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리즘<아티스트 낸시랭의 비키니 입은 현대미술> 
 
 
 
 
낸시랭은 그녀의 말처럼 귀엽고 애교스럽고 장난기 넘치는, 주책바가지 아티스트다. 처음에 그녀를 접한건 메가패스 친구들 시리즈 CF였다. 클래지콰이나 라스트포원 같은 사람들은 알았는데 낸시랭은 누구지? 하며 인터넷을 뒤졌었다. -이래서 광고의 영향력은 위대하다- 그녀의 홈페이지가 나오고, 그녀의 몇가지 사진들이 나오고, 게시판에 절반은 욕, 절반은 호의의 게시글들. 포탈에서는 그녀에 대한 짤막한 기사들. 

그렇게 그녀를 알고 나니까 그녀가 갑자기 무지하게 밟히더라. 쌈지의 낸시랭 브랜드도 밟히고, Mnet의 <트렌드 리포트 必>이 밟히고, 일간스포츠에 월요일마다 연재되는 그녀의 패션 칼럼이 밟혔다. 그에 더불어 그녀의 책 <비키니를 입은 현대미술> 이 한방에 난 그녀의 사상에 폭 빠져버렸다. 이른바 낸시리즘. 음, 이건 좀 오바인가?

책은 그녀의 현대미술에 관한 자신의 생각들과 자신의 창작론 같은 것들이 뒤섞여있다. 그녀는 책의 초반부터 미술의 시작이라고 할수 있는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패러디하면서 미술의 근본부터 자신의 낸시리즘으로 바꿔버린다. 

자, 여기서 설명 들어간다.

낸시리즘

(저 단어는 내가 지어낸 신조어이니 괘념치 말길.) 그녀는 책의 초반부터 당당하다. ‘미술은 욕망이다.’ 라며 미술에 대한 정의를 내려버린다. 땅땅땅. 재현의 욕망, 영원 불멸에 대한 욕망, 해석에 대한 욕망, 인정받고 싶은 욕망(p.10). 미술사는 인간 욕망의 변천사라고 단정짓는다. 그녀는 단색으로 이루어진 모노크롬 그림도 욕망의 ‘울트라 캡숑’으로 정의하며 모든 미술을 욕망과 결부시켜 버린다.

그러한 욕망을 그녀는 적극적으로 추구한다. 예술이 주는 즐거움을 추구하며 만끽하고 딱딱한 미술사의 획을 긋는 그림들도, 심지어는 달러조차도 가지고 놀아버린다. 짐짓 무거운 어투를 하고 있는 것들이 그녀의 손을 거쳐 패러디 되고나면 즐거워지는 것이다. 

그녀는 비너스를, 아담과 이브를, 최후의 만찬을, 모나리자를,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신윤복의 미인도를, 마티스의 춤을,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종횡무진 패러디한다. -특히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하여 예수의 자리에 자신의 얼굴을 합성시키고 나머지 제자의 자리엔 김정일과 부시가 키스하는 장면을 연출해내고, 여러 나라 수상의 얼굴을 배치해놓은 <최후의 만찬>을 보고 있으면 즐거워 미칠지경이다.- 모든 미술을 즐거움이라는 욕망과 결부시켜 즐거운 것들로 치환해버린다. 

그녀는 태연하게 당당하고 솔직하다. 자신이 작품에 명품들을 등장시키며 세속적인 욕망을 표현한 것에 대해 사람들이 ‘꼴’이라고 수근댈 때, 그녀는 욕망이 무슨 죄인가. 욕망을 포장하는 권력이 죄다.(113) 욕망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이 죄일까?(148) 라며 오히려 제도화된 욕망(18)을 비판하고 솔직해지자고 말한다. 미술이 어차피 욕망인 이상 그 욕망의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무엇보다 성실한 아티스트의 자세(20)라며 오히려 그녀의 낸시리즘을 우민들에게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당당한 욕망의 중요성, 솔직함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을 즐기라고 말한다. 나는 내 스스로 상품이 되던, 뭐가 되던 그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소통되고 공유되며 나눠 가질 수 있는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 대신 나눠 갖기는 하되, 나는 달러를 원한다. 즐기고 싶으면 돈을 내라. 그리고 더 좋은 것을 요구하라.(28) 그녀는 어떻게 보면 돈을 밝히는 사람으로 비춰질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미술사에 깊숙이 침투한 자본의 역사를 까뒤집으며 미술은 원래 돈과 연관되어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당당하게 소비로 인해 채워지는 미술, 소비라는 행동을 통해 대중이 미술에 참여할수 있는 향유론을 발칙하고 깜찍한 자신의 미술세계를 예로 들며 설명하고 있다.

