 되는 법입니다. 욕망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는 성질의 것입니다. 단지 우리는 그 상황에 맞춰 적절한 욕망을 추구할 수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헌데 시대라는 것은,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항상 자신이 배열한 욕망의 위계를 그 속에서 살아가는 구성원들에게 강요합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인간을 위한 보편적인 욕망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결코 보편적일 수 없으므로, 시대의 균열 틈새에서는 항상 소외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는 거창하게 확대하기 이전에 지극히 사적인 저 자신의 문제입니다. 저의 욕망이요. 그건 아마도 이 시대 너머에 있을, 있기를 바라는 무엇이겠지요. 소외를 넘어서, 온전한 저 자신의 삶에 도달하는 것. 하지만 새로운 시대를 기대하기 이전에 지금 이 시점에서도 제가 찾을 수 있는 욕망이 없는 건 아닙니다. 전복, 이 시대를 전복시키는 일이 바로 오늘날 저의 욕망입니다.


38. 문근영을 필두로 송혜교를 비롯하야 강록씨는 세상을 나타내는 무언가에 대해 하나의 아이콘을 제시하곤 했는데요. 지금도 문근영을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생각하시는지. 그렇다면 그런 이유와 아니라면 다른 아이콘과 그 이유를 듣고 싶군요. 개인적으로 현재 책마을의 아이콘은 안습대형과 무라카미 영준씨와 비호감 브라더스 용준씨를 들고 싶군요. 하하. 

☞ 문근영과 관련한 저의 몇몇 언급들이 많은 오해를 샀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의 아이콘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가령 포르노는 강간 당하는 여성의 태도 변화를 통해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식의 강령을 제시한다는 점─아주 먼 옛날에 제가 이곳에 처음 인사를 겸하여 올렸던 글의 제목이 '포르노, 우리들의 시대 정신'이었습니다─에서, 외판원은 이 사람이 지금 내 소중한 시간을 뺏으면서까지 전적으로 자기 용무를 위해 붙들고 늘어져 짜증을 유발하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카탈로그의 물건을 사느냐 마느냐, 심지어 어떤 물건을 사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로 희석시켜버린다는 점에서 이 시대의 정신입니다. 또한 출석부는 어떻습니까. 출석부는 호명하면 호명하는 대로 답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조성하여 출석이라는 강제적 행위를 직접적인 명령보다도 더욱 효과적이고 세련되게 이끌어내며 나아가 학생으로서의 본분이라느니 하는 추상적 개념들을 출석결석의 이항대립 구조 속에 명료하게 가둬놓는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이 시대의 정신입니다. 그밖에도 월드컵, '독도', 스타벅스, 수능, 선거, 크리스마스, 토익토플, 고시생, 등록금 인상, S그룹, 등등 그것이 한 시대의 산물인 이상 그 시대의 특질을 반영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문근영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무조건적인 문근영 예찬론자로 보였다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제가 말하는 '문근영'은 문근영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에 대한 거부감과 문근영이 제공하는 향락 사이에서 주저앉은 일종의 타협적인 코드이며, 따라서 동시에 애증의 코드이기도 합니다. 사실 제 입에서 나오는 문근영에 관한 언급에는 항상 어느 정도의 자포자기와 냉소가 담겨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썩 들어맞는 예는 아닌 것 같지만, 어떤 철학자가 '신의 손' 마라도나에게 신을 부활시킨 20세기 최고의 형이상학자라고 불렀다면, 그게 과연 마라도나에 대한 예찬일까요 아무튼 제가 무슨 열혈 문근영 매니아처럼 여겨지는 분위기는 저로선 늘 갑작스럽고 감당하기 힘듭니다.


39. 사실 오늘 회식을 하고 들어와서 약간을 술기운에 횡설수설 하고 있는데요.(이럴 때 누군가 연락해서 얘기를 하면 참 좋을 것을........) 마지막으로 가벼운 질문을 한다면. 강록씨의 술버릇과 그것의 의의에 대한 강록씨다운 평을 마지막으로 하고 싶군요. 

