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푸른 봄  
병장 김무준   2009-04-06 15:50:31, 조회: 193, 추천:0 

1.
비가 내린다.

그렇게 모든 것이 사라졌다. 놈을 잡으려고 시간을 쏟은 지도 한 달 가까이 지났다. 의뢰인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남긴 채 잠적했다. 그동안 미친 듯 찾아다닌 것이 무엇이었단 말인가. 진실은 깊은 밤 어둠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모든 것에는 진실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이 만약 진실이라면, 왜? 대체 왜? 단서들은 퍼즐처럼 맞아떨어졌지만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봄비가 내린다. 트렌치코트가 쏟아지는 비를 이겨내지 못하고 아래로 축축 처진다. 마치 미스터리에 빠진 이번 일처럼 무겁게 느껴진다. 다. 전부.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놈을 잡고 싶었다. 잡아보고 싶었다. 경찰력을 동원해서라도 놈을 잡아보려 했다. 비는 한 여름 장마처럼 굵게 길게 떨어진다. 어느새 흠뻑 젖어버렸다.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일단은 좀 쉬어야겠다. 한 달을 정신없이 보내고 나니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감기에 걸릴 조짐이겠지. 그게 아니라면 꾸역꾸역 들어찬 생각에 머리가 이겨내질 못하는 걸까. 계단을 올라갔다. 한 층. 두 층. 세 층. 사건은 보통 차근차근 짚어나가면 풀리기 마련이다. 진실이라는 꼭대기에 도착했다고 여기는 지금, 왜 의뢰인은 사라졌을까. 사무실 문을 열었다. 종이쪼가리 같은 것이 떨어진다. 종이에는 곱게 쓴 문장이 담겨 있었다. 담겨. 있었다.

손이 덜덜 떨린다. 화를. 화를 주체할 수가 없다. 이 타오르는 화를. 화를.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잡아주겠어. 기필코 잡아주겠다! 평생이 걸린다 할지라도, 내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잡고야 말겠다. 그리고 물어주지. 왜, 대체 왜. 무엇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진실이, 과연 진실인지 확인하고야 말겠다!

2.
평화로운 하루였다. 중국 발 황사가 들이닥쳐 전국이 뿌옇게 흐렸지만 별 다른 일 없는 조용한 오후였다. 사무실은 고요했고 전에 맡았던 사건은 해결한지 꽤 되었다. 일을 끝내고 받았던 돈이 넉넉했기에 당분간 일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교과서나 마찬가지인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홈즈 시리즈를 읽고 있었다. 왜 추리소설이 교과서냐.

나는 탐정이다. 살인 사건을 조사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을 찾거나 하는 그런 탐정 말이다. 뭐, 한국은 대개 우발적이고도 충동적인 범행이 많이 일어나는 편인데다 경찰이 다 알아서 해주겠지 하는 심리가 보편적이라서 탐정 일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탐정이란 끽해야 만화나 소설 속에 나오는 직업이다. 일거리도 별로 없어서 살인 사건을 맡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저번 일도 돈 많은 아줌마에게 겨우 개 한 마리 찾아주고 돈을 받았다. 쪽팔리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나를 김전일이라고 부른다. 이니셜이 같아서일까. 꽁지머리를 하고 다녀서일까. 하도 김전일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아 사무실 이름도 김전일 탐정 사무소다. 김전일을 좋아하기도 했고. 이런 쪽 일은 가명이 필요하기도 하니까. 코난 도일을 좋아하지만 한국 사람이 자기소개를 하면서 안녕하십니까, 김셜록입니다 라든가 김코난입니다라고 하면 이상하지 않나.

바스커빌 집안의 사냥개를 읽고 있었다. 송아지만한 개가 어쩌고 사람을 물어죽이니 저쩌고. 한참 책에 빠져드는데 덜컥 사무실 문이 열렸다.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여자였다. 어떻게 보면 오륙십 먹은 노인네 같기도 한편으로는 열여덟 꽃다운 나이로도 보이는 이상한 여자였다. 허어, 탐정이라면 상대방의 겉모습만 보고도 많은 것들을 추측해낼 수 있어야 하는데, 크나큰 문제다. 홈즈는 상대의 손만 잡고도 사회적 위치나 직업 따위를 판별해냈는데.

김전일 탐정 사무소 맞나요. 네 잘 오셨습니다. 뭣 때문에 그러시죠? 아, 사람을 찾고 싶어서 왔어요. 잠시만요, 본인 성함이……. 겨울, 겨울이요. 이겨울. 아 네, 이름이 참 아름다우십니다. 그래요 겨울…씨 누구를 찾으러 오셨습니까. 제 동생이에요. 잃어버린 쌍둥이 동생을 찾고 있어요. 쌍둥이라면, 세월이 좀 지났겠습니다. 아뇨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습니다. 실종입니까? 그렇겠죠.

겨울양? 겨울씨?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어 호칭 선택이 어려웠다. 의뢰인은 자신이 스물두 살이라 했다. 동갑이구만. 나이를 듣고 보니 정장을 입어서 그렇지,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윤기 있는 긴 생머리와 아기처럼 뽀얀 피부가 젊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이를 짐작하지 못했던 건 내가 안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인가 보다.

의뢰인은 잃어버린 쌍둥이 남동생을 찾으러 왔단다. 이름은 봄. 이봄이란다. 혹시 네쌍둥이라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이름을 갖게 되었냐고 물어보려다 말았다. 네쌍둥이가 흔한 게 아니니까. 의뢰인은 동생을 마지막으로 본 날과, 몇 가지 단서, 동생의 사진을 주고 돌아갔다. 사진 속 남동생은 에스대 앞 정문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아아, 나는 대학도 가질 않았는데. 부러웠다. 삼수를 해서 얼마 전에 입학했다나. 삼수를 해 한국 최고의 대학교에 붙고도 행적이 묘연하다는 건 분명한 실종을 의미한다. 지금은 개학 시즌이고, 한참 오티다 뭐다해서 여기저기로 불려 다니며 대학생활을 시작할 때인데 삼수로 대학에 입학하고도 사라진다는 건 미친놈들이나 하는 짓이다. 상식적으로는.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서 사무실을 나섰다. 의뢰비도 두둑하게 받았겠다, 돈을 받았으면 일을 해야 하니까. 우선 에스대로 찾아갔다. 겨울씨는 남동생이 법학과에 붙었다고 했다. 오티나 엠티 따위에 분명히 참가했을 테고 시간상 수업도 몇 번 들었을 거다. 학과 사무실에서 마지막 출석을 확인하고 일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탐문수사에 들어갔다.

일학년 수업이 있다는 강의실 근처에서 한 학생을 만날 수 있었다. 키는 백오십 쯤 될까. 포동포동한 얼굴에 꽤나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쓰고, 머리띠로 앞머리를 홀라당 깐 학생이었다. 그래, 넌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구나. 과연 이 학생이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 수사가 중요했기에 일단 말을 걸었다.

