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1월 17일의 일기  
병장 김민규  [Homepage]  2009-01-17 20:01:20, 조회: 178, 추천:1 

  부모님이 오셨다. 우리 찌게집 근처에 있는 찜질방에 들렀다가, 밤에 자고 점심이나 같이 먹을 겸 면회란다. 사실 나는 참 복 받은 편이다. 비록 삼공육 최악의 케이스라는 철원으로 오기는 했지만, 저 위쪽 출입금지지역은 피해 아랫동네로 왔고, 게다가 의외로 수유리의 우리 집에서 매우 가까웠다. 어쩌다 집에 가는 날이면, 아침 열 시면 도착을 해 늦은 아침을 먹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




  일단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많은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지만(사실 그 때문에 무리해서 올라오신 것도 있었다) 일단은 불판을 꺼내 버너 위에 얹고 삼겹살을 김치와 함께 구웠다. 저 맞은편의 석유난로 위에는, 양은냄비에 물을 채워 햇반을 넣어 두었으니 고기를 먹은 후라면 따끈한 밥도 되어 있을 것이다. 우걱우걱. 아침 내내 자다 일어나 뒤늦게 점심을 첫 끼로 먹고 있는 나이니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은 없다.

  ‘미지 대학 등록금 나왔더라, 기숙사비랑 포함해서 오백이야. 요새 영 실적도 별론데, 큰일 났네. 아참, 요새 알바 한다고 하더니, 지가 일하는 선물포장가게가 18일날 빠진다고 했대. 포장 팁에서 월급의 육십 프로가 나오거든. 당연히 빠지면 자기도 그만두려고 했는데, 사장이 무슨 소리를 하냐고, 한 달은 채워야 한다고 했다는 거야. 당돌한 것이, 그럼 월급을 다 주든가, 못 하겠다고 그랬대. 자기도 세 군데서 오라고 그랬는데 그것 때문에 접고 온 거라고, 자기를 뭐로 보냐고 하면서. 거기다가 액자 값 오 만원 못 받은 게 있었는데, 사장이 준다고 했다가 지금까지 미루고 있다나. 그거 안 주면, 세 군데에다가 오만 원 삼등분해서 청구하겠대. 언제 그렇게 경제관념이 투철해졌지? 우리 때는 그냥 굽히느라 그렇게 못 했는데’

  80년대 생이 규범과 시민의식을 완전히 내면화해 일탈을 부정하는 가치관을 갖고 산다면, 90년생인 내 동생은 그 다음 세대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장남의 장남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짐을 지고 그 부담으로 모범이라는 굴레 안에 스스로를 가두었던 나와는 달리, 오빠라는 녀석 때문에 항상 모든 기회를 차 순위로 미루고 그나마 이룬 것들에 대해서 인정도 잘 받지 못했던 내 동생은, 어느새 톡톡 튀는 생활왼손잡이로 홀로서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수능을 치르고, 선택의 순간에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간호대를 택해 곧 충남 당진으로 내려갈 처지이나, 집을 떠난다는 일종의 해방감과 함께 세상에 부딪혀 보겠다는 가득한 에너지를 갖고 있었다. 삶의 반경이 서로 겹치지 않고 관심도, 전공도 다르지만 대학로 핫트랙스에서 일하는 동생을 둔 덕에, 예쁜 2009년 다이어리를 하나 얻어들고는 히죽거리는 나다.




  1년을 들고 다니던 파란 다이어리를 이제 보낼 때가 되었다. <대한적십자사 2008>이 음각으로 찍혀 있는, A5만한 사이즈의 깔끔한 스프링 제본 노트다. 0.4mm 하이텍씨를 좋아하는 나이지만 이 펜을 제대로 쓰려면 몇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해서 늘 마땅한 노트를 찾기 힘들었다. 절대로 번들거리는 코팅지여서는 안된다. 중성잉크이기는 하지만, 그런 재질에는 쉽게 스며들지 못하고 번지기 일쑤다. 게다가 0.4밀리라는 특성 때문에 나오는 잉크의 양 자체가 많거든. 그런 나의 취향을 알기라도 한 듯, A4용지보다도 더 건조한 색감의 각 장들은, 쓰는 족족 물기를 빨아들이며 하나의 고정된 형태로 새겨주었다. 게다가 이런저런 사소한 정보들을 찾기 힘든 여건상, 노트 뒤편에 모아져 있는 지도들이라든가, 지하철 노선도는 급할 때 적당하게 나의 갈증을 해결해 주었다.