향유와 소통.

낸시랭은 길거리 낙서도 미술이고 화장실 낙서도 미술이지만, 이런 것들이 미술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향유하는 소비자가 있어야 한다.(18)고 말한다. 그녀는 관객과 소비자를 동급으로 만들어 버린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생각과 소비엔 차이가 없다(41)고 말하며 자신의 예술작품을 사줄것을 요구한다. 사준다는 소비 행위에 생각한다는 행위가 들어있기 때문이라며.

그녀는 관객들을, 대중들 모두를 한명의 아티스트(174)로 본다. 자신에게 맞는 스타일의 옷을 슈퍼 컴퓨터 몇 대 보다도 더 정확하게 골라내는 우리의 미학적 안목을 예로 들어가며 관객의 위치에 있던 대중들을 예술가의 위치로 끌어 올린다. 소비자와 생산자가 같은 ‘프로슈머’의 사회에서 예술계 또한 예술계의 ‘프로슈머’를 관객 한사람 한사람에게 인식 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그녀의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 라는 작품을 패러디한 <손님은 왕이다>(79) 라는 작품은 아주 큰 의미를 갖는다. 원래 국왕을 비추고 있는 거울에 국왕을 없애버리고, 진짜 거울을 놓았다. 국왕을 그리는 벨라스케스가 아니라, 작품을 향유하고 있는 당신! 손님이 왕이요, 주인공이라는 말이다.

그녀는 또한 인간의 개별성, 독립성을 매우 높은 가치로 여긴다. ‘이미지를 소비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가 독창적이고 차별화되면서도 뭔가 대단한 것처럼 보이는 상품을 찾는 소비주의 경향을 추구하는 것을 ‘이왕 그림을 그리는데, 뭔가 새로운 것을 그리고 싶다.’ 라는 욕망과 쌤쌤 맺으며(178) 각각의 존재가 너무나 유니크 하다는 것을 강조한다.(183)

그렇게 낸시랭은 관객들을 작가의 위치까지 격상시키고, 왕의 옷을 입히고, 독창적인 개인을 강조한 다음 이제 미술과 좀 가까워 진것 같지 않냐고 말한다. 과거 미술작품에서 흘러나오며 영향을 받는 관객의 입장과는 달리, 미술작품 자체를 만드는 작가의 입장이 되었으니 이제 미술계와 관객은 다시 소통할수 있는 것이라며 애교스럽게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예술과 일상간의 소통을 진심으로 갈구한다. 그렇기에 상품을 예술화시켜 일상적인 풍경이나 대상들에게서 예술을 느끼게 만든(162) 팝아트의 선두주자 앤디 워홀을 존경하고, 미술가는 이제, 소비 대중과 소통할수 있는 네트워크 상에서만 존재할수 있다(81)고 말하고, 낸시랭 또래 아티스트들은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기꺼이 노력하는 세대(164)라고 말한다. 

그 소통의 방법으로 그녀는 만인의 공통적 욕망인 즐거움을 작품에 차용하는 것이고, 자신의 퍼포먼스들도 그러한 움직임으로 봐달라고 말한다. 자신의 작품을 기꺼이 지고하시고 고매하신 높은 예술적 경지에서 끌어내려, 과거 미술작품과 건담류의 몸을 차용한 어찌보면  싸구려틱한 -그러나 그렇기에 즐길수있는- <터부 요기니> 시리즈를 꾸준히 창작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낮아진다음 그녀는 관객을 높인다. 관객을 아티스트 수준으로 격상시킨다. 그렇게 모두 평등한 수평론적 관계까지 만들어 놓고는 한바탕 즐기자고 한다. 미술은 한바탕 신나는 ‘놀이’(162)라며 애교스럽게 낸시리즘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낸시랭은 과거 미술사와 현대 미술사를 넘나들며 자신의 책 제목처럼 그들에게 비키니를 입혀 더 가볍게! 더 재밌게! 만들고 있었다. 가벼워지고 즐길만한 수준까지 내려온 예술들은 대중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향유되고 즐기는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중이 예술을 즐기는 방법은 흔치 않다. 미술관을 방문하거나, 관련 도서를 보거나. 그래서 낸시랭은 대중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다.