봄이 오빠요? 알죠. 잘 놀고 성격도 좋아서 신입생이나 선배들 가릴 것 없이 인기 많았죠. 얼굴도 잘생겼으니까요. 외모 되지 학벌 되지 성격 되지. 내가 코만 좀 더 높았으면 대시를 해보는 건데. 음… 신기한 사람이었어요. 잘 놀다가도 갑자기 진지해져서 열변을 토해낸다거나, 침울해져서 어디로 사라져 구석진 곳에 앉아 담배를 피기도 했죠. 뭐랄까, 감정 기복이 심한 것 같다 랄까? 그래도 남들한테 피해주는 건 없으니까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정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괜찮은 남자라니까. 아직 집에 안 들어왔데요? 무슨 일 생겼나. 글쎄 나이대가 좀 다르니까 그렇게까지 친한 사람은 없었는데, 아 맞다. 총학생회장이랑 뭔가 친해 보였어요. 회장한테 물어보면 알지 않을까요. 아마 잔디밭에서 낮술 먹고 있을 걸요.

여대생은 다행히도 우리말을 알아들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기를. 여대생의 말대로 창 밖 잔디밭에서 혼자 소주를 병째 마시고 있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에스대 총학생회장이 대낮부터 술이라니. 회장 옆에는 열 병에 가까운 소주병이 뒹굴고 있었다. 허어, 대낮에 대학캠퍼스에서 이렇게 술을 퍼마시는데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이야? 대한민국의 미래가 참으로 밝아 보인다. 그래도 수사가 중요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

네. 학생회장 맞습니다. 취했냐고요? 전혀요. 전 말술입니다. 학생들 교수들 많이 상대하려면 술을 잘 마셔야해서요. 그러다보니 알코올 중독 비슷한 게 와서 죽어라 술을 퍼마시고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죽지는 않았습니다. 봄이요? 네, 봄이지 않습니까. 빛나는 청년들이 꿈을 품고 깨어나는 봄. 높아져버린 등록금이란 놈의 농약을 팍팍 뿌려대도 청년들은 봄마다 새싹처럼 꿈을 꾸기 마련이죠. 취했냐고요? 전혀요. 전 말술입니다. 아, 그 봄이요? 네 알고 있습니다. 제가 과외를 한 적이 있으니까요. 좋은 녀석이었습니다. 고등학생이란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한국의 미래를 걱정했고, 힘없는 자들을 대변해주기 위해 국선 변호사가 되고 싶어 했죠. 삼수 끝에 우리 대학에 입학했죠. 연락은 없었습니다. 가끔 술을 사주곤 했지만 개학이 된 후에는 만나질 못했어요. 현실이란 그런 것이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취했냐고요? 전혀요. 전 말술입니다. 생각났습니다. 며칠 전에 부산에 내려간다고 했었죠. 바다가 보고 싶다나. 원래 감정이 수시로 바뀌는 예민한 녀석이라 그러려니 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잔 하시겠습니까? 그렇군요. 힘드시겠습니다. 술을 마셔 백팔십도 쯤 돌면 세상이 바로 보일 줄 알았는데, 이제 취하지도 않습니다. 전 말술이니까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꼬부라진 혀로 했던 말 또 하면서 자기가 취했다는 걸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으면서. 회장은 말을 마치고 또 술을 퍼마셨다. 어쨌거나 약간의 단서는 잡았다. 회장이 마지막으로 연락을 받았다는 날짜와, 의뢰인이 마지막으로 봄을 만났다는 날짜가 정확히 일치했다. 그렇다면 회장의 말대로 부산으로 향했을 가능성이 있다. 일단 현재까지는.

짙은 황사로 목이 매캐했다. 마스크를 쓰지는 않았다. 마스크를 쓰는 건 탐정의 기본자세에 어긋난다. 탐정이 마스크를 쓸 때는 지독한 피 냄새가 깔린 살인현장에 도착했을 때다. 의뢰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의뢰인에게도 부산에 내려간다는 말을 했다면, 봄이 정말 부산으로 향했을 가능성이 조금 더 높아지니까.

김전일입니다. 예. 봄씨의 지인을 만나본 결과 지인에게 부산으로 향한다는 말을 했다는데 의뢰인께도 언급이 있던가요. 네. 그렇습니까? 확실하다고요? 배웅을 해주셨다고요. 네. 알겠습니다. 왜 진작 말씀하시지 않으셨죠? 집에 짐이 도착해있어 돌아온 줄 알았다고요. 흐음.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 있다면 생각날 때마다 연락을 주시죠.

뭔가 헛짓을 한 기분이 들었다. 추리를 해보자. 집에 도착했다면 왜 도착했다고 연락하지 않았을까. 간다고 말은 하되, 왔다고 말은 하지 않는다?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집에 짐이 도착해 있었다면, 집에 방문했다는 말이 되는데. 그럼 지금 서울에 있다는 건가.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이다. 신입생이 왜 학교에 가지 않을 걸까. 그럼 집에는 왜 다시 오지 않았지?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오늘 수사는 여기까지다. 영업시간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해 지는 시간까지다. 누구 맘대로? 내 맘대로. 정규직 직원들이 다섯 시쯤 퇴근을 하는 것이 보통이니까. 탐정이 프리랜서라면 프리랜서지만 칼 퇴근은 정신건강을 위한 미덕이다. 칼 퇴근 지키다 일거리 없으면 백수가 될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시간은 지켜야 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오늘은 여기까지다.

3.
아침부터 일어나야만 했다. 의뢰인의 전화가 왔다. 봄을 데리고 있다는 남자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거다. 그렇다면 이건 실종이 아니라 납치라는 말이 되니까. 대충 세수만을 마치고 불안에 떨고 있을 의뢰인의 집으로 달려갔다. 의뢰인은 의외로 굉장히 침착했다. 아침도 굶지 않았냐며 커피를 한 잔 타주더니 토스트를 구워왔다. 동생이 납치되었다는 전화를 받은 여자 치고는 지나치게 담담했다.

의뢰인은 경찰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았단다. 처음에는 단순한 가출이라 생각했고, 납치범의 전화가 온 이상 침착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나. 우선은 나에게 일을 알리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고 판단했고, 아침 일찍 전화를 걸었단다. 전화가 온 것은 어제 밤. 왜 미리 알리지 않았느냐 물으니 잠을 잘 시간에 깨우는 건 실례라고 생각했다나.

의뢰인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씻을 것을 권했고, 아가씨의 집에 들이닥치며 최소한의 매너도 지키지 못했으니 그러겠다고 답했다. 탐정은 신사처럼 행동해야하는 법이다. 깔끔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진정한 신사의 매너지.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의뢰인은 거실에 놓인 전화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앉아있었다. 여자는 여자다. 걱정이 될 밖에. 여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럴 때일수록 의뢰인과 탐정은 신뢰를 쌓는 것이 중요하다. 납치범에게 휘둘려 냉철한 판단을 잃으면 안 되니까.

