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러 가기 전에 올리고 갑니다.(후다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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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놀림 




1. 예전에 개그콘서트의 거의 메인케릭터나 다름없었던 박준형씨를 보면서 씁쓸함을 느꼈던 적이 있다. 초기에는 무갈기 스킬로 시청자들을 웃겼으나, 그의 장기는 그게 다였다. 그가 새로 선보이는 개그는 자신을 메인으로 코너에 내세운 다음에 자기 후배들을 불러내 후배들의 개그를 소개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나중에는 후배들을 ‘놀리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여타 개그맨의 몸개그나 개인기에 의한 개그, 자기혐오식 개그는 그에게 없었다. 딱 한번 오지헌, 정종철과 얼굴로 웃기는 개그를 선보이기는 했으나, 그 코너에서 마저도 오지헌과 정종철의 외모를 공격하며 웃기는(가끔 자기 얼굴 비하로 웃기기도 했다.) 방식으로 마무리를 지어버렸다. 씁쓸했다. 그의 개그는. 




2. 놀리는 것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기분을 나쁘게 하기 위한 놀림과 웃음을 선사하기 위한 놀림. 그 두 가지 극과극의 놀림 사이에서의 줄타기는 아슬아슬하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놀림은, 놀림을 당하는 대상은 기분이 나쁘나, 대다수에게 웃음을 주는 메커니즘으로 되어있다. ‘한명의 희생, 다수의 행복’이랄까.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놀리는 사람은 놀릴 때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놀림을 당하는 사람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기 때문에 기분은 나쁠지라도, 놀리는 사람이 어느 정도 선만 지켜준다면 화를 낼 수가 없다. 씁쓸한 웃음을 지을 뿐이다. 만약 그 상황에서 화를 낸다면, 그 놀림 때문에 화기애애해진 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 될 것이고,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가 당황하게 될 것이므로. 




3. 그렇다면 놀리는 이와 놀림을 당하는 이는 완벽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란 말인가. 

그.럴.수.도.있.고.아.닐.수.도.있.다. 




4. 놀림이 폭력으로 받아들여지느냐 개그로 받아들여지느냐 에는 놀리는 사람의 목적보다는 행동에 기초한다. 목적도 중요하긴 하지만, 놀림을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놀리는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볼 수 없으므로 그 사람의 목적을 그저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반면에 놀리는 사람의 ‘행동’은 눈으로 보이기 때문에 놀림을 당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행동으로 목적을 추측하게 된다.(그 추측이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건 ‘놀리는 사람의 행동’이라 함은 ‘놀릴 때의 행동’이 아니라, ‘놀린 후의 행동’이라는 것. 




5. 가해자는 다른 사람을 놀리는 순간만큼은 자신의 방어기제를 해제시켜야 한다. 놀림의 목적이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놀림을 당한 상대방도 놀린 이를 공격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한다. 반격을 할지 안할지는 반격의 기회를 가진 이의 선택이다. 이전에 공격을 가했던 이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꼭 준비를 할 필요는 없다.) 마음의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 의도하지 않게 놀림으로 인해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는 상대방이 공격할 수 있는 공간을 비워두어야 한다. 




6. 실컷 상대방을 놀려놓고 방어 메커니즘(‘나는 놀리지마’)을 바로 발동시켜버리는 이의 놀림 행위는 그야 말로 폭력이다. 자신은 놀림으로 인해 나도 웃고 다른 사람들도 웃었으니 성공한 개그라고 기뻐할 것이지만, 거기서 그대로 그 현상 자체를 끝내고 방어적인 모습으로 돌아가 버린다면 상대방은 뭐가 된단 말인가. ‘나는 실컷 놀렸으나 너는 나를 놀리면 안 된다‘는 생각 자체가 이기적인 생각이며 상대방을 깔아뭉개서 내 밑에 두겠다는 것 아닌가. 놀림을 당했던 이가 놀렸던 이에게 반격기를 가했을 때, 방어막을 형성(정색한다던가 하는 행위들)해 버린다면 놀림을 당한 이는 두 배로 마음이 상한다. 이미 반격기를 가하는 행위 자체가 ’조금 기분이 상했으니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이야아아앗!‘ 이라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며 그 상태에서 날린 하이킥이 막힌다면 더더욱 화가 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7. 놀림을 받은 이가 최고로 기분이 상할 때는 반격기를 가했는데, 상대방이 방어기제를 발동시키면서 자신에게 다시 반격기를 가할 때이다. 대략 이런 경우이다. 

가해자 : 야, 너 어떻게 그런 얼굴을 들고 거리를 다닐 수가 있냐?(선제공격) 

(‘하하하’ 하고 주변 사람들이 웃는다.) 