쌈지와 계약하고 자신의 이름을 내건 브랜드를 런칭한 것이다. 낸시랭은 언제나 공중부양중이신 터부 요기니를 기꺼이 땅바닥에 내려놓고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자신의 결심을 로고에 면면히 드러냈다. 그녀는 패션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사람이 한명쯤은 있어야 되지 않겠냐며 소비하며 생각하는 우리들을 설득한다.

낸시랭이 당신을 구원하리니.

낸시랭 행보가 요즘들어 참 바빠진것 같다. 몇 달 전까지만해도 이름도 모르는 아티스트에 불과했는데 광고를 찍고, 여기저기 TV 프로그램 게스트와 VJ, 칼럼니스트까지 자신이 책에서 미술사를 넘나들듯이 종횡무진 활동하며 낸시랭을 널리 일파만파 퍼뜨리고 있다. 낸시랭이 당신의 죽어버린 감성에 구원을 주리니. 라면서 말이다.

걸어다니는 팝 아트. 자신을 못 팔아서 안달난, 욕망에 적극적으로 솔직한 낸시랭. 그녀가 정말이지, 애교스럽다.
* 병장 김동환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6-06-08 14:12) 

  
 
 
 
병장 김강록 (2006/05/19 16:54:20)

진우님은 얼리 어답터!    
 
 
 병장 박진우 (2006/05/19 16:55:22)

내일은 주말이라 글쓴다고 출근하기는 귀찮고 해서 너무 급하게 적은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밥먹으러 가야겠습니다. 
모두들 즐거운 주말되세요! 얏호!    
 
 
상병 안대섭 (2006/05/19 17:05:40)

일상적이어야 예술이 되고 예술적인 것은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죠. 
올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일병 변화수 (2006/05/19 17:10:34)

저는 낸시랭은 별로입니다. 집이 잘 살다가 갑자기 망해서 그때부터 돈에 대한 욕심을 
엄청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부와 명예라면서 자신의 입으로 자신이 아티스트라고 하는데 
자신의 몸과 얼굴을 철저히 상업적으로 이용하는데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병장 한상원 (2006/05/19 17:18:41)

올것이 왔군요-에 올인. 
아티스트가 되는 관객의 소비가 즐거울 수 있는 것은 언제일까요- 책을 읽어봐야 알겠지만, 건담 몸에 사람 얼굴 한 낸시 랭의 작품에 시큰둥했던 저로서는. 뭐 그런 생각이 듭니다.    
 
 
병장 최무강 (2006/05/19 17:36:14)

어떤분은 그랑죠라더니.. 이번엔 건담... 

흐흐흐~ 하지만 비키니 예술은 최고라구요!!!    
 
 
병장 김성룡 (2006/05/19 20:13:19)

흐음 한번 보고 싶은걸요.. 그럼 이미 책을 봄으로써 예술을 소비하는 소비자가 된건가요?...흐음    
 
 
상병 최숭규 (2006/05/20 07:15:45)

보고싶은책이었는데, 리뷰(?) 감사합니다    
 
 
 병장 박진우 (2006/05/20 07:20:11)

사실 이 책은 낸시랭의 미학오디세이에요!! 으하하하.    
 
 
병장 주영준 (2006/05/20 13:18:40)

아직은 잘 모르겠고. 일단 본인이 밥을 먹는 사병식당의 근무자가 낸시랭 팬인지 아침점심저녁 주구장창 식당 티비로 낸시랭을 볼 수 있기는 한데. 역시 동의할 수 없음. 나중에 보다 알아보고 글을 쓰던지 해야지 원.    
 
 
병장 김형진 (2006/05/20 14:38:14)

