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헤겔을 다시 읽기, 나라에 충성하기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7-16 223634, 조회 115, 추천5 

혹시 문제의 소지가 있다면, 바로 삭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1.  
  최근에 출간된 우연성, 보편성, 헤게모니라는 책을 독서했다.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슬라보예 지젝, 해체론적 여성주의 철학자이자 '퀴어 이론가'로 명성을 떨치는 쥬디스 버틀러, 사X주의와 헤게모니 전략이라는 기념비적 저서로서 안토니오 그람시의 정치이론을 현대적으로 갱신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이 세 사람의 불꽃 튀기는 논쟁들이 하나의 책에 압축되어 있다. 물론 이들이 '모여서' 논쟁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현대적 ㅈ파의 길을 모색하기 위함이다. 이들이 기존의 고전적인 계급론이나, 고리타분한 막수주의(하지만, 도대체 언제 그게 고리타분한 적이 있었다는 것인가)에서 탈피하고서 '해체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후기구조주의'적 사고들을 폭넓게 수용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는 일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이들이 공유하는 어떤 기묘한 공통분모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헤겔'이다. 이들은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헤겔로 돌아가서, 그의 사유를 꼼꼼하게 재독해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글 곳곳에서 그들 나름의 독창적인 헤겔 해석들에서 드러난다. 그렇다면 역으로 그들의 대담이 우리에게 던지는 몇 가지 질문들(나는 나중에 이 질문들로 돌아올 것이지만)이 있다면, 그것은 '왜 헤겔인가'냐는 질문이다. 다소 추상적인 정식화지만, 나는 이 질문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2.
  다소 논의를 우회해서 전개하자면, 지난 번 도서출판 b의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이하 우연성) 출간 기념 파티(라고 해봤자 조촐한 것이었지만)에서 주워 들은 이야기를 인용해야겠다. 지젝의 다수 저작을 번역한 '이성민' 씨는 헤겔의 변증법에서 가장 '기묘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헤겔의 사고방식에서,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저 변화무쌍하고 복잡한 사물을 따라잡지 못하는 게 아니다. 물론 이것은 전적인 '칸트적'인 문제이다. 칸트에게 있어서 '문제'는 말 그대로 개념이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었고, 그는 단지 그 개념이 그것에 끊임없이 다가가고자 하는 '이념'에 의해 이끌어진다는 방식으로 사태를 정리했다. 그런데 여기서, 개념이 사물을 충분히 포착하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그 개념 자체의 구성적 조건이라는 것을 간파한 것은, 헤겔 자신이었다. 말하자면 엄밀히 말해서 개념은 결코 사물을 파악하는 데 실패하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패' 그 자체를 자신의 조건으로 정립하기 때문이다. 