경찰에 알리시겠습니까. 부끄럽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추적 장비를 함부로 사용하기가 힘듭니다. 경찰의 도움을 받는 것이 빠를 겁니다. 아니요. 우선은 김전일씨에게 맡기고 싶어요. 범인은 경찰에 알릴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했거든요. 알겠습니다. 혹시 몇 시에 다시 전화를 걸겠다든가 하는 말이 있었습니까? 오늘 오전에 다시 전화를 한다고 했어요.

의뢰인은 입을 다물었다. 다시 전화를 한다. 일단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상황에 의뢰인에게 많은 것을 물으면 불안을 크게 만들 위험이 있다. 사람의 심리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일이 꼬인다. 냉정을 유지해야 한다. 의뢰인에게는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위안이 될 것이다. 마음이 진정되었을 때 먼저 말을 꺼내리라. 의뢰인이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전화를 하나 가져와 브리지를 땄다. 아날로그 전화기에 전화 두 대를 연결해 동시에 전화를 받도록 만드는 건 쉽다. 거실 탁자에 두 대의 전화를 놓아두고 집안에서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집안에는 봄의 사진이라 생각되는 것들이 무척 많았다. 어린 시절의 모습에서부터 의뢰인이 건네주었던 사진까지. 사진들을 살펴보며 이상한 점을 찾았다. 사진들의 날짜를 확인하니 어린 시절과 최근의 것들은 있었지만 청소년기, 봄의 나이로 여덟 살 때부터 스무 살까지의 사진이 하나도 없었다. 의뢰인에게 이것에 대해 물어보려는데 전화가 왔다. 급히 전화를 받으려는 의뢰인에게 동시에 전화를 받아야 한다고 하고서, 신호를 주고 함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겨울씨. 당신인가요? 목소리를 기억하시는 군요. 제 동생은 어디 있죠. 잘 있습니다. 목소리라도 들려주시면 안 되나요. 급하시군요. 돈이 필요하신가요? 얼마든지 드릴 수 있어요. 얼마면 될까요. 생각을 좀 해보겠습니다. 뭐가 필요하신 거죠? 드릴 수 있는 건 다 드리겠어요. 제발 동생만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해주세요. 오후에 다시 전화하죠. 목소리라도, 목소리라도 우선 들려주세요. 제발요……. 경찰에 알리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장담 못합니다.

범인은 거의 자신이 할 말만 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뭔가 기계적 장치를 썼는지 나이를 알기 힘든 목소리였다. 단지 남자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의뢰인은 눈물을 쏟기 시작했고, 나는 의뢰인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단서를 잡기로 마음먹었다. 의뢰인을 겨우 진정시키고 나서 질문을 시작했다.

의뢰인의 가족관계는 아버지와 자신 그리고 남동생뿐이라고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동생 모두가 삼대독자인데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외동이었기에 친척은 존재하지 않는단다. 어머니는 남매가 중학생이던 시절에 사고로 돌아가셨기에 외가 쪽 식구와도 전혀 친분이 없다고 말했다. 거기다 자신은 고등학교 때부터 작가를 지망해왔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채 창작활동에만 전념해 친구도 없다고. 아버지는 외국계 기업에 몸담고 있어 해외에 있단다. 의뢰인에게는 동생이 전부였단다. 굉장히 외로운 사람이었다.

스물 두 살의 남매가 주변에 원한을 살만한 일이 있다면 얼마나 있을까. 더군다나 에스대에서 만난 봄의 대학 친구들은 한 결 같이 봄이 굉장히 좋은 사람이었다고 했으니. 이번 일은 단순 납치에 가까운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범인은 몸값을 요구하지 않은 걸까. 사람을 납치하고 가족에게 전화를 걸었음은 분명히 목적이 있을 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의뢰인과 대화를 나누다보니 몇 시간이 훌쩍 흘러버렸다. 식사를 하지 않겠다는 의뢰인을 설득해 겨우 밥을 먹였다. 결국에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아닌가. 범인도 나도. 혼자 밥을 먹을 수는 없으니 의뢰인에게도 식사를 권했다. 점심을 먹고 나니 한동안 무서운 침묵이 흘렀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집안에서는 이렇다 할 단서를 찾지 못했고 범인의 전화를 기다려야만 했다. 전화를 기다리다보니 아까 묻지 못했던 게 생각났다. 의뢰인에게 말을 붙이려는데 전화가 울렸다. 마찬가지로 신호를 주고 동시에 받았다.

여보세요? 당신인가요? 전화를 참 빨리 받으시는군요. 동생은, 동생은 잘 있나요? 궁금하십니까. 목소리만이라도 들려주시면 안 될까요. 누나! 누나! 살려……. 여보세요? 봄이니? 괜찮아? 목소리는 들려드렸습니다. 원하시는 게 뭔가요……. 돈은 얼마든지 드릴 수 있어요. 제발… 동생만 돌려주세요. 근처 고등학교 아시죠. 봄마다 벚꽃 많이 피는. 네, 네… 알고 있어요. 거기 스탠드에 가보시죠. 벚꽃 구경을 할 수는 없겠지만.

범인은 잠깐 동생의 목소리를 들려줬다. 이걸로 생사를 확인할 순 없지만 범인이 봄을 납치했음은 확실해졌다. 의뢰인의 태도를 보아 동생이 확실한 것 같았다. 의뢰인과 함께 움직이기로 결정했고 다행히 범인이 지시한 고등학교는 멀지 않았다. 걸어서 이동하기로 했다. 의뢰인이 삼십 미터 정도를 앞서갔고 나는 조용히 의뢰인의 뒤를 따랐다. 벚꽃이라. 확실히 벚꽃이 필 때는 아니지.

벚꽃이 많이 피는 고등학교라. 학창시절이 생각났다. 고등학교에는 벚나무가 굉장히 많았다. 봄이면 벚꽃이 눈부시게 피는 학교였다. 스탠드에 앉아 데이트를 하는 녀석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그러고 보니 왠지 익숙한 길이었다. 삼십 분 정도 걸어가 도착한 곳은 공교롭게도 내가 졸업한 학교였다. 하지만 벚나무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의뢰인은 스탠드를 뒤지기 시작했다. 범인은 스탠드에 가 볼 것을 지시했었다. 뭔가 꿍꿍이가 있겠지. 쉬는 시간이었는지 고등학생들이 고개를 내밀고 의뢰인을 쳐다봤다. 하긴 의뢰인이 좀 미녀이기는 했으니까. 스탠드의 가운데쯤에서 의뢰인은 무언가를 찾은 듯 했고, 나는 문자로 연락을 기다리겠다고 하고는 조용한 카페로 들어갔다. 성급하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 범인은 의뢰인을 관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곧 문자가 들어왔다. 스탠드에 놓인 쪽지에는 벚나무가 없어서 유감이군요라고 적혀있었고 다른 내용은 없다고 했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범인은 지능범이다. 어딘가에서 의뢰인을 관찰하며 지금 상황을 즐기고 있을지도. 정말 그런 거라면 어떤 원한을 가진 것이거나 범인이 엄청난 사이코패스라는 거다. 복잡한 일에 휘말려든 것 같아 불안하기는 했지만 내 직업은 탐정이다. 길 잃은 똥개나 찾아다니며 탐정이라 우길 수는 없다. 자존심이 머리를 박박 긁었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승부욕이 몰려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 녀석을 잡아주마.