  노트를 펴고 앞에서부터 한 장씩 읽으며 기억을 되살린다. '대한적십자사는 봉사활동을 통하여 인간의 고난과 위기를 보다 잘 해결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노력한다.' 첫 장에 적힌 사명선언문이다. 뭐라고? 개소리 집어치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분노가 치솟는다. 우리는 악연이다. 나는 너희들 때문에 나의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지금에 와서도 피 장사나 하다가 욕 들어 먹는 것들이, 뭐가 어쩌고 어째?




  그래, 나는 나의 조부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천구백육십년대의 어느 날, 지독한 술에 쩔어든 한 사람이 더 이상 몸을 추스르지 못해, 토악질을 하며 서울의 적십자병원에 들어섰다. 당장 응급치료를 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원무과는 완고했다. 먼저 돈을 가져오지 않으면 그 무엇도 해줄 수 없다는 싸늘한 한 마디에 나의 할아버지는, 그렇게 허망하게 가셨다. 조선일보 1면에 전면으로 실리고 사회발전의 병폐로 지적되어가며 한참을 회자되었다고 한다. 논객들은 매정한 원무과 직원을 질타했고 정부기관들은 합심해서 대책을 내놓았을지도. 그러나 그런들 무엇하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그조차 뒤늦게 아버지를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이기에, 당시 사정의 극히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그들도 나름대로의 사정은 있었겠지. 절대로 어떤 합리화나 용서는 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나마 그 이야기를 2008년이 다 가서야 들었기에, 고인의 손자는 병원 전산화 작업을 하며 원무과장에게 얻은 이 노트를 1년 내내 썼다. 그야말로 코메디로군, 낮게 읊조린다. 뻔뻔한 사명선언문을 보며 내가 노트를 집어던지지 않았던 이유는, 표지 왼편 비닐 안쪽으로 꽂아 놓은 유망주의 웃고 있는 사진 때문. 참 해맑게도 웃는다.




  비스켓(역시나 비슈케크의 내맘대로 표기다)으로 떠났던 그녀가 돌아올 날도 이제 오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동안 얼마나 생각하고 심정적으로나마 지원했는지 돌아보니 까마득해 문득 미안해진다. 많이 추울 텐데, 매일같이 저녁밥을 먹고 막사로 향하며 저 하늘에 두둥실 떠오른 금성을 보며 생각했던 바다. 너도 나랑 같은 별을 보고 있겠지?

  생각해보니 부모님이 오기 전 아침에 내내 죽은 듯 잠을 잤는데, 그 선잠 꿈에 그녀가 나왔더란다. 그 속에서 아마도 너와 나는 하나를 이루기로 이미 약속을 한 듯했다. 너를 품에 안고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어루만지고 쓰다듬으며 내가 느낄 수 있는 생생한 감각의 극한을 맛보았다. 나는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아마도 그 때문인지, 갑자기 그녀와 내가 함께 있는 그 배경이 궁궐 안으로 느껴졌고, 시간이 되어 정문 앞에서 차를 태워 보내면서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니 후배 하나가 밥 먹으러 안 갈 거냐고 추궁하듯 서있다. 그 후배가 그곳에 서서 나를 부르는 시간동안, 오래도록 잠에서 깨지 못하고 해롱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안 가, 짧은 한 마디로 그 시간들을 무위로 돌린다.