좀 더 쉬운 예를 들자면, 지젝 자신이 우연성에서 예증한 것처럼, 헤겔에게 합리적 총체로서 '국가'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게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을, 심지어 영화 매트릭스처럼 사적인 영역의 관습과 개인적인 감수성마저도 '합리적'으로 질서짓는 '국가'라는 것을 상상하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 헤겔에게 진짜 문제는 그러한 '합리적 총체'로서의 국가가 현실에서 실현 가능하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진짜로 현실화될 때, 그것이 '개념적인 차원'에서 더 이상 외적인 권위자로서의 국가가 아니라, 모든 내밀한 것들을 의례화하는 종교 공동체(혹은 매트릭스)가 되어버린다는 '역설' 내지는 개념적 '반전'이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헤겔에게 진짜 문제는 개념이 사물을 못 따라가는 게 아니라, 현실적인 사물이 개념의 미묘한 역설과 반전을 제대로 못 따라잡는 것으로 전도된다. 변증법이란 언제나 '멍청한 사물'의 실패를 다시 개념적인 긴장으로 치환하는 끊임 없는 역설과 아이러니의 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통상적인 '진리 대응설'의 정 반대라는 점을 강조해야 마땅하다. 개념이 사물을 적절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사물이 너무 멍청해서 개념을 못 따라잡는 게 문제인 것이다. 나는 진정한 '형이상학의 전복'이라는 게 바로 여기(헤겔의 변증법)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칸트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계승되어 온 어떤 형이상학적 가정(진리 대응설)을 일거에 해체시켜버린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헤겔은 정확히 이러한 '해체'를 가능하게 만드는 토대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사고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얼치기 해체주의자보다 더 해겔이 낫다는 점을 증명하는데, 그는 기존의 상황에서라면 단순히 '말장난'에 불과한 '변증법'이라는 특유의 사고방식이 정말로 작동할 수 있는 어떤 물적 토대를 끈질기게 추절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진리 대응설'에 대한, 이러한 개념적 전도 자체는 오로지 '근대 국민국가Nation-State'라는 정치적 조건 속에서 '현실화'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사실, 사물이 개념을 못 따라잡는다는, 언뜻 봐서는 말장난에 불과한 변증법의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정말 '현실적인' 사태로 피부 깊숙히 경험되는 것은 오직, 대외적으로 그리고 대내적으로 유일하고 배타적인 주권(폭력권)을 소유한 근대-국민국가 내부에서이다. 일례로 궁궐을 생각해 보라. 거기에서는 사물이 개념을 못 따라잡는 것이 진정한 '문제'로 경험되는 어떤 특권적인 장소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로지 근대국민국가 속에서 새로운 철학적 도약이 일어날 수 있으리라는 헤겔의 신념과도 들어맞는다. 이것은 헤겔이 그토록 '국가 철학자' 심지어는 '패권주의자'로 비난받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3.
  그리고 또 한 가지 아이러니를 지적해보자. 어쩌면 오히려 헤겔 자신이 기존의 형이상학적  구도(진리 대응설)를 전복시켰던 것은, 현대철학(해체주의, 후기구조주의)을 예비했던 게 아닐까 반문해 볼 수 있다. 그가 특유의 '변증법적 사고'를 통해, 현실에 대한 개념의 자율성을 부여했던 것이, 말하자면 '표상Represent되는 것에 대한 표상Representation 자체의 과잉'이라는 원칙으로 연결되지 않겠는가 말하자면 (표상되는) 현실이 (표상하는) 개념에 자신을 투영하는 게 아니라, 개념 자체가 만들어내는 아이러니와 간극이 사후적으로 풍부한 현실감을 생성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헤겔과 현대적 해체주의자가 놀랍게도 같은 것을 공유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헤겔은 이 원칙을 철저하게 단언하면서, 그것을 '(표상되는)신민에 대한, (표상하는) 국가의 우위'라는 정치적 당위로까지 밀고 나갔던 것이다. 