4.
이십여 일에 가까운 시간동안 놈은 우리를 가지고 놀았다. 몇몇 납치영화에서 범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지시를 내리듯이 서울 시내 곳곳을 뒤졌다. 경복궁이라든가 놀이공원, 한강변도 있었고 동대문 의류시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의뢰인과 나의 공통된 목적만 없었다면 데이트코스라 해도 무방할 그런 이동경로였다. 범인은 지독한 사이코패스가 분명했다. 사람을 가지고 놀았지만 아무런 목적이 없었다.

보통 이런 납치의 경우, 범인은 몸값을 요구하거나 복수를 하려하는 등 어떠한 목적성을 가진다. 한국에서 화이트컬러 사이코패스의 납치실례를 그리 찾아볼 수 없다. 납치라는 행위는 지나치게 밖으로 드러나는 짓이고, 최근에는 기술이 발달해 휴대폰 전화조회나 무인감시카메라로 수많은 정보를 얻어 범인을 찾는 것이 쉬워졌다. 화이트컬러 사이코패스는 자신의 일상을 따로 가진 채 범행 자체를 즐기는 미친놈들이니, 단 한 번의 짤막한 범죄로 쾌감을 얻는 건 타산이 맞지 않는 짓이리라. 여러 가지로 추측해 보건데 봄의 납치는 분명히 원한에 의한 복수다. 단서. 단서가 있어야한다.

의뢰인의 가족사를 더 파보았지만 이렇다 할 답이 없었다. 의뢰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철들 무렵부터 외국생활을 하다, 영국인가 프랑스에서 서로를 만나 결혼했고 어머니가 자식만큼은 한국에서 키우고 싶어 했기에 홀로 돌아온 것이란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어도 자식들에 대한 애정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에, 장례식 이후로 일 년에 몇 차례 돈을 송금할 뿐 남매를 찾지 않았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중학생 때부터는 남매끼리 서로 외로움을 달래며 살았고. 그동안 지켜본 의뢰인의 성격을 미루어볼 때 정말 의뢰인에게는 남동생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이래저래 원한을 살 만한 게 없는 집안이었다. 아버지가 외국에서 평생을 살았는데 어떤 외국인이 그에게 원한이 있어 이 먼 타국까지와 납치를 벌인단 말인가. 더군다나 의뢰인의 말대로라면 의뢰인의 아버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 또한 의뢰인의 아버지로부터 단 한차례의 연락도 없었다. 어머니 역시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가끔 아버지를 만나기는 했지만, 언제나 아버지가 생활비를 보내주었기에 부족함 없이 쌍둥이를 키웠고 집에서 벗어나는 일이 잘 없었다고 한다. 원한관계라. 지나치게 깔끔한 집안이었다. 범인의 목적을 파악할 수가 없다.

차라리 경찰에 정식으로 수사를 의뢰합시다. 범인이 알리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했잖아요. 이제 곧 한 달입니다. 간간히 범인이 동생의 목소리를 들려주기는 했지만 최악의 경우 현재 동생의 생사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무슨 말씀이시죠? 전에 있었던 아동유괴와 비슷할 수도 있습니다. 동생의 목소리만 녹음한 후 겨울씨에게 그것을 들려주며 장난을 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동생은 제가 묻는 말에 대답하기도 했잖아요.

그랬다. 범인과 실제로 접촉하지 못했고 동생의 생사를 확인할 증거도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봄은 의뢰인과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눴다. 아픈 곳이 있냐는 말에는 묶인 손발의 피부가 벗겨졌다고, 꼭 도와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에 오히려 의뢰인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그야말로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상황이었다. 범인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지시대로 움직이는 것만을 명령했다.

시간을 더 허비할 수는 없다. 의뢰를 받고 움직이는 탐정이기는하지만 이건 사람의 목숨이 달린 문제다. 이십일 동안 범인이 봄에게 제대로 된 환경을 제공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납치상태에서 식사를 권한다면? 위생 상태는? 이제 슬슬 지쳐갈 시기다. 이건 범인도 마찬가지다. 어느 시점부터 우리는 범인의 목적은 묻지 않은 채 묵묵히 지시를 이행했다. 범인의 입장에서도 당황스러웠겠지.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머리가 돌고 또 돌아버린 사이코패스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의뢰인에게 잠깐 담배를 피러 나간다고 둘러대고 밖으로 나왔다. 친한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은 어릴 때부터 만나온 형사다. 형이라기엔 나이가 좀 많았지만. 무튼 형의 도움이 필요하겠다고 판단했다. 탐정이라는 일이 가끔 경찰력의 도움을 받아야할 때도 있다. 형이 나에게 도움을 받을 때도 있고. 이번에는 내가 부탁을 해야 할 것 같다.

여어, 김전일이 어쩐 일이냐. 요새 일 없다며? 똥개 뒤나 i아 다닌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만. 그게 이번에 좀 큰 건을 맡았습니다. 뭐 간만에 살인사건 관련해서 도움을 청하디? 너 사무실 열고는 몇 번 없었잖아. 계획살인이 흔한 것도 아니고. 이번에는 납치입니다. 납치? 납치라면, 성인여자? 아니, 남성입니다.

형님과 잠깐 통화하는 동안 약간의 정보를 얻었다. 최근 인신매매나 여성납치살해 등의 강력범죄는 증가하는 추세에 있으나 남성을 납치해 돈을 요구하는 경우는 없다고 했다. 돈이 목적이라면 있는 집 자식을 납치하는 편이 빠르니까. 남자의 경우 장기를 빼돌리거나 원양어선에 팔아먹는 일이 위험부담도 적고 훨씬 돈이 된다.

범인의 목적이 돈 따위가 아니라면 원한관계에 의한 것일지도 모르나, 나로서는 그 관계를 도무지 알 수 없다. 의뢰인이 말을 듣지 않기에 일이 더 커지기 전에 형에게 연락을 했다고 설명했다. 의뢰인의 신상정보를 형에게 알려주고 사건을 접수하고 우선은 조용히 정식절차를 진행하기로 결정, 오늘 안으로 본격적인 수사를 진행할 것이다.