☞ 저는 단지 많이 마시는 것만을 맹목적으로 숭상하거나, 혹은 술 먹고 행실이 난잡해지는 일이 청춘의 낭만으로 받아들여지는 대학가의 일부 사조를 경멸하는 사람입니다. 술은 항상 마실 만큼만 마시며, 눈에 띄는 술버릇이 없습니다. 그것은 제 주관적인 생각이 아니라 주변의 객관적인 평에 의해 그러합니다. 다만 그러한 객관적인 평에는 종종 '뭔가 있긴 하지만 평소와 별 차이가 없어서 구체적으로 언술하기 힘들다'라는 문장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며 이를 통해 다시 몇 가지 해석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사 윤석호 

김강록씨라.. 시도 곤돌스럽게 쓰고 수필도 곤돌스럽게 쓰고 후기도 곤돌스럽게 쓰고, 하여간 언어로 이루어진 모든것에 독자적인 스타일이 있는 사람. 그리고 분명 2살이나 많음에도 불구하고, 술마시면서도 계속 허둥되서 나름 귀여운면이 있는 사람. 그의 행동을 하나하나 뜯어보시고 그가 이야기 할때 귀를 막고 말하는 자태라던가 술잔을 올리는 자태를 본다면 그의 행동이 하나하나 허둥됨의 연속이라는걸 알수 있지요. 그렇게 허둥되는 모습과 입에서 나오는 촌철살인의 말들이 매치가 안되기는 하지만, 뭐, 나름 느낌이 있으니까 좋아요. 

☞ 그 허둥댐을 '보편적 행위 양식의 무비판적 내면화에 대한 항시적 경계 및 거부 태세'라고 말씀해주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40. 벌써 40번째 질문이네. 록이형 고생 많이 하시겄수다.(허허) 내가 물어보면 무엇을 물어볼거 같아요 저번에 부락에서 한번 물었지만 답변을 받아내지 못해 나름 아쉬웠던 사랑에 대한 질문 아니면 페도형진에게 질문했던 류와 비슷한 개방적인 사회에서 진실한 자신을 유지하며 사는것이 가능하냐는 질문 미안하지만 첫 질문은 당신의 성격은 어떤 성격이냐는 질문입니다. 허허. 싱거우시다구요 이거 싱거운 질문이 아닐텐데.. 그럼 긴장 좀 하게 몇가지 옵션을 덧붙인 초 울트라 파워 업그레이드된 질문을 드리도록 할게요. 아무래도 질문을 받는 사람이 록이형이니까 그 수준에 맞춰주는게 예의 겄지. 
제가 물어보는, 그리고 궁금해하는 성격이란 그냥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록이형의 성격에 대해 물어보는게 아니에요. 보여지는 성격이야 나도 알고, 많은 사람들도 알지. 내가 궁금한건 록이형 내부에서 가공되어진 록이형이 아닌 스스로의 정치적 함의에서 자유로운, 껍데기에서 상당히 자유로워진 자신을 말하는 거에요. '그런거 없고, 보여지는 그대로가 나 자신이다.' 라고 말하신다면 할말은 없지만, 적어도 제 생각에 남들의 언어와 글에서 느껴지는 정치적함의를 경계하시는 분이라면 굉장히 왜곡된 내부를 겉으로 표현하고 있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천천히 생각해 보시고 대답해 주세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써 열린사회에 닫힌 자신을 가지고 사는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결국 중요한 일이 닥치게 되면 내면의 성격이 일을 결정하게 되는 경우가 있고, 그걸 알아야 내가 록이형을 더 잘 알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치명적인 질문이면 'pass'를 외치셔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pass를 외치신다 하여도 다음에 만나면 대답해 주셔야 함을 기억하시고 열심히 탐구해 보세요. 질문 자체가 워낙 힘이 드므로 하나만 물어보도록 할게요. 

☞ 저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기 파악이 비교적 분명한 편입니다. 따라서 답변은 충분히 마련되어 있습니다. 자 우선, '본질적인 나'라는 건 없습니다. 저 또한 넓게 봐서 이 시대와, 그리고 저를 둘러싼 미시적인 특정 조건 상에서 주조된 하나의 결과로서의 인간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질문의 의도를 가장 우려했던 방향으로 벗어나려는 듯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계속 들어봐요. 저도 압니다. 아무리 이데올로기가 자의적이라 해도 사람의 인생은 짧고 따라서 지금 제 삶을 규정하는 조건들은 결국 평생에 걸쳐 거의 절대적인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한 사람의 캐릭터가 어느 정도 고착화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요.

문제는 제가 가진 면모의 일부이되 아직까지 숨겨진 면모가 있다는 것인데, 그러한 면모가 분명 있습니다. 그 부분을 우리는 두 가지 국면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제가 지향하고 있으나 아직 실현되지 못한 것으로서의 제 모습과, 반면에 현재 실현되고 있으나 저의 지향에서 배제된 것으로서의 제 모습. 질문의 의도는 아마 후자를 염두에 둔 것이겠지요. 

