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할로윈마을  
일병 송기화  [Homepage]  2009-01-16 11:01:41, 조회: 96, 추천:0 

1.
긴 새벽이 지나고 해가 떠오른다. 활기차던 거리는 조금씩 밝아질수록- 조금씩 생기가 사라진다. 한 명, 두 명, 집으로 들어간다. 안녕, 잘자. 적당한 구름, 적당한 습도, 적당한 바람, 타오르는 태양. 저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 완벽하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좋은 아침이다. 심지어는 이 마을의 주민들 조차도 좋은 아침이라는 것은 인정할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 좋은 아침을 즐기지 않겠지만.

2. 
마을 사람들이야 지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그저 그러니 그저 그런 마을이다, 라고 하겠지만 외부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지하게 개성있는 마을인 할로윈의 아침은 한가하다. 그저 몇몇의 사람들이 하품을 하며 나와서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는 정도. 그리고는 각 집에 있는 외양간이나 마굿간에 여물을 좀 던져놓는다.
"졸려."
"나도."
마주치는 사람들끼리 하는 대화라면 이 정도. 이 기막힌 아침에 대한 평가라던가 하다못해 왜 졸립냐는 질문도 없다. 그저 피곤한 표정으로 한 사람 당 대여섯집 정도 돌아다니고 나면, 다시 하품을 하며 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덜컥, 덜컥. 창문들이 모두 닫히고 문도 닫힌다.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는 마을은 귀신들이 사는 유령마을같다. 유령마을 같다, 마을 주민들이 들으면 모두 웃을 말이다. 점심 때가 되어도, 움직이는 사람은 없다.

3. 
쾅쾅쾅
그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는 평범한 사람인 볼프강은 누군가 대문을 두들기는 소리를 들었으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너무나도 밝은 햇볕이 갈라진 창 틈으로 새어들어와 낮동안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걸 보니 달이 떠오른 모양이다. 밤이 찾아왔다.
"볼프강, 볼프강."
쾅쾅쾅쾅쾅
정신과 몸이 따로 움직이는 색다른 경험을 하며 볼프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자신도 모르는 상태로 앉아있던 볼프강은 자신이 어느새 일어나 앉은건지를 기억하지 못해 흠칫 놀란다. 말 그대로 비몽사몽.
"볼프가아아앙. 문 부수고 들어간다?"
누구더라? 하지만 볼프강의 머리는 그런 것을 파악할 정도의 정신을 아직 찾지 못했다. 간신히 몸만 휘적휘적 움직여 문가로 다가간다.
"나가요."
누구더라? 문고리를 잡고 돌린다. 아직도 누군지 기억하지 못했다. 문을 연다. 문을 열자 볼프강의 눈높이에는 짙은 회색의 털이 나타났다. 고개를 조금 들자 그의 얼굴이 보인다. 뾰족한 주둥이, 날카로운 이빨, 세모난 귀, 빛이 번쩍이는 눈동자, 달의 노예 늑대인간이 야수성을 온 몸으로 표현하며 서있었다.
"밥 먹으러 가자."
"세수 좀 하고."
볼프강은 몸을 돌려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4.
"우리 맬든 여물은 잘 챙겨줬지?"
할로윈 마을의 밤이 밝았다. 해가 사라지고 달이 떠오르면, 마을에는 다시 활기가 차오른다. 주민의 대부분이 태양빛을 싫어하는, 심지어 태양빛을 치명적인 사인으로 가진 자들도 많은 할로윈 마을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평범한 인간 볼프강과 늑대인간 치와와는 평소 즐겨찾는 식당을 찾았다.
"밀 100%, 물론이지."
주민의 대부분이 육식을 즐기는 할로윈 마을에서는 많은 수의 소와 돼지를 키우고 있었다. 다만 낮에 활동할 수 없는 구성원이 대부분이다 보니 방목은 힘들고 낮에 활동할 수 있는 몇몇 사람들이 마구간을 돌며 여물을 챙겨주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맬든은 치와와가 특별히 아끼는 소인데 마을에도 몇 없는 1등급 혈우였다. 치와와가 생(生)스테이크 특대사이즈를 입에 털어넣으며 말했다.
"혈액추출이 다음 주로 다가왔어. 품질유지에 힘을 써야 한다고. 고거 한마리가 얼마를 벌어주는 지 알아? 으흐흐."
생스테이크는 맛은 좋은데 피가 너무 많이 떨어져. 입가를 닦으며 덧붙였다.
"걱정말라구. 특별히 좋은 밀로 먹이고 있으니까. 충분히 뽑을 수 있을거야."
평범한 사람인 볼프강은 미디움으로 구운 스테이크를 평범하게 먹으며 대답했다. 마늘이나 양파가 있으면 좋을텐데. 하고 덧붙인다. 고기를 즐기는 사람이 많았지만 순수한 피를 즐기는 주민도 많았기에 피의 공급은 중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몇 안되는 사람들의 피를 뽑을 수 없어 혈우라고 불리우는 특수한 종의 소를 통해 얻었다. 그렇게 귀한 것이었기에 피는 같은 무게의 고기에 비해 수십배의 가격이 붙었다.
"어쨌건 앞으로 일주일이야, 조금만 더 고생해 줘."
치와와가 씩- 웃으며 격려한다. 나란히 늘어선 송곳니들이 빛난다.