범인은 전화를 하겠다고 통보한 때에만 전화를 했다. 하루 두 차례 전화가 걸려온다. 시간대는 정해놓지 않는다. 오늘은 두 차례의 통화를 했으니 퇴근이다. 이러면 안 되지만, 의뢰인이 그렇게 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의뢰인의 말을 거부하면 가택무단침입이 될 수도 있는 노릇이니 최근 암묵적으로 퇴근시간이 정해졌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 내가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으니까. 지문채취 실패. 목격자확보 실패. 범인과 접촉조차 할 수 없었으니 나는 지난 시간동안 범인에게 놀아났다고 봐야만 했다. 오늘 오후에 걸려온 전화에서 범인은 그동안의 데이트가 즐거웠냐고 물었다.

우스운 일이었지만 의뢰인과 내가 돌아다닌 곳들은 데이트코스에 가까웠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제껏 사귀던 여자들과 한 번쯤은 가본 곳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가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바뀌기도 한다. 수사에 집중해야했지만 과거의 추억들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빠르게 잠에 빠졌다. 피로 때문이었을까.

5.
오후 늦게 잠에서 깨고 말았다. 형의 문자가 도착해있었다.

-어제 몇 차례 전화를 받지 않아 문자를 보냄. 전화바람. - 콜롬보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접니다. 김전일이 어제는 왜 전화를 안 받았나! 그게 며칠간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지 피로했던 모양입니다. 지금 시간이 몇 신줄 알아? 탐정이 기본이 되어있지가 않아 기본이. 그러게요. 어제 부탁한 거 말인데 좀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었어. 뭐가 이상하죠? 이겨울이라는 여자는 없어.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주민등록번호도 틀리고 이겨울이란 이름으로 찾아봐도 그 집에 사는 여자는 없다는 말이야. 그럼… 자네 정말 수사 진행 중인 것 맞나?

지난 전화에서 설명했던 대로 한 달에 가까운 시간동안 범인에게 휘둘려왔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이겨울이란 이름의 여자는 없었다. 그럼 내가 만난 의뢰인은? 납치는? 범인은? 답 없는 물음이 맴돌았다. 형은 계속해서 조사를 부탁한 것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았다. 이봄이란 이름의 남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주소지의 서류상 거주자는 없으며 소유주는 국외에 있는 상태다.

말 그대로 빈집이란 소리였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럼 여태까지 무얼 한 거지? 확인이 필요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납치라는 사건의 위급함에 빠져 정작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납치다. 의뢰인은 경찰수사를 꺼려했다. 범인의 지시를 이행하기는 했지만 그 외에 어떠한 요구조건도 없었다. 동생과 범인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둘 모두와 실제로 접촉하지 못했다. 유령이랄까. 실체하지 않던 것들에 대해 확신하며 일을 진행해왔다.

탐정의 기본이 되어있지 않다는 형님의 말이 맞다. 사건의 속성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확인해야할 것들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의뢰인의 집으로 향하는 동안 갑자기 고등학교 일이 생각났다. 벚꽃이 아름다운 학교라, 의뢰인이 어떻게 걸어서 삼십분이나 걸리는 고등학교에 벚꽃이 많이 핀다는 것을 알았을까. 걸음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의심하지 못했다. 선생님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오, 오래간만이야. 전에 가끔 신문기사를 보곤 했네. 김전일이라고 불러야하나? 편하신 대로요.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그래 뭔가? 학교에 벚나무 있잖습니까. 어어, 그래 벚나무 많았지. 그거 언제 뽑혀나갔습니까? 글쎄 자네가 학교에 관심이 없어서 그럴지는 몰라도 자네들 졸업하자마자 바로 뽑았지 아마? 예? 햇수로는 삼년 되었다는 말이지.

전화를 끊었다. 삼년 전에 벚나무가 뽑혀나갔는데 벚꽃으로 유명한 학교라는 걸 알았다고? 것도 집에서 꽤 떨어진 거리에? 거기다 남매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들이었다. 그럼 내가 만난 의뢰인은 대체 누굴까. 범인은 누구며. 물음에 물음이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의뢰인의 집에 도착해 문을 두드렸다. 의뢰인은 나오지 않았다.

문을 열었다. 문이 열려 있었다.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어제 마셨던 찻잔은 그대로 놓여 있었고 전화며 가구, 심지어는 사진까지 다 그대로 놓여있었다. 왠지 더 이상 이 일에 말려들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에 강하게 들었다. 아직까지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모든 것이 미스터리였다. 의뢰인의 집에서 빠져나와 엘리베이터에 탔다. 나는 대체 무엇을 i고 있었던 걸까. 일 층에 도착해 사무실로 돌아가려는데 계단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저기요. 부르셨습니까? 김전일씨죠. 예, 그렇습니다. 어떻게 아시는 지요. 심부름센터 직원인데요, 누가 부탁한 게 있어서요. 혹시 그 사람 머리가 긴 여자였습니까? 생머리가 찰랑거리는 게 굉장한 미녀이기는 했죠. 시키는 게 이상해서 그랬지. 무슨 일을 시켰기에… 돈을 왕창 주면서 유에스비를 주더니 정해진 시간에 전화를 걸어서 안에 있는 파일을 틀라던데요. 처음에는 뭐 이런 사람도 있나 했는데, 내용을 들어보니까 장난이 아닌 거예요. 그만두려고 했는데 돈을 너무 많이 주니까…….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했어요. 어쩔 수 있나요. 문제없을 거래서 믿었죠. 뭘 부탁했습니까? 그냥 이야기를 다 털어놓으면 된다던데요. 그게 끝이었습니까? 예. 그럼 아무 문제도 없을 거라고. 진짜에요?

아무 문제는 없을 거라고 답해준 후에 사무실로 향했다. 봄비.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왜 이 이야기를 모두 나에게 털어놓으라고 한 걸까. 그럼. 애초에 납치라는 것조차 없었으며, 동생도 없고, 범인도 없다? 나는 의뢰인에게 철저히 농락당한 건가? 그럼 대체 왜? 무슨 이유로? 몇 차례 형님의 요청에 따라 살인사건 해결에 도움을 준적은 있어도, 그게 내 공이 되기보다는 경찰 쪽의 공로로 인정받았다. 내가 그렇게 원하기도 했고. 그 때의 범인들은 대게 단독범이었고, 사형선고나 무기징역을 받았으니 나에게 복수를 하지도 못할 거다. 그럼 대체 누가?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일단은 좀 쉬어야겠다. 한 달을 정신없이 보내고 나니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감기에 걸릴 조짐이겠지. 그게 아니라면 꾸역꾸역 들어찬 생각에 머리가 이겨내질 못하는 걸까. 계단을 올라갔다. 한 층. 두 층. 세 층. 사건은 보통 차근차근 짚어나가면 풀리기 마련이다. 진실이라는 꼭대기에 도착했다고 여기는 지금, 왜 의뢰인은 사라졌을까. 사무실 문을 열었다. 종이쪼가리 같은 것이 떨어진다. 종이에는 곱게 쓴 문장이 담겨 있었다. 담겨. 있었다.