하지만 이러한 접근 방식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저를 준準 자연사적인 모습과 인위적인 모습, 이렇게 둘로 나누어 양자를 이항대립의 구조 속에서 대치시키려 한다는 겁니다. 물론 석호씨도 전자만이 온전한 진실이고 본질이며, 후자는 전자에 비하면 그저 얄팍한 위장에 불과하다, 라는 식의 극단적인 뜻으로 말씀하신 건 아닐 겁니다. 하지만 여전히 인위적인 것들은 불완전한 것이며─그것도 딱히 인위적인 것이라기엔 쫌 그렇습니다─마치 먹구름 사이로 몇 줄기의 햇살이 비치듯이 숨겨진─진실된─저의 면모가 종종 틈새로 드러날 것이라는 투의 이야기라는 인상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제 생각은 정반대입니다. 저는 태어날 적부터 제 삶을 규정하는 조건들─가정이라든지, 학생 신분이라든지, 한국 국적의 남성이라든지─에 철저히 발목 잡혀 있었습니다. 저의 지향은 그것들로부터 벗어나 제가 원하는 새로운 삶을 구성해내는 것입니다. 틈새로 비치는 것은 고리타분함과 무기력함이 아니라 발목 잡히고 꽉 막힌 삶을 꿰뚫고 나오는 저의 의지입니다. 반면에 제 삶의 표면을 덮고 있는 것들이야말로 고리타분하고 무기력하며 답답하지요.

그럼 그 고리타분함과 무기력하며 답답한 저의 모습은 어떤 것이냐구요. 저는 경찰공무원인 아버지와 전직 초등교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1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나 유치원부터 초중고를 거쳐 대학에 이르기까지 앞서 서술된 정황상 기대되는 딱 그만큼 구태의연하게 살아왔습니다. 그것이 저의 삶이되, 제가 원하는 삶은 아닙니다. 아니, 제가 거부하는 순간 더 이상 그것 역시 저의 삶은 아니지요.

제가 지금껏 살아온 삶은 제가 그것을 거부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제가 지향하는 삶은 아직 그것이 실현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어느쪽도 온전한 저의 삶이 아닙니다. 오늘의 제 삶은 오히려 그 사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어느쪽도 아닌 삶에 처해 편치 않은 잠자리에서 잠을 자고 편치 않은 밥을 먹으며 편치 않은 교육을 받고 편치 않은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바로 오늘의 제 일상이고 바로 오늘의 제 파토스입니다. 답변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병장 엄보운 

그 역시 가슴에 상처가 있는 사람, 하지만 아름다운 꿈을 품고 따뜻하게 빛나는 청년. 
명랑함 그 자체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일부러 엄숙해지지 않아도 바른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 

세상을 변화시키려 하는 사람을 향해, 넌 네 생활 하나도 네 의지대로 행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일갈을 들려주고 싶을 때가 있어요. 상황에 불평하고 불만어린 시선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한 번 짓궂게 굴어보고 싶은 심보랄까요 
그런데 이게 그냥 그렇게 넘길만한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않은 사람이 어느 누구를 진정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요 우리 너무 염치없는 건 아닐까요 

41. 자기 자신 하나 변화시키지 못하면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 라고 부르짖는 것에 대한 강록씨의 생각을 듣고 싶어요. '스스로의 결벽은 필연적이다.'에 관한 생각이나, 생각 자체의 전제에 대한 공격도 좋아요. 그냥 이것과 관련한 강록씨의 생각이 듣고 싶습니다. 

☞ 자기 자신 하나 변화시키지 못하면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고 부르짖는 것은 이제 거의 하나의 사회적 현상입니다. 이 불구의 시대에, 누군들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말하는 뽄새를 들어보면 대충 '개념'이 있는지 없는지, 'four case'가 있는지 없는지는 어느 정도 나옵니다. 저 역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무려 자격씩이나 물을 처지는 못되지만, 나름대로의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개인적인 결론 비슷한 얘기는 제법 몇 마디 할 수 있을 겁니다.

어디까지나 중요한 것은 논리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름이 아니라 자신이 그것을 진정으로 원하느냐입니다. 논리야 어차피 만들기 나름입니다. 자신의 말재주에 스스로 속아넘어가 그것을 자기 고유의 신념인 양 말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담론은 분명 대단하고 매력적이며 실제로도 어느 정도 힘을 가지고 있는 듯 하지만, 온전히 자기 것이 아닌 담론을 위해 대리전을 치르느라 청춘을 바치는 일은 스스로에게 의미가 없는 행동입니다. 