  만약에 헤겔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 있다면, 그것은  우선 헤겔이 생각보다 우리에게 가까이 있다는 것이고, 좌파 해체주의자들이나 탈근대적 좌파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그 원칙들(개념은 현실을 선-구조화하며, 현실 자체에 대해 임의적인 관계를 맺는다. 우리는 현실에 접근할 개념적 수단만 있는 게 아니라, 현실 자체가 개념적 조작의 부산물로 등장한다 기타 등등)이 정확히 헤겔에게 '근대 국민국가'를 옹호해야만 하는 절대적 이유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왜 이제는 공허한 구호로만 남은 '반헤겔주의자'와, 그것의 정치적 등가인 반-국가 담론들의 유혹에 단호히 저항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4.
  나 스스로도, 국가의 권위를 부정하고 그것의 허구성을 폭로하려는 모든 지적이고 해체론적인 수사적 전략들에 의구심을 품고 있는데, 헤겔이 말했듯이 그러한 수사적 전략들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정확히 '국가'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과거 봉건사회에서, 어떤 수사적인 전략으로 자신의 계급적 제약을 임의적으로 변경한다는 게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련지 아주 저속한 차원에서만 말하더라도 국가적 권위에 대한 '저항'을 입에 올리는 지적 엘리트들이 교수나 기타 등등의 자리에서, 국가 보조금을 받는 사례들을 봐도 그것은 쉽게 예증될 것이다. 나는 이것을 '위선'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다만 권위에 대한 저항을 이야기할 수 있는 바로 그 조건이, 이미 개개인이 자신의 계급적-신분적 위치로부터 분리시켜버리는 폭력적, 국가권력 내부에서 창출되었다는 것이다. 국가가 독점한 주권적 폭력이, 바로 그러한 해방이 가능한 공간을 창출해내는 조건 그 자체라는 것이다. 나는 가령 전에도 스티븐 호킹이 한 유명한 발언을 인용한 적이 있었는데, 빅뱅 이전의 우주의 상태란 어땠는가라는 청중의 한 순진한 질문에, 그는 빅뱅 이전의 우주를 상상하라는 것은, 남극에 도달해서 더 '남쪽으로' 가려고 하는 부조리를 연상시킨다고 대답했다. 여기서 반-국가 내지는 반-권위를 이야기하면서도, 여전히 네이션-스테이트의 상상력에, 혹은 그것의 좌표에 붙잡혀 있는 동일한 곤궁이 연상되지 않는가 우리가 폭력이나 외적 권위로부터 어떤 해방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여전히 다른 형태의 '국가'를 상상해볼 수 밖에 없다는 헤겔의 단언은, 단순히 완성된 근대국민국가를 가져보지 못했던, 변방국 프로이센의 시민이었던 헤겔의 촌놈근성으로만 치부할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헤겔은 어쩌면 이 '역설'은 온전히 승인함으로써 가장 멀리 나아간 사상가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가령 들뢰즈가 그를 '국가철학자'라고 비난했던 좋은 이유인 셈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위선자는 아니었던 셈이다. 왜냐하면 들뢰즈 자신도 들뢰즈만큼 국가에 대해 충분히 사고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칼럼 란에서 진행중인 김예찬 님의 만주국 세미나라는 것도, 국가에 대한 사고를 보다 전개시키기 위한 지적 시도로 나는 이해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국가라는 어떤 억압기제, 혹은 프로이트가 '초자아'라고 말하는 어떤 초월적 억압구조가, 단순히 어떤 부정적 '금지'만을 행하는 게 아니라, 금지를 넘어설 바로 그 추동력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콤플렉스'란 어떤 금지를 내면화한 작용인 것만이 아니라, 그런 금지를 어떻게 재해석하고 내면화할지에 대한 복잡하고 풍부한 정신작용을 자극하며 추진력을 부여하는 바로 그러한 장치라는 정신분석의 통찰을 다시 생각해봐야한다. 만주국의 경우에서도, 우리는 오히려 근대국민국가의 '오이디푸스-콤플렉스'라는 어떤 강박이 '탈영토화' 과정을 겪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말하자면 이성적인 총체로서의 국가가 '미쳐버린' 어떤 특이한 변증법적 이행 과정을 만주국의 경우에서 볼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것은 들뢰즈에 대한 헤겔의 반격으로까지 보인다. 왜냐하면 '만주국'이라는 반-오이디푸스적인 탈주의 모험이 말하자면, 오로지 '대일본 제국'이라는 극단적 오이디푸스적 배치 내부의 극단적 기획으로 추구되었기 때문이다. 통상적인 관점에서도 만주에 여러 민족들을 조화롭게 통합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시도는 '비합리적'인, 어떻게 봤을 때 미친 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이상주의적인' 시도가 '실제로' 행해졌다는 것은, 그리고 그것이 수년 간 실제로 유효하게 작동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런 광기어린 시도가 정확히 제국주의적 근대국가의 공리계에서 도출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데, 이것은 정확히 우리의 '진보적'인 정치적 상상력이 과거 수십년 전의 제국주의자들의 그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라든지, '민족을 위한 헌신'이나, '집단적 규율'이라는 과거의 전체주의적이고, 폭압적이고, 상상력이 결여된 것으로 여겨지는 가치들이 오늘날에도 다시 '되살려져야'하지 않겠느냐는 지젝의 조심스러운 제안을 온전히 승인하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궁 안에서도, 표어 포스터 경연대회나 각종 글짓기 대회들을 봐도, 앞서 말한 옛날의 가치들을 권장하는 경우를 거의 보기 어려울 지경이다. 말하자면 '반권위주의적' '인권' 담론을 오늘날 국가가 '내면화'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데, 여기에 더해서, 궁궐 안에서 이뤄지는 각종 정신적 교육들은, '자신의 내면의 바램에 귀를 기울이고 존중하라'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아라' '자신의 자존감은 타인의 인정 속에서만 가능하다' 식의 포스트모던한 인권담론들로 채워지고 있다는 현상을 본다면 더더욱 우리가 '반국가' 혹은 '반권위주의' 담론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헤겔이라면 아마, '아름다운 영혼의 법칙'이라고 비아냥거렸던 바로 그 경향들이 사회 곳곳에, 심지어 가장 국가와 밀접한 영역에도 이미 만연해 있는 것이다. 

