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폭력시위", "불법집회", "법과 법치주의"  
일병 김소망   2009-03-07 00:06:09, 조회: 142, 추천:0 

1. "불법집회", "폭력시위"라는 단어
  언론과 시민들의 입에서 자주 오르내리는 "불법집회", "폭력시위"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두 단어의 포커스는 "불법"이라는 단어와 "폭력"이라는 단어에 있음을 알게 된다. 시민들은 쇠파이프와 화염병의 향연이 펼쳐지는 혼란의 장에서 간접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혹은 시위 현장을 지키는 내 아들, 내 손주일지도 모르는 전경들의 모습을 통해 그것이 "폭력"임을 직감적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그러한 물리적 폭력을 "불법"이라고 규정한 고결한 법을 통해 시민들은 그들의 행위를 "불법"이라고 인식하며 그들의 행위를 비난한다. 하지만 '법'과 '폭력'이라는 두 개념의 상관관계, 그리고 그 두 개념을 둘러싼 권력관계를 조금만 들춰내보면 '불법집회', '폭력시위'라는 단어를 통해 희생자들을 비난했던 우리의 논리가 결국에는 또 다른 형태의 언어폭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2. 폭력에 맞선 폭력투쟁 "폭력시위", 그리고 폭력을 비난하는 논리로서의 "법"
  약자들의 집회에서 간간히 동반되는 폭력사태는 그것의 물리적 과격성으로 인해 인간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시민들은 그것의 폭력성에 주목한 나머지 약자들의 폭력을 불러일으킨 또 다른 형태의 폭력, 즉 자본과 권력에 의한 폭압에는 주목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폭력을 불러일으킨 가해자들의 폭력은 흔히 '합법성'을 띄고 있기 때문에 비난당하는 쪽은 오히려 희생자인 경우가 많다. 결국 똑같은 폭력이지만 그것을 심판하는 기준은 그것이 법에 합치하는 폭력인가 아닌가에 있다. 비록 그 싸움의 양태가 가해자의 폭력에 대한 피해자의 대응일지라도 피해자의 폭력은 법에 합치하지 않으므로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이 같이 간단하게 성립되는 논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불편한 논쟁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논리의 핵심적 근거가 되는 법조항들이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 절대적 가치이며 모두에게 같은 논리로 해석될 수 있는 정언명령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에 법조항이 절대적 가치요, 정언명령이었다면 법조인들은 그렇게 많은 재부를 축적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법이 절대적 가치가 아니었기 때문에 법을 이용할 수 있고, 법을 바꿀 수 있는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으로의 분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3. 법과 법치(法治)에 대하여
사회가 진보하면 진보할수록, 사회가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면 나아갈 수록 법은 점차 민주적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법은 법 자신이 '모두에게 평등하다'라고 선언할 수 있을 정도로 진전된 모습을 갖추었다. 하지만 '법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라는 말이 진실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을 절대적으로 긍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는 2.에서도 언급되었던 법 자체의 태생적 한계에서 비롯된다. 법은 정언명령이 아니기 때문에 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것의 모양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결국 법의 보호범위는 법을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해 낼 수 있는 사람, 혹은 그러한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에게만 미친다는 사실을 도출해 내는 것은 세 살짜리 어린 아이라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해당되는 이들은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폭력을 위장하는 가해자들일 것이라는 점도 당연하다.
  이러한 논리--법은 실질적으로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한 저항을 용납할 수 없는 이들은 저항자들이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법에 저항하지만 정작 저항자 자신은 그 근간인 '법치'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비난한다. 쉽게 말하면 폭력 투쟁의 불법성은 법치주의(法治主義)에 대한 도전이며 그것은 곧 민주주의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모든 형태의 저항은 합법적인 선에서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법치(法治)는 그 법이 민주적이라는 가정하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법의 민주성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법치는 결코 민주주의의 근간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투쟁을 통해 무너뜨려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조선시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라 민을 통치하였던 것도 법치는 법치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결코 민주주의의 근간이라고 평할 수 없는 것이었다.

