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Grigo  
상병 주해성   2008-04-25 16:44:01, 조회: 269, 추천:0 

언제부턴가 커피 한잔 하실래요 라는 한마디 말로 커피와 카페는 항상 낭만이란 이름에 배경화면으로 점칠 되어 왔었다. 우리가 사랑과 이별을 이야기하는 횟수만큼 커피와 카페가 불리어졌고, 부드럽고 예쁘고 편안함이라는 이미지 속에 커피의 향은 묻혀져갔다. 더 이상 사람들에게 커피의 맛과 향은 중요치 않았다. 사람들은 커피를 소비하지만 즐기지 않았고 마시지만 맛보지 않았다.



한 번 가보라는 지인의 추천만 있었을 뿐 자세한 이야기는 없었다. 2층이라는 말에 기대감을 갖고 올라간 계단 끝에는, 상상치도 못했던 파란색 문에 빨간색의 중화반점이라는 표어가 붙어있었다. 한 참이나 멍하니 서 있은 후에야 중국집 반대편에 포스터가 -청소년 음악회니 문화예술 한마당이니 하는- 덕지덕지 붙어있는 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상하리 만큼 무거운 문 때문인지 처음가보는 곳에 대한 낯설음 때문인지 손잡이에 몸을 실어 천천히 밀었고 덕분에 난 고개를 숙인 채 그곳에 들어갔다. 바닥에 꽂혀져 있던 나의 시선 끝엔 얇은 콩 껍데기들이 휘날리고 있었는데 그 콩 껍데기와 나의 망막사이엔 영화 속의 이펙트처럼 뿌연 연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불이 난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나의 눈은 연기 속을 빠르게 헤맸고, 한바가지 땀을 흘리며 커피를 볶고 있는 그 덩치 좋은 아저씨를 ‘발견’ 할 수 있었다. 
커피숍 특유의 주황빛 조명과 뿌연 연기의 배경화면속에 우린 어색한 인사를 나눴다.

“어우 연기가 장난이 아니네요.”
“아- 하하. 지금 커피를 볶고 있는데 우리 집은 환풍구가 따로 없어서요.”

어색한 웃음을 끝으로 아저씨는 말이 없었고, 앉으라는 말도 없기에 대충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보통의 커피숍 주인장이라면 이 삐그덕 거리는 의자-볼트가 3개쯤은 빠져있고 괄약근을 사용하여 무게중심을 맞춰야 하는-와 자욱한 연기가 손님에게 미안할 법해야 할 탠데, 0.5kg짜리 작은 수동 로스터기를 (태연스레) 돌리고 있는 아저씨는 나의 존재유무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고소한 커피 콩 볶는 냄새와 아저씨의 우스꽝스러운 자세만이 나를 대신 반겼다.

과연 이런 곳이 장사가 잘 되려나 하는 쓰잘데기 없는 근심을 하며 카페 안을 쭉 둘러보았다. 깨어진 유리조각품, 고흐의 작품들이 그려져 있는 퍼즐 조각,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부족의식에서 쓰일 것 같은 헝겊조각,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커피자루, 한쪽 끝이 너덜너덜한 사진들, 선반 위에 올려져 있는 깔루아까지 어느 인테리어소품 하나 연관성 있는 것이 없었고 낭만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추상화였다.



날씨는 찌뿌둥했고 재즈 풍의 음악도 없으며 맛좋은 케이크 와 미인도 없는, 수요일 오전 11시였다


지인의 추천으로 와봤다는 나의 말에, 아저씨는 시계(역시나 삐뚤어져 있는)를 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오늘은 파푸아뉴기니가 좋아요”

라는 말과 동시에 커피-내가 돈 주고 먹어야 할-를 갈고 있었다. 
난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떠한 원산지의 커피를 먹을지, 어떤 스타일의 커피를 마실지, 뜨거운 커피를 마실지 냉커피를 마실지, 아니 커피를 마실지 안 마실지 조차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가 나를 ‘알아’봤을 때 그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이런 불친절에 화내거나 흥분할 법도 하지만 사실 난 아무생각이 없었다. 