어디까지나 제 멋대로의 생각입니다만─ 지고의 가치는 이제 더이상 아름다움이 아니라 귀여움이라는 것을 몸으로 체득해 알고 있다는 점에서, 낸시 랭은 가치전도 현상의 한가운데 서 있달까. 스스로 얘기하듯, 애교를 통해서 세상을 날로 먹으려는 심보를 가지고 있다고 하니까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억압과 동떨어진 가치, 억압의 힘을 벗어날 수 있는 상상계적 가치,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진(眞), 선(善), 미(美)가 아닌, 귀여움이라는 겁니다. 패러디를 통해서 진(眞)을 비웃고, 예술과 상업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선(善)에 의문을 제기하고, 파격성과 노출─그것도 좋게만 봐주기 힘든─을 통해 미(美)에 돌을 던지고 있죠. 사실 그녀의 퍼포먼스나 뻔뻔스레 속보이는 키치적인 아트는 그냥 장난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괜스레 의미부여할 것도, 예술성에 대해서 왈가왈부 할 것도 없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그건 껍데기이고, 중요한 건 쥐뿔도 없으니까. 정말 중요한건, 되레 그런 식으로 잔잔한 수면위에 돌을 던지고선 귀여움과 애교로 천진난만하게 깔깔대며 웃어대는 모습이 주목해야 할 포인트이고, 진짜랄까. 그러니까, 그저 작품 껍데기만 보고 호의를 표하는 것도 우습고─설마 그녀의 작품을 보고 "이건 완전 내 정서와 감수성에 딱이군!" 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그렇다고 욕하는 것도 참 민망한 짓이라는 거에요. 마르셀 뒤샹이 '샘'을 내 놓은지 어언 한 세기가 다 흘러가는데, 아직까지도 사람들의 시선과 안목은 거기서 한 치 앞도 더 나아가지 못했군요. 오호, 통탄할 노릇이로고. 

그저 좋고 싫고를 떠나서, 억압을 모르는 사람이란 그 존재 자체로 참 보기 좋은 것 같아요, 게다가 매우 흥미롭구요. 자신의 내재성을 온전하게 펼쳐내고 있다는 점에서, 패리스 힐튼도 그렇고, 낸시 랭도 그렇고, 문근영이 그렇듯. 이들이 공통적으로 소유한 가치, '귀여움'이야말로 이 세상의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신의 내재성을 온전히 보존하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가치가 아닐런지, 하는 생각이에요. '귀여움'이라고 하면 외적인 요소에 무게를 두고있는 가치, 혹은 여성적 가치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텐데, 굳이 부연하자면 천진난만함과 귀여움의 경계선에 모호하게 서 있는 그런 가치랄까요. 여성적 가치라는 말에 대해선 굳이 반박하고 싶지 않구요. 대부분 여성만 언급해서 그런가, 하지만 남성 중에선 앤디 워홀 같은 사람도 있으니까요. 요즈음 저의 관심과 신경은 '귀여움'이라는 가치에만 집중되어 있답니다. 꼭, 낸시 랭 때문은 아니고, 얼마전부터 생각해왔던 거였어요. 어쩌면 우리들은, 그러니까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저항없이 커다란 억압들을 겪어온 나머지, 온전한 내재성의 발현과 본질적인 차이를 정서적으로 용인하기 힘들어진 획일화 된 감수성을 가지게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거든요. 어쩐지 사실은 나와 상관없는데 괜히 꼴보기 싫다거나, 이유없이 욕하고 싶다거나, 하는 건 어쩌면 억압속을 살아오면서 자신만의 개성을 상실하고 내재성을 발휘할 기회를 잃었던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현대인의 방어기제인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이런 문제─귀여움, 그 지고의 가치─에 대해서는 글로 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지만, '밀도있는 코멘트주의자'를 자처하고 있는 저로선 썩 내키지가 않네요. 아무튼 책 읽어보고 싶어요. 좋은 후기, 잘 읽었습니다.    
 
 
병장 강경태 (2006/05/21 13:21:15)

저는 가벼움이란, 특히 문화방면에 있어선- 추구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미지를 창조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창조물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에 관해 좀 더 심사숙고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해묵은 고상함을 던져버리고, 자신만의 색깔을 찾는다는건 물론 나쁜게 아니지만, 형식에 있어서 고상함을 던져버리는 대신, 가벼운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그 내용도 텅 빈 가벼움뿐이라면, 무엇이 남을까요. 껍데기만이 남을 뿐입니다. 대중이 가벼움을 추구하니, 나도 가벼움을 제공해야지- 하는 논리는, 예술가로써의 책임에 관한 면에서, 좀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오히려 형식에 있어서의 가벼움이란 그것과는 반비례적인 무게감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는게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제가 더 두려워하는 것은, 이미지의 가벼움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엉뚱한 사상을 사람들로 하여금 멋대로 상상하게 하고, 내면화하게 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의 방향이 어느 방향으로 나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구요. 그릇된 방향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요즘 부쩍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특히 어린아이들에 의한) 충격적인 사건들은 그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낸시랭이 철저히 상업성을 추구한다면, 글쎄요, 저는 최근의 그녀에게 집중되고 있는 이목을 유쾌하게만 받아들이진 못하겠네요    
 
