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환상소설을 위한 변辯 - 하이트를 여전히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서  
병장 김민규  [Homepage]  2008-11-16 00:24:47, 조회: 183, 추천:0 

환상소설을 위한 변辯
- 내가 하이트를 여전히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서

바야흐로 대중문화의 시대다. 신은 죽었다고 했는가. 그 표현 그대로 빌려 나는 귀족은 죽었다고 말하겠다. 예술의 고고함과 품격을 지탱하고 유지시키던 세도가들이 몰락하고, 새롭게 등장한 신흥 자본가들은 중세의 예술취향에서 멀어져버린 지금, 그 자리를 대중의,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새로운 형태의 것들이 대신하고 있다. 오페라와 오케스트라 공연은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십 수개 관을 가진 스크린과 B-boy들과 록커의 영향력에 밀려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이제, 그 화려한 영광의 자리에 있던 상위 가치로서의 예술은, 여전히 질적 우세라는 꼬장꼬장한 자존심을 지키고 있을지언정, 이 시대를 살아가는 다수 대중에게 현실적인 호소력을 주지 못하고 있다.

마이너한 ‘고급 예술’의 처지는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미 그것이 주도적 입지를 굳히고 있던 중세에도 일반 대중은 그것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차단당했다. 진작부터 소수에 의해서 향유되고 발전되어 온 것이 예술이다. 부르주아가 호황속의 여유를 누리면서 상류층으로 편입되어 그것을 함께 향유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먹고살 생존의 문제에 더욱 초점을 두고 있던 일반 민중들이 현실 속에서 자신들이 느끼는 감각을 예술 활동으로 승화시키기 시작했다는 점은, 이전까지의 판도를 바꾸는 중대한 변화로 주목해볼 가치가 있다. 과거에도 민중들은 현실의 모순을 풍자와 패러디의 미학이 담긴 연극 등으로 표출하기는 했지만, 기술적 제약과 교통, 통신의 미비로 하나의 조류를 이룰 만큼 거대한 규모를 이루지는 못했기에, 현재의 상황과는 다소 분리해서 봐야 할 필요가 있다.

학문이 정립된 이래로 예술은 소양이요 교양으로 받아들여졌고 그 정형화된 체계를 벗어나는 모든 시도는 그 시초에 제지당했다. 대부분은 ‘제대로 된 예술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것을 파괴하고 수준을 끌어내리는 저급한 시도’쯤으로 받아들여졌고, 그 진정성이 인정받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현대사회에서 수시로 등장하는 예술의 하향평준화에 대한 비판은 그 나름대로의 논거를 갖고 있다. 어렵고 고지식하다는 이유로 수천년간 쌓아온 인류의 보물에 더 이상 누구도 손을 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쉽고 가볍게, 모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보다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형태로, 그렇게 만들어진 신문화가 각광받고 있는 현실이 못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모순적으로 현대에 와서 칭송받는 많은 음악가들마저 정작 그의 생애 중에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점을 기억해 보면, 이 논의가 단순히 ‘한글을 파괴하는 귀여니 소설은 나빠요’로 끝날 수 있는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언제라고 언어가 변하지 않았던 적이 있는가. ‘칼’이 고려 시대에는 ‘갈’ 이라고 불렸던 것을 알고 있는가. 언어파괴의 주범은, 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글의 경화와 외래어의 난립을 조장하고 있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만큼, 우리가 신봉하는 기준들은, 상대적이다.

이 자리에서 내가 예술 전 분야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은, 내 부족한 ‘소양’과 ‘교양’ 의 한계로 적합하지 못한 것 같다. 뭔가 말을 하려면 객관적 사실들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이끌어내야 할 것인데, 솔직한 말로 나는 콩나물대가리도 모르고 언제 글에 대해 체계적으로 깊이 있게 공부해본 바도 없다. 그러나 소위 판타지 소설과 N문학을 보고 읽으며, 현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나름대로 느끼며 정리한 바를 종합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우리의 언어와 감성으로 가슴속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도록, 지금까지의 형식주의와 전통에 도전하는 혁명적인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내게 있어서는 게을리 할 수 없는 사명이자 당연한 도리이기에, 부족한 필력이고 지식이지만 <한글>을 켜게 되었다.

