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전단체의 떠오르는 기대주로 살던 시절, 온라인 공간의 체육인-비체육인의 논쟁엔 ‘brainwashed’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곤 했다. 아마도 세뇌를 뜻하는 것이겠지만 왠지 모르게 (특히 비체육인들에 의해)‘쇄뇌’ 내지 ‘쇠놰’ 등의 이상한 스펠링으로 쓰여지는 경우가 많았던 이 단어에는, 자기들은 지성의 공간이라는 대학에 와서 자신만의 세계관과 비전을 갖고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데 비해 당신들은 선배들의 한 잔 술에 혹해 잘 알지도 못하는 마선생(내지는 무시무시하게도, 김장군)의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우루루 몰려다니며 지성의 공간이어야 할 대학의 분위기를 흐리는 무비판적 인간이라는, 체육인에 대한 비체육인들의 무시와 편견이 담겨있다. 소나라의 몰락으로 마선생의 이론이 틀렸음이 증명되었고 민주주의가 쟁취된 지 (그 당시)10년이 넘었으며 자본주의의 발전 덕에 7,80년대보다 먹고 살기 훨씬 좋아졌으며 그러나 IMF사태로 무한국제경쟁의 냉혹함을 깨닫게 된 이 시대에, 민주주의며 노동이며 진보가 왠 철지난 노래란 말인가.(민족은 내가 옹호하는 가치가 아니라 제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체육인들은 그저 갑자기 주어진 자유를 감당 못하고 한 때의 치기에 머물러 있는, 철이 덜 든 아이들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들이 자기계발서와 토익교재를 읽으며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데 꾸준히 매진하고 있을 때 체육인들은 철지난 빨간 책을 읽으며 광신에 빠져있었고, 자신들이 사회의 각종 문제들에 대해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은 ‘자신의 시각’으로 ‘자신의 판단’을 내리고 있을 때 체육인들은 그들을 이용해 정계로 진출하려는 음흉한 생각을 가진 선배들의 번지르르한 말만 믿고 있었으니까.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거인의 머리 위에 앉아있는 난쟁이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천재라고 불리는 인간들의 업적조차 앞선 세대들의 성취에 대부분을 빚진 것이다. 비단 자연과학뿐 아니라 인문, 정치, 사회, 경제, 예술,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그러하다. 거창하게 학문에서의 성취를 들지 않더라도, 모든 인간의 지식과 가치체계는 학습을 통해 형성된다. 한국의 정상적인 고등학교 교육을 이수한 사람은 갈등지양적이고 통합지향적인 정치학, 강자한테 빌붙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현실주의적 외교학, 시장친화적이고 개방지상주의적이며 노동적대적인 경제학, 우리민족지상주의 역사학 등등 수많은 거인들 중에서도 한국사회만의 특이한 오른손잡이 거인들(사실은 거인은커녕 꼬맹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의 무릎팍 위에 올라앉은 것에 불과하다. 물론 그곳에서도 세상은 보인다. 그러나 자신이 올라선 곳이 거인의 무릎 위가 아니라 자신의 발만으로 땅위에 섰다고 믿는 것이 문제다. 체육인들의 험난한 여정은 그것을 깨닫고 그 거인들의 무릎 위에서 하산하는 과정으로부터 시작한다. 파업대오에서, 철거현장에서 만나는 것은 알고 있던 세계와는 또 다른 현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을 더 잘 말해줄 수 있는, 지금까지 우리를 무릎 위에 데리고 놀던 거인과는 아주 다른, 왼손잡이 거인의 발꿈치를 잡고 겨우 등산을 시작한다. 어쩌면 이 단계에서 이들의 이야기는, 강고한 현실에 맞서기엔 너무나 미약하고 유치한 논리에 불과할지 모른다. 학습은 이제 겨우 시작되었고 뜻도 모르는 받아적기 수준에서 맴돌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가치관의 파괴 및 재형성이라는 과정은 자기가 어디에 발 딛고 서있는 지도 모르는 이들에게 비웃음 당할 만큼 쉬운 것은 아니다.

대학에서의 한 시대가 지나고 전 교육부장관의 이름을 딴 세대가 입학할 때쯤, 수많은 한 때의 체육인들에게 글쟁이와 학원강사로서 먹고 살 길을 열어준 논술이라는 제도가 안정적으로 정착한 시대의 논쟁은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띄게 되었다. 이 시대의 비체육인은 왼손잡이 거인의 존재를 ‘알고 있다.’ 왼쪽과 오른쪽의 논리를 균형 있게 섭취하며 역시나 ‘자신만의 생각’을 만들어 가는 것은 이들의 지적유희다. 그리고 현실은, 여전히 왼손잡이의 논리로는 살 수 없다.
조선이 당파싸움 때문에 망했으며 민족보다 좌우의 이념을 앞세운 지도자들 때문에 나라가 갈라지고 전쟁을 겪게 되었다는 주류 역사학의 논리 때문인지, 갈등을 배척하고 통합을 중시하는 고등학교 정치학 또는 사회학의 영향인지, 낮에는 태극기, 밤에는 인공기를 걸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전쟁의 경험 때문인지, 중용을 강조하는 유교의 영향인지, 이 말도 옳고 저 말도 옳다는 황희 정승의 고사 덕분인지 한국사회는 유독 균형 잡힌 시각을 강조한다. 허구헌날 대기자와 주필들의 화려한 글빨 속에서 난무하는 분열의 극복, 일치단결, 통합, 그 놈의 통합. 사물에는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의 정과 반의 빡센 투쟁을 거쳐 합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반복된다는 헤겔의 변증법은 한국에서는 정도 반도 아니고 합이 맞다는 싸구려 논리로 변질되어 이제는 반대만을 위한 반대가 두렵다는 아이돌 그룹의 노래가사까지 장식하게 되었다.
균형 잡힌 시각에 따르면 A가 1을 주장하고 B가 -1을 주장할 때 0를 주장하는 C가 옳다. 사실은, 제로라도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5를 주장하는 이가 다섯이고 3을 주장하는 이가 넷이며 -1을 주장하는 이가 하나다. 올림픽에서 다이빙 평점 매기는 것도 아닌데 최하점인 -1은 비합리적인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고려대상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장과 자유무역과 경제성장만을 제일의 가치로 아는 이가 사립학교 재단 이사장들의 소유권을 살짜쿵 제한해보려 하다가 왼손잡이로 몰릴 때, 애초에 그들과 생각의 출발점이 다른 real왼손잡이들은 Mr. cellophane, 아웃 오브 안중이다. 이 경우 균형 잡힌 시각은 대략 4.1정도에 위치한다. 스스로는 두 거인 사이에서 자신의 관점을 잡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이 역시 그 둘 밑에 엎드려 있는 거인의 등짝 위일 뿐이다.
이것은 왼쪽과 오른쪽의 싸움에서만 벌어지는 문제는 아니다. 어떤 논쟁에서나 우리는 남의 경험과 주장에 의해 얻어진 관점을 폄하하는 경향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남의 주장을 인용하는 사람은 그나마 스스로 선택한 학습의 과정을 거친 사람이다. 그 어떤 기성의 생각에도 의존하지 않은 주장이란 건 사실 매스미디어와 정규교육의 찌꺼기에 불과할 경우가 많다. 다양한 관점들 사이의 균형 잡힌 시각이라는 것 역시 큰 틀에서 보자면 기존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100% 내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라는 것은 존재한 적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 그러니 ‘공부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