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칼 4
일병 송기화 [Homepage] 2009-01-13 18:21:29, 조회: 87, 추천:0
"왜 또 그래?"
여동생이 물었다.
"머리가 좀 아파서."
이 편두통은 나의 지긋지긋한 고질병이다. 시도때도없이 찾아와서 지끈지끈 거리다가는 슥- 하고 사라진다. 아 좀 살겠네, 싶으면 어느새 또 찾아와서 머리를 짓누르고는 사라진다.
"또? 괜찮아?"
"응, 늘 그렇잖아. 이러다가 낫겠지 뭐."
여동생은 내 건강상태에 굉장히 민감하다. 편두통 정도는 거의 매일같이 찾아오는 녀석이기에 신경쓰지 않을 때도 된 것 같은데 언제나 신경써준다. 내 동생이지만 참 대견하다.
"정말 괜찮은거지?"
"그렇다니까."
내가 그렇게 못미더운가. 생각해본다. 사실 내 몸은 건강하지가 않다. 종종 쓰러져서 2,3일간 정신을 잃기도 한다. 자고 난 것처럼 눈을 떠보면 이틀, 사흘이 지나있고 여동생이 침대곁에서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 꽤나 자주 일어났다. 어릴때 쓰러져서 한달 간 의식이 없었던 때부터 계속 그랬지만 요즘은 쓰러지는 빈도가 잦아지고 있기에 나를 이렇게 걱정해 주는 것도 어느정도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과했다. 조금 전에 심심하다며 내가 바닥에 종이를 뿌리기 시작할 때부터 동생이 날 걱정하기 시작했다. 난 그저 멋대로 흩날리고 겹쳐져 우연한 모양을 이룬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고 싶었을 뿐이다. 종이들을 줄에 맞게 세워서는 절대로 알아볼 수 없는 특별한 그림을. 첫 선을 긋는 순간부터 무엇을 그리는지, 왜 그리는지 캐묻기 시작했다. 딱히 이유가 없었기에 건성으로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그림은 퍼즐과 비슷할 수도 있다. 종이의 빈 곳이 정말 그림과는 생관없는 여백인지, 아니면 다른 종이의 밑에 깔려있었기에 흰색으로 남은건지 추리해야 하기에 더 어려울 수도 있지만.
종이들을 모아 정리하고 일어선다. 내가 그렸지만 아마 이 그림을 다시 맞추지는 못할 것이다. 종이뭉치를 보면 무엇을 그렸다는 것은 기억해 내겠지만, 다시 맞추려고 노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냥 해보고 싶었던 놀이니까.
"가질래?"
여동생이 종이뭉치를 바라보고 있기에 묻는다.
"응."
의외로 선뜻 대답한다.
"줘."
잠시 머뭇거리자 재촉까지 한다. 아마 녀석도 맞추지는 못할텐데. 어쨌건 펜을 떼는 순간 나에게는 별로 중요치 않은 물건이 되었기에 미련없이 소유권을 이전한다.
"아직도 머리 아파?"
"이정도는 뭐, 참을만 해."
"죽을만큼 머리 아파지면, 찾아와."
"응?"
하지만 여동생은 말없이 종이뭉치를 들고 자기 방으로 돌아갈 뿐이었다.
걸음을 옮긴다. 아무래도 머리가 지끈거려서 방에서 쉬어야겠다. 침대에 누우며 생각한다. 한숨 자고나면 낫겠지. 편두통이란 원래 딱히 치료제가 없다고 한다.
일어났을 땐, 약간 늦은 시간이었다. 저녁밥을 먹어야 하나, 아니면 조금 쉬다가 다시 잠을 자야하나 고민이 되는 그런 시간이었다. 무언가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목 뒷쪽을 타고 꿈이 연기처럼 날아간다. 무엇이었더라. 기억은 나지않고 찜찜한 기분만이 남는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다. 바람이라도 쐬고 와야겠다.
책장에 엉망진창 꽂혀진 책들이 보인다. 책들의 크기도 맞지 않아서 들쭉날쭉하고, 낡아서 책등에 얼룩덜룩 때가 낀, 지금같은 기분에 짜증만 보태주는 물건들이다.