 
병장 김형진 (2006/05/21 15:14:21)

전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몇 마디 덧붙일게요. 그러니까, 가볍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지요. 언제부터인가, 문학에서도, 영화에서도, 미술에서도, 음악에서도, 너나 할 것 없이 가벼움에 대한 우려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과연 왜 그럴까요? 예술은 시대의 반영이라는 해묵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엄숙한 시대에는 분명 엄숙한 예술이 있었습니다. 치열하고 뜨거웠던 시대를 지지해온 치열하고 뜨겁고, 무거웠던 예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 자체가 가볍습니다. 넷을 기반으로 한 인간관계, 쿨한 끝맺음, 힘들고 어려운 것 보다는 쉽고 편한 것을 추구하려 드는 젊음, 이러한 가벼움이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든, 지향해야 할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이 그렇다는 거에요. 문학만 해도 그래요. 라이트 노벨의 향유 현상이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지고 있으며, 귀여니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가벼운 시대를 가볍게 살아오고 있는 이들에게 엄숙하고, 무거운 것들은 그저 재미없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재미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일단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라는 거에요. 말씀하신데로 그런 식이라면, 껍데기만이 남을 뿐이지요. 사실은 현재의 우리네 젊음들의 삶 자체가 그냥 껍데기입니다. 

제 생각을 말하자면 예술이 그런 가벼움과 텅 빈 껍데기 같은 무엇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텅 비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텅 비어있기 때문에 우리네 삶을 비추어주는 예술이라는 것도 그 모양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깁니다. 예술가가 뭐 그리 대단한 사람들이라고요. 예술가의 존재의의는 자신의 결과물이 초래할 결과와 파장 같은 것을 고려하고 심사숙고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지 꼴리는데로 창조하는 것에 있습니다. 말씀하신 논리는 예술가들의 활동을 지나치게 정치논리로 재단하려 드는 것이기에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예술가들이 계몽하고, 선도한다, 뭐 이런건 나치 시대의 한물간 논리 아니던가요? 게다가 상호 정보접근성이 원활한 인터넷 시대에 그게 왠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랍니까. 낸시 랭 본인의 입으로 말하듯, 팔리는 예술을 하려면 대중의 감수성을 자극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한 표현으로서의 예술, 그 가벼움이 우리를 가볍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사실, 저 또한 '그녀에게 집중되는 이목'을 유쾌하게만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와 '그녀에게 집중되는 이목'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제가 그녀에게 집중되는 이목을 유쾌하게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그로 인해서 우리네 삶이 껍데기일 뿐이라는 것을, 그러한 현실을 어느 정도 수긍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그게 짜증나기 때문입니다. 시대와 맞지 않는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녀는 주목받지 않았을테니까요. 

우리네 삶의 감수성은 민감하고, 또 빠르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언제, 어떤 형식의 예술이 주목받게 될 지 아무도 몰라요. 중요한 건, 우리들 개개인이 각자의 꿈을, 감수성을 온건히 펼칠 수 있는 세상이 오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낸시 랭의 등장으로 인해서, 점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감수성을 표현할 기회를 얻게 될 수도 있겠지요. 말하자면, 그녀는 개개인의 대중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도구 혹은 매체의 폭을 넓혀준 셈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건 하나의 시작에 불과할 뿐입니다. 공허함과 의미없음으로 점철된 미국의 60년대를 휩쓸었던 팝아트가 이제서야 지구 반바퀴를 돌아 우리나라에서 주목받는 데에는 그런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요. 사람들 속에 내재된 무언가를 마음껏 꺼내어 놓을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껍데기는 사라지고, 자연스레 잃어버렸던 진지함 같은 것도 회복될 수 있을 테니까요. 그 진지함이란 꼭 엄숙해야 할 필요는 없겠지요. 우리 모두에게 적이 존재했던 암흑의 시대에는 진지함이 엄숙함이라는 정서로 표현되었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껍데기의 시대를 거쳐오고 있기에 권태와 짜증을 느끼는 우리들에게는, 조금 더 유쾌해져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저도 그렇지만, 아마 경태님이 느끼시는 짜증이라는 것도 조금 더 파헤쳐보면, 이 시대의 정서를 향한 어떤 감정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병장 노지훈 (2006/05/21 15:14:24)