  어쨌건 다시 진짜 면회실로 돌아가, 이제 밥을 다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녀에 관한 이런저런 실마리들을 던지며, 비록 아직 실질적으로 가 닿은 것은 하나도 없지만, 나 나름의 느낌과 계획들을 풀어놓는다. 한참을 듣고만 있던 아버지가 입을 열고 말문을 뗀다. ‘결혼을 하는데, 이런저런 필요한 혼수품들이 있을 거 아니야. 왜 신랑 집에서는 뭐 뭐를 해 가고, 신부 집에서는 이런저런 가전들을 해 넣고, 그걸 리스트에 죽 적어. 그래서 액수를 대강 산출한 다음에, 정말 꼭 필요한 것들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그런 현물들 빼고는 캐쉬로 타내. 그래서 그 돈을 종자돈 삼아서 어딘가에 잘 넣어 놓으란 말이지. 요즘 보면, 무슨 마고자네 LCD TV네 10자짜리 장롱이네 하면서, 사실 불필요한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고. 아니 집은 다 빚인데, 그 안에 세팅은 완벽하게 다 해놓고, 가진 건 사실 하나도 없으면서 드러누워서 헤- 하고 있으면 그게 뭐냔 말이지. 결혼식이야 오는 사람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고, 사람이 살면서 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마저 모른 척 지나갈 수야 없으니 하는 거지만, 실용적인 것에 초점을 맞춰야지, 허례허식해서야 되겠냐.'

  백 번 맞는 소리다. 신혼 때 아기자기하게 해 놓고 예쁘게 살겠다는 아내의 환상을 깨는 것이 되어서야 곤란하겠지만, 적어도 미래를 향해 살겠다는 말에 동감한다면 감안해볼 여지가 충분히 있다. (게다가 캐쉬로 받아내라니, 이건 청구하라는 말과 같다. 공수표 한 장을 얻었군) 그러고 보면 나의 아버지는 참 뚜렷한 분이다. 이제 겨우 스물네 살 먹은 아들이 설레발이 치는 소리에 저 정도의 깊이 있는 말을 던질 줄 아는 것을 보면 내가 따라가기야 한참 멀었고. 어머니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아직도 삐죽삐죽이다. ‘아니, 좋은 시절 뭐 하러 십자가를 절로 지려고 해. 일찍 해서 좋은 거 뭐 있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창조한 자들보다 더 훌륭한 한 사람을 창조하려는 두 사람의 의지- 이것을 나는 결혼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의지를 의욕하는 자들에 애한 외경으로서의 상호간의 의지를 나는 결혼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그대의 결혼의 의미요 진리이기를. 그러나 많은 너무나 많은 자들, 이 쓸데없는 자들이 결혼이라고 부르는 것, 아, 나는 이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 이 남자는 영웅처럼 진리를 찾아 나섰으나 마침내 하나의 작은 치장한 거짓말을 손에 넣었을 뿐이다. 그는 이것을 그의 결혼이라고 부른다. 저 남자는 교제를 삼가고 까다롭게 골랐다. 그러나 그는 한꺼번에 영원히 그의 교제를 망쳐버렸다. 그는 이것을 그의 결혼이라고 부른다. ... 그들은 모두 교활한 눈을 갖고 있다. 그러나 가장 교활한 자조차도 아내를 살 때에는 자루에 넣은 채로 산다.
  잠시 동안의 여러 가지 어리석음, 그대들은 이것을 연애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대들의 결혼은 하나의 장기간의 어리석음으로서 잠시 동안의 여러 가지 어리석음을 종결시킨다. ... 창조하는 자의 갈등, 초인을 겨누는 화살과 동경 - 말하라, 나의 형제여. 이것이 결혼에 대한 그대의 의지인가? 나는 이미 이러한 의지, 이러한 결혼은 신성하다고 말했다‘

  뭐, 사실 그랬다. 꿈속이었지만 너를 어루만지며 나는 다른 이름을 불렀다. 도대체가 이놈의 무의식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너와 내가 다 아는, 내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그 친구의 이름을 불렀던 것이다. 게다가 너와 내가 이미 하나가 된 것을 알고는, 그런데 도대체 내가 너에 대해서 아는 것이 왜 이렇게 없는가를 꿈속에서 심각하게 갈등하며 고민했었다. 무슨 꿈이 이러냐. 의지몽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좀 그 안에서라도 해피엔딩이면 안 되는 건가?