1. 사대주의와 섣부른 검증의 위험성에 대하여

판타지 소설, 아니, 무식의 소치인 단어사용을 지양하고 무준님께서 지적하신대로, 환상소설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그 자체가 지니는 한국에서의 특수성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가 있다. 해외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환상소설이 하나의 장르문학으로서 인정받는 풍토가 조성되어왔으며, 그런 여건 위에 <반지의 제왕>과 <나니아 연대기>는 세워질 수 있었다. <해리포터> 시리즈는, 어느 날 혜성같이 등장해 연령층을 구분하지 않는 폭발적인 지지를 받으며, 하나의 신드름으로 전 세계적 파급력을 미쳤다. 그런 <세계적 명작>에 대해서 국내의 그 어느 학자도 감히 <저급한 판타지 소설>이라는 호칭을 붙이지 못한다. 그러나 교과서에 실렸다는 <드래곤 라자>와, 필자 역시도 즐겁게 읽었던 <가즈 나이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평가와 대접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독특한 세계관과 긴박감 넘치는 스토리, 섬세한 묘사로 세계 몇십개국에 번역되어 수억명의 독자에게 읽힌 공인된 <명작>이기에 문학적 값어치는 당연하다는 것인가. 만약 그러한 것이라면, 그것은 저급한 사대주의의 일종일 뿐 다른 어떤 말로 정당화될 수가 없다. <드래곤 라자>가 고작 하이텔에 연재된 통신 소설일 뿐이라 인정해줄 수 없는가. 왕비호 컨셉으로 비난을 감수하고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해리 포터>는 실직한 아줌마가 커피숍에 앉아 끄적거린 책 아니었는가.
아니, 보다 궁극적으로, <명작>이라는 호칭은, 누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달아주는 것인가? 근현대사에 대한 평가 역시도 그 동시대성을 이유로 유보하고 미루고 있는 판에, 현시대에 쓰여 아직 제본 풀이 마르지도 않은 책들에 대해 즉각적으로 평론하고 가치판단을 하겠다는 것인가. 갈릴레오의 비극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평론가들이 무어라 말하든, 세인들이 그 가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 그래도 지구는 둥글고 모차르트와 비발디와 바하의 곡은 감동을 준다. 모두다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한 보물들이다.
섣부른 검증이 가지는 위험성이 거기에 있다. 더불어 우리 것은 저급하고, 모자라고, 더 배워야 한다는 근거 없는 열등의식은 환상소설의 발전에도, 우리 문학계의 성장에도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한다. 비가 미국에서 차트에 오르면 띄워주기라며 그가 뉴욕에서 공연한 곳이 사실은 아레나가 아니라 그 옆의 작은 무대였다는 식으로 평가 절하해야 속이 편한가? 희망은, 어디에 있는 걸까?

2. 순수문학과 순수하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초중고 12년과 대학생활에 이르기까지 나는 청록파 시인의 특징과 세자니 네자니 하는 형식과 그들의 심상에 대해서 [배워]왔다. 그것은 교과서적인 예문으로 실려 당연히 칭송받고 우러러보아야 할 표상이었다. 그렇다, 그것들은 우리가 낳은 작품이요 결정체가 맞다. 허나,

어디까지가 <문학>이고, 어디부터가 문학이 아니라는 것인가. 문학이 아니라면, <비문학>이라는 것인가.

문학
(文學)【명사】【~하다|자동사】 
1.  자연 과학 및 정치·법률· 경제 등에 관한 학문 이외의 학문의 총칭. 곧, 순문학·사학·철학·언어학 등. 
2.  정서나 사상을 상상의 힘을 빌려서 언어·문자로 표현한 예술 및 그 작품.
¶ ∼ 취미/ ∼에 뜻을 두다.

어디까지를 문학의 영역 안으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등] 이라는 애매한 단어로 문학을 규정한 한컴사전을 믿고 가기에는, 정의된 바가 너무도 어쭙잖다. 어쨌거나, <순문학> 이란 또 무엇인가, 순수문학과 동의어란다. 순수문학이라고 하면, [어떤 정치적·계몽적 동기에서 이루어진 공리주의적 또는 대중 문학·통속 문학이 아닌 순수한 예술적 충동에서 형성한 문학] 이라고 한컴사전은 친절하게 설명한다.

