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콜럼버스를 따라간 보헤미안  

병장 김형태  [Homepage]  2009-03-29 21:16:53, 조회: 160, 추천:0 

콜럼버스를 따라간 보헤미안



“예술의 위대함은 아름다움과 고통사이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창조의 광기 사이의, 견딜 수 없는 외로움과 많은 사람들 속에서 지치는 것 사이의, 거부와 동의 사이의 지속적인 긴장에 있다.” - 알베르트 카뮈


1.
‘애니어그램’을 통해 살핀 나는 4번 유형으로 개인주의이다. 이는 ‘표현력 있고, 극적이며, 자기내면에 빠져있고, 변덕스럽다.’ 라고 표현한다. 이대로 나는 건강한 보헤미안이며 감각적 쾌락 주의자이자 아웃사이더이며 항상 황홀한 로맨스를 꿈꾸고 싶은 사람이다.

2.
고등학교 1학년 때 우리 1학년 6반의 담임선생님은 이제 막 40살이 된, 아직 젊고 건강한, 사립 고등학교인 우리학교에서 몇 안 되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일원이었다. 그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수업이 아닌 때라면 그저 담임으로써의 할 일만 할 뿐이었고 심지어 목소리도 작았다. 하지만 우리를 가장 이해하려했고 우리를 대할 때면 '아들처럼, 조카처럼'이 아닌 정말 제자로써 우릴 아울렀다. 그는 다정하거나 입에 발린 말은 하지 않았다. 또 조용한 목소리로 현실을 알려주고 판단은 우리 몫에 맡겼다. 어느 날 문득 그가 나에게 그 답지 않은 장난스러움으로 다가와서 물었다. “너희 집은 어떤 신문 보니?” 아마 그에게는 이 말이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 전 상대를 알아보는 전제인 것 같았다. 난 얘기했다. “한겨례요.” 그는 놀라는 척 했지만, 사실은 놀라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동공의 움직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그와의 더 많은 대화를 원했지만 아쉽게도 특별한 발전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배정된 국어시간에 입시보다는 그가 가진 사회에 대한 소리나 지금 우리 민주주의가 처한 현실 따위의 얘기 등에 귀를 더 기울였다.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이 되어 국어선생님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도 1학년 때의 선생과 같은 전교조의 일원이었다. 또 그는 예전 담임의 선배였다. 그러던 중 몇 번의 국어수업을 거치면서, 또 조금씩 들려오는 소문에 의해 그들의 조합 중 또 한명의 국어 선생님이 고등학교에서 중학교로 강등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내 그들은 학교 앞에 텐트를 치고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수업은 계속 이어졌지만 지켜보는 이들은 모두 안타까워했다. 곧 그들은 해당 교사를 복귀시키지 않을 경우 단발을 감행 할 것이라는 얘길 했다. 하지만 학교 측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전교조의 수뇌부가 학교를 다녀가면서 더욱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였지만 그들이 외치기에 학교는 너무 컸으며 그들이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지 알고 있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하굣길에 이미 익숙해져버린 그들의 아우성을 들으며 긴 언덕을 내려가려던 차, 괜스레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1학년 담임이 누구보다 열의에 찬 모습과 흥분된 모습으로 그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같이 지낸 1년 동안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그의 불같은 모습이, 조용하게 얘기하던 그가 말한 현실의 모습을 그는 몸으로 뜨겁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와 친구A는 학교의 모든 학생에게 사실을 알릴 생각으로 단단한 결의 후 전단지를 만들었다. 돈이 없는 우리는 갱지에 인쇄를 해서 한 장이라도 더 많이 만들길 원했으며 어느 시간이 가장 좋은지 예상하고, 암암리에 ‘해서는 안 된다.’고 할 것 같은 이 일을 우리는 가슴 벅찬 정의(正義)라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기다리던 결전의 날이 되었고, A와 나는 새벽 다섯 시 반, 학교에 일찍 와 무려 세 시간 동안 학교의 곳곳에 전단지를 뿌릴 것이라고 결의했다.
집에 가자마자 A와 통화를 마지막으로 조그만 반란의 계획을 마무리 한 뒤,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래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가려는 나를 엄마가 붙잡으셨다. 엄마의 손에는 전단지가 들려있었다. 가지 말라고 하셨다. 학교교사였던 엄마의 사회적 입장을 보았을 때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얘기하셨다. 한겨례의 열렬 팬이던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봤으나 되레 역정을 내시며 가지 말라고 하셨다. 나는 결국 30분정도 밖에 앞당기지 못한 시간에 등교했다. 실패한 것이다. 한숨을 쉬며 학교로 가고 있는데 멀리서 A와 내가 만든 전단지가 조금씩 뿌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A혼자서 해낸 것이었다. 그는 내가 오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인지, 혹은 너무 늦은 나를 원망할지라도 우리의 작은 정의를 홀로나마 치룬 것이었다. 가슴이 벅차 빨리 뛰어갔다. 하지만 학교게시판에 가보니 학생주임이 여기저기 붙어있는 우리의 전단지를 뜯어내고 있었다. 서둘러 3층으로 올라가 교실 앞에서 멍하니 창문으로 밖을 보고있는 A를 만났다. A의 말에 의하면 학생주임은 어제 집에 가지 않았고, 몰래 붙인 전단지의 대부분도 학생주임이 다 처리했으며 그걸 본 학생들도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또 전단지를 본 몇 몇의 교우들도 대수롭지 않게 휴지통에 버렸다는 것이다. 우리의 패배였다. 조회시간, 종례시간에도 그 전단지에 대한 얘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그 다음날 아무런 대책 없이 전교조의 집회도 끝이 났으며 그 들의 단발식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그들 조합은 나에게 단지 ‘국어선생이 많은 집단’으로 기억되었다.