글이랑 댓글 모두 <가지로~ > 
... 
(무안함)    
 
 
병장 강경태 (2006/05/21 17:47:27)

-제가 좀 흥분한 나머지, 저도 모르는 사이 무려 ‘나치 시대의 한물간 논리’가, 제 속에서 일어나게 되었나 되돌아보게 되는군요. 예술로부터 ‘두 눈 부릅뜨고’ 순수함을 요구하는 것도 다른 관점에선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새삼 생각해보았습니다.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제가 염려하는건, 예술분야에서 귀여니류의 소위 ‘쿨한’ 형태의 것들이 그 세력을 확장하면 확장할수록, 그것들의 위협으로부터 예술의 순수함은 결코 안전할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경박한 노래들로 인한 거품만이 잔뜩 들끓다가 곧 그 식상함에 대중들이 고갤 돌리고, 결국 지금은 골골히 목숨만을 연명하고 있는 요즘의 가요계를 보더라도, 이런 현실에선 희망을 그리고, 이야기하고, 노래하는 사람이 보다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바라는건 예술을 하는 이들에게 있어 그러한 순수함의 ‘강요’는 아니지만, 정작 희망적인 것의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는 예술에서마저 순수함이 힘을 잃어가는 상황을 지켜보기에는 안타깝다는, 그런거죠. 

그래서, 그녀에 대해 ‘예술적 측면에 대해선 왈가왈부 할 것 없다‘고 보시는 형진님과는 다르게, 저는 그녀의 영향력이 이내 못마땅해 결국 한마디 남긴 것입니다. 또한, 저도 순수함을 무척이나 동경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저 자신이-아직은 그 미천함에 부끄럽지만서도- 순수함을 이야기하는 예술을 꿈꾸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곧, 낸시랭의 자유분방함, 기발함에 이끌려(이런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 뒤에 숨은 그녀의 속뜻을 살펴보니, 저와는 예술관의 노선이 다른 그녀에 이내 실망하고, 밉게 보였고, 무엇보다 제 꿈의 존재근거가 위협당하고 있다는 본능적 불안감을 감출 수 없어, 결국 한마디 남겼다-라고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웃음)    
 
 
병장 김형진 (2006/05/21 18:06:20)

진심어린 글, 잘 읽었습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사실은, 저도 예술을 꿈꾸고 있거든요. 
건투를, 빌어요.    
 
 
병장 김대현 (2006/05/21 18:13:16)

아 이 사랑스런 자본주의 키드. 
자본주의를 알아버린 사람들은 절대 사회주의로 돌아서지 못한다는 걸 보여주는 실례군요. 그만큼 사람들은 더 영악해지고, 세련되어지니까요. 
그렇게 된다면 승부수는 역시, '세련'됨의 기조를 바꿔서 들이대는 것. 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낸시랭에 어느정도 동의합니다. 주제를 말하기 위해 우리는 정치적으로 더 공교로워질 필요가 있어요. 주제를 위해서라두요. 

그녀의 진심에 기대를 좀 걸어보고 싶습니다.    
 
 
상병 안대섭 (2006/05/21 18:25:58)

개인적으로는 형진님의 맥락에 동의합니다. 
낸시 랭 자체에 대한 호오를 밝히는데서 더 나아가 그녀를 반대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과 평행선을 그을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브루투스가 시저를 암살했다고 로마가 공화정으로 돌아가지는 않은것 처럼요.    
 
 
상병 박정훈 (2006/05/23 13:27:17)

낸시랭..좋던데...어헐..로버트 만화에 어린이 얼굴-루이비똥 빽을 든 모습을 보고..상냥한 충격을 받았던게 기억이 나네요..솔직해서 좋고..즐거워서 좋고... 
(뭐....자신은 주로 룸살롱에서 노는걸 좋아 한다는 대답도 이상하게 좋았음..) 
..아무튼 주목되는 젊은이 중에 한명~    
 
 
상병 문창현 (2006/06/02 21:19:53)