순수한 예술적 충동이라, 좋다. 계몽주의도 안 되고, 스포츠도 안 되고, 대중문학도 안 되고, 통속적이면 더더욱 안 된단다. 그냥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그 찬란함에 대해서 이야기해야만 순수 문학인 것인가? 그렇다면 인간사가 문학에 끼어들 여지는, 사라지는 것인가? 인간사의 희로애락喜怒愛樂은 결국 세상과 긴밀히 연결되어있고 그것은 통속通俗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을 노래하고 추억을 이야기한 <소나기>나, 이데올로기적 긴장과 모순을 담담하게 그려낸 <태백산맥>은, 권력암투와 위촉오의 세력다툼을 그린 <삼국지>는, 결국은 통속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말이다.

통속
(通俗)【명사】 
1.  일반 세상에 널리 통하는 풍속. 
2.  전문적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알기 쉬운 일.
¶ ∼ 작가.

전문적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알기 쉬운 일이란 또 무엇인가. 반드시 고도의 지식기반에서 나오는 소재들만이 문학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 오히려 그러한 주제들은 <비문학>의 소재로서 더욱 적절한 것들이 아닌가?

정리하자. 이미 순문학이네, 순수네, 하는 단어들에서부터 모순이 마구잡이로 튀어 나오고 있다. 이에 관련된 논문을 몇 편쯤 읽고 썼다면 더욱 설득력이 있겠으나, 그 역시도 끼워 맞추기에 지나지 않으리라는 섣부른 좌절감을 체감한다. 이런 견해에서라면, 이미 구분짓기는 설득력을 잃고 무엇을 어디에 넣어야 할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사태가 초래되는 것이다.

3. 문학의 기능과 의의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거나 지식의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비문학과는 달리, 문학은 단순히 예술적 충동을 그 이유로 한다는 점을 위에서 살펴보았다. 쓰는 이가 그러한 동기로 쓴다면, 읽는 이는 왜 읽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개인마다의 성향에 따라 다른 답이 나올 수가 있다. 어떤 이는 한 구절 한 구절을 음미하는 언어적 미의 향유에 가치를 둘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읽는 동안의 즐거움을 위해, 어떤 이는 비평을 위해, 누군가는 정서와 감정의 해방을 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좋아서’ 라는 점이다. 그저 읽는 것이 좋고, 그 과정에서 무언가 얻는 소득이 발생하는 것이다.

읽는 즐거움은 당연한 것이며 우리의 독서를 지탱해주는 힘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는 이견이 없겠으나, 어떤 글을 읽을 때에 즐거운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딱딱 떨어지는 형식의 묘한 멋 안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도 있다. 그리고 저쪽 정 반대로, 모음이 붙지 않은 자음과 기호들이 난무하는 글 속에서 그 조합이 주는 특유의 느낌에 공감하며 마치 내가 그 장면에 참여하는 듯 한 묘한 착각을 즐기는 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 물론 환상소설이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비교를 위해 끌어온 극단적인 예일 뿐 -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며, 단순한 취향의 차이일 것이나, 현실에서의 인식은 그렇지 못하다.

예술이 소양이 되고 교양이 되는 환경 속에서 후자의 경우는 흔히 저급한 것으로 취급받고, 언어체계와 문학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한다. 그렇다. 쉽게 쓰인, 고민의 깊이가 보이지 않는 글이, 불편할 수 있다. 아니, 분명히 불편하다. 앞뒤 호응도 되지 않는 비문들의 집합체를 글이라고 한다는 것 자체가 한심해 보일 때가 많다. 그러나,

글쓴이의 미숙을 탓해 그 완성도에 시비를 할 수는 있어도, 그가 글을 쓴 목적과, 그것을 읽는 자의 즐거움, 이 두 가지가 결합되는 이상에, 그것의 존재가치를 그저 부정할 수 있는 것인가? 아래 다른 글에 달았던 리플에서 언급했던 이야기지만 한 번 재탕을 하는 용기를 내자면, 

1000원 한 장이면 살 수 있는 소주와, 면세가로 500불이 넘는다는 프랑스산 Gray Goose Vodka는, 둘 다 무색의 알코올 향이 나는 술이다. 취하기는 똑같고 맛에 대한 부분은 철저하게 주관적이니, 무어라 명확한 답을 내릴 수가 없다. 후자 쪽이 알코올 도수는 두 배로 높으니 그 쪽에 두 배의 점수를 줘야 하는가? 혹은 희석식이냐, 증류식이냐, 등의 제조방법에 따라 가치를 매겨야 하는 것인가? 도대체 저 극단적인 가격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

