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해 빗자루를 드는가? 
 병장 이승일 05-26 15:15 | HIT : 417 






 벌써 2년 전의 이야기이다. 그토록 기다리던 첫 후임병이 소대 트럭을 타고 도착했다. 

" 필승!"

 최말단의 막내생활이 드디어 끝났음을 알려주는 경쾌한 외침이었다. 어떤 경례소리가 이토록 멋질 수 있을까? 나는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하던 일을 계속 했다. 평소에 하기 싫어 죽겠던 일들이 너무나 쉽고 재미있었다. 마치 내 피부에 반중력장치라도 달아놓은 듯, 몸을 움직이는데에는 아무런 힘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기쁨에 찬물을 끼얹는 자들이 있었으니 당연하게도 나의 고참들이었다. 

" 분명히 말하는데, 너 후임한테 잘해주지 말아라. 쟤가 못하면 니가 욕먹는다. 알았냐?"

' 훗. 자기가 뭔데 남의 정신상태까지 지배하려드는가? 내가 욕먹는다고? 마음대로 혼내시지. 난 너희들과 다르거든.' 
 이것이 나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반응이었다. 핵심은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 는 것이었다. 나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 나는 너희들이 하던대로 하지 않을 것이고, 설사 나에게 불이익이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후임에게 친절을 배풀 것이다. 그로 인해 후임이 나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순전히 내가 부덕한 탓이지, '친절' 자체가 잘못된 전략이어서가 아니다. 날 너희 따위와 똑같이 생각하지 말아라. 너희는 시간이 지나면 생각이 변한다고 말하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결코 너희와 같지 않다.'
 이후 나는 정말로 가능한 최대한의 '친절' 을 배풀었다.(고 생각한다.) 후임의 일을 대신 해주고, 고참들로부터 보호해주었다. 그로 인해 그는 나를 가볍게 생각하고, '쉬운 고참' 으로 생각하게 되었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나의 사회적 능력이 부족하여 생긴 부작용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 후임이 들어와도 나는 마찬가지 방식으로 대했다. 나의 행동으로 빚어지는 모든 개인적인 불이익이 이 체계에 순응하는 것보다는 훨씬 견딜만 했다.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이 불합리한 체제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나는 자유로운 개인이었고, 누군가가 나의 목숨을 빼앗아갈 수는 있을지언정, 나의 정신적 자유를 빼앗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병장이 되고 나서도 거의 동일했다. 나는 병장이 되어서까지 이러한 생각을 유지한 나 자신이 고마웠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문득 이 '자유로운 정신' 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 나는 왜 이 체제에 저항하는가? 나는 왜 빗자루를 들었는가? 그것은 물론 이 체제가 정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가? 오히려 그것은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 않는가? 나는 내 정신의 자유를 증명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내가 저들과 다름을 증명하기 위해 저항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나는 이 모든 것이 나의 교만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착하거나 선해서 후임들에게 잘 해준 것이 아니었다. 내 마음 속에 사랑이 가득하거나 계몽적 의식을 갖고 있어서 폭력을 행사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단지 교만했을 뿐이었다. 내가 사랑한 것은 후임들이 아니라 나 자신, 혹은 나 자신의 이상(ideology)이었던 것이다. 후임들이 나의 '친절' 에 그다지 고마워하지 않은 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들을 정말로 사랑한 적이 없었으며 단지 내 자신이 추구하는 무언가를 위해 그들을 이용했을 따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처음에는 '꼽창' 으로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후임들과 정말로 친하게 지내는 여러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은 처음엔 이 체제에 완전히 순응하는 듯 보였다. 이 꼽창들은 내가 경멸해 마지 않았던 체제의 노예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처럼 교만하지 않았다. 그들은 후임들을 진심으로 대할 줄 알았다. '민주'니, '자유' 니 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마음으로 대할 줄 알았다. 그들은 결국 후임과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게 되었고, 내가 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한 방식으로 이 체제를 극복해냈다. 그들은 이데올로기니 자유니 체제니 이딴 말도 안되는 것들을 알지 못했지만, 마음으로 그것을 이겨냈다. 나는 요란하게 무언가 하는 척 했지만, 그들은 조용히 그러나 정말로 해냈다. 

