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칼2
일병 송기화 [Homepage] 2009-01-06 13:35:07, 조회: 133, 추천:0
녀석의 얼굴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칼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놀라서 허겁지겁 손을 떼었다. 사실 내가 이곳저곳을 떠도는 일을 하는 이유가 혹시라도 녀석을 마주칠 수 있을까 해서였다. 녀석은 나의, 우리 가족의, 우리 마을의 원수였고 나는 혹시나 마주친다면 그 원수를 갚기 위해서 늘 칼을 지니고 다녔다. 세상이 좁다더니 정말 마주칠 줄이야.
녀석은 우리 마을 주변에서 활동하던 한 도적단의 우두머리였다. 본래는 도적단의 크기도 그렇게 크지 않고, 우리 마을 주변은 땅도 좋아서 식량도 꽤나 넉넉하게 남았으며, 근처에 마을도 여러 곳이 있었기에 녀석들이 일으키는 피해는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아예 녀석들에게 줄 식량이나 금붙이를 따로 떼어놓고 녀석들이 받으러 오기를 기다릴 때도 있었다. 문제는 녀석들의 구역에 다른 도적떼가 하나 생기면서 시작됐다. 서로 세력을 키우려 머리수를 늘리기 시작했고, 남 주느니 필요 없어도 내가 갖는다는 식으로 노략질이 잦아졌다. 두 도적단 중 한쪽이 강했다면 괜찮았겠지만 서로 힘이 비슷했기에 싸움은 길어졌고 결국 우리 마을을 비롯한 주변 마을들만 피해가 커졌다. 식량만 준다면 그냥 지나가겠다는, 한겨울에 하기에는 지나치게 잔인한 선택지를 주었다. 식량을 내놓지 않고 지금 죽던지 식량을 주고 천천히 추위와 배고픔에 괴로워하며 죽던지 선택하라는 말이었다. 우리 마을은 선택지에 없던 제 3의 답을 택해 무기를 들었고, 결국 마을은 도적떼의 손에 불타버렸다. 아직 어렸던 나는 그 당시의 정황을 알지는 못했지만 도적녀석들의 귀신같은 얼굴은 기억하고 있다. 아직도 간간히 꿈에 나올 정도로 무시무시한 얼굴이었다. 지독하게 추웠던 것 또한 알고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식량도 없이 한겨울에 떠돌아야 했다. 간신히 도착한 근처 마을들도 비슷한 처지였다. 식량을 순순히 내어주고 말라비틀어진 나무껍질을 씹으며 비참하게 살아가거나, 아니면 잿더미가 되어있을 뿐이었다. 어른들은 모두 녀석들을 생각하며 이를 갈았고, 입만 열면 도적들을 향한 저주를 뱉었다. 어른들의 분노는 자연스럽게 나에게 옮겨졌다.
사실 너무 어릴 적 일이었다. 지독하게 춥고 배고프고 힘들었던 기억만이 있을 뿐 순수한 분노나 원망을 품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하지만 어른들에게 배운 분노와 원망이 있었고 덕분에 칼을 몸에서 떼지 않고 다녔다. 칼을 잡은 건 놀라서 저지른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조금 늙어서 이제는 중년으로 보이지만 못 알아볼 리 없는 그 얼굴을 보고도 앞뒤 가리지 않고 칼을 뽑아 녀석에게 덤벼 들 정도로 격한 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어린 나에게 그 시절은 큰 고통이었다. 늘상 추웠고, 배가 고팠다. 무엇을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나이가 많은 노인부터 쓰러졌다. 도적떼들은 누가 어떻게 되는 것은 상관없는 듯이 서로 다투기 바빴다. 어제 이쪽이 이겼다는 소리가 들리고, 오늘은 저쪽이 이겼다는 소리가 들렸다. 길을 잘못 잡아 도적떼들 싸움에 휘말릴까봐 두려웠다. 긴 겨울은 끝이 날 줄 몰랐고 봄이라는 건 사실 꿈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렇게 한참을 떠돌다가 간신히 평온한 마을을 찾아 정착했을 때, 남아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고, 멀쩡한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그간 입은 동상때문에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정도 잘라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꽤 부유한 편이었던 우리 집은 재산이 홀라당 사라지자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딱히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고, 무언가 새로 시작할 밑천도 없었다. 새로운 곳에서의 시작은 달콤한 것이 아니었다. 어른들의 입에서는 아직도 도적놈들에 대한 저주가 흘러나왔다.