와인에 대해 다룬 신의 눈물이라는 만화 덕에 국내에도 때 아닌 와인 붐이 불었다. 1000원 한 장 들고 깡소주를 마시는 사람들에게는, 도대체 포도의 재배온도와 풍향, 숙성의 정도에 따라 수백만원짜리 술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상대적 박탈감으로까지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또 마셔 보면, 그 맛의 섬세한 깊이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가 없다. 취향의 차이라고 하기에는, 엄연히 질적 차이가 존재하고 그러한 가치체계가 반영된 것이, 여기서는 가격의 차이로 나타났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쪽이나 저 쪽이나 똑같은 술이다. 하지만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개별적 차이들은 있고, 부정할 수가 없다. 오비와 카스와 하이트와 프라임을 놓고 입으로 블라인드 테스트 해낼 자신이 있는 필자로서는, 필스너를 먹어 보니 분명 맛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고, 그러나 그렇다고 또 하이트의 기특한 의의를 포기할 수도 없다. 여전히 동네 치킨집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마실 수 있는 시원한 한 잔은 소중하니까.

이게 바로 질적 차이를 능가하는 효용의 가능성이다. 그리고 그것은 문학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예술적 가치와 완성도에 강조점을 둔 나머지 다양성의 소중함와 취향의 차이를 밀어 버린다면, 우리에게 소-맥을 즐길 수 있는 기쁨은 아직까지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50여종에 이르는 맥주를 먹어보고 내린 결론은, 하이트는 맛없다, 였지만, 그게 하이트 무용론을 입증하는 결정적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건, 그 나름대로의 값어치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 하이트가 여전히 소중한 유일한 이유다.

4. 환상소설이 설 자리에 대해서

환상소설은 인류가 가진 고결한 축복인, 상상력에 의존하여 세계관을 형성하고 이야기를 이루어간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이미 예술적 동기를 가진다. 다른 무슨 동기가 있다는 것인가. 그저 글 쓰는 것이 좋았을 뿐이고, 상상의 나래를 펴며 물리적으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경계를 때로는 넘나들며,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 도달할 수 없는 세계의 벽도 때로는 거부하고, 만날 수 있는 종족과 만나지 못한 종족들이 혼재하며 살아가는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 것 뿐이다. 그보다 더 순수한 예술적 동기가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상소설은 ‘말도 안 되는 소리’ 내지는 ‘아무 짝에도 도움 안 되는 공상’으로 치부받기 일쑤이다.

인류는 지금까지 상상력의 힘으로 세계를 개척해 왔다. 뛰어 다니던 인간이 기차를 만들고, 전화를 놓고, 하늘을 날고, 우주로 진출하는 것은, 그것을 정복하기 이전의 관점에서는 말 그대로 쌀만 축내는, 米친 짓이다. 그러나 그 무모함이 기제가 되어 새로운 단계를 개척했을 때, 그것은 美친 짓이 된다. 그것이 곧 혁명이고 인류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전기의 마련인 것이다.

환상소설은, 현실에 찌든 내가 다시 꿈꿀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 있어 환상소설이 중요한 유일한 이유다. 이미 수십년의 시행착오를 거쳐 온 우리나라에서의 주류문학에 비해 아직 뿌리가 깊지 못하고 보완의 여지가 남아있다는 지적은, 감사히 받겠다. 그러나 그것은 애정에 근거한 발전으로의 논의가 되어야 하지, ‘너희 수준이 그 정도지’ 하는 비아냥이 되어서는 안 된다. 깊이에 대한 고민, 좀더 나은 작품을 위한 뼈를 깍는 과정은, ‘그 바닥’ 안에서 자체적으로 배워가고 이루어갈 과정이지, 그것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싹을 잘라버리고 문학의 리그에서 밀어내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입맛에 맞게 비슷비슷한 글들을 제목만 바꾸어 내놓는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당신에게, 나는 <묵향>과 <퇴마록>, <데로드 앤 데블랑>의 스펙트럼 분포에 대해 생각해볼 것을 권한다. 이 셋은 우리나라 환상소설계에서는 비교적 초기에 쓰인 글들로, 내가 중학생일 적 이미 출간되어 있었던 책들이다. 그럼에도 각각은 독특한 세계관을 꾸려나가고 있으며, 충분한 상상과 모험의 여지를 제공했다. 그로부터 십년이 지난 지금, 강산이 바뀔 수 있는 시간동안 우리의 환상문학이 어디까지 왔는지 그대는 알고 있는가. 선입견과 마음속 판단을 맹신해 일방적인 결론에 도달한 것은 아닌가. 전 세계의 환상문학으로 탐색의 범위를 확대한다면, 그 가능성은 또 얼마나 커질 것인가. 아쉬운 예들만을 부각해 환상소설들은 다 그렇다, 는 식의 귀납추리를 할 셈인가.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있지 않은가.