피해자 : 그래도 너보단 나아.(반격기) 

가해자 : (0.5초 정도 정색 후) 나랑 너를 비교한거야?(방어메커니즘 발동) 거울을 봐 거울을.. 어디 감히.(방어메커니즘+반격기) 




8. 반격기의 사용여부는 자존심의 문제이다. 왠지 저 사람이 나를 깔아뭉개려고 놀린 것 같으면 나도 저 사람을 조금 놀려줘야 마음이 풀린다. 저 사람이 나에게 어퍼컷을 가했을 때 그냥 맞아주면 자존심이 상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내가 상대방에게 반격 펀치를 날린다고 해서 내가 맞은 자리가 덜 욱신거린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저 기분이 조금 풀릴 뿐이다. 어디까지나 자존심의 문제이다. 




9. 그래서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놀릴 때 조심해야 한다. 자기는 실컷 놀려놓고 상대방이 반격을 가하면 강한 자존심에 의한 방어메커니즘이 작용해 상대방을 더 눌러버리려는 심리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자기가 먼저 놀릴 때부터 자기의 자존심은 상대방의 자존심에 비해 우위에 있다. 문제는 직접 맞아보지 않은 사람은 그 아픔을 모른다는 것이다. 반격기가 날아오게 되고 그것을 그냥 맞아주면 왠지 내 자존심이 피해를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군! 하면서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지는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반격을 안 하면 왠지 내가 진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에 한대 더 날린다. 




10. 놀림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Give 가 아니라 Give&Take 가 되어야 한다. 정말 잘 놀리면서 분위기를 띄우는 사람은 놀림 받을 때도 효과적으로 잘 받는다. 타격이 그리 크지는 않지만 ‘으윽!’하면서 크게 소리를 질러준다거나, 살짝 얼굴을 뒤로 빼면서 맞기는 맞되 타격은 약하게 받는 식으로. 




11. 후임 한명이 나를 ‘인격모독죄’로 고소했을 때 ‘저는 그냥 조금 놀린 것뿐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으려면 놀릴 때 자신도 마음의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 

자기가 놀렸는데, 후임이 받아쳤을 경우를 가정해보자. 그 상황에서 가장 강한 방어메커니즘인 ‘짬 방어 메커니즘’을 발동시킨다면, 그래서 이제 상대방이 반격을 할 수 없게 사전에 막아버린다면 그때부터 그건 놀림이 아니라 일종의 폭력으로 변질한다. 그 경우에 놀림을 당하는 대상은 말 그대로 ‘인격모독’을 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게 된다. 후임이 받아치는 게 싫다면, 계급 상하가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놀리지 마라. 폭력을 휘두르지 마라. 




12. 김제동의 놀림 받아치기는 그야말로 일품이다. 그는 항상 먼저 공격받는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기분 나쁘지 않은 듯 받아들인 다음에 자연스럽게 받아친다. 혹은 자연스럽게 흡수한다. 어떤 식으로든 그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게 되고 서로 기분 나쁜 일이 생기지 않는다. ‘말로는 도저히 김제동을 못 이기겠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유재석은 ‘놀림‘을 가지고 논다. 상대방의 펀치가 약할 경우 일부러 아픈 척 하면서 뒹구르르 굴러준다. 덕분에 사람들은 크게 웃는다. 상대방의 펀치가 강할 경우는 웃으면서 살짝 받아쳐준다. 싸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웃음으로 넘기는 그의 센스는 가히 최고이다. 

강호동은 유재석, 김제동과는 다른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사실 초반에는 강호동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상대방을 ‘놀린’다음에 방어메커니즘을 바로 발동시키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깡패 같았다. 하지만 요즘의 모습은 다르다. 요즘의 그는 먼저 공격하는 대신에 공격 후 자신을 무방비 상태로 방치시킨다. 상대방이 공격할 여지를 아주 많이 열어 놓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두 배의 웃음을 선사한다.(그의 행동의 변화에는 신정환이 가장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신정환은 강호동이 방어를 하든 말든 시종일관 공격해댔다...) 




13. 놀림의 메커니즘을 깨달은 후부터 박준형의 개그는 씁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놀리는 개그’는 재미있는 개그가 될 수 있다. 만약 훤칠하게 잘생기고 결점이 없는 남자가 오종헌, 정종철을 놀린다면 웃길까? 웃음 뒤에 오종헌, 정종철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모두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박준형씨는 상대방을 놀리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열어놓는다. 그는 허점투성이이다. 방어메커니즘을 발동하지 않는다. 가끔씩 같이 망가져 주기도 한다. 

그가 가끔 오는 반격기에 받아치는 것은 방어메커니즘이 아니다.(정색을 안 하지 않는가?) 더 웃긴 개그를 위한 메커니즘일 뿐이며, Give-Take-Give-Take-Give-Take 반복구조이다. 그래서 그는 정종철, 오지헌과 친하게 지낼 수 있다. 

그렇기에 그의 ‘놀리는 개그‘ 씁쓸한 개그가 아니라 진정 웃긴 개그가 될 수 있다. 