  어차피 답 안 나오는 이야기는 오일 뒤로 미뤄놓고, 2월 3일에 있을 면접을 생각하면서, 그 날 서울에서 너를 꼭 보고 들어오겠다고 결의를 다진다. 자연스럽게 교환학생 준비로 화제가 넘어갔다. 양은냄비 안에서 새로 부은 물은 보글보글 끓고, 커피 세 잔이 뚝딱 만들어진다. 이런 인스턴트 라이프가 오늘만큼은 싫지가 않다. 원하는 대로 내 미래도 뚝딱 세워졌으면 좋겠다.

  ‘꿈꾸는 다락방’ 이라는 책을 지난 번 아버지가 왔을 때 던져주고 갔었는데, 묘한 반발감(아마도 아직도,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 질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에 대강 훑는 듯 한 시간도 안 걸려 다 읽기는 했지만, 그 핵심만은 명료하게 기억이 났다. R=VD, 즉 Realization = Vividly Dreaming 이라는 것이다. 생각하는 대로 된다니, The secret의 아류인가. 평소 같으면 ‘또 계발’ 하면서 집어 던졌겠지만, 막상 내가 급하니 그거라도 해 보기로 했거든. 까서 물만 타면 만들어지는 커피믹스처럼, 제발 이번에는 돌아가지 말고 한번에, 원하는 대로 좀-

  매번 나의 도전은 쉽게 받아들여지는 법이 없었고, 10을 원하면 꼭 9의 결과가 돌아오곤 했었다.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물론 9만 해도 어디인가 생각하면 다행이다 싶기도 하지만, 채워지지 않은 2%에 목마르곤 했던 것이다. 그건 일종의 강박적 불안으로 자리 잡았다. 교환학생을 준비하면서, 내가 정말 원하는 학교를 1지망에 써 놓고, 2지망과 3지망에 더 고민하는 내 모습을 보건대 분명히 그렇다. 거기다 혹시나 1지망 학교를 내가 지원하지 못하게 될 상황(학점인정의 문제라든가, 아니면 지금 모르는 다른 조건들이 있을 경우)에 대비해서 2안의 지원서도 쓰고 있자니 참 어지간하다 싶었다. R=VD라도 붙잡고 싶은 게 솔직한 심경이다.




  왜 그곳으로 떠나려고 하는지, 아버지에게는 메일을 통해 구구절절 설명을 했지만, 어머니는 아직 모른다. 교환학생을 가면 좋다는 당위에는 동감을 하지만 왜 그것이 Montreal이어야 하는지는 설명을 드리지 못했다. 어차피 갈 거면 미국으로 가지, 이 정도 의문이야 지극히 당연한 것 아닌가. ‘엄마, 거기가 그렇게 보여도 세계적으로 몇 번째 꼽아주는 경영대학이고, 같은 동네에 캐나다의 하버드라는 맥길도 뭉쳐있고, 무엇보다 도시 분위기 자체가 엄청 깔끔하고 안전하다고요. 보통 외국 도시들 다녀보면 밤 아홉시 지나서는 어딜 나다닐 수가 없는데, 거기는 꼭 서울처럼, 새벽 두시가 되건 세시가 되건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즐기는 안전한 동네고, 대도시이다 보니까 교통도 무진장 편리하고. 아, 워낙 추운 동네라 150m에 하나씩 버스정류장이 있고, 전철이 있는데다가 학교도 Downtown에 있어서. 또 거기가 퀘벡이니까, 있다 보면 불어도 좀 집적거릴 수 있지 않을까요.’

  뭐 사실 이런 거야 아주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다. 사실 거기가 아니면 마땅히 쓸 학교도 없다. 1학기짜리 파견은 많은데 1년짜리는 드물었고, 따져보니 네 다섯 군데가 나오기는 하는데, 작은 동네라 차 없으면 다니지도 못할 곳들을 제하니 그나마 생활여건이 제일 나은 편에 속했던 것이다. 거기다 재정적인 부분을 빼고 이야기할 수가 없으니까. 이러저런 조건들을 고려해본 결과 가장 상식적인 수준에서 해결이 될 곳은 여기랑, Pennsylvania의 Scranton밖에는 없었다. 결국은 저런 장점들은 그런 현실적 한계를 미화하는 수사일 뿐. 그렇지만 정말 매혹적이었던 것은 몬트리올 관광청에 올라 있던 소개 동영상이었다.

