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한글날인데.  
상병 김무준   2008-10-10 10:03:07, 조회: 168, 추천:0 

한글날이라. 솔직하게 말하면 저는 한글날이 정확히 언제인지도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한글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기념으로 생겨났다는 것, 빨간 날이 아니라는 것, 으레 학교나 단체에서 백일장을 개최한다는 것 정도입니다. 대학도 가질 않은 고졸 나부랭이에게 있는 지식은 이것 밖에 없군요. 책마을에 한글날 관련 공지가 올라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생각지도 못하고 한 해를 넘겨버렸을 겁니다.

저는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정상적으로 의무교육을 마치고 고등 교육기관인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이십년이 조금 넘는 시간과 한글과 함께했습니다. 유학이라고는 가본 적이 없는데다 가족 중에 외국인은 한 명도 없으니 순수 토종 한국인일 겁니다. 제가 모르는 출생의 비밀이 없다면 말이죠. 어쨌거나 한글을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이 한글날이 언제인지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군대라는 다소 폐쇄된 사회에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별 관심 없이 살고 있습니다. 어흠.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까 살짝 부끄럽기도 하네요.

며칠 전 TV를 보는데 한글과 관련한 영상이 나왔습니다. 이상봉의 한글 패션에서부터 먹으로 쓰는 타이포그라피(무언가 정식적인 명칭이 있던데 기억이 나질 않아 아는 단어로 대체합니다.), 외국인들의 한국어 말하기 대회 등이 나왔습니다. 관심이라고는 쥐뿔도 없었지만 이상봉 디자이너가 나와서 별 생각 없이 보고 있었습니다. 한 단체의 간부분이 나와서 한글에 대해 설명하시더군요. 일본어와 중국어는 발음 표기상으로 몇 천자 정도가 만들어지는데 한글은 11,100자 가량의 표기가 가능해 사실상 언어체계의 모든 발음을 기술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글의 우수성이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등 익히 알려져 있지만 받침이 있는 유일한 언어라던가 구체적으로 얼마만큼의 표기가 가능한지는 처음 알았습니다.

일본에서는 제법 오래전에 영어가 공용어로 채택되었습니다. 그래봐야 십여 년 정도겠지만 경제대국답게 영어를 구사하는 일본인이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5년 전 쯤 일본에 여행을 간 적이 있습니다. 일본어라고는 도통 모르는지라 영어를 간혹 쓰곤 했습니다. 신기한 게 학생들이나 청년들보다 아주머니들이 영어를 꽤 잘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렇듯 영어 울렁증 때문에 청년들이 말도 못 꺼냈는지 모르겠지만, 신선한 충격이었죠. 외국인과 바디랭귀지를 써가며 대화하시는 어머니보다도 영어를 잘 했습니다. 같은 동양인이 영어로 말을 붙여서 그랬는지도.

저는 영어교육이 초등학교부터 의무화 된 세대입니다. 정확히 몇 학년 때였는지는 모르지만 십여 년 가까이 영어교육을 받아왔습니다. 지금도 머리가 썩지 않게 발버둥을 치는지라 간간히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사회에서는 말이 많습니다. 인력과 비용과 시간을 투자해 십년 넘게 영어교육을 해도 젊은이들이 외국인 앞에서 입도 못 벌린다고. 요즘에서야 많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울렁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미군과 함께 훈련할 때면 절대 먼저 말 걸지는 않습니다. 낯을 가리는 성격도 한 몫 합니다. 많이 나아졌어도 여전히 외국인 앞에 서면 말이 막히고 가슴이 울렁거립니다. 말을 꺼내도 반쯤 씹어 먹고 대충이야기 하고 말죠.

상병 말, 병장 쯤 되면 꼭 영어공부를 하겠답시고 제게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가끔 말년 병장들에게 속성으로 영어 과외를 해주곤 합니다. 누구나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입니다. 요즘 세상에 살아가려면 영어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막말로 영어 몰라도 먹고 살 수는 있지만 영어라도 할 줄 알면 그래도 좀 더 잘 먹고 잘 살죠. 제 분대장은 단어장을 펼쳐놓고 몇 개씩 외우고, 어디서 구했는지도 모를 동영상을 띄워놓고 틈틈이 공부를 합니다. 차라리 부대 통역병과 프리토킹을 하라고 핀잔을 주지만 꿋꿋이 공부하더군요.