 내 후임 중에는 나와 같은 태도를 가진 애가 있다. 공교롭게도 나의 대학교 후배이다. 타 부서에도 비슷한 아이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대체로 소위 상위권 대학 출신들이다. 이들의 행동 패턴은 놀랄만큼 유사하다. 군대라는 체제에 대해 엄청난 반감을 느끼며, 그것에 아무 의문 없이 순응하는 아이들을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라고 여긴다. 그리고 후임들에게 최대한의 친절을 배풀며, 고참이 된 이후에도 일하려고 노력한다. 이 모든 것이 작지만 훌륭한 사회적 실천이라고 믿으면서.
 그러나 이들의 노력 뒤에 놓여 있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람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교만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들은 사람보다 논리를, 어떤 이념을 더 사랑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사회적 의식이나 지적인 차원에서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것이었다. 나를 포함한 이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 이렇게 함으로써 설사 이 체제가 바뀌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 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일종의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최초의 출발이 교만함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자기만족 만으로도 무언가를 '달성' 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초라한 종류의 인간들인가? 우리는 지성인이라기 보다는, 단지 약간 아픈 환자가 아닌가?  

 이러한 나의 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후임이 있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설사 그렇더라도, 가만히 앉아있는 것보다는 뭔가 하는게 나은 것 아닙니까? 설사 동기가 잘못되었더라도 그 결과가 좋으면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로 결과가 '좋은지' 조차 확실하지는 않다. 우선 나, 그리고 나와 비슷한 유형의 후임들이 추구한 변화를 살펴보면 '최대한의 평등 & 최소한의 부당한 권력' 에 그 핵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때의 평등은 평생동안 개인의 사회적 지위가 거의 고정된 외부 사회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군대의 모든 개인은 잠재적 이병이자 일병이자 상병이자 병장이다.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이 모든 과정을 거쳐간다. 게다가 (공군의 경우) 병장>상병>일병>이병  순으로 기간이 길기 때문에, 병장들의 복지 수준이 모든 장병의 복지에 있어서 가장 큰 가중치를 차지한다. 모든 (공군)병은 (0.33병장 + 0.25상병 + 0.22 일병 + 0.18 이병) 인 것이다. 때문에 전체적으로 평등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병사들의 실질적인 이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에 더 가깝다.
 어쨌거나 병사 사회는 점점 평등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러나 이 겉보기 평등은 병사들을 예전보다 훨씬 더 광부들에게 속박되도록 만들고 있다. (사실 이것이 이 변화의 목적이다.) 예전에는 군 생활의 반절 정도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머지는 여유롭게 보낼 수 있었지만, 점점 더 온 군생활을 스트레스 속에서 보내야하게끔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고참병이라는 작은 권력에 저항했지만, 실제로 그것이 해체된 자리에는 광부라는, 더 크고 단단한 권력이 들어왔다. 

 교만함에서 나온 실천은 결코 칭찬받을만한 것이 아니다. 그 실천이 설사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게다가 내가 보기에는 '좋은 결과' 라는 것도 환상에 불과하다. 대체 누구에게 더 좋게 되었는가? 누구를 위한 저항인가? 우리 모두는 단지 0.33병장 + 0.25상병 + 0.22 일병 + 0.18 이병 일 뿐인데 말이다. 진정한 개혁은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해서는 안된다. 이데올로기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구체적인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비롯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로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은 요란하게 주장하거나 외치지 않으면서도 부조리와 불합리를 극복해낸다. 그들은 마치 체제에 동화되는 듯 하다가도 그 내부로부터 진정한 변화를 만들어 나간다. 그리고 그 변화는 투쟁이나 저항을 통해서 표출되지 않는다. 그들은 적을 파괴시키려는 것도 아니고, 동등한 민주시민으로 만들려는 것도 아니며, 단지 친구로 만들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유일한 승리자이다. 
 나는 오늘도 빗자루를 들며 열심히 청소하는 병장 분들을 뭐라고 비판할 자격이 없다.비판은 오히려 내가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딱 한가지만 진심으로 생각해보길 권한다. 과연 누구를 위해 빗자루를 들고 있는지 말이다.  