이것이 내가 환상소설을 지지하고 여전히 사랑하는 이유다. 그리고 그 안에 얽힌 오해들과 편견들이 풀리기를 바라는 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 시간 몰래 읽다 선생님에게 지적을 받을 때의 그 어두웠던 기억은, 우리가 환상소설을 무언가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하게끔 하는 엉뚱한 동기를 제공한다. 이제는 벗어버릴 때다. 상위의 가치로서 예술의 고결함을 옹호하는 것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는바 아니나, 언제까지고 대중의 힘을 외면하며 변화를 거절하는 고집불통으로 남아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지구가 네모난 모양이라고, 도는 것은 저 하늘이라고, 유일한 것은 땅, 불, 바람, 물, 마음이라고, 얽매인 가치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일 수도 있다.

변화를 거부하고 정체하는 모든 것은 침몰한다. 문학에도 새로운 피가 필요하며 신선한 충격은 값지다. 열린 마음에서의 접근과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때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5:40:46 

 

병장 김기태 
  잘 읽었습니다. 뭔가 골조를 잡고 차곡차곡 세운 건물처럼 탄탄하다는 느낌이 드네요. 

하지만 앞서 주욱 얘기해왔던 '부정의 의견들'은 

'분명 우리나라 판타지에도 작품성이 있는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외의 대다수라 할만한 것들은 거의 함량미달의 저급한 글이다.' 
라는 것이더군요. 
뭐 그렇죠. 저 또한 많은 판타지를 읽었지만 제가 읽은 것들 중에도 분명 무척 진부하고 형편없는 작품들도 있었고, 읽어보지 못한 책들이 그 배 이상으로 많으니까요. 

즉 '판타지를 문학으론 인정하지만, 이런 허접스레기같은 작품들까지 문학으로 포함시키고 싶진 않다.' 라고 해석이 되더군요. 이렇게까지 말하면, 순수소설중에서도 형편없고 수준 낮은 글들은 문학으로 포함시키지 않을거냐!!?? 라고 싸울것만 같네요.(땀땀) 

즉 김민규님의 글은 무척 즐겁게 읽었지만, 서로의 핀트가 어긋난 시점에서는 반박의 여지가 많다는 사실 또한 견지하셨으면 합니다. 수고하셨어요(웃음) 2008-11-16
01:46:49
  

 

상병 김무준 
  그러니까 그 부정의 의견에서 주장하는 '글'이 잘못榮募 겁니다. 장르소설은 그 특성상 드러난 부분 즉, 출판된 글보다 그렇지 못한 글이 훨씬 많습니다. 글쎄요. 쓰여지는 글 중의 한 1%나 되려나 모르겠습니다. 한국장르문단의 출발이 그러했듯 장르소설을 제대로 비판하려면 일단 그 바탕이 되는 곳 부터 뛰어들어봐야 합니다. 

주해성씨가 제게 순수문학에 관해 논하기 전에 우물에서 나와 공부하라 했듯 장르문학에 관해 논하기 전에 일단은 공부부터 하고 달려들어야됩니다. 근데 어쩝니까. 가르쳐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반론인들께서 주장하시는 허접쓰레기는 말 그대로 환상의 파편에 불과합니다. 특성을 놓고 생각해봐야 합니다. 장르소설이라는 놈의 특성.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볼 줄 모른다면 혹은 본 적조차 없다면 사자가 개과 동물인지 고양이과 동물인지 어떻게 주장합니까. 2008-11-16
01:54:36
  

 

병장 이동석 
  이런, 이 글에도 댓글 한참 달리지 않았었나요? 이모티콘 찾는다고 주륵주륵 읽었었는데 2008-11-18
18:1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