3.
학창시절부터 나는 영화감독을 꿈꿨다.(이는 단지 매트릭스를 감명 깊게 보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무작정 꿈만 키워가던 나는 방과 후의 시간들을 지하철 4호선 충무로에서 보냈고, 대학생들이나 참가하는 메이킹필름 집단의 오프라인 모임에도 참여했다.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만들었고 콘티를 위해 그리지도 못하는 사람의 옆모습도 그려가며 최선을 다했다. 결국 열의를 느껴준 여타 감독들 덕분에 함께 독립영화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으며 때마침 우리를 지원해주겠다는 투자자도 생겼다. 기존의 사람들은 조금 더 투자를 받아 독립영화가 아닌 정식 엔터테이먼트 회사로의 발전을 요구했고 투자자역시 흔쾌히 수락했다. 각자 파트를 맡았으며 긴 여름방학 시즌을 통해 많은 것을 완성시킬 것이라고 계획했다. 나는 학생이었기에 자주 참여하지 못했고 집에서도 ‘그 집단을 믿을 수 없다.’며 반대했다. 몰래 몰래 그 곳을 찾아가 배우려하고 영화 만드는 모습을 보길 원했지만, 어쩐지 그들은 영화보다 회사에 관심이 있었다. 그 들이 꿈꾸던 배우, 연출, 작가는 어느 곳에도 없었다. 그저 회사원이 되길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그 뒤 변해가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그 곳을 떠났고, 몇 달 뒤 투자자에게 사기를 당해 모두 사라져버렸다는 얘길 들었다. 

4.
재수생 시절 어느 날 갑작스러운 제의를 받았다. “영화가 하고 싶다면 해라, 내가 책임지겠다. 단, 그림을 그려라.” 홍대 앞  미술학원 원장의 말이었다. 그는 예전부터 내가 미술을 전공하길 원했다. 때는 7월 이었고 시간이 별로 없었지만, 하고 싶은 것을 하기위해 다시 일 년쯤은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그 해 입시에 성공해 진학했다. 그 후 영화를 만들었다. 총 3편의 단편. 우수한 독립영화들에 비하면 영화라 칠 수도 없지만 그래도 나는 그 집단에서 나름대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미술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80%인 우리 학과는 시나리오나 컴퓨터에 의존할 수 있는 효과에는 뛰어났지만, 밑그림을 그려나가는 레이아웃에는 약했다. 때문에 이곳에서 조 감독으로 힘을 발휘 할 수 있었다. 카메라에 담는 법을 알았고 원하는 구도를 잡아낼 수 있었으며, 새로운 시도들조차 모두 성공적이었다. 또 얕지만 넓게 뻗어있는 음악의 지식도 많은 도움이 됐다. 이렇듯 영화라는 핑계로 미술을 배우면서 음악도 자연스레 알게 되었고 그 속에서 안정을 찾아 나는 더 이상 영화가 아닌 예술을 사랑하게 되었다. 또, 이렇게 행복의 길을 찾기 시작했다.

5.
변함없는 기득권층의 아집 속에서 아우성으로 몸과 마음을 불태워 봤지만 누구나 올바른 길 보다 본인에게 유익한 길로 가길 원하고, 꿈보다는 현실에 머물렀다. 그렇기에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일어나는 정치적 사태는 잘못되어 있는 줄 알면서도 그저 그렇게 가는 것뿐이다. 선박회사의 이사로 있는 삼촌이 얼마전 이런 말을 했다. “마음은 ‘한겨례’로 갖되 머리는 ‘조중동’으로 가져라.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 이는 내 삼촌의 말이기 전에 일전에 학생운동과 민주주의운동으로 거리를 불태우고 징역을 살아야만 했던 한 사내의 말이었다. 그도 어쩔 수 없는 어른이고, 우리고교 선배 중 하나였던 것일까.