 상병 박수영 
 하하. 잘 읽었습니다. 뭔가 아래에 써놓은 제 글이 부끄러워지는군요. 그러나 '사랑'이라는 것은 참으로 오묘한 것 같습니다. 써놓으신 대로 '사랑'이 있고 '애정'이 있어 그들과 친구가 된다면 그 이상으로 좋은 것은 없겠지요. 그러나 조직은 한명이 아니기에 두명이있고 세명이 있어 그리고 40명이 있다면, 과연 그 모두를 진정으로 사랑하여 친구로 만드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요? 

 이것은 마치 제가 첫 여자친구랑 대판 싸워서 헤어진 과정이랑 비슷하군요(씁쓸). 저는 성인의 경지에 오르지 않는 이상에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굳게 믿고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제가 삭막한 사람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로서는 40명이 있다면 그 중의 5명조차 제대로 사랑할 자신이 없습니다. 설령 저 자신이 40명을 사랑할 수 있다하더라도 그 40명의 대상은 저마다 복잡한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을 것이고, 서로 적대적인 관계의 누군가를 서로 동등하게 사랑하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애초에 사랑의 동등함이라는 명제 부터가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할말은 없습니다.) 그리하여 누군가에게 더 많은 애정이 가고 그 댓가로 누군가에게 배타적이 된다면 전 차라리 '교만'함으로라도 잘해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그래요 (우울) 05-26   

 상병 박수영 
 위대하고 진정한 사랑만이 모든것을 가능하게 하겠지만... Love each other or perish. 
 과연 누가 위대하고 진정한 사랑의 경지에 도달할수 있을까.. 05-26   

 병장 양각산 
.. 흠없는 인간성을 지니지 못한 사람이 타인에게 배푸는 관심이나 사랑은 그 순작용 만큼의 반작용을 동반하지 않나 싶습니다. 완전한 이타적 사랑의 모델로 칭송되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도 가끔은 지나친 집착이나 기대로 그 대상에 악영향을 주기도 하는 걸요. 제가 겪은 후임에 대한 인간적 사랑이 가득한 선임들도 그들의 마음이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때론 받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도 하더라구요. 지나친 간섭이나 나름의 기준에 어긋났다는 이유로 행해지는 갈굼.. 그후엔, 자기딴에는 뒤끝없이 담배 한댈 피거나, 과자 부스러기라도 사주면서 푼다고 생각하는 듯 했지만, 앞에선 헤헤 거리던 후임들은, 뒤에선 전혀 다른 소릴 하더군요. 전역하는 날 하나같이 울면서 위병소를 나서던 그들을 희한한 놈 다본다, 는 눈빛으로 배웅하던 모습이 생생하네요. 
 결론은, 차라리 좀 건조한 게 좋다, 입니다. 그게 요즘의 후임들이 바라는 모습이기도 하구요. 
 또 한가지, 이곳 궁대라는 곳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행위들중에 가장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전쟁' 이라는 사태의 대응을 위해 준비된 조직인 만큼, 그 조직을 운동케 하는 부분의 핵심은 비합리와 비이성의 속성을 지닐수 밖에, 아니 지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 이제 승일님 오기 전에 도망가자. 05-26   

 병장 황성규 
 오늘, 다시 내가 빗자루를 드는건 역시 자기만족이자, 자기기만이겠지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권력에 근접하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해져요. 결국 이 작은 세계는 커녕 나조차 변하지 않았으니까요. 문득, 용서 받지 못한 자라는 영화가 떠오르네요. 05-26   

 상병 박준연 
 얼마전 나누었던 얘기와 내용은 틀리지만 논지는 비슷하지 않나 싶네요. 
 잘 읽었습니다. 05-26   

 병장 이승현 
 교만이나 자기만족 내지는 메시아 컴플랙스라도.. 그렇게 하는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맞으니까요. 05-26   

 병장 김청하 
 아래 답글에서처럼 승일 씨의 글에는 많은 부분 공감하며, 동의합니다. 