  2분짜리 짧은 동영상이었는데, 도시의 이런저런 모습을 보여주며 평범한 일상을 소개했다. 그 자체에 나는 감동했고 푹 빠져버렸다. R=VD라는데, 이거 요새 상상력도 부족한 찰나에, 이거나 실컷 보면서 떠올리면 되겠구나. 재정적 고민도 잠시는 잊혀졌다. 활기찬 젊음이 느껴지는 그 생기에 나 자신을 푹 담가보고 싶었다. 어차피 교환학생의 신분에서 학교 공부는 부수적인 것일 뿐.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동생 등록금 내고, 너 보내자니 허리가 휠 것 같다고. 아버지의 짧은 한 마디. ‘니가 반은 벌어서 가.’ 안 그래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나다. 여기서 백 만원 만들어서 나가고, 나가서 5, 6, 7, 8, 네 달 벌어서 사백 만들면 도합이 오백, 좀 낫지 않겠느냐고. 학원 강사라도 해야 하나, 아니면 과외를 빡세게 뛰어? 그 정도 모으자면 한 달에 백오십은 만들어야 할 텐데, 이걸 어떻게 하지-

  학벌사회라는 체제를 극도로 혐오하면서도 결국은 그것에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기생식물 같은 내 처지가 끔찍스럽게 다가왔다. 결국 편의점에서 시급 삼천 팔백 원씩을 모아 그것을 이루고 싶은 치열한 현장감각은 없는 셈이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짧은 시간만 일하면서 목돈을 만질까, 하는 편리한 사고에 나 자신을 몽땅 던지고 있다. 그러고 보니 미래에 대한 고민 역시도 그렇다. 결국은 학교 이름 팔아서, 토익점수 내밀어서 어디 괜찮은 자리 없나 모색하게 될 것이었다. 그나마도 아침 여섯시에 출근해 밤 열두시에 나온다는 그런 쳇바퀴는 싫고, 어떻게든 좀 젠틀하고 마일드한 일자리, 그런 것만 찾고 있었던 것이다.

  동생의 한 마디가 나를 전율하게 했다. ‘너, 간호대 나오면 그냥 양호실 같은 데 가서 편하게 양호선생 하지, 왜 힘들게 종합병원에 가려고 해?’ 하는 어머니의 물음에 이랬단다.

  ‘그럴 거면 애초부터 그냥 대충 살지, 뭐 하러 힘들게 공부를 해요? 대학병원에 들어가서 힘든 것도 해 보고, 끔찍한 실상도 봐야 진짜 간호사로 클 수 있는 거지, 처음부터 어떻게 좀 편한 자리 없나 찾다보면 그 뒤엔 뭐가 남는데요?’

  아, 이 치기어린 당돌함이 나를 돌아보게 하고, 괴롭게 만드는구나. 열심히 살자.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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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보면 지금 내가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믿으며 고르는 것들도 훗날에는 ‘얻지 못해 다행이었던’ 일일 수가 있다. 2006년 봄, 나는 일본의 한 베이스로 떠나고자 했었다. 당시 가정의 여러 복잡한 문제들을 보면서 심각한 회의와 고민에 빠졌었고, 선교에의 길로 내 한 몸 던지면 그 성의를 알아 하늘이 알아서 도와주지 않겠는가 하는 얄팍한 생각에 빠져, 1년을 투자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생각보다도 더 완강했던 아버지의 반대에 밀려 결국은 흐물흐물 포기하고 2학년 1학기를 다닐 수밖에 없었고, 나름대로 그것은 좌절의 이유가 되어 나를 그 1년 내도록 괴롭혔었다.
  그런데 면회를 마치고 돌아와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소식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야, 너 거기 그때 못간 게 완전 다행이다. 그 목사님, 완전 이단이었대. 자세한 이야기는 나오면 하고, 단비 가 있잖아, 어떻게든 꺼내 와야 돼. 큰일 났어’