6.
내가 예술과 사랑을 찬양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내가 아닌 어느 곳에도 타협하지 않길 원하며 오직 난 ‘드러나지 않는 드러남’ 속에서 나의 노래로 이전의 불태웠던 마음을 만지고 싶다. 또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세상을 살고 싶다. 내가 미술을 하는 한 어느 누구 하나 나에게 다가와 “넌 어떤 신문 보니?” 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난 사랑에 미치길 원할 뿐이고, 그에 대한 답이라면 내 노래에서나 찾으라고 말하고 싶다.

7.
언제나 나는 선봉의 리더십을 꿈꿨다. 그리고 외쳤다. 하지만 나에겐 제1의 어시스턴트가 가장 적소였으며 역시 그 자리에서 제 빛을 다하길 원한다. 나의 미술은 아직 한국에 자리 잡지 못한 미디어아트에 대하여 나만의 스케치로 재해석하고 나만의 색으로 완성하고 싶다. 또 나의 사랑은 그림과 음악이 어울리는 서정의 계명으로 할 것이다. 나는 언제까지나 강인함이 담긴 뿌리칠 수 없는 힘을 보여주는 콜럼버스보다는, 전쟁터에서 열렬히 피 흘린 이들에게 고향의 노래와 미지근한 행복의 차를 전하는 보헤미안이고 싶다. 

8.
하지만 나는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나는 우리의 꿈이 담긴 배를 뒤쫓으며 노래하고 싶다. 
Heal the world, make a better place. ♪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10
10:10:09 

 

병장 김민규 
  Heal the world, make a better place 
Tell the world, believe that it could be a better place 

물마시러 잠시 나왔다 읽고는 또 잠 못이루게 생겼습니다. 
끈질긴 불면, 고맙습니다. 엉엉엉 2009-03-29
22:25:56
  

 

상병 김태완 
  마이클잭슨의 노래로 마무리 하셨군요. 
님의 인생은 잘 보았습니다. 
보헤미안을 꿈꾸는, 다면적으로의 길을 이미 구상한 예술인. 
실로 이상적인 도약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노래선곡에서 인상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음율, 가사 모두 좋습니다. 
하지만 그 노래를 부른 사람은 당시 어떤 눈으로 세계인을 향해 노래를 했을지. 
그렇습니다. 전 마이클 잭슨 혐오자입니다. 
끝에 달려있는 음표로 인해 노래가 제 머릿속에서 흐릅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 혀를 내밀고 비웃고 있는 마이클잭슨이 떠오릅니다. 
정말 음예합니다. 
아이들에게 잔인한 짓을 한 것은 후에 어떤 선행을 했든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런 댓글을 달아 죄송합니다. 
님의 글에 해를 끼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마이클잭슨에 너무 흥분했습니다. 
제 흥분증도 치유를 좀 해야겠습니다. 2009-03-29
22:31:28
  

 

상병 김형태 
  민규// 
얼개들이 하나둘씩 올라오니 뭔가 기쁘네요 정말. 흐흐 제 컴퓨터에는 폴더로 정리중인데 말이죠. 너무 사적인 여담만 늘어놓은 것은 아닌지 걱정이 많이 되었습니다만, 그대로 올려버리고 말았죠. 계속 붙잡아둘 수 만은 없었기에. 흑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태완// 
제가 좋아하는 팝송 중 하나입니다. 아이들의 재잘거림도 너무 좋고, 역시 마이클잭슨도 그답지않게 노래에 있어서는 최선을 다하고 아름다운 내용들을 담아주니까요. 위에 적어주신 내용들도 내용들이지만 여러모로 전 마이클잭슨에 대해 단지 '가수'로 생각하고 있답니다. 많이 불쾌하셨다니 죄송스럽네요. 끝에 달려있는 음표로 인해 노래가 머릿속에 흐르신다면 제 작전은 성공한건데 말이죠.(농담) 2009-03-30
09:46:19
  

 

상병 김태완 
  형태// 
님의 작전은 대 성공하셨습니다. 
님 덕분에 근무시간 내내 마이클잭슨의 얼굴이 제 머리위에서 웃으며 빙글빙글 돌고 있었습니다.(웃음) 
그렇다고 님이 죄송할 건 없죠. 
오히려 마이클잭슨에 대한 제 강박증이 문제겠지요. 2009-03-30
15:29:12
  

 

상병 정근영 
  좋군요 
형태님의 글에 댓글을 단 건 이번이 처음인 듯 한데, 왜 이제야 인사를 건네게 되었는지 아쉽기만 합니다. 
반가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