익숙한 사진이었다. 푸름. 푸름이었다. 그제야 생각났다. 고등학교 추리동아리에서 언제나 머리를 맞대고 씨름하던 라이벌. 녀석의 사진이었다. 탐정이 꿈이라는 나를 비웃으며, 검사를 꿈꿨던 녀석. 예쁘장한 얼굴을 가졌던 놈의 사진이었다. 왜 미처 알아보지 못했을까.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녀석은 나를 데리고 논 게 분명하다. 하지만 왜? 무엇 때문에.

손이 덜덜 떨린다. 화를. 화를 주체할 수가 없다. 이 타오르는 화를. 화를.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잡아주겠어. 기필코 잡아주겠다! 평생이 걸린다 할지라도, 내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잡고야 말겠다. 그리고 물어주지. 왜, 대체 왜. 무엇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진실이, 과연 진실인지 확인하고야 말겠다!

6.
너에게 기회를 주겠어. 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사진 뒤에는 그렇게 적혀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움켜쥐는데 형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어, 김전일이. 살인사건이 하나 났다. 여자가 죽었는데 신원조회를 해보니까 남자야. 네 고등학교 동창이라 일단 너한테 전화를 걸었다. 수상한 점이 많아서. 너 졸업한 고등학교 알지? 거기로 빨리 와라.




뱀발. 단편입니다.
뱀발 둘. 여러분에게 내는 문제입니다. 살해당한 이는 누구며, 이유는 무엇일까요. 추리해보시길.
뱀발 셋. 공모전 용입니다. 담겨진 뜻을 알아차리는 건 쉬울 거라 생각합니다. 
뱀발 넷. 나름 문학적으로 구성해 보았습니다. 낄낄낄.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9:21:43 

 

병장 김상윤 
  겨울 = 살해당한사람 = 푸름 인가요 
데이트코스를 다녔다고 하면 사실 김전일을 좋아해서 성전환 한걸수도 있겠네요 
... 솔직히 잘 이해가 안가요 2009-04-06
16:23:20
  

 

병장 김민규 
  음, 좋다. 2009-04-06
16:52:12
  

 

병장 김무준 
  어설퍼서 그렇습니다. 낄낄낄. 2009-04-06
17:54:24
  

 

상병 이석현 
  뭐죠 이건.... 
겨울 = 살해당한사람 = 푸름 까지는 이해가갑니다.. 
왜 살해당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어설픈 추측은 
돈을 많이쓴게 사채였는데 못갚아서?????? 
정도임니다 .음허 

모르겠어요 왜 살해당한거죠...? 

자작극이라는 전제하에 범인도 겨울이인것 같고 
봄은 아마도 돈을 준 대역? 인듯싶고.. 
애초에 사건의 발달이 김전일과의 데이트가 목적이었다면 
(김상윤 병장님의 말씀대로 사랑했기때문에...?) 
음.. 미궁인데요 왜 살해당한겁니까 으허. 
[일상이야기] 자, 다음 분 들어오세요.  
병장 김무준   2009-04-07 02:26:47, 조회: 341, 추천:0 

이제 두 달이다.

이곳에서 보낼 남은 시간이 두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책마을이라는 인문학 동아리를 발견하고 입주를 시작한 것이 작년 시월 무렵이니, 거의 반년을 책마을에서 살았다. 살았다는 말 외에는 그 시간을 대체할만한 다른 어떤 단어를 찾지 못하겠다. 사백장이 넘는 텍스트. 칠십 만자에 가까운 텍스트를 남기며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소재도 꽤나 다양했다. 나, 사랑, 우정, 가족, 문학, 패션, 신화, 역사, 비평(이라 쓰고 잡문이라 읽는다) 등등. 잡동사니나 다름없는 소재들로 쉬지도 않고 중얼거려 댔다. 

순전히 심심해서 그랬다. 거의 모든 텍스트는 자기만족을 위해 생산되었다. 자기만족의 충족은 무료한 일상의 타파라는데 있었다. 지난 반년동안 책마을을 드나들며 덜 심심했다. 여기에는 김지민도, 이영기도, 허원영도, 황민우도 있었고. 딴지를 걸어주는 주해성이나 소심하기 서울역에 그지없는 정병훈도, 바지를 내려대는 변태 푸 이동석도 뒹굴었다. 지금도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일부를 보여주며 소통을 제시하고 그들의 텍스트를 읽으며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 왁자지껄 까지는 아니라도, 도란도란 정도는 될까.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구회 말 투아웃의 출판을 결심한 때부터 우석훈씨와 레디앙 대표에게 수차례 메일을 주고받으며 일을 진행해왔고, 원고검토가 진행되며 새로운 커뮤니티와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민규씨와 계속 대화를 나눴다. 경우의 수를 생각해 최대한의 선택지를 확보하기 위해 보안성검X를 맡겼고 자그마치 마지막 나들이 중에 사박 오일에서 오박 육일을 잘라 밖에 나갈 계획을 잡았다. (이것 때문에 개 말에 관광공사 감찰팀에서 나오는 점검을 준비하고 참여해야하며, 삼십 킬로미터의 등산에 다녀와야 한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이번 달 들어서는 각종 공모전에 모아놓은 텍스트를 뿌리기로 결정해 원고를 다듬고 있다. 거기다 롯데 측과 구회 말 투아웃의 라이센스 문제와 투자에 대한 논의를 해보려는 심사로, 지인을 통해 접촉을 시도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만화로 만들 방법을 구상하는 중이다. 그리고 지부에서 개최하는 축구와 농구리그에 참여해야하지, 운동도 해야지, 관광공사 업무는 업무대로 봐야하지, 숙소 청소하랴, 밀린 빨래하랴 아주 죽어나간다. 이번 달에는 브이아이피의 방문이 많아 보디가드 일정이 한 달 절반 스케줄을 차지한다. 이런 축구선수 니에미 병풍 십장생. 심심할 틈이 없다. 원고검토 결과가 나오기로 예정된 날짜가 다가올수록, 긍정적인 답을 이끌어내도록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쏟아 붓고 있다. 공모전 참여를 통한 글쟁이로 인정받기가 그것이고, 롯데 마케팅계열과의 접촉이 그렇고, 만화화에 대한 플랜 구성이 그 결과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니 자연스레 책마을에서 보내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는 그럴싸한 핑계도 있고. (물론 칼럼의 마무리가 남았지만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 대충 넘어가자.) 뭐랄까. 꼭 기분이 정든 놀이터를 떠나보내는 여덟 살 새내기 초등학생의 그것이랄까. 세상국제초등학교에 입학은 다가오고, 이제 갓 초등학교 일학년으로 시작하는데 기본적으로 할 줄 알아야한다는 대학류 덧셈뺄셈도 못하고, 외국인 친구를 사귀기 위해 그토록 갈고 닦았던 잉글리시 리딩 및 스피킹은 죄다 까먹어버렸다. 대부분의 수업은 영어로 진행된다는 모집요강을 몰랐던 것도 아닌데. 합격해놓고도 문제다.