도적단의 두목이 어째서 이곳에 나타났을까? 내가 속한 상단이 향한 이곳은 내가 어릴 적 살던 그곳과는 지나치게 먼 곳이다. 그러고보니 녀석의 복장도 이상하다. 조금 전에는 얼굴에 지나치게 집중해서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지금 녀석은 도적의 복장이 아니다. 비단으로 옷을 해 입고 온 몸에 각종 장신구를 달고 다니는 녀석은 부유한 집안의 가장의 모습으로 보였다. 이 근처를 털기 위해서 변장하고 잠입한 건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너무 튀는 복장이다. 도대체 뭐지? 사람들이 녀석에게 허리를 굽힌다. 예의를 표한다. 도대체 뭐지?
어른들은 어떻게든 그곳에 정착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안그래도 강했을 텃세는 동상때문에 작게는 손가락에서부터 크게는 팔다리가 하나씩 없는 우리 어른들에게 더욱 심했다. 작은 일거리 하나 구하는 것이 힘이들었고, 살 집도, 터전으로 삼을 밭도 구할 수 없었다. 거짓말인 것 처럼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오고 여름이 찾아왔지만 우리는 여전히 가난에 허덕였다. 마을사람들이 우리를 받아들여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여전히 이방인이었고 떠돌이였다. 가을은 그래도 버틸만 했다. 날씨가 싸늘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먹을 거리는 꽤 풍족했다. 모두가 거둬들이고 난 빈 밭에서 미쳐 수확하지 못하고 남아있는 것들을 찾아서 먹었다. 가끔은 배가 부를정도였다. 하지만 모두들 알고있었다. 이대로라면 이번 겨울은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걸. 어른들의 입에서는 저주가 끊이지않고 새어나왔다. 그해 겨울은 추웠고 간신히 셋만 살아남았다. 그나마 젊은 우리들이기에 간신히 버텨낸 듯 싶었다. 우리는 뿔뿔히 흩어졌다.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언젠가 들른 마을에서 한 상단에 끼어들었다. 난 떠돌다가 구한 칼을 가지고 있었고 어차피 이곳저곳 떠도는 상단에서는 위험한 일이 많기에 일손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자신들의 물건에 손을 댈까봐 경계했지만 어느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가족처럼 대해주었다. 한 상단에서 인정받자 난 어느정도 명성있는 호위무사가 되었다. 방향이 맞는 상단에 들어가 돈을 벌며 이동할 수 있었다. 어른들의 저주는 더이상 들리지 않았고, 나는 편안한 삶을 살고있었다.
저 빌어먹을 녀석이 이 상단의 주인이라니! 알아본 결과 녀석은 이 마을에 정착한 지 꽤 됐다고 한다. 이 마을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산더미같은 금은보화를 가지고 온 녀석은 이 마을에 정착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있다는 것이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아픈 사람에게는 약을 주며, 고아들은 거둬들여 따뜻한 정 속에서 돌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른들이 전해준 분노가 아닌 내 속에서 피어난 분노를 느꼈다. 우리 마을을, 우리 가족을, 나를 이렇게 만들어놓고 자기는 이곳에서 성인인 척 하며 가식을 떨고있었다. 녀석이 어느 산에서 동료에게 배신당해 칼을 맞았다면 나는 그러게 왜 그렇게 악하게 살았어, 라며 녀석을 용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보란듯이 잘 살고 있는 걸 보니 마음 속에서 무엇인가가 끓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빌어먹을."