  이것들이, 오늘날 만연해 있는 저항과 권위의 역설적 반전과 전도현상들이, 우리가 여전히 헤겔과 그의 '변증법'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이유이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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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병 오학준 
  저로서는 이 글을 읽는 것 부터가 매우 큰 도전이군요. 이제 간신히 예전에 원익님이 쓰신 랑시에르에 대한 두 편의 글과 '인문학과 악의'라는 글을 관통하는 '컴플렉스'라는 부분을 어렴풋이 알 수 있을 듯한데, 원익님은 그사이 또 한발짝 달아나고 있어요... (이 무서운 간극!) 

저에게 있어서는 컴플렉스가 일종의 '대가'로서 느껴지는데, 물론 이 대가 없이는 현대 사회에서는 그저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독백의 집합만 있을 뿐이지, 어떤 '대화'라는 사건이 나타나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이 '대가'가 요구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지젝의 조심스러운 제안을 정말로 조심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소위 '포스트'한 사람들이 국가에 대한 사유 자체를 아예 은폐해버리는 경향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에 대한 제동이 필요하다는 것은 느끼지만... 2009-07-17
010003
  

 

상병 이정환 
  일단 감동의 눈물과 함께 박수... 

이것이 아래의 글에서 원익님이 말씀하셨던 '국가에 대해 해명되지 못한 부분'인지요(미소) 

그리고 왜 이 글에 '문제의 소지가 있다면, 바로 삭제해달라'는 문구가 선행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역시 미소) 2009-07-17
074503
  

 

병장 김범수 
  원익씨는, 책마을의 학자에요. 2009-07-17
092012
  

 

상병 양제열 
  헤겔이나 지젝을 이름만 알고 있는 저로서는 원익님의 글이 이해하기 쉽지 않네요. 
다만 '국가의 권위를 부정하고 그것의 허구성을 폭로하려는 모든 지적이고 해체론적인 수사적 전략들'을 비교적 최근에 접하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저로서는 원익님의 이번 글이 큰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라는 속담이 있죠...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려는 시도들과 기획들이 결국 또 다른 파멸로 우리를 끌고 가지는 않을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것 같습니다. 주말 잘 보내시길. 2009-07-17
092118
  

 

상병 진수유 
  잘 읽었습니다. 

국가, 현대적 ㅈ파, 개념과 사물에 대한 칸트적 문제에서 헤겔적 문제로의 전환, 네이션-스테이트, 만주국 세미나, 프로이트의 초자아와 컴플렉스, 오이디푸스-컴플렉스, 그에 따른 우리의 자세 전환. 국가에 대한 반동적 전략들에 헤겔로써 재해석될 수 있는 의외성을 끌어들임.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위험과 오류로부터 새롭게 전진하도록 만드는 동력으로의 가능성.. 

