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송의 풍경 
 병장 김지민 04-04 10:47 | HIT : 170 






 저기, 저기에 풍경화 하나가 있다. 고목을 그려놓은 풍경화처럼 딱딱하게 시들어가는 질감의 풍경화가 버티고 있다. 붐비는 이 곳, 신림역 지하철 6번 출구 계단에 풍경화가 놓여져있다. 발걸음들 지나치며 알아주지 않는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꾸벅꾸벅 졸듯이 자신의 존재감을 전혀 뽐내지 않고 가만히 있다. 마치 시들시들해진 고목이 그러하듯이. 다만 늙다리 세월의 깊이감만이 자리하듯이. 아니, 고목이라기 보다는 노송이 맞을 것이다. 그래, 주글주글하고 말라 비틀어진 노송이다. 노송의 풍경화이다. 고동색이 되다 못해 차라리 거무죽죽한 노송의 풍경.

 풍경은 계단에 앉아있었다. 

"처음 봤을 땐, 그냥, 그런 줄 알았어요. 원래 그 자리에 있었고, 원래 부터 가만히 있었기 때문에 전혀 수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었죠. 저는 미처 그런 줄 몰랐어요"
S 대 '이'모양의 풍경화에 대한 진술이다.

 그렇다, 노송의 풍경은 어느 날 갑자기 큰 이슈가 되었다. 경찰차가 왔고, 조사가 이루어졌다. 지하철 관계자들이 진술을 했고, 6번 출구를 자주 지나다니는 몇몇 대학생들 역시 진술을 했다. 아니, 사건에 대한 진술이라기 보다는 인터뷰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 오랜 세월동안 무엇을 그렇게 빨아 잡쉈수. 말라 비틀어지며 꼬부라 지며 오래오래 살아서 이파리는 파들파들해지고 수맥은 울퉁불퉁 드러나 추악해지도록, 썩은 내 나도록 대체 왜 그렇게 무엇을 빨아 잡쉈수. 당당한 소나무로 죽지 그랬소. 다 늙어서 풍경화가 왠 말이오


 지하철 2호선 신림역 6번출구에는, 그러니까 늙어 빠진 할머니 한분이 동전통을 가만히 놓고 동냥질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날씨가 추우나 따뜻하나, 눈이 오나 비가오나, 돈 푼을 벌어 뭘 그렇게 잡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어코 빨아 드셨나보지. 지하철역 출구 계단은 콘크리튼데 거기다 뿌리를 내리고 그렇게 빨아 드셨나부지. 토양은 돌아다니는 사람들. 붐비는 사람들. 생명력이 약동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양분이었나부지. 할머니는 그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양분들을 쭉쭉 빨아드셨겠지. 그렇게 빨고 빨고 쉬어 꼬부라지셨겠지. 비단 그 때 뿐만 아니라 모든 그녀의 생애가 그렇게 만들었겠지. 어디서 오셨을까. 자식들은 무얼 할까. 비옥한 토지는 내비두고 지하철역 출구 계단이 다 무어라 말이오 할머니.

 할머니는 쓸데없는 체력 소모를 피하기 위해 미동도 잘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날 역시 사람들은 그녀가 예전 그대로 있었는 줄 알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할머니에게 축복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가만히. 아주 가만히 노약해져서 죽어버렸으니, 온갖 병치레 하면서 주사바늘 투성이가 되는 죽음보다는 어쩌면 - 어쩌면 - 한결 나은 것일는지도 모른다. 이런 나은 사정 역시 그녀의 자식이 어디 있는 줄 모르기 때문이겠지. 그녀의 자식이 있었다면 주사바늘을 꽂았을지도 모른다. (오마이 갓!) 그러니까, 그런 죽음은 그녀에게 아주 - 어쩌면 - 다행인 셈이지
 할머니는 노송의 풍경이었다. 지하철 역 6번 출구에서 꼬부라진 노송의 풍경. 가만히 바람을 맞고 이파리나 파들거리는, 풍경. 사람들은 풍경화에 말을 걸 턱이 없었고, 지나다니다가 풍경화에 대한 삯이나 이따금 지불할 따름이었다. 