부대에 있는 통역병과 가끔 진지한 대화를 나눕니다. 전역 후에는 무얼 할 것이며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 잡다한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으레 대화를 하다보면 문제가 생깁니다. 통역병 대부분이 외국에서 오래 살다 왔는지라 모르는 단어가 많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개념을 설명하지 못해 영어로 말할 때도 있습니다. 저야 별 답답함이 없지만 녀석들은 답답해 죽으려 하더군요. 한글은 너무 어려운 것 같다고 투덜거립니다.

그럴 때 마다 저는 녀석들을 놀려줍니다. 한국 놈이 한국말도 할 줄 모르면 어디다 써먹겠냐고. 어떻게 보면 그네들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어쩌면 녀석들이 알고 있는 한국어가 우리들보다 나을지도 모릅니다. 한글을 학문으로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공부하는 통역병들의 문법수준을 보면 오히려 저보다 나을 때도 있습니다. 저에겐 모국어고 녀석들에게는 외국어인지라 도통 개념을 설명해줄 방법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제가 문자깨나 쓴다고 찾아오는데 돌려보낼 수 도 없어 인터넷을 뒤져서라도 가르쳐 주곤 합니다.

참 부끄럽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는 영어도, 국어도 할 줄 모릅니다. 대한민국 사람으로도 반쪽, 영어권 문화인으로도 반쪽입니다. 어떤 할배는 말했습니다. 모국어는 그 나라의 뿌리라고. 그 할배의 지론에 따르면 저는 근본도 없는 막 되먹은 놈일지도. 글공부 좀 해야 하는데 걱정하면서 매일 탱자 탱자 놀기 바쁩니다. 녀석들은 자신의 나라라고 노력이라도 합니다. 자괴감에 빠져 담배만 뻑뻑 피지만 공부를 때려 친지 오래라 다시 펜은 못 잡겠습니다. 한글날이라. 요즘은 알고 있던 단어도 생각나질 않아 당황할 때가 많습니다. 슬픕니다. 글을 쓸 때면 한컴 사전을 켜놓고 이래저래 들쑤십니다. 한글2007이 없다면 맞춤법에 띄어쓰기도 못 할지도요. 아 슬픕니다. 한글날인데, 한글도 모르는 글쟁이가 자판을 두드립니다.

근데, 때려죽여도 공부는 못하겠습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3:56:27 

 

병장 고은호 
  '근데, 때려죽여도 공부는 못하겠습니다.' 
라는 말이 가슴에 '팍'하고 박히네요. 

머리는 공부의 필요성은 느끼는데... 
가슴은 그냥 책 읽으면서 여유를 즐기자고 그러네요. 

이런 딜레마 속에서, 
공부 하는 척, 여영부영 책 읽는 척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에효~ 2008-10-10
10:13:19
  

 

병장 이동석 
  무준님의 성장환경이 궁금해지는군요. 
무준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세요. 

저도 입궁해서 느낀것인데, 얼마나 맞춤법과 단어들을 네이놈 사전에 의지하며 살아왔는지였죠. 전 애초에 근본없는 언어를 가진지라, 한컴사전으로는 감당이 안됩니다. 2008-10-10
10:18:44
 

 

상병 최광준 
  그래도 
영어를 왠만큼 구사하실 줄 아는 것은 부럽네요. 2008-10-10
10:31:05
  

 

상병 김무준 
  보일 것도 없는 놈인지라 딱히 보여드릴 게 없습니다. 그냥 가끔 글에 제 이야기 쓰는 편이라 글 보시다 보면 어떤 놈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지도요.. 2008-10-10
10:38:42
  

 

상병 박영교 
  때려죽여도 안 할 그 의지로 
공부를 해보는것도 좋겠죠 2008-10-10
12:52:26
  

 

상병 김무준 
  학문은 그 끝을 보고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맡겨도, 
살아가기에 충분한 것이라 변명하렵니다. 2008-10-10
17:34: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