흐흐흐.... 요리사 원익님. 2009-07-17
104041
  

 

상병 박원익 
  오학준 언젠가 그 자신부터가 미쿡 해체주의 비평가였던 '폴 드 만'이 어떤 개념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개념을 믿어야만 한다.는 말을 했었지요. 어쩌면, 컴플렉스에 관해서 비슷한 것을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 진정 냉소적인 시대를 사는 걸까요 그게 전혀 그렇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디선가 지젝이, 이제는 고전적인 연애가 끝난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당신을 사랑해'라는 직설적인 말을 하기를 두려워하는 세태는, 역설적으로 오히려 '고전적인 연애'를 하던 과거 사람보다, '널 사랑해'에 더 많은 것을 믿고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니냐고 반문했었지요. 

이정환'국가'에 대해 해명되지 못한 부분은 여전히 남아 있지요... 

김범수저는 제가 글을 쓸 때 모종의 '전이'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볼 때마다 섬뜩한 기분이 들지요. 사실은, 저도 쓰고 나서야 분명히 알게 된 것도 있고, 글로 쓴 모든 것들을 제가 사전에 안 것도 아닌데, 글을 쓰면 뭐랄까 마치 제가 사전에 이 모든 것을 조망하고 있었던 '저자'로 보이게 되는 과정이 있는 것이죠. 저는 그 과정이 내내 못마땅하면서도, 한편이 기꺼이 그렇게 식자연하게 보이는 것을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진짜 '겸손'이란, 자기에게 퍼부어진 부당한 기대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일 테니 말입니다. 

양제열제 두려움은 오히려 '파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게 아니라, 파멸조차도 오지 않은 채 지리멸렬한 과정이 지속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초등학생 때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빗나가자, 내심 실망했던 기억이 나네요. 초등학생 때부터 저를 사로잡고 있었던 악몽은, 마치 고대 인도인들의 사고방식처럼 우주가 파괴와 생성의 아득한 순환을 영겁의 세월에 걸쳐 반복해오며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이지, 인류에게 파국이 닥친다는 종말론적 생각이 아니었다고 해야겠습니다. 

진수유제가 요리한 건 꿀꿀이 잡탕이지요. 하하. 2009-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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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장 김요셉 
  [참고, 발췌] 

원익씨는 얼마 전에 어쩌면 다음에는 헤겔을 '국가철학자'라고 매도한 들뢰즈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라고 하신 적이 있지요. 그리고 바로 이어 써 주신 이 글을 읽다가, 천 개의 고원중에서 떠오르는 부분이 있어 그 중 발췌해 올립니다. 같이 읽으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흐흐 



(전략) 
소위 근대 철학과 근대 국가 또는 이성적 국가에서는 모든 것이 입법자와 주체(=신민)를 중심으로 운용된다. 따라서 국가가 입법자와 주체(=신민)를 구별할 때는 사유가 이 양자의동일성을 사유할 수 있도록 해주는 형식적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항상 복종하라. 복종하면 할수록 너희들은 주인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오직 순수 이성, 즉 너희 자신에게만 복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토대를 놓는 역할을 자임한 이래 항상 기존 권력을 찬양하고, 국가의 여러 기구의 원리를 국가 권력의 여러 기관들 속으로 전사해왔다. 공통감(sens commun), 즉 코기토를 중심으로 한 모든 능력들의 통일은 절대화된 국가의 합의(consensus)인 것이다. 이러한 대 작업은 특히 칸트의 “비판”에 의해 철저하게 수행되고 다시 헤겔주의가 이를 이어받아 발전시킨 바 있다. 칸트는 [능력의] 악용을 끊임없이 비판했으나 그것은 [능력의] 기능을 찬양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칸트 시대 때부터 철학자가 교수, 즉 국가 공무원이 된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국가-형식이 사유의 이미지에 영감을 불어넣는 순간 모든 것이 규제되는 것이다. 완벽한 호혜주의인 셈이다. 게다가 국가 형식의 다양한 변화에 따라 사유의 이미지도 계속 다른 윤곽을 가진다. 따라서 언제나 동일한 사유의 이미지가 철학자를 묘사하고 지시해온 것은 아니며 앞으로도 반드시 그렇다고 불 수는 없을 것이다. (후략) 

들뢰즈  가타리, ‘1227년 - 유목론 또는 전쟁 기계’, 천 개의 고원, 721 - 722p 2009-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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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김예찬 
  어렵군요. 그래도 요새 올리시는 글들이 상당히 '친절'해진 것을 느끼게 됩니다. 흐흐. 