5.
"마늘 먹었어?"
앤지가 물었다. 동그랗게 뜬 눈동자는 새카맣다. 어깨길이에서 찰랑이는 단발은 밤보다도 더 검다.
"아니."
볼프강이 웃으며 대답한다.
"너 만나는 날 내가 마늘 먹는 거 봤어?"
"아니."
앤지 또한 웃으며 대답했다. 창백한 피부에 붉은 입술, 그리고 웃는 입 사이로 송곳니가 보인다. 참 매력적인 흡혈귀다.
"우리가 만난지도 어느 새 1년이 됐네."
잔 속에 붉은 액체가 찰랑인다. 핏빛 와인과 와인빛 피를 가지고 건배한다. 1년 전 오늘, 볼프강과 앤지는 만났다. 할로윈 마을이 생길 무렵이었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종족, 그것도 배가 고프면 인간을 식량으로 삼을 수도 있는 종족들이 함께 사는 마을이 생긴다는 것은 그 누구도, 심지어 마을 주민들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위대한 어둠의 귀족인 흡혈귀 사고루 백작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실행에 옮겼다. 작은 사고는 몇 번 일어났지만 다툼에 휘말려 누군가 죽는 사고는 없었다(인간이야 싸움에 휩쓸릴 것 같으면 도망갔고 나머지 종족들은-특히 트롤은-왠만하면 죽지 않는다.). 서로가 냉정한 이성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하며 상대방을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게 할로윈 마을의 초기 분위기였다. 흡혈귀는 늑대인간을, 늑대인간은 미라를, 미라는 인간을, 인간은 오크를, 오크는 트롤을, 트롤은 흡혈귀를 배려했다. 하지만 곧 서로를 배려하기보다는 동등하게 보려는 분위기가 잡혔고, 마을은 성립되었다.
"사랑해."
입 안에 담아두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아무리 서로를 동등하게 생각한다 해도 넘을 수 없는 게 있다. 반년째였다. 인간과 흡혈귀가 지지부진한 연애를 끌어가고 있는 것이.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었지만 늘,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순간 현실을 강하게 깨달으며 상처받았다. 마음에 담아두고 눈으로 말하는 것이 낫다. 둘 다 알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새어나오는 말을 참기 힘들 때도 있다. 둘의 기분은 진득하게 가라앉았다. 끈끈하고 눅눅한 분위기가 둘을 휘감았다.
"앤지."
볼프강이 침묵을 깼다. 그는 그저 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어줄래?"
앤지의 눈동자가 커졌다.

6.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모여사는, 인간의 법이 아닌 어둠의 귀족이 지배하는, 태양이 아닌 달이 뜨는 시간에 살아나는 할로윈 마을. 어딘가에는 술에 취한 늑대인간을 부축하는 미라가, 어딘가에는 트롤에게 팔씨름을 도전하는 겁없는 인간 취객의 도전이, 어딘가에는 흡혈귀에게 고백하는 인간이 존재하는 밤이 깊어간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9:11:57 

 

일병 조영준 
  트롤이 아니라 프랑켄슈타인이었다면, 할로윈 마을의 할리우드에서는 
두치와 뿌꾸가 찍혀지고 있었겠네요- (웃음) 2009-01-16
11:06:21
  

 

상병 김형태 
  문득, 서티데이즈오브나잇 이라는 영화가 생각나네요, 
크학 하면서 입벌리던 뱀파이어들이 생각납니다. Gee! 2009-01-16
11:43:30
  

 

상병 김영윤 
  영준님 말씀대로 프랑켄슈타인이 존재했다면 - 

선량한 흡혈귀, 늑대인간, 미라, 프랑켄슈타인을 납치하여 1000년동안 비좁은 
호리병 속에 감금한 후 인성을 말살당한 괴물로 둔갑시켜 세계정복에 이용하려고 
했던 마빈 박사가 탄생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군요. (웃음) 

문득 생각이 난건데, 마빈 박사에게 현존하는 법들을 항목별로 적용시킨다면 
어떤 죄가 성립될까요? 
납치, 자유박탈 , 인권모독(인간과 동등한 수준의 지성을 가진 존재라면 
인권이 있을까요?) 육체적 정신적 폭행, 사회를 위협하고 국가 전복 시도를 하는 
불순 사상범? - 제게 생각나는 건 여기까지인데... 2009-01-16
11:57:01
  

 

일병 조영준 
  새로운 종을 탄생시켰으니 괜찮아요... (엥?) 2009-01-16
13:39:42
  

 

상병 차종기 
  아앗 - 볼프강은 , 그 고양이 인겁니까!?후훗, 
그리고 늑대인간 이름이 치와와라니 이거 쇼킹한데요. 2009-01-16
13:40:03
  

 

병장 이동석 
  요오, 잔잔하니 좋습니다. 흐흐. 찰랑찰랑한 달빛이 보이는듯 하군요. 2009-01-21
10:1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