  정말 좀 특별한 곳이기는 했다. 현대사회에 이런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철저한 지하조직으로 숨어 지내면서도 그 조직원들의 유대는 단단했었고, 처음에 일이년을 생각하고 들어왔던 사람들은 무언가에 사로잡혀 평생을 위탁하고 그랬었다. 외부와의 소통은 보안상의 이유로 가급적 차단되었고, 그것은 가치를 향한 몸부림으로 받아들여졌었다. 그런데 이단이니, 변절이니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들으면 아마 나도 깜짝 놀랄 것이라는 선배의 말에, 도무지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선배도, 나도 기간의 차이는 있지만 그 곳에서 시간을 보냈던 기억을 공유하고 있고, 내 친구 하나 -단비- 는 이미 그곳의 2년차다. 당시에 진작부터 지역교회들과 갈등이 많은 것은 감지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일종의 텃세 내지는 기선제압으로 생각했었다. 선교지에서의 믿음에 대한 이해는 지역교회에서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라, 그런 세속적인 말다툼과 질투가 끼어들 여지도 없이 치열하기 때문에, 그리고 어떤 조직론을 세운다거나 큰 제단을 만드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삶이기에, 순전한 열심을 언젠가는 알아주겠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것이 좌절되고 1년이 지난 후에 나는 교환학생을 신청했었다. 독일의 한 학교로 한 학기를 가서 여행도 하고, 여유도 갖고,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좌절되었었는데, 만약 그 때 내가 기회를 잡았다면 입궁은 미뤄졌을 것이고, 국제교류는 재학 중 1회에 한한다는 규정에 밀려 지금은 이런 준비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한번의 좌절을 안고 중국에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5개월을 보냈다. 정말로 황홀해서 못 이룬 오사카의 꿈을 대리만족하며, 그리고 하루하루 즐거운 중국어 배우기와 사람 만나기에 흠뻑 빠져 지냈다. 생각 같아서는 1년 정도는 있고 싶었지만, 5월의 입대를 미루기에 나는 고집스러운 믿음이 부족했다. 일종의 약속과도 같은 신호를 우주적 존재는 내게 내비쳤지만, 나는 외면하고 삼공육으로 향했었다. 그리고 일 년, 신체검사 기준이 바뀌어, 나의 경우라면 굳이 현역으로 오지 않아도 좋다는 헤드쿼터의 결정이 나왔다.




  가지 않은 것은 천만 다행이고, 가 버린 것은 안 해도 될 일이었던 것이다. 최선의 길을 선택한다는 나의 고집이 좌절되었을 때, 매번 원망하며 뭐 이런 게 다 있냐고, 내게도 2%를 허락하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대들었었지만, 막상 시간이 지나고 돌아본 결과는 명료했다. 손바닥 안에서 노는듯한 이 찜찜한 기분을 어찌 해야 할 것인가. 끼워맞춘 무기력일지언정 털썩 무너지는 것은 어찌 다룰 방법이 없다.

  그래서 이번의 선택에 나는 그리 고집스럽게 나를 주장하지 않으려고 한다. 설령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곳으로 떠나게 된다 할지라도, 혹은 그것이 좌절될지언정, 그런 결과에 대해 연연하지 않으려 한다. 사실 애초에 내 머릿속에 Montreal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그에 대한 갈망은 뒤늦게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내가 꿈꾸는 유망주도 어쩌면 일반명사일지도 모른다. 꿈속에서 내가 다른 이의 이름을 불렀던 것이 그것을 입증한다.

  뒤숭숭한 마음에 담배 한 대를 결국은 꺼내든다. 에라, 모르겠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5:43:05 

 

병장 정병훈 
  이게 복잡한 오늘 마음이군요. 일단은 선리플- 낄낄낄. 2009-01-17
20:05:43
  

 

병장 김민규 
  그런데 다 써놓고 8시뉴스를 보니 이건 뭐 상식 밖이네요. 아무리 그래도 저건 아닌데... 
살려줘! 2009-01-17
20:09:24
  

 