2007. 12. 4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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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놀림  추천 : 5, 조회 :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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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병장 최강  
 와우 이런 소재로 이런 수준의 글을 쓰시다니

하하하

잘 봤씁니다.
2007-12-06 11:47:17 | ipaddress : 20.50.1.207  
03|병장 최강  
 가지로~~ 책 가지로~~ 고고

후임이 11번 완전 캐공감이래요~
2007-12-06 11:48:02 | ipaddress : 20.50.1.207  
02|상병 김진석  
 가지로.!!
군에서의 놀림이 참. 공감됩니다.
재미로 놀리는 선임에 후임이 맞받아치지 못함은
역시 놀림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죠!!
궁극의 우주방어스킬 짬 방어메커니즘앞에 무너지는 나약한 후임,,
겉으로는.. 웃지만,, 웃는게 웃는게 아닌,,(엉엉)
2007-12-06 12:17:32 | ipaddress : 22.38.5.210  
03|병장 김상열  
 가지로 안됩니다!!!!(울음)
다시 읽어보고 있는데, 문장이 매끄럽지 않아서.. 
한번만 봐주세요.
2007-12-06 12:43:14 | ipaddress : 52.2.8.232  
01|병장 정경준  
 가지로.

예~전부터 누군가를 놀리면서 얻게 되는 다수의 웃음에 대해 가끔 생각해보곤 했는데, 이렇게 다른 분의 글로 읽으니 정리가 훨씬 빠르네요. 전 생각만 했을 뿐 글로 이렇게까지 정리가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는데.
잘 읽었습니다.(웃음)
2007-12-06 13:19:16 | ipaddress : 52.2.6.178  
02|6급 하지연  
 자폭도 있습니다. 저는 저를 놀림으로서 남도 같이 놀립니다.
예를 들면 이런식입니다.
'요즘은 눈밑에 이 자글자글한 주름때문에 거울 보기가 싫어'
'하하...'
'너도 웃을 처지는 아닐텐데...' 

 

2007-12-06 16:59:26 | ipaddress : 52.1.4.101  
02|병장 구본성  
 잘 읽었습니다. 엠씨들에게 그런 면이 있었군요. 

2007-12-06 17:28:48 | ipaddress : 5.12.1.199  
03|병장 김상열  
 최강님, 진석님// 우리나라 100대 민요중에 하나인(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짬타령'은 민요 치고는 꽤나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지요. 금지곡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 신나는 리듬과 멜로디가 중독성이 있어 가끔씩 저도 셉떳곤 합니다.
지연님// 앗, 그건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공격패턴이 다양해지는 방법 아닙니까.(웃음)
             '요즘은 눈밑에 이 자글자글한 주름때문에 거울 보기가 싫어'라고 나왔을때
             '하하, 아니야 너 주름 별로 없는데 뭐' 가 제일 잘 받아치는 것일까요?
2007-12-06 19:56:35 | ipaddress : 52.2.8.232  
03|병장 이재웅  
 이거 이해가 잘되는데요?
놀린다는 것에 대한 분류를 이렇게나 정확하게 해주시다니

2007-12-07 02:03:02 | ipaddress : 18.78.1.246  
  
 대단하십니다,,
2007-12-07 10:39:54 | ipaddress : 18.77.1.123  
  
 아, 이제야 보았습니다.

지금 제가 상열씨의 글에 언급된 것들에 한참 맛들려 있다지요.
저희(무리)들은 놀림을 '이빨'로 동치시켜 '이빨'이란 언어로 사용하고 있답니다.

놀림을 하는 행위자를 '이빨 깐다.'

이빨 공격을 당해 피해자가 반격을 했으나, 가해자가 방어기제를 작동시켜 반격기를 사용 피해자에게 다시 피해를 줄 때 '역시 xx의 이빨엔 안된다.' 라는 표현을 씁니다.

지금 제가 자주 피해자가 되는 것은 사실이나, 가해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모의상황까지 연습하고 있답니다.(웃음)

2007-12-11 10:01:58 | ipaddress : 54.1.35.179  
02|병장 정찬용  
 아. 글 감사합니다.

우리는 아무런 생각 없이 일상 생활 속에서 누군가를 놀리고, 단체로 깔보며, 그것을 웃음거리로 삼는 것이 일상화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12~13 의 경우처럼 항상 싸움없는 경우만 있었으면 좋을텐데요.
2007-12-15 21:03:32 | ipaddress : 54.2.2.223  
03|병장 박상엽  
 김상열 병장님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생활에서 소재를 찾아내고 글로 풀어내는 능력이 상당하시군요.


2008-01-03 14:07:06 | ipaddress : 18.2.1.225  
04|상병 이태형  
 멋지십니다.
역시 세상엔 잘난 사람이 너무 많군요!
저도 글연습이나..
2008-02-11 12:07:39 | ipaddress : 18.33.9.102  
02|상병 이현승  
 마음속에 있는, 감추어진 뒷공간을 공격당한 느낌입니다.. 날카롭고 신선하군요.
2008-02-15 19:06:36 | ipaddress : 56.7.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