소실. 무언가를 잃는 데에 무감각했다. 우선은 관광공사에 입사하며 신체적 자유를 구속당해야했고 이는 이제까지 겪어본 소실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었으니까. 해졌다는 게 맞겠다.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변했으니 다른 것들을 잃는 데 어떻게 신경을 쓸 수 있으랴. 그래서인지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지조차 깨닫기 힘들었다. 그나마 매일 해오던 반성의 시간마저 잊었으니. 아아 슬프도다. 주인과 손님이 자리를 바꿔 앉으려 카포에라 스텝을 밟고 있는데 그걸 여태 몰랐더냐.

그럼에도 불구, 앞으로 텍스트를 생산할 시간은 굉장히 줄어들 것 같다. 한마디로 예전처럼 손가락을 놀리지 못한다는 말이다. 텍스트 생산의 가장 큰 원동력인 심심함이 사라졌으니, 복구는 힘들지 않을까. 질량보존의 법칙. 무언가를 얻어야 할 때 무언가를 버려야 하는 것은 그 구성에 따라 다를 수는 있어도, 그것의 절대적 무게감은 같다. 주변의 모든 것을 다 붙잡을 수는 없다. 비록 이곳이 마음의 고향이 되었을지언정 떠나야 할 때를 아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여덟 살 꼬맹이가 언제까지 꼬맹이로 남을지. 혹은 나이를 먹어가 청년이, 노인이 되어갈지. 세상국제초등학교가 중학교로, 고등학교로, 나아가서는 세상 그 자체로 바뀌는 슬픈 날이 오더라도. 떠나야할 때는 있기 마련이다.

이별은 만남의 또 다른 이름이라 했던가. 이제는 조금씩 멀어져갈 마음의 고향이여 안녕이어다.





뱀발. 새로운 커뮤니티를 위한 노력에는 분명히 참여할 겁니다. 출판을 하려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커뮤니티에 보탬을 해보려는 이유도 있거든요.
뱀발 둘. 일단 위쪽에서 원고에 문제가 없다는 허락이 떨어지면, 본격적으로 원고를 뿌리며 원소스 멀티유즈를 위해 다방면으로 알아볼 예정입니다. 도움을 주시는 교수가 애니메이션학과 교수이시기에 특히 만화 쪽으로의 접근은 굉장히 용이할 것 같습니다.
뱀발 셋. 출판이 확실해졌을 때 텍스트의 무대가 되는 부산 쪽에서의 이슈화에는 그렇게 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습니다. 부산의 지역 일간지인 국제신문과 부산일보에 깽깽이의 이야기를 지인을 통해 기사화도 가능할 것 같더군요.
뱀발 넷. 더 나아가서는 한동안 사대 일간지에 광고를 때려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는 예상입니다만.
뱀발 다섯. 이제 우석훈씨와 이광호 대표의 입장만 좀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예상 시나리오는 지인의 도움을 얻어 부산 일간지에 깽깽이의 케이스를 기사화하여, 이 기사를 위쪽지방 지역 신문 쪽으로 확대- 약간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면서 롯데 측과 대화를 시도한다는 내용이나, 우석훈씨가 깽깽이에게 도움을 주려 한다는 이야기, 군인신분으로 출판을 진행 중이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게 되면 작은 관심이라도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으리라 예상합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9:21:55 

 

병장 김형태 
  전역인사의 향기가 폴폴나는군요. 이대로 이루어진다면 당분간은 '구회말 투아웃' 열풍이 불겠는걸요- 2009-04-07
07:39:58
  

 

상병 손근애 
  누구보다도 책마을에 열정적이었고,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으며, 많은 이야기를 쏟음으로써 책마을을 풍성히 함은 물론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과 사유의 여지를 준 무준씨입니다. 

심심했으니까-라고 이야기 하지만 그 이면의 모습을-그렇게 함으로써 감내했어야 했을 것들- 누가 모를까요. 

시간과 여건이 온전히 허락치 않기에 책마을에서의 무준씨를 두달 남짓한 기간 밖에는, 그것도 더 줄어들수도 있는 기간밖에는 볼수 없다는 것은 굉장한 아쉬움입니다. 
무준씨 글의 수가 최근 급감한 것을 느끼고 대강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이렇듯 고별사를 듣고 나니 그 아쉬움은 한층 더 깊어져만 가는군요. 

고생하셨습니다. 정말 수고많으셨어요. 

저는 이제 내딛었던 한 걸음에서 다시 다음 발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속도는 느리지만 뚜벅뚜벅, 그렇게 한걸음씩 걸어가야겠죠. 그것이 이곳을 만들고, 이곳을 지키고, 이곳을 향유했던 모든 사람들에 대한 예의라 생각합니다.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겠지만-그리고 능력이 될지 심히 의심스럽지만- 그저 묵묵히 칼을 벼리며 그저 힘껏 이곳을 지키렵니다. 

고마워요, 무준씨. 2009-04-07
07:48:26
  

 

병장 고승철 
  정말 저녁인사같네요... 
당신 참 멋있는 사람 이었는데...(아마 앞으로도 멋있는 사람이겠지만.) 
이말 뿐이네요. 
계획하신일들 다 잘되시길..바라고있겠습니다. 2009-04-07
08:52:01
  

 

병장 김민규 
  에이, 이제 시작이구만요. 깔깔깔 2009-04-07
09:05:33
  

 

병장 이동열 
  조금씩 나아가고 계시는군요. 앞으로가 기대가 되요. 으흐흐 
그나저나 전 무준씨 나가고 1달은 있어야하군요. 쩝... 2009-04-07
09:18:17
  

 

상병 김태완 
  쩝... 2009-04-07
10:39:08
  

 

병장 김용준 
  민규씨 시작은 조금 넘었죠! 아니면 무준씨랑 비슷한 저는 어째요? 흐흐. 

음...어느 지점에 이르러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글 같군요? 자서전도 되겟네요? 흐흐흐. 2009-04-08
09:29:21
  

 

상병 문민수 
  멋지군요.. GOOD 앞으로가 진짜 시작이겠습니다. 화이팅 2009-04-08
14:06:48
  

 

일병 이선목 
  바쁘게 사시는 모습 보기 좋아요 


[독서후기] 예술과 음주 사이의 숙취  
병장 김무준   2009-04-14 03:47:18, 조회: 94, 추천:0 

0.
막걸리의 숙취는 최고다.