내 입에서 저주가 새어나왔다. 난 녀석을 용서한 것이 아니라 그저 녀석에 대한 증오를 몸으로 깨닫지 못한 것 뿐이었다. 사는 게 중요해서 그런 것에 신경 쓸 틈이 없었던 것 뿐이다. 나 또한 녀석을 충분히 증오하고 원망하는 자였다. 다시 한 번 칼을 잡았다. 뛰쳐나가지는 않았다. 녀석을 확실히 벨 기회를 잡아야한다. 그것이 아무리 가식이라도 녀석이 이곳에서 존경을 받고 있다면 이곳은 적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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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을 며칠간 따라다닌 결과 녀석이 고아원에 들를 때에는 늘 혼자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녀석이 별다른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도. 품에 숨겨둔 무기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작은 무기로는 내 칼에 당해 낼 수가 없을 것이다. 녀석이 고아원에 향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미리 찾아가 몸을 숨겼다. 녀석이 지나갈 때 뒤에서 벨 생각이다. 녀석은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도 모를 것이다. 멀찌감치서 녀석이 보인다. 칼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까이 오면. 역시 녀석은 비무장이다. 조금 만 더. 잠깐, 그런데 내가 녀석을 베는 이유가 무엇이지? 복수가 아닌가? 그런데 녀석을 뒤에서 베다니! 녀석은 자신이 어떤 죄를 지었고 그로 인해서 어떤 벌을 받는지 알아야 한다. 난 녀석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칼의 손잡이가 손에 딱 알맞게 쥐어진다. 칼을 뽑는다. 그리고 녀석의 당황한 모습을 살핀다.
"자네같이 젊은 이에게까지 원한을 사고 있다니..."
뭐지? 녀석은 그저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겁에 질리거나 놀란 얼굴이 아니다.저건, 혐오? 혐오감이다. 녀석의 손이 움직인다. 허릿춤에서 이상한 것을 꺼냈다. 칼이라기엔 이상하다. 칼날보다 손잡이 부분이 더 길다. 게다가 날부터 손잡이까지 통으로 금속이다.
"네가 우리 가족에게 무슨 짓을 했는 지 알아?"
녀석은 더욱 얼굴을 찌푸렸다.
"너 때문에 우리 마을이 잿더미가 됐어! 응? 아냐고!"
녀석의 표정이 변했다. 혐오가 사라졌다. 연민? 동정? 날 지금 동정하는거야?
"미안하네."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거야? 그게 다야?
"젊었을 땐 정말 죄를 많이 지었어. 정말 그게 나라는 사람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지독했어."
"그래! 그게 너야! 너라고!"
"정말 내가 잘못했네.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나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어. 많이 반성했네. 착실하게 살기로 했지. 내가 한 일을 조금이라도 돌이키고자 부모잃은 아이들을 키우고 있네. 도적질로 번 돈은 모두 녀석들에게 줘버리고 나왔어. 그곳을 떠나지 않고서는 제정신으로 살 수가 없었네. "
"그럼 저 돈은? 저 돈은 뭔데!"
"장사로 번 돈이지. 깨끗한 돈일세. 내 목숨 말고는 모두 다 주겠네. 날 용서해 줄 수는 없겠는가?"
"왜? 살고싶어? 그 많은 사람들을 죽여놓고 자기는 살고싶은거야?"
"미안하네. 이젠 날 바라보고 사는 이가 너무 많아. 많은 아이들이 나를 보고 살고있어. 처음엔 그저 속죄하는 의미로 거둔 아이들이지만 이제는 내 친자식들 같아."
혼자서 깨끗한 척 하고 있네. 그렇게 쉽게 돈을 벌었어? 네가 없어도 그 돈만 있으면 아이들은 잘 살 수 있어. 넌 사라져도 돼. 그렇게 깨끗한 옷 입고 있다고 네가 깨끗해 진 게 아니야. 넌 여전히 잔인한 살인자야.