중요한 것은 낸시 랭이 팝 아트 면에서는 진보적일지는 몰라도 예술의 순수의 범주에는 조금 벗어나 있다는 것. 그리고 예술을 단순한 소비의 형태로서만 해석한다는 것. 욕망을 꾹꾹 숨기고 살기 바쁜 현대 사회에서 그녀가 꾸밈 없이 욕망을 (그녀의 반라 누드처럼)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는 점은 더할 나위 없이 흥미롭고 대견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소비 문화적으로만 예술을 옹호하는 듯하여 조금 씁쓸함. 요즘은 명품 브랜드와 아티스트의 작품을 결부 시킨 패션 의상이나 가방 등이 많이 나오고 있는 실정인데 그 제품을 구매한다고 해서 소비자가 예술을 이해한다고 볼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피카소의 그림을 거액을 주고 거실의 한 쪽 벽에 걸어 놓는 다고 해서 그림을 구입한 사람이 예술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낸시 랭이 주창하는 팝 아트라는게 본래 자본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들 진정 그녀가 말하는 예술의 소통이 이루어질까 의문임. 물론 예술이 예전처럼 고상하고 엄숙한 귀족이나 부르주아들만 향유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술이라는 것이 최소한 순수성을 잃어버려서는 안되지 않을까. 적어도 루브르에 있는 모나리자와 공장에서 찍어내는 티셔츠에 그려진 모나리자는 구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임. 예전에 만나던 여자친구가 낸시 랭과 홍대 미대 동창이었고 같은 방을 쓰던 룸메이트 였다고 함. 그녀가 말하길 요즘 낸시 랭이 하는 꼴을 보면 우습다고 함. 학교 다닐 적엔 그러지 않았는데 집이 망하고 난 이후로 돈에 환장한 여자가 된 듯 하다면서 씁쓸해 함. 아트 = 욕망 이라기 보다는 욕망 = 돈 이고 그리하여 욕망 = 돈 = 아트 가 되는게 아닌가 싶음. "나는 구찌가 너무 좋고 구찌를 사랑한다"는 그녀의 말이 욕망을 허물없이 드러낸 아티스트의 당당함이 아니라 오히려 세속적인 현대인들의 구질한 물질욕을 대변하는 속물인 듯 함. 그녀처럼 옷을 벗는 것이 예술이라면 공중파에 물의를 일으킨 카우치는 이 시대의 진정한 아티스트일 것임. 개인적으론 그녀가 예술적 영감과 작품이 뛰어난 아티스트가 아니라 그녀 스스로를 상품처럼 포장하여 이슈화 시키는데 능한 사업가라는 생각이 듬. 그리고 왠지 그녀의 존재가 당연스레 한 명쯤 있어야 할 작가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이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씁쓸한 부산물인 듯 하여 안타까움. 그리고 자본주의의 상업적 논리에 의해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있는 희생양이 아닌가 싶음. 메가패스든 에스콰이어나 GQ같은 잡지에서든 쌈지에서든. 예술의 다양성을 그녀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좋지만 내가 믿고 있는 예술의 가치관에선 이해가 되지 않는 여성인듯 함.    
 
 
상병 안대섭 (2006/06/02 22:38:08)

그런데 낸시 랭 나온지 꽤 되지 않았나요? 여기저기 찔러대는데 비해서 그렇게 대중에 대한 파급력이랄까, 효율도 별로 좋지 못한것 같습니다. 

조만간 들어갈듯.    
 
 
병장 강승민 (2006/06/13 14:03:09)

아...이 게으른 백성은 이제야 읽게 되는군요. 
저는 형진님의 의견에 살짝 동의를 날리면서 낸시랭의 현상이 지금 추이에서 더 멀리 미래를 내다보고 판단해야 할 문제라고 비겁하게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저는 낸시가 인간의 욕망을 지나치게 자본주의적 시각으로 제단하고 있지는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피 우리 소녀들이 모두 머터리얼 걸들이라면 저는 낸시랭은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내가 상품의 대상이 되는 것이랑 스스로 진탕에 발을 담가 그 상품이라는 기호로서의 껍데기를 비웃는 마돈나의 경지는 같은 딴따라라도 다르다고 봅니다. 물론 낸시랭이 마돈나와 대착점에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진우님의 후기를 보면서 현대미술에 대한 평론가들의 시선과 마찬가지로 낸시랭의 예술관이 단지 발랄한 포스트히피즘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저는 결국 저렇게 미술을 단순화하고 그래서 그러한 가짜 에고이즘에 비판을 가한다는 것은 조금은 자기애에 함몰된 상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쨋든 저도 미술에 관심이 많은지라 책을 꼭 구해 읽어봐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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