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히드라 예찬  
병장 정영목   2008-07-07 07:21:03, 조회: 447, 추천:1 

한때는 온순하기 짝이 없던 존재가 이제는 유혈과 폭력에 굶주려 있는데다 특히 행동하는 방식이 아주 잔인하여 악명이 높다.

블리자드의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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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무리 출판사(www.galmuri.co.kr)의 책엔 히드라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그 곳엔 다음과 같은 설명이 곁들어 있습니다.

"히드라: 저항, 생성, 협력을 상징하는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뱀, 권력과 위계적 질서의 상징인 헤라클레스의 적으로서 불멸하는 다중의 지혜와 힘을 표현한다."{1}{2}

꿈보다 해몽인건지... 그리스 신화를 탐독해 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뭐라 의문을 제기하기가 어렵네요. 그저 신선한 느낌만 들 뿐입니다. '히드라=괴물'이라는 등식에만 익숙해 있었지, 저런 내막이 있는 줄은 몰랐으니까. 저 텍스트의 해석대로라면 전 당연히 히드라 편입니다.

하긴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개념이란 것에 이와 같은 경우가 비단 히드라 뿐일까요? '바알(Baal)'이라는 악마도 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섬기던 주신의 이름이라죠. 한니발의 뜻이 '바알의 축복'이라는 썰도 있던데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은 못했습니다. 뭐... 역사 그 자체가 승리자들의 이야기니 이런거 일일이 세보는 것도 꽤 남사스러운 일입니다만.

그래서 대신, 위 설명에서 등장하는 '다중'이란 용어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히드라 예찬을 하려면 본문 용어 정도는 알아야 하니까요. 다중(Multitude)은 원래, 초기 근대의 반(反)홉스주의 철학자인 스피노자의 핵심 용어였다고 하는데, 아우또노미아(Autonomia: 이탈리아어. 자율이란 뜻과 가장 가까움) 사상의 주인장 안또니오 네그리가 이를 '싸이버네틱 경제의 사회적 공장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다양하고 이질적이며 혼종적인 사상들의 집합체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했다고 합니다.{1:495}

어렵죠. 그래서인지 저자도 후렴구를 달아놨습니다.

"다중은 민중 및 대중과의 비교를 통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통합되고 단일하며 대의된 주권적 주체성을 가진 민중과는 달리 다중은 반대의적이며 반주권적인 주체성이다. 그리고 비합리적이고 수동적인 주체성인 대중과는 달리 능동적이며 행동적이고 자기조직화 하는 다양성이다. 다중은 민중과는 달리 사회적 힘들의 다양성이며, 군중과는 대조적으로 공통의 행동 속에서 결합한다. 요컨데, 다중은 특이성들의 공통성이며 공통적 특이성들이다."{1:495-496}

머리 쥐어짤 필요 없습니다. 히드라의 머리는 결코 똑같지 않으며 '뇌'가 없는 꼬리와 혼동해선 안된다는 겁니다. 민중이란 용어는 사람들을 같은 범례에서 보려는 우를 범하기 쉽고, 대중이란 용어는 사람들을 우둔한 이로 얕잡아 보려는 시각이 녹아있기 때문에 그 대체제로서 등장한 용어랄까요.

대중이란 표현의 단점은 직관적으로 와 닿는 면이 있습니다. "대중에게 연설할 때는 중학생에게 말하듯이 하라"라는 말이 있듯이, 은연 중에 대중이란 용어를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때가 분명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민중은 뭐라 꼬집기 어렵습니다. 괜한 생사람 잡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는 죠지 레이코프의 "중도는 없다"라는 화두와 연결하면 조금이나마 맥락을 잡을 수 있겠습니다.

이를 테면, 모든 이의 관점을 포괄하는 통합된 입장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거나 있어도 '혼합물'일 뿐인데, 그것을 '민중의 요구'라는 이름을 붙여서 찾아다니는 것은 헛수고라는 것이죠. 반면, 다중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면 얘기가 다릅니다. 필요한 것은 '보물 찾기'가 아니라 '강화'가 되니까요. 히드라 머리 각각의 특이성을 확고히 하는 것이 히드라가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 머리들을 조율한다고 해서 하나의 끈으로 묶는 건 그야말로 우스꽝스러운 일이구요. 그런데, 민중이라는 말이 그 환상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

물론 조율은 필요합니다. 당연한 얘기지요. 다만, 다중이란 용어는 그 조율이란 것이 아주 역동적인 과정이란 사실을 우리에게 인식시켜 준다는 게 장점이랄까요? '다중의 요구'. 뭔가 일개 끈으로 묶을 수 있는 포스가 아닙죠.

누군진 몰라도 다중을 히드라로 표현한 건 참으로 멋진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히드라: 제국과 다중의 역사적 기원>이란 책이 나온 듯 하니 한 번 읽어봐야겠고... 요새 유행타고 있는 '집단 지성'이란 것과 아우또노미아 사상이 말하는 '다중 지성' 간의 차이를 고찰해 볼 생각입니다.