"짤랑"

 오랜 세월 꼬부라진 할머니 역시, 풍경화가 되어 고맙단 말을 할 기력조차 없었고, 그날 역시 고맙단 말을 하지 않았었으니,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는지도 모른다.

 풍경화는 그렇게, 싸늘하게 식은 채 20시간이 지나서야 '죽은 풍경화'임이 밝혀졌다. 귀찮게도, 노송이 지하철역에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청소부가 비키라고 소리소리 지르며 밀쳤다가, 그 풍경이 비명 악소리 하나 없이 계단을 굴러 떨어진 덕분이었다. 청소부는 자기가 노인을 죽음으로 몰아간 줄 알고 잠시 패닉에 휩쌓였으나, 방금 죽었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싸늘한 시신을 알아 차리고 이내 이성을 되찾았다 한다. '다행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 여러분, 이 풍경화에 있는 노송을 한번 잘라보세요
 에이 선생님 풍경화 속에 있는 노송을 어떻게 잘라요. 저건 그냥 그림인데요.
 어떻게 자르긴요 잘 보세요
 이렇게, 노송이 그려진 부분을 칼로 도려내서... ......... 자아... 그 다음... 자 보이죠? 이렇게 따로 떨어져 나온 노송을 가위로 싹둑! 자르면 되는 거에요. 알았죠?
 우와! 네에!!


 노송을 도려낸 것은 누구였을까. 노송을 가위로 싹둑 잘라 장례라도 치뤄줄 사람은 있었을까. 신림역 6번 출구를 다니는 사람들은 노송이 없는 풍경화에 이따금 낯설어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익숙해지면, 원래 노송 없는 풍경화처럼, 다시 붐비어지겠지


 풍경화로 남았던 한 노인이 이제는 풍경도 되지 못한 채,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 픽션입니다.  


 일병 김대윤 
 무서워요.제가.(98%픽션이었으면.) 04-04   

 병장 김지민 
 픽션이면 좋겠다구요? 04-04   

 일병 김대윤 
 그냥 무서워요. 하고 끝내려니 코멘트 수에 걸리고. 지민씨의 "해피버스데이 투유" 가 생각났어요. 
 아래의 "98%의 달에게 소원을"도 스쳐지나갔고요, 
98% 는 픽션이고 딱 2%확률로 논픽션으로 일어나는 일이었으면 해서요. 04-04   

 병장 박효승 
 갈 곳으로 간건데 참 슬프네요. 
 풍경화의 그 노송의 자리는 다른 새싹이 자라고 또 노송이 되겠죠? 04-04   

 병장 이영준 
 지민씨의 픽션들은 가끔 사람을 놀래켜요. 
 그저 슬픈 현실이군요. 04-04   

 일병 김대윤 
 지민씨의 ※ 픽션입니다. 라고 여백을 두고 광고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픽션의 강조로 논픽션으로 어느 새 넘어가버리게 만드는 
 그래서 픽션이군요. 너무 슬프니까. 04-04   

 병장 김지민 
 소재는 옛날부터 생각해 두었었고, 이렇다할 플롯의 살을 붙이지 못해 못썼던 건데, 그냥 소재만으로 한번 올려봤어요. 여러가지 서술의 다른 기법도 실험해 봤구요. 
 사실 저는 이런 픽션을 슬프게 쓸 자격이 없습니다. 저야말로 저와 관계되지 않은 사람들의 일에 대해선 냉혈한인지라.... (...) 04-04   

 병장 진규언 
 지민님 답글을 읽고 원글을 한번 다시 읽어보았는데.. 이 글에서 실험해보신 서술의 다른 기법을 한 두가지만 구체적으로 집어주실 수 있을까요. 조심스럽게 여쭈어 봅니다.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표현력이 부럽습니다..) 04-04   

 일병 김준호 
 본문만으로도 좋은데 지민님의 답글이 이 글을 제게 더 와닿게 하네요. 
 사람이 풍경의 한 부분으로 인식된 순간의 아릿함이 절절히 다가와서 좋은 글이었어요. 04-04   

 병장 김지민 
 당초 목적은 완벽한 풍경 묘사 뿐이었는데.. 쳇 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