4. 다시 '폭력투쟁'으로 돌아와
  결국 투쟁은 법을 보다 민주적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자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약자들의 폭력 투쟁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폭력을 배제한 합의와 타협으로써 민주적 개혁을 완성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비폭력 투쟁이 결국에는 이상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미 여러 투쟁사를 통해 드러난 사실이다. 또한 폭력에 의해 희생당한 이들의 저항을 폭력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희생자 비난하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법과 정치적 절차에 대한 접근이 원천적으로 봉쇄당한 상황에서의 저항은 다름 아닌 폭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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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편의 책을 쓰고도 남을 만한 주제로 이 같은 엉성한 글을 만들어 낸 나의 무지함을 죄송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별다른 참고서적 하나 들여다 보지 않고 글을 완성시킨 나의 게으름에 죄책감을 느낀다.
  하지만 "불법"이라는 이름 하에 탄압 받는 약자들의 고통과 그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저항 수단이 무엇인가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이 글을 맺는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9:11:00 

 

병장 이재륜 
  맞아요. 불편한 논쟁. 그 말이 맞는 거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쉽게들 얘기하죠. 

'아, 요즘에 살기 힘들다.' 
'도대체 윗사람들은 뭘 생각하고 정책을 입안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자신들의 불평과 불만이_ 
하나의 폭력적인 행위로 표출되어 보여진다면, 
다시 쉽게 여반장을 해버리잖아요. 
폭력이라는 방법은_ 
아무리 그 이유가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근거로 내세우면서. 

그리고 다시 쳇바퀴를 돌고 돌고 돌고. 

결국 항상 양 쪽의 의견에서 자신이 번갈아가면서 서야한다는 사실을 언제쯤 자각하게 될까요. 물론 저도 박쥐처럼 왔다갔다하고 있긴 하지만... 2009-03-07
01:18:14
  

 

병장 이지훈 
  폭력이라는 수단이 법의 민주성을 보장하는데 보탬이 되기 위해서는 소망님 글의 마지막 문장처럼 그 폭력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공감대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게 잘 되지 않고 있지요. 우선 그 이해와 공감대를 이루는 역할을 절대적으로 언론이 하고 있는데 언론이 제대로 이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의문이 드는군요. 

어떤 행동이 불법, 폭력이라 규정하는 것은 법보다 언론의 영향이 더 크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언론이 선택하는 단어, 문장, 각 기사의 구성 하나가 그 폭력이 폭력을 행하는 개인, 집단의 마지막 저항수단이든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도록 만드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결국 이들이 투쟁을 포기하고 무너지는 것은 대다수 사람들의 동조가 사라지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마지막 저항 수단으로써의 폭력이 근본적인 해결책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당장 눈앞의 대상(예를들면 전경 등)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지요. 이건 다분히 감정적인 요소가 많아서 논란이 되는데, 이런 경우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고민되는군요. 심정적으로는,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이들의 폭력을 이해하지만 단순히 눈앞의 감정적인 폭력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음 이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2009-03-07
12:52:45
  

 

상병 김형태 
  '법의 보호범위는 법을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해 낼 수 있는 사람, 혹은 그러한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에게만 미친다는 사실' 2009-03-07
13:16:10
  

 

상병 김형태 
  백분토론에서 신해철씨가 했던 내용과 일치하네요. 사실 이런 내용들 생각만 하면 머리터지고 속상한 내용들인것 같아요. 어쩜 색(色)이 너무 분명해서 할말을 잃기도 하고 그저 웃지요. 하나 둘 꼬집는 것 조차 근본이 잘못된 문제들을 해결하기엔 말을 도통 들으려고하지도 않고, 지난주도 이번주도 어제도 그랬을 여의도를 생각하니 허탈할 뿐이에요. 2009-03-07
16:48:23
  

 

일병 김소망 
  지훈 / "감정의 폭력"이라는 부분을 강조하는 것은 아무래도 사태를 바라보는데 있어 너무 현상적인 측면만을 강조하는 부분이 아닐까 하는데요.. 뭐 그 부분에 대해선 아직 생각해 본 바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약자들의 폭력이 결코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2009-03-09
16:30:51
  

 

병장 이지훈 
  소망// 

음 그렇다면 소망님은 '폭력'이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제가 사태를 바라보는데 있어서 현상적인 부분만을 강조해서 '폭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첫 댓글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소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약자'들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폭력'에 대해 문제삼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폭력이라는 것이 다른 한 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피의자와 피해자를 강제로 나누는 것이라고 볼 때, 

약자들의 폭력을 어디까지 이해해주어야 하는지, 그리고 약자들이 근본적으로 타개하려고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 속의 폭력이라도 그것을 어디까지 어떻게 이해해주어야 하는지 고민된다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