아, 그리고 오늘부터 제게 히드라는 나쁜 넘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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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1} 조정환, 『아우또노미아』, 갈무리, 2003.
{2} 갈무리 출판사, www.galmuri.co.kr.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9:31:53 

 

병장 장윤호 
  그래도 술만 먹으면 사방으로 침을 뱉는, 제 후임 히드라는 나쁜 넘입니다....(웃음) 

좋은 글 잘봤습니다. 근래의 일련의 사건과 연결지으면 재미있겠는데, 지면이 지면인지라... 2008-07-07
10:22:38
  

 

상병 강수식 
  제 전역한 사수는, 회식이 끝난 날이면 침대에서 자다가 혼자서 침을 찍찍, 
뱉고는 했죠. 자고 일어나면 그 사람의 목덜미와 침대주위로 낭자하던 침의 흔적들. 
갑자기 그 사람이 생각나네요(하하)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2008-07-07
10:37:00
  

 

일병 이동열 
  앞으로의 글이 더욱 됩니다! 

역시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008-07-07
12:25:00
  

 

병장 이동석 
  자면서 침뱉어 봤어요? 
안 뱉어 봤으면 말을 마세요. 

(울음) 2008-07-07
12:54:50
 

 

병장 황인준 
  다중 대중 민중... 
비슷하면서도 다른 단어들이군요. 
다중이란 단어는 익숙하면서도, 잘 들어보지 못했던 것 같네요. 
다중, 다중이라... 어려워요(울음). 2008-07-07
13:08:52
  

 

병장 정영목 
  제 생각에도 다중이란 용어가 민중과 대중을 대체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의미는 좋습니다만. 

비슷한 예로, 비정부기구(NGO)-비이윤기구(NPO)-시민사회기구(CSO)가 있겠습니다. NGO라 하면 기업도 NGO가 되고, NPO라 하면 너무 경제 논리로 따지는 셈이라, 시민사회기구(Civil Society Organization)라 부르는 것이 가장 합당한데도, 그게 잘 안되죠. 

풀뿌리에게 유리한 단어는 쉽게 안바뀌는 것 같습니다. 2008-07-07
13:50:07
  

 

병장 이동석 
  "히드라: 저항, 생성, 협력을 상징하는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뱀, 권력과 위계적 질서의 상징인 헤라클레스의 적으로서 불멸하는 다중의 지혜와 힘을 표현한다." 

다시봐도 죽이는데요? 

김상봉 교수의 저작들을 추천합니다. 
그리스 신화로 치면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분인데도 지방대 교수라는 것때문에 딱히 부각은 못되는듯 하군요. 얼마전엔 진보신당 비례대표로 나오기도 했는데 뭐 그런거에 상관없이 우리 시대 활동하는 철학자라고 부를만한 몇 안되는 분입니다. 얼마전에 홍세화씨가 한겨레 지면에서 소개하기도 했지만, 스스로는 학벌을 충분히 갖춘 분인데도 학벌없는사회만들기운동의 주도적으로 시작한 분이기도 합니다. 2008-07-07
14:58:43
 

 

병장 이태형 
  아이고 어려워라. 2008-07-07
15:21:18
  

 

병장 정영목 
  이동석 님// 

소개 감사합니다. 조만간 읽어보겠습니다. 2008-07-07
15:54:34
  

 

이병 장봉수 
  다중의 지혜와 힘... 
나쁘지 않군요. 
원래 뱀 자체가 지혜를 상징하고 히드라의 경우 다수의 머리이니까 다중의 지혜일까요? 
흐음. 
연금술사들이 신봉했던 궁극의 지혜를 가진 뱀이 생각나네요. 
이름이... 
뭔지 기억이 안 나는 군요. 
꼬리를 문 뱀인데.... 2008-07-08
01:24:13
  

 

병장 문두환 
  참 괜찮은 글인데 의외로 묻혀 있군요. 일반적인 통념과 다른 대상에서 민중과 대중 다중의 의미를 추려내는 논리구조가 재밌었습니다. 쉽게 사용하는 단어들이기는 하지만 그 나름의 역사적 의미와 쓰임이 다를터인데 이제껏 참 무신경했었네요. 지금이라도 가지로! 2009-01-10
16:08:57
  

 

병장 이동석 
  영목님 글은 확실히 지식의 최전선에 서있습니다. 일종의 얼리어답터-인 영목님은 열걸음쯤 멀찍히 앞서나가 새로운 것들을 소개해주는 정말이지 친절한 선지자-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신듯 합니다. 그 선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제게 약간의 자괴를 느끼게도 하지만은, 언제나 신선한 자극이기도 했습니다. 

공로상은 아닙니다. 그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죠. 

가지로- 2009-01-12
21:18:00
 

 

병장 정영목 
  헛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수가 없군요 (땀) 2009-01-13
08:2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