병장 정병훈 
  젠장. 일이 좀 심각해 지는것 같습니다? 휴- 

그나저나, 이건 정말 일기군요. 일기입니다. 흥미롭다기 보단 민규형의 머릿속을 뛰어다니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다만, 아주 흥미로운 것은 동생분이 간호대를 다니는군요. 저도 대학병원에 취업하는게 일단은 목표이기 때문에, 이거- 잘하면 동생을 만나는거 아닐라나 모릅니다. 낄낄낄- 
(저는 간호대는 아니지 말입니다. 허허-) 2009-01-17
20:34:03
  

 

상병 김예찬 
  "처음에 일이년을 생각하고 들어왔던 사람들은 무언가에 사로잡혀 평생을 위탁하고 그랬었다."는 부분에서 제가 엮일 뻔한 모 단체가 생각나네요. 처음에는 그냥 성경 공부나 하자, 하고 접촉하게 되었는데, 그럭저럭 거리를 유지하며 1년 이상 참여했더니 점점 정녕 '사람 낚는 어부'의 모습을 보여주길래 억지로 빠져나왔는데. 다시 생각할 수록 좀 아찔하기도 하네요. 2009-01-18
12:40:19
  

 

병장 김민규 
  병훈/ 동생은 아마도 곧 09학번이 되겠지요. 허허.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엮는건, 좀? 
2014년 면접에 참여하시라요. 낄낄낄 

예찬/ 아찔합니다. 아니, 사실은 아직도 의아해요. 어느정도 검증이 된 곳이었고, 여러 가지로 열매들이 있는 곳이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변할 수 있었던 것인지. 이번에 나가면 구체적으로 들어 보려고 합니다. '사람 낚는 어부' 그 자체야 부정할 수 없겠지만, 낚아놓고 잡아먹어서야. 어흑 2009-01-18
14:06:57
  

 

병장 정병훈 
  면접이라뇨. 낄낄낄- 아마 병원 취업도 제가 먼저 할 거 같은데요? 으허허- 과도 달라서, 부딪힐 일은 없을 겁니다. 간호대라니, 힘든 길입니다. 2009-01-18
16:35:08
  

 

병장 김민규 
  그러게요. 그저 편안한 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졸업한 후가 어쩌면 더 걱정인지도- 
아무렴 어때요.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스무살이 되어버린 동생은, 잘 할 겁니다. 2009-01-19
01:23:02
  

 

상병 김용준 
  하....복사할껄...날아가 버렸군요...뭉개뭉개 구름처럼...크헉- 그래도 모...다시 씁니다. 그렇게 길지도 않았으니...낄낄낄. 

동생분의 열정과 패기가 저한테도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후후. 둘째들은 다 그런걸까요? 
첫째들은 보통 편안한 길을 선택하는...일종의 사회에 찌든거죠...에휴...민규씨의 일기를 보니 고민거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저희가 사는 이 사회현실이 씁쓸하군요. 끌끌끌. 
아무튼! 지금 당근 먹고 있는데 새벽에 지존급Boss분들이 들오셨네요. 이거 심상치가 않은데...이러면 안되는데...흑흑. 2009-01-19
03:24:51
  

 

병장 김민규 
  허허, 한참 써놓고 날렸을 때의 그 허망함이란. 다시 적어보려 해도 그 감각은 돌아오지 않고, 뒤늦은 후회만 맴돌 뿐. 크크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저는 저대로 나름대로는 독립적인 삶의 자세를 견지한다고 생각해왔는데, 사실 그게 백그라운드 없이 형성되었을 리는 없고, 그러니까 어느정도 지렛대를 가진 상태에서 1의 노력만 들이고도 10을 얻어놓고는 '이루었소' 라고 생각해왔는지. 

부채의식이 좀 있군요. 아, 월급이나 많이 나오면 밥이라도 먹자고 하지, 이건뭐 무능력자라 2009-01-19
13:49:13
  

 

상병 이동열 
  아아, 읽고나니 민규님이 너무 좋아져버렸어요- 
흐흐, 다이어리를 꾸준히 쓰시는거나- 0.4mm 하이텍씨를 좋아하는거나-(웃음) 
4번째 문단이 너무나 마음에 들면서- 동생분도 궁금해지는걸요?(웃음) 2009-01-19
16:04:51
  

 

상병 이동열 
  아참, 그리고 추천과 함께 가지로 외칩니다! 2009-01-19
16:07:28
  

 

병장 김민규 
  어이쿠. 타자속도 100%로 놓고 후다다닥 쳐내려간 넋두리에 이리 호응해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네요. 