나중에 시간이 흐르고 나서, 지금껏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한번 평가해봐야만 하는 시점에 이르렀을 적에, 뭐라고 말할 겁니까. 나는 결과야 어쨌든 멋지고 만족스럽게 싸웠다고 할 겁니까. 언젠가 어느 술자리에서 젊어서 스머프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바보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까지 스머프에 빠져 있으면 더욱 바보다라는 포퍼의 말을 근거로 현재 자신이 어떤 만화를 좋아하며 그것은 나의 청춘이 충분히 낭만적이라는 증거다, 라는 투로 한 친구가 제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랑은 이제 같이 안놉니다. (음화화화) 아무튼,

목적이 명확해야 합니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뭔가가 없을지라도 더 나은 세상과 더 나은 삶을 원하는 마음만은 진심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지, 아니면 제법 똑똑한 척 유세하면서 젊은 시절의 낭만을 만끽하고 싶은 건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대의니 뭐니 하는 것들을 따지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 냉철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전자는 비록 때때로 절망적일지라도 제법 아름다울 수 있겠지만 후자는, 당사자가 정 원한다면야 정상을 참작하여 일단은 격려하고 북돋아 주겠지만 계속 그러다가는 저한테 한 대 맞습니다. 메롱.


42. 스스로를 다잡아주는 모습이나 상황이 있나요 다른 사람의 어떤 모습을 보거나 어떤 상황에 처해있을 때의 행동 등을 보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이 어떤 모습이고, 어떤 상황인지가 궁금해요. 그러니깐 그것을 바라보는 강록씨의 시선과 그것을 자기화하는 과정을 듣고 싶네요. 

☞ 그 비슷한 무언가가 있긴 하지만, 스스로를 다잡아주는 것이라고는 말을 못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때때로 상기되는 외부의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제 삶의 지반에 해당하는 항시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자세히 밝히지는 못하겠지만─죄송합니다─제 주변에는 제가 진정으로 아끼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어떤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행복할 수 없도록 만드는 그 모든 사회의 조건들에 대해 저는 어쩔 수 없이 적대적입니다. 그것은 논리와 대의 이전에 저의 지극히 사적인 문제입니다. 


☆43. 너무 질문들이 적나라한 건 아닌지요

☞ No problem. 저는 감히 자부하건대 저는 어떤 질문이 떨어지건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안하고 싶은 말은 안합니다. 


44. 목동 사람들은 그 특유의 어떤 느낌이 있어요. 개인적으로 목동 그룹 내의 여러 계파들을 사랑하는데요. 목동人으로서 목동인들의 특징과 그 매력에 대해 짤막하게 알려주세요. 

☞ 어디까지나 제 경험의 범위 내에서 말해질 수밖에 없는 목동이 과연 '목동'을 대표할 수 있는지 저는 자신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21세기의 대한민국에, 다른 곳도 아니고 수도권 아파트 단지에 '지역 특색'이란 게 있어야 얼마나 있겠습니까. 공동체 자체의 성립 여부가 의심스러운 가운데 과연 '목동인'이란 말이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피상적으로 접근할 수 밖에 없는데, 일단 목동은 전국적으로 봐도 굉장히 교육열이 높고, 또 대표적인 중산층 주거지역 중의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앞 문장에서 서술한 정황상 대충 그려지는 그림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는 형태의 삶을 살고 있는 듯 합니다. 어쨌든, 그것이 어떤 형태가 되었건 사람들은 주어진 만큼, 주어진 개선의 여지만큼 각자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꼭 정감과 활력이 넘치며 굉장히 특색있는 도시라고는 말 못할 이 아파트촌에서 어떻게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과 소소한 즐거움들을 함께 나눌 수 있었던 걸까요. 우리가 처한 공동의 아름다움과 공동의 추함에 대해 함께 공유할 수만 있다면, 사람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나름의 행복을 일구며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꽉 막힌 아파트 단지의 네모반듯한 놀이터라 할지라도 아이들은 거기서 천진난만하게 뛰어놀며─적어도 저는 그랬습니다─어머니들은 그것이 비록 아이들 성적과 학원비에 관한 이야기이일지언정 함께 모여 담소를 나누곤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목동 사람들은 철저한 도시적 생활 속에서도 작은 행복을 찾으며 사는 데 어느 정도 단련된 사람들이 아닌가 합니다. 

  
 
 
 
 병장 김동환 (20060804 124907)

당최. 
내가 어떻게 형이됩니까.(부들부들)    
 
 
상병 김청하 (20060804 125404)

옷, 드디어!! (선리플 후감상)   
 
 
병장 이영기 (20060804 131357)

동환형, 그럼 말까도 되우 (영기 82)    
 
 
병장 고계영 (20060804 134815)

완.전. 길.어!!! 이 텍스트의 압박 스크롤 바는 안보고 중간정도 읽었더니만. 왜 이렇게 안 끝나 했는데.. 
완전 좋습니다!! 강록님의 문체와 이 성심성의 껏 적은 답변들!! 사.랑.해.요. 김강록!    
 
 
 병장 김동환 (20060804 134912)

영기씨, 말 편하게 하라고 이미 3년전에 얘기한 것으로 아는데.(먼산..)    
 
 
 병장 노지훈 (20060804 153210)

길다.(좋아하는 잡지를 하나 산 느낌으로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