 다만 사랑이 진정한 변화를 이뤄내는 힘이라는 말씀에는 동의하기 힘들군요. 순수한 선의에서 비롯된 일들이라고 해도 많은 경우 그것들은 도리어 시스템의 모순을 희석시키고 결과적으로 강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를테면 기부나 자선사업과 같은 것이죠.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사랑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빗자루를 들고서도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각산/ 또 한 가지, 에 대한 얘긴데요. 전쟁을 결정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 하에서 전쟁 결정을 내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현대 사회에서는요. 실제로 원숭이 행정부에서도 이라크전 이전에 전쟁이 자국에 가져올 이익과 손실에 대해 면밀하게 검토했을 거구요. 더구나 군대는 어떤 목적을 수행하기에는 다른 어떤 조직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합리적인 체계를 갖고 있죠. 그렇다면 이건 이성과 합리성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가치 판단의 차이가 아닐까요? 05-27   

 병장 김청하 
 아, 그런데 0.33병장 + 0.25상병 + 0.22 일병 + 0.18 이병을 모두 더하면 0.98이 되는군요. 통계적 오차가 아니라면, 공군은 0.98 군인이라는 뜻인가요? (허망) 05-27   

 병장 양각산 
 청하/ 제가 이야기한 전쟁의 비합리,비이성성이란 의미는, 인명과 가시적, 비가시적 의미의 문명을 위시한 인간의 이성과 합리의 산물들을 파괴하는 전쟁의 속성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길고 긴 조립공정을 지나와 완성된 한대의 덤프트럭이 별안 전속력으로 후진해 생산라인을 부수는 형국이랄까요. 덤프트럭이 일으킬 수 있는 가장 골통스런 행동은 달리 없겠죠. 
 그리고 제가 경험한 궁대는 청하님이 느끼시는 것과는 조금은 달랐답니다. (음..) 작금의 여러 상황(경제적, 문화적, 기타 등등..)에서 이루어 질 수 있는 최선이 현재 우리 궁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어쨋든 저 또한 이런 제 판단이 개인적 오판이거나, 근무지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길 바란답니다.(웃음) 05-27   

 상병 정찬용 
 실패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후임과의 감정공유, 대화가 없으셨겠죠. 전 후임들과 항상 그런 대화들을 나눴었습니다. 최대한 평등하게 일을 나누는 것. 또 그것이 가져다 주는 큰 즐거움. 그래서 반이상 성공한것 같습니다. 저와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혼자서 끙끙대면 변화시키고 싶어도 그럴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손바닥도 맞아야 소리가 나지요. 후임에게 아무리 혼자서 잘해준다고 해도 전체적인 분위기가 싸하면 뭔가 이뤄질리가 없습니다. 이해가 필요합니다. 

 제 경우엔, 어느덧 대대원 중 3~4명정도만 제외하고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최대한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자 노력하면서. 자유롭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05-27   

 상병 정찬용 
 이승일 병장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실패의 원인을 본인에서 찾으신다음 자학하는것 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교만이라면, 틀렸다면, 세상은 더없이 상막한 곳이 되겠죠. 아닙니다. 그게 안되는 원인은, 대화의 부재, 이해가 없는 실천에 있습니다. 후임들과 마음을 터놓은 대화를 나누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러한 분위기를 만들어서 진심을 들어보신적 있으십니까? 궁금합니다. 그래도 안된다면, 모르겠네요. 후후 제 후임들이 너무 좋은 사람들인지도요. 

 조금 흥분한것 같군요.. 후.. 전 이문제에 관해, 너무나 많은 고민을 했었습니다. 먼저 전역한 사람들 중에는 제 얘기 듣고 뻘짓거리 하지 말라고 비웃고 나간 사람도 있었으니까요. 안된다고. 그래서 불과 몇달 전까지 정말 마음고생 많이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에요. 전 절 비웃은 그를 향해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옳지요? 라고 말입니다. 05-27   

 일병 장현철 
 갑자기 요즘의 변화가 무섭게 느껴지는군요. 특히 글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더 그렇게 느낍니다. 05-27   

