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결정 
 병장 임정우 01-05 19:16 | HIT : 140 



 어릴적 부터 눈이 온다면 마냥 좋았다. 그래서 눈이 오는 날이면 아침 댓바람부터 뛰쳐 나가 놀았었다. 친구들과 함께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었다. 지금은 장갑끼고도 잠깐이면 손시리다며 엄살을 부리지만 그 때는 맨손으로 잘도 눈을 뭉치곤 했다. 머리의 핏기가 조금쯤 가셨을 때에는 눈을 밟는걸 좋아했다. 길바닥에 깔린, 목화솜으로 만든 듯한 복스러운 눈이불을 밟으면 소리가 들린다. 뽀드득 뽀드득!거리는, 이 소리는 정말로 좋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어느 누구도 걷지 않았던 판판한 눈밭을 거니는게 특히나 좋다. 그래서 눈이 오는 날에는 일부러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로 찾아다니는 편이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 눈은 더렵혀지고 얼고 녹음을 반복하면서 구질거리고 미끌거리게 되어 종국에는 녹고 마르겠지만, 그런 순환의 과정마저 너무나 순리적이어서 때로는 감동마저 느껴지는 것이다. 물론 최근에서는 이 녀석들을 쓸고 밀고 퍼내는 것에 진저리를 느낄 때도 있지만, 여전히 나에게 흰 눈은 어린 시절과 현재의 순결함을 엮어주는 부드러운 실타래와 같은 존재이다.

 어제는 올 겨울들어 첫눈이 내렸다. 크지도 그렇게 작지도 않는 포근한 눈송이가 떨어졌다. 날씨는 꽤나 썰렁했지만, 왠지 신이나서 이래저래 말도 많아지고 돌아다니는 걸음수도 빈번했었다. 그러다 그것도 지쳐서 가만히 서서 눈이 내리는걸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활짝 펴서 떨어지는 눈송이를 받아들였다. 검은 장갑위로 눈송이가 떨어졌다. 갑자기 어릴적 탐구생활에서 그렸던 눈의 결정이 떠올라 눈송이를 자세히 보았다. 가까이서 차분하게, 시야에서 머리속으로, 머리속에서 가슴으로 눈의 결정을 완성시켰다. 조화를 뜻하는 육각모양과 그 각으로 부터 뻣어나간 얼음가지들. 자연이 만들어낸 놀라움과 경이로움은 내가 느끼는 신비롭다는 감정마저 조롱하고 기만하였지만, 그것마저 어찌나 고맙던지, 그저 한동안 마냥 바라 보는 것 이외의 다른 방도가 없었다. 마치 그것이 태초부터 그러해야만 했던 것처럼.

 눈은 대강 정리가 되었고, 어느덧 세상엔 어둠이 내려 왔다. 어쩌다가 나는 그리워하는 친구와 오랜만에 연락이 되어서 기분이 격양되었는데 바로 그 순간에 아침에 보았던 눈의 결정이 떠올랐다. 그 경이로운 육각의 결정체가, 그 조화로움에서 뻣어나가는 투명한 인연의 가지들이, 그리고 그 가지들이 얽혀서 만드는 순백의 아름다운 평야가. 그것은 언젠간 더럽혀지고 얼고 녹음을 반복하면서 구질거리고 미끌거리게 되어 종국에는 녹고 마를테지만, 또 다시 순환하여 새로이 하늘로 향하고 추위에 저항하여 육각 결정을 이루고 인연의 가지를 뻣대고 얽히어 결국엔 이 세상으로 몰락할 것이다. 아, 인연은 춥다. 한없이 경이롭고 끝없이 회귀한다. 그리하여 활짝핀 내 손, 검은 장갑위로 떨어 졌다. 귀에선 뽀드득 소리가 들린다.



 상병 조윤호 
 정우씨가 쓴 글 중에 가장 따뜻하게 느껴져요. 01-05   

 병장 김효진 
 제목만 보고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을 생각해버렸... 01-08   

 병장 임정우 
 효진// 모르는 것. 책? 영화? 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