제 짧은 생각으로는 네이션-스테이트-자본 모두 그러한 역설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세가지 항에 대한 문제 제기와 이론적 모색이 이루어진지 벌써 오래 잡아 두 세기가 넘어가고 있지만, 이러한 탐구가 현실을 묘파해냈다기 보다는 오히려 재구성하고 확장했다고 봐야겠네요. 비근한 예를 들어, 주식 시장을 움직이고, 그럼으로 때로는 공황을 불러오는 것이 결국 경제 상황을 진단하고 위기를 예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경제 이론들이 되지 않았습니까.. 

저는 '개발주의의 망령을 지적하며 산업 구조를 새롭게 짜야'한다든지, '노사 간의 협상 테이블을 더욱 개방하여 노동자의 소득을 보장하고, 내수 시장을 키워나가야 할 때'라는 진보(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제학자들의 주장이 결국 '국민 경제'라는 함정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이 많은 국민들에게 상식처럼 받아들여지는 상황 자체가 주장의 곤란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구요. 

그러나 더 뼈아픈 것은 제가 마주하는 현실에서 이러한 주장에 발을 걸치지 않는다면 무엇도 불가능해지는 '현실의 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2009-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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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병 오학준 
  원익  다시 언급하신 부분은 이전에 랑시에르를 언급한 글에서 수학적-합리적 유산이 전제되지 않은 해체에 대해 말하신 부분과도 일치하겠군요. 분명 우리는 무언가 유산이 없는 시대가 아니라, 유산이 없다고 믿는 강력한 유산 아래에 살고 있으니까요. 이데올로기의 종언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시대... 어떻든 간에, 원익님의 글 덕분에, 토대의 해체가 아니라 해체 자체가 거꾸로 전제생산하는 토대, 라는 생각을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것이 '공공성'에 대한 논의로 발전적으로 연결되려면 조금 더 공부를 해야겠지만... 2009-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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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박원익 
  김예찬글쎄요, 저는 오히려 '진보'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장하준이나 우석훈 같은 경제학자들이 지지하는 '상식'을 폄하하긴 힘든 것 같습니다. 금융업만으로는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없다, 결국은 제조업과 실물경제의 성장이 진짜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 내수가 탄탄해야 외부변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규제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지금 광고 때리는 규제완화 선전들도, 대체 무슨 근거로 수도권 규제를 무작정 철폐하면 높은 성장률을 달성한다고 호언장담하는 걸까요 애초에 토지규제를 풀면 그 자리에 반도체 공장이 들어설지 러브호텔이 들어설지부터 따지는 게 '국민경제'의 상식이 아닌가요), 높은 경제성장률은 시장경제로부터 기대할 수 없다, 기타 등등 굳이 해체까지 동원하지 않더라도 삼척동자도 눈치 챌 수 있는 신자유주의의 온갖 왜곡된 패러다임들에 대한 반례들, 문제는 그 상식으로 돌아가야, 유의미한 '비판'작업이 이루어질 텐데 말이지요. 애초에 '국민경제'의 정의를 완전히 왜곡시켜버리는 이익집단이 있다는 게 상황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것 같습니다. 과연 국민들은 '상식'을 제대로 알고나 있는 걸까요 저는 용기 있게 '국가'의 역할을 지지하는 장하준의 제스처가 공감이 갑니다. 저로서는 오히려 ㅈ파들이 못하는 걸 쁘띠 부르주아들이 선점해버렸다는 것만이 유감스러울 뿐입니다. 

오학준제가 썼던 글의 논지를 일관성 있게 이해해주시는 것에 우선 감사드리고요, 말씀드렸다시피, 토대라는 게 언제나 '사후'에 정립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하겠씁니다. 2009-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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