1.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했던가. 옛 선조들이 쌀을 발효시켜 막걸리라는 곡주를 만들어 내었고 세월이 흘러 그 자손들은 막걸리에 사이다를 섞어 마시는 새로운 음주형태를 발견했다. 유레카. 이는 대 발견이었다. 사이다를 탄 막걸리는 밀키스와 흡사한 맛을 자랑했고 놀라운 영역을 찾아낸 이는 탄산의 묘한 매력에 빠져 막걸리보다 사이다 폭탄주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밀키스맛 막걸리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다음날 숙취가 그 어떤 폭탄주보다도 심하다는 것이었다. 성남에 살고 있는 깽깽이의 말에 따르면 막걸리 폭탄은 같은 양을 마신다면, 소맥폭탄을 능가하는 후폭풍을 감수해야한다.

2.
한마디로 지금 죽겠다는 거다.

3.
현대미술의 거장 데미안 허스트는 경악할만한 짓을 했다. 소를 토막 내 전시하거나, 해골에 다이아를 박아 넣는 등 대체 이게 예술인지 모를 짓거리들을 예술이라 주장했다. 과거에도 이런 미친 짓이 없었던 건 아니다. 피카소가 그림인지 뭔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들고 나왔을 때도 그랬다. 보통 이런 상식을 벗어나는 예술은 시간이 흐르며 새롭고도 놀라운 예술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여전히 데미안 허스트는 쌍욕을 처먹지만 엄청난 명성을 얻었고 다방면에 걸친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의 작품이 예술이라 평가받건 말건.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면서 예술 또한 기존의 형태에서 탈피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단일적이던 과거의 예술은 그 틀을 깨고 발전했다. 앤디 워홀은 우리에게 예술의 새로운 가치를 제시했고 이제 예술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다양한 형태를 보여준다. 적지 않은 예술가들이 전자기기나 패션과 같은 분야에서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대중에게 예술을 선사한다. 예술가들은 광활한 대지에 흰 천으로 된 벽을 세우는, 의도를 파악하기 힘든 예술을 하기도 한다. 이우환의 작품들도 그렇다. 하얀 캔버스에 파란 선을 그어놓고 이게 예술이라니. 도대체가.

4.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어디까지가 헛짓거리일까. 그럼 막걸리에 사이다를 타놓고 막사폭탄주라 이름 붙인 후에 전시장에 던져놓으면 이것도 예술이 될 수 있단 말인가?

5.
사진이나 회화, 설치미술, 음악, 영상 등 수없이 많은 예술 분야에서 새로운 예술이 탄생하고 있다. 헌데 자세히 살펴보면 텍스트 역시 예술의 범주에 속함을 알 수 있지만 이 변화에서 텍스트의 자리는 찾을 수 없다. 박민규가 냉장고에 세계를 집어넣고 카스테라를 생산하거나, 이외수가 물고기 그림에 몇 마디를 던져놔도 그렇게까지 놀랍지는 않다. 이상이 삼각형내부의삼각형내부의삼각형내부의 어쩌고, 거울속의나는 저쩌고 씨부릴 때만큼 충격적인 텍스트예술은 이제 없다. 마광수가 간혹 포르노인지 야설인지 소설인지 모를 작품을 내놓기는 하지만.

그래서일까. 할배들은 문학 위기론을 계속 주장한다. 이제 문학은 죽었다. 다른 예술과 같은 발전적 모습이 없기에 할배들은 문학이 죽었다고 조잘거리는 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위의 예술가들처럼 뭇매를 맞으면서 새로운 작품세계를 개척하려는 글쟁이가 없는 것 같다. 왼쪽이니 오른쪽이니 떠나서 새로운 형태의 택스트를 제시하는 글쟁이가 없다. 박민규가 쌍큼한 텍스트를 작성하고 있다고는 해도.

6.
여기서 김점선 화가의 말을 들어보자.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충동은 원시인들이나 어린애들도 갖고 있는 원초적 본능이야. ‘너는 왜 배가 고프냐.’ 라는 질문에 대해서 ‘내 몸 속에 철분이 부족해서.’, ‘간이 먹고 싶어 해서…’ 이런 대답이 필요 없듯이 그림도 마찬가지라는 거지. 그림을 그리는 것도 깡이 있어야 해. 전시회를 열고 자기 작품을 발표할 때 깡도 가지고 있어서, 그 뒤에서 욕이나 수많은 비평이 들어오더라도 버텨낼 수 있어야 해. 욕이 비처럼 쏟아져도 온몸으로 툭툭 퉁겨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늙을 때까지 화가 노릇을 할 수 있지.” - 랑데부 아트中

7.
피카소조차 첫 전시회에서 시선을 끌어보고자, 지나가는 대학생들에게 돈을 쥐어주며 전시회장에서 ‘여기 피카소의 그림이 있습니까?’ 라고 물어보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뭐, 우리는 모두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어있더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오는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지만.

8.
다시 페터 바이벨 독일 ZKM 미술관 관장의 말을 들어보자.

“모든 것이 혼합됩니다. 미디어 예술은 통합적입니다. 미디어 예술은 모든 예술 장르를 혼합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텍스트, 그림, 음향이 혼합되어 만들어지니까요. 예술과 과학 사이를 연결하는 미디어 예술은 나노 기술이든 양자 물리학이든 이 모두와 동맹을 맺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동맹은 교육이나 경제 등, 모든 분야와도 가능합니다. 바로 이 점이 미디어 예술의 아주 독특한 힘이자 특징입니다.” - 랑데부 아트中

9.
처음부터 막걸리를 사이다에 타 먹지는 않았을 테다. 어쩌다보니 비빔 문화가 강한 한국에서 폭탄주가 탄생하듯 막사가 탄생했는지도 모른다. 음주 후의 숙취가 극심하다는 부작용이 있어도 막사 애호가들은 이대 일 또는 일대 이 비율로 막걸리와 사이다를 섞는다. 왜? 맛있으니까. 한 번 열면 멈출 수 없는 프링글스처럼.

문학이 예술로 남아야한다면 글쟁이들이 다양한 시도를 해야 하고, 학계와 평단에서는 이 새로운 텍스트를 쥐어 패기에 앞서 선글라스를 벗고 넓게 바라보는 시야를 가져야한다. 멈추어버린 예술에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 예술가들은 그것을 알건 모르건 오늘도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을 한다. 글쟁이도 스스로 예술가가 되고 싶다면. 혹은 아름다운 무엇을 하고 싶다면. 디지털 시대의 예술과 그 흐름의 변화를 판단하고 수용해야하지 않을까.

10.
끝으로 미디어 아트 작가 제프리 쇼의 말을 들어보자.

“현대의 예술가들은 의사소통하는 방법에서도 개방적이어야 합니다.” - 랑데부 아트中





뱀발. 졸려 죽겠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9:22:15 

 

병장 김형태 
  [음주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