동열님도 0.4 하이텍씨를 좋아하시는군요! 0.3은 워낙 잘 망가트려먹는바람에, 도저히 감당을 할 수 없어서 적당히 타협봤더니 생각보다 더 좋더이다. 문제는 이 이쁜 2009년 새 노트예요. 번들번들 코팅재질이라서 슥 번져버리는 통에, 다시 0.3으로 돌아가게 생겼습니다. 환율이 워낙 올라서 하나 망가질때마다 눈물날텐데. (울음) 

동생이 궁금하시면, 2014년 1월 1일 육군 제 0000부대 위병소 앞으로 전투복 필히 착용하시고 포트폴리오를 지참해서 오시면 됩니다. 낄낄 ([내글내생각] 오빠가 된다는 것-일병 김태경 아래에 달린 리플 참조) 

물론, 밀실야합에 따른 빅딜은 가능합니다. 2009-01-19
16:44:54
  

 

상병 이동열 
  민규/ 넋두리하면 저도 한 넋두리하는지라- 동지애같은거지요(웃음)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넋두리도 예술입니다. 흐흐. 

저같은 경우에는 0.25는 너무 가늘고 대중적인 0.3은 뭔가 부족하니 0.4가 제일이지요 
그런데 아끼고 아끼던 펜이 사라진지도 어연... 역시 궁은 뭔가 터가 안 좋아요(땀) 
그래서 지금은 ZEBRA 클립온으로 연명중이랍니다(웃음) 

그나저나 면접 지원하기 힘들군요- 사이좋은 세상으로 먼저 검색들어가야겠습니다(웃음) 
밀실야합하면 제가 또 능숙합니다- 괜히 행정학과가 아니거든요. 저는 밀실행정입니다. 흐흐 2009-01-19
17:05:20
  

 

상병 김용준 
  이제는 거의 실수 안하고 열심히 복사신공을 하는데 에휴. 날려 먹다니 끌끌끌. 

사람마다 다른 환경과 다른 사람들과 정말 하나하나가 다 틀린 요소를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아가는 동안 그 사람마다의 민규씨가 말하는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겠죠. 후후. 모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때요? 어찌되었든 민규씨는 민규씨인걸? 낄낄낄. 

후후. 먼저 저녁밥 드시고 기다리세요. 천천히 나갈테니? 흐흐흐. 2009-01-19
17:52:43
  

 

병장 김민규 
  못지않은 문구 매니아시군요. 저는 기분전환이 필요하면 대형 문구점에 가요(헉) 
몇 개 담다보면 금세 이만원이 넘어가는게 탈이지만. 한때는 0.3샤프의 마력에 빠져서 한동안을 허우적거렸는데, 궁이 고쳐줬군요. 흐흐 

이건 뭐 앉아있다보면 너도나도 와서 '아저씨, 펜 있어요?' 하는 통에, 잠시라도 그놈의 추적관리를 안 하면 스르륵, 없어지지 않겠어요. 접대용 펜을 따로 들고 다니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꼴아박은 펜만 대충 십만원치는 될 것 같아요. (울음) 

밀실행정이라, 그야말로 끌립니다. 잠깐만, 이거 이러다가 마구로 옹에게 진압당하는건 아니겠죠.... (형님이라 부른다고 했었었는데) 2009-01-19
17:59:42
  

 

병장 김민규 
  용준/ 설마 또 복사실패이신가요. 허허. 그냥 저혼자 지껄인 잡설에서 뭔가 공통점이 나온다면 그야말로 신비한 일이겠지요. 아마도, 그게 이 세계의 매력 아닐지요. 

그런 의미에서 용준씨의 세계도 좀 듣고 싶네요. 허허 2009-01-19
18:01:17
  

 

상병 김용준 
  공통점이 있다는 자체도 정말 노랍고 신비한 일이죠. 후후. 매력이라....유혹도 되겠죠? 

음...저의 어떤 세계를 말하시는지요? 낄낄낄. 2009-01-20
08:4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