 일병 정영목 
" 체제 순응자"도 교만한 건 매한가지죠. 다른 사람의 행위를 '뻘짓'이라고 오만하게 정의하니까요. 피차 똑같은 상태니 '우리도' 좀 교만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하) 

 다만, 스스로 조심하는 건 괜찮겠지요. 자기 반성은 자기 발전의 시작이니까요. 05-27   

 상병 조진 
 으흠.가지로--> 05-28   

 병장 안준석 
 우리는 지성인이라기 보다는, 단지 약간 아픈 환자가 아닌가? 

good 05-28   

 상병 박수영 
 사실. 전 하늘을 날기 위해 빗자루를 듭니다. 

 괜찮아 단지 오늘은 날지 못했을뿐. 05-28   

 상병 이기중 
0.98 이 나오는 이유는 소수점 이하 두자리에서 버림을 했기 때문이겠지요.(웃음) 

 꼽창질을 하는 사람이나, 하지 않는 사람이나, 겉으로는 쉽게 나눌 수 있는 두 개의 그룹에도 내부에는 수많은 차이가 있을겁니다. 후임을 정말 사랑해서 꼽창질을 할 수도 있고, 후임을 전혀 갈구지 않지만 또한 전혀 신경쓰지 않는 사람도 있고. 물론 그 반대의 경우들도 있구요. 
 어쩌면 이것은 인간관계에 대한 관점 혹은 선호의 차이일 수도 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개인주의적이고 드라이한 인간관계에 익숙치 않고, 심지어 그것을 무조건 악으로 보는 경향도 있어서 끈적한 인간관계를 최고로 치지만, 그런 관계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죠. 개인주의화가 나쁘기만 하다는 생각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갈구면서 친해지는 방법에 익숙치 않은 저같은 사람들에겐 승일님이 말한 '그들'의 승리가 별로 와닿지 않네요. 특히나 그 친해지는 방법이 수많은 부작용들을 만들어 냈던 것을 생각하면 말이죠. 
 어찌보면 '그들'도 나름의 판단에 따라 후임을 위하는 방식으로 살고 있는거고, 그게 꼭 빗자루를 드는 사람의 방식에 비해 교만하지 않다고 볼 수는 없을거 같아요. '그들'은 후임을 사랑할 줄 아는데 나는 이념에 따라 행동한다는 생각이 또다른 교만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상명하복과 일사불란함이 생명인 군대라는 집단의 특성과 개인주의가 절대 상극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세계 최고의 국방력을 자랑하는 미국 군대만큼 개인주의가 심한 군대가 없다죠. 이건 사족입니다. 05-28   

 병장 김지민 
 교만 없는 선의를 찾으려고 하면 할 수록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같은 이치라고 생각해요. 넨장, 복잡할 거 뭐 있나요. 인생 단순하게 살면 가장 속편하죠. 05-28   

 상병 양호경 
 거창한 사랑 보다는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존중 정도가 답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 내가 밥을 살터어니, 넌 차를 사" 라는 말처럼, 서로 일을 나눠하도 어느 정도는 정도 차이가 생기는 것이고, 크게 힘든 일이 아니고 '귀찮은'정도라면 병장의 기득권을 이해한다 치지만.. 

 땀을 뻘뻘흘리는 한 이등병과, 생활관에 누워 있어 허리가 아픈 병장의 모습은 상호 비인격적이라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일 뿐만 아니라 소위 "막말"하는 사적제재 측면에서도 "주어진 일"을 위해서는 어느정도 규율이 필요한 것이겠지만 계급의 모순은 그런 "일"이라는 정당화를 통해 자신의 감정까지도 그 상대에서 배설해 버리는 것이 문제겠지요.. 

 계급이 아니라 우선 인간으로 먼저 봐라..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군대도 그렇지만, 한국사회도 세계도 온당치 못한 행태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나라는 음식쓰레기 처리에 골머리를 앓고, 어떤 나라는 음식물이 없어서 골머리를 앓고.. 

 누구는 생계를 위해 고민하는데, 누구는 소외와 착취를 위해 고민하는 상황.. 

 웃기죠..멋진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