아저씨는 매우 곱게 커피를 갈았는데 분명 그것은 내가 즐겨 마시는 커피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주전자로 물을 부어 커피에 뜸을 들이고 숨을 고르고 있는 그에게 빼앗겨 버린 나의 권리에 대해 호소 해보려 했지만, 난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주먹만큼이나 될까 한 작은 주전자 앞에 두고 오른팔에 온몸을 집중시키는 아저씨의 진지한 모습이 카페 안 모든 소음은 물론 나의 온몸과 입을 움켜쥐었다. 날렵하면서도 부드러운 모습을 뽐내는 스테인리스 주전자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쪼로로로록-
호빵처럼 부픈 신선한 커피 속을 곱디고운 한줄기 물이 쏘옥 빨려 들어가고, 상큼한 향기와 함께 고요 속을 탈출했다. 

아저씨는 입을 벌리지 않고 말을 하고 있었다.  마치 화가가 그림을 그려 표현을 하듯, 연기자 자신의 몸으로 표현을 하듯, 자신의 침묵의 이유와 타당성을 커피의 향으로 피어 올렸다. 이 향은 아주 넓고 풍부하게 퍼졌다. 


‘한 모금, 또 한 모금’

“커피향이 구수하네요.”
“하하핫 구수하지 구수해. 옳은 표현이야. 분명 그 할머니의 커피에 비하면 구수해.”

하지 않은 주문을 한지 10분이 지나서야 완성된 커피를 맛본 나의 느낌에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웃음 뒤에 이어지는 아저씨의 날카로운 몸짓과 말은 흐릿흐릿하고 얇은 미각의 끈을 표현하기위해 움직이는 아저씨의 깊고 단단한 커피철학을 여실히 보여준다. 
잡힐 듯 말듯 사라지는 향미를, 난, 차분히 느끼고, 
즐겼다.



다른 미학적인 혹은 낭만적인 표현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 맛은 단지 아저씨만의 진중한 커피 맛 이었다. 배우고 보니 부족함을 알게 되듯 취하고 보니 많은 것이 보인다. 이곳과 아저씨는 최고의 서비스를 행했었음을. 

나와 같은 처사로 이곳에 들어와있을, 이 너덜너덜 주렁주렁 달려 있는 통일성 없는 물건들은 이곳에 들어와 커피에 취하고 바래 이곳과 어우러진다. 아무것도 넣지 않은 커피 그 자체처럼, 아저씨처럼.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10
10:01:37 

 

상병 이찬선 
  글 읽는 동안 어느새 입안이 쌉싸름해지네요... 잘 보았습니다!! 
죄송하지만 위치를 알 수 있을까요..?? 2008-04-25
16:47:40
  

 

상병 주해성 
  제가 군입대 할 당시 가게를 정리하고 여행을 떠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 소식통에 들리지 않는 걸 보면 아직 진행중인 것 같습니다. 아마 카메라를 들고 산을 타고 있을 겁니다. 2008-04-25
17:31:11
  

 

상병 이태형 
  그런 무례라니, 뭔가 당해보고 싶은 기분이 드네요. 
오늘은 왠지 커피가 먹고 싶군요. 
천천히. 2008-04-29
07:04:32
  

 

병장 황인준 
  좋네요.. 
저렇게 자유롭게 사는 듯한 사람을 보면, 
참 그 용기가 부럽다는.. 2008-04-29
08:43:30
  

 

상병 강호준 
  흠...요즘 카페는 단순히 커피맛으로 승부하는 곳이 아니죠. 스타벅스의 성공요인이 커피가 아닌 분위기와 이미지를 상품화 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저런 카페도 한번쯤은 가고 싶군요. 2008-04-29
09:03:24
  

 

이병 서재용 
  읽는 내내 상상해 버렸습니다. 꼭 가보고 싶은데 가게를 닫았다니 아쉬울 따름이네요 . 저도 언젠가 저런 가게를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