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3부작을 마치며  
병장 최도현   2008-11-18 11:38:39, 조회: 84, 추천:0 

# 3부작을 마치며 

지금까지 게시되었던 세편의 짧은 에세이를 하나의 내용으로 묶어야겠다는 생각을 한지도 꽤 오래되었습니다. 지금에서라도 이런 작업을 하게 된 것을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세편의 에세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1부는 ‘미간과 인중’, 2부는 ‘이중성의 긴장’, 그리고 마지막 3부는 ‘나는 왜 클레(Klee)를 주목 하는가’입니다. 세편의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권두(權頭)로서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를 소개하였습니다. 이제 3부작을 마치며 작가가 글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진의(眞意)를 파악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에선 과외를 통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통해 우리의 얼굴에 묻어있는 얼룩(본연의 모습)을 발견하였고, 그것을 인정하는 과정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연의 모습을 발견하는 과정은 우리가 우리의 얼굴을 찾는 과정이며,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남을 위한 삶을 살 때 우리의 얼굴에 묻어있는 얼룩을 지울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하는 것을 상대방의 얼룩을 서로 닦아주는 모습으로 묘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우리의 얼굴을 찾는 과정은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를 통해 다음 3부작에서 간접적으로나마, 그러나 누구나 쉽게 연상이 가능하도록 문학적으로 우리의 본질적인 죄성(罪性)을 묘사하는데 가장 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1부 ‘미간과 인중’의 핵심어는 <살아있는 생활>입니다. 나의 이상형은 언제나 숭고함과 진지함이 가득하기에 모든 것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그녀의 행동에는 젊은이의 생동감이 넘쳐흐르고, 주변 사람들에게 다시 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을 느끼게 해줍니다. 이 살아있는 생활은 아주 솔직하고도 단순하며 너무나 우리를 정면에서 바라보는 까닭에, 그 이상적이고 완전한 존재로부터 내 영혼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죄성(罪性)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직선적이고 직접적인 강렬한 태양에 과감히 노출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동안 깊숙이 숨겨져 있던 우리 내면 안에 깃든 근본적인 결핍의 요소는 <살아있는 생활>이라는 ‘일반 계시’를 통해 우리 얼굴의 얼룩이 더욱 도드라지는 것이며,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우리 본연의 얼굴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진실 된 물음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생활을 하고 있는 나의 이상형은 이글거리는 태양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그곳으로 믿기 힘들 정도로 너무나도 쉽게 데려다 줍니다. 부끄러운 우리의 얼굴은 살아있는 생활을 하는 그 완전한 존재로부터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지만 용서를 구하기엔 우리는 이미 너무나 부끄럽기만 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우리의 행한 모든 일을 용서한다면, 우리는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Then, when I make atonement for you for all you have done, you will remember and be ashamed and never again open your mouth because of your humiliation, declares the Sovereign LORD. (Ezekiel 16:63)

그렇다면 ‘용서’는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그것의 속성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2부 ‘이중성의 긴장’에서는 우리가 우리 주변의 사물이 지니고 있는 이중성을 통해 그것으로부터 오는 긴장이 현실을 좀 더 사실적으로 묘사해주며, 관찰하는 사물의 속성과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사물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선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한한 우주에서 유한한 존재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우리는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담아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특정시기조차 일어난 모든 것을 담을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실상을 ‘불분명하게’ 묘사represent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사물 앞에서 지배감과 겸손함이 공존함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중성의 긴장 앞에서 불확실하게 서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한 것도 확정된 것은 없는 것만 같습니다. ‘용서’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아들을 살해한 원수를 사랑하는 것, 배신한 옛 애인을 용서하는 것, 간음한 여자를 용서한다는 것은 도대체 우리에게 어떠한 예측을 가능하게 해준단 말입니까? 어느 부모가 예전의 자식들을 잃은 슬픔을 새로 낳은 자식들을 얻은 기쁨으로 보상받아 “말끔히” 잊을 수 있을까요.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삶의 불분명한 경계와 이중성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슬픔과 기쁨이 뒤범벅되어 어느새 유쾌한 설움으로 바뀌어 간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입니다. 완벽하고 말끔한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더 이상 현실적인 것을 바라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불분명한 삶의 한복판을 헤쳐 나가는 우리에게 ‘용서’라는 특별한 ‘계시(啓示)’는 우리 의지와는 무관하게 우리 바깥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입니다. 

이제 ‘살아있는 생활’이라는 일반 계시와 ‘용서’라는 특별 계시는 우리에게 하나의 중심된 주제로 정돈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얼굴을 찾는 과정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성을 발견하는 작업이라는 점이 이제 밝히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사물을 직시한다면, 진실 안에서만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류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오히려 커다란 진실의 대부분은 인류가 저지르는 오류(죄의 본질)를 통해 드러난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부 ‘나는 왜 클레(Klee)를 주목 하는가’에서는 바로 이 점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찾고자 했던 얼굴의 얼룩, 바로 죄의 본질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시대를 깊이 통찰하는 방편으로 예술을 채택하곤 합니다. 예술은 그 시대의 사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현대로 오면서 예술은 의미로부터 스스로 해방되려 하였고, 모든 윤리적, 종교적 상황을 외면한 채 완전히 자율적이고자 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인간 외적인 것이며 삶으로부터 동떨어진 것이고, 인간 정신의 다른 기능을 배제시켜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본질에 반하는 일이며, 인간을 단지 다른 사물들과 같은 단계에 놓이게 하는 상황으로 만들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쇠라(Seurat)는 인간을 목각 인형이나 마네킹이나 인조인간처럼 표현하였으며, 마티스(Matisse)는 인간을 양탄자 무늬 이상의 큰 뜻을 지니지 않도록 격하시켰습니다. 현대예술은 전통과 인간을 버린 자리에 바로 새로운 ‘우상’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 우상은 이제 자율적인 인간이 자율적인 예술을 만드는 일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폐기하도록 부추기고 있으며, 심지어는 인간 폐기마저 불어오도록 조장(助長)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을 인간 이하의 것으로 저하시키는 것이 본연의 임무인 것입니다. 

이에 비해 언어예술(문학)은 현대성으로부터 그나마 가장 덜 훼손된 장르입니다. 왜냐하면 언어라는 것은 단순한 하나의 습관적 기술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건지는 바구니와 같은 것이며, 그 ‘의미’는 역사 속에서 형이상학의 몰락을 방어해 내고 있는 최후의 보루(堡壘) 역할을 굳건히 담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인간성이 배제된 핏기가 없는 무표정한 모습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우리 얼굴의 얼룩이 녹아내리도록 살아 숨 쉬는 눈물을 흘려야 할 때입니다. 의미를 찾고자 근원적인 것을 열망하였던 고뇌에 찬 클레의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일반 계시로 대변되는 살아있는 생활의 강렬한 태양과, 위로부터 일방적으로 부여 받는 용서의 특별 계시를 통해 기쁨의 눈물을 흘려야 할 때입니다. 그 눈물은 우리 얼굴을 덮고 있는 가면을 부술 것이고, 우리 얼굴의 얼룩을 지워줄 것입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20:13:02 

 

상병 김무준 
  잘 읽었습니다. 근데 아무리 공부해도 예술은 어렵습니다. 그런 고로. 공부는 뒷전... 2008-11-18
11:45:35
  

 

병장 이동석 
  그런데, 이게 마지막은 아니겠지요? 2008-11-18
15:17:51
 

 

병장 이동석 
  그러니까 도현님의 마지막 글은 아니겠지요? 2008-11-18
15:1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