"죽어!"
난 칼을 휘둘렀다. 녀석이 나를 바라보았다. 슬픔? 저 눈은 또 뭐야! 녀석의 몸이 움직였다. 손에 들고있던 기묘한 칼을 나를 향해 들었다. 그래, 그대로 서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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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남자가 들고있던 칼이 갑자기 길어졌다. 칼을 들고 달려들던 남자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남자는 힘을 잃고 쓰러진다. 붉은 것이 흩뿌려진다. 슬픈 눈을 하고 있던 남자가 일어나려 버둥거리는 자를 바라본다.
"미안하네. 나에 대한 감정을 베었네. 내가 저지른 일은 지울 수 없지만 그래도 원한이라도 잊어주게. 자네는 이제 나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어. 원한이 없으니 날 찾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아무런 감정도 없이 기억만으로 나를 해하려 온다면 주저않고 베겠네. 이런 일을 할 때마다 내 자신이 미워지지만, 죽어 줄 수가 없어 미안하네."
쓰러진 남자는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고 버둥거리고 있다. 중년 남자는 다시 짧아진 칼을 품에 넣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에 묻은 붉은 것을 손으로 닦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붉은 색이라. 자네가 나에게 가진 것은 아무래도 증오가 아니라 질투였던 것 같네."
슬픈 눈으로 손끝을 바라보던 남자는 발걸음을 돌려 고아원으로 향했다.
덧. 그러니까 이딴 이야기가 나온 건 그림자자국을 읽어서에요. 아, 머리가 깨질것같아!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9:02:10
상병 차종기
아앗 , 조회수 0이다 , 킬킬 2009-01-06
13:37:37
상병 차종기
그 대장간이 아주 여러개의 칼을 만들었군요,
자르는 칼 말고 만드는 칼은 없을까요? 2009-01-06
13:46:55
상병 이석재
...저도 그림자자국 일고싶어요. 냐하 2009-01-06
15:36:10
병장 김도환
아직 책마을에 정착(?)한지 얼마 안되는 관계로 여러 굇수님들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송기화님 글은 상당히 매력적인것 같습니다.
음...제가 글빨이 딸려서 뭐라고 표현해야 할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 읽고 있어요(웃음) 2009-01-06
16:50:59
병장 이충권
중년의 남자는 주문을 외운다.
반카이!우워어어어! 검이 용수철 처럼 늘어나 달려들던 남자의 얼굴을 베어버렸다.
잘 보고 있습니다. 유후. 2009-01-06
17:53:02
병장 이동석
그림자자국- 허허, 역시 아름답군요. 아름다와요. 2009-01-06
18:12:56
병장 이동석
전 기화님을 납치해다가 감금해놓고 15년간 숙식과 향응을 제공하며 시나리오를 받아 영화를 찍고 싶습니다. (흐흐)
향응도 제공하니 봐주세요. (허허) 2009-01-06
19:09:40
일병 송기화
종기님/ 오, 지금은 82입니다. 만드는일에 쓸거면 차라리 호미나 삽을 만들었겠죠.
석재님/ 그림자자국, 역시 이영도님입니다. 라고 하겠어요.
도환님/ 아, 굇수님들 다 알게되시면 저도 좀 소개시켜주세요(웃음)
충권님/ 오, 오, 오? 박진감넘칩니다. 왜 내가 쓰면 안저럴까(곰곰)
동석님/ 그렇죠, 15년 정도 가둬놓고 들들 볶으면 쓸만한 게 하나 정도는 나올 수도 있겠군요. 그래도 저같으면 그런 도박 안해요. 2009-01-07
08:34:41
병장 위대한
하하하 난 이영도씨의 팬이며 그림자자국을 읽었는데도 왜 이런글이 나오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직 전 먼건가요 2009-01-22
01:3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