지끈.
그러고보니 옛날엔 종종 꺼내읽곤 했는데, 요즘엔 책장에서 책을 꺼내는 일도, 책장에 새로운 책을 더하는 일도 하지 않는다.
"일어났니."
내 방에 있는 창문은 너무 작아서, 원하는 만큼 바람이 들어오지 않는다.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가는 길에 아버지를 만났다.
"예."
"무슨 낮잠을 그렇게 자는거냐. 그래서 밤에 잠이 오겠니?"
"머리가 좀 아파서요. 바람이나 한번 쐬볼까 하고 있습니다."
"많이 아픈거니?"
"아뇨, 본래 가끔 오는 편두통이에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 늦지 않게 자거라."
하지만 아버지의 표정에는 걱정이 담겨있었다. 내가 하루라도 빨리 건강해져야 할텐데. 아버지는 무역상으로 내국은 물론 외국까지도 영향력을 미치는 대단한 분이시다. 하지만 하나뿐인 아들이 이렇게 비실비실해서야, 상단을 따라 다니며 신용을 쌓을 수도 없고 부하들이 믿고 따를 카리스마를 보일 수도 없다. 아마 아버지의 걱정은 그것일테지. 아버지는 늘 나에게 어느정도 거리를 둔다. 몸이 약한 나를 진짜 후계자로 인정하지 못하시는 것 같다. 동생을 애지중지 하는 것에 비교하자면 거의 양자수준이다.
지끈.
아, 또 머리가 아파온다. 어서 나가서 바람을 맞고 와야지. 이유는 없지만 바람을 맞아야만 이 기분을 날려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상인의 집 답게 우리 집은 상당히 크다. 딸려있는 정원도 자랑할만한 수준이다. 나는 우리 정원을 대단히 좋아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외국의 식물들도 종종 보인다. 저기에 있는 저 나무는 어릴 적에 내가 내 손으로 땅을 파고 심은 나무이다. 지독하게 더운 여름날이었다.
지끈.
아, 기분이야 좀 나아졌지만 아무래도 머리가 아파서 그만 들어가봐야 할 것 같다. 오늘따라 눈이 닿는 구석구석에 쌓인 옛날 추억들이 떠오른다. 어릴 적에는 정말 집안 구석구석에 숨는 일이 잦았다. 무슨 놀이의 일종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우리 집은 어린아이가 몸을 숨길만한 장소가 얼마든지 있었다.
지끈.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다. 얼른 쓰러져서 자야겠다. 발을 질질 끌며 복도를 걷는다. 내 방 문을 열고, 들어간다. 여전히 삐뚤빼뚤 놓여진 책이 신경을 자극한다. 책장으로 손을 뻗는다. 크기별로, 두께별로 책을 정리한다. 사실 내가 이상하게 책장을 정리하지 않아서 그렇지 원래는 정리를 좋아하는 성격이다. 두꺼운 책부터 얇은 책 순으로, 큰 책부터 작은 책 순으로 책장에 책을 꽂는다. 그리고, 무언가 이상한 것을 보았다.
책등에 놓인 얼룩이, 그림을 이루고 있었다. 마치 내가 흩뿌린 종이 위에 그린 그림처럼, 내가 정리하는 방법으로 책을 꽂아야만 나타나는 그림이었다. 울퉁불퉁한 책등에 그려져서 드문드문 선이 끊겨져 있었지만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사슬, 족쇄였다.
지끈.
지독한 두통에 책장을 뒤엎는다. 책이 쏟아져 뒤엉킨다.
똑똑.
노크한다.
"접니다."
말한다.
"들어와."
대답이 들린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여동생의 방이다. 여동생? 아니 여동생이 아니다.
"기억났어?"
"예."
"존댓말 하지 마."
"안됩니다."
"명령이야."
"안됩니다."
모두 다 기억났다. 나는 이 집의 아들이 아니었다. 나는 노예였다. 딸을 지극히 사랑하는 아버지가 딸이 혼자 자라서 외로울까봐 갖고 놀게 하기 위한 장난감이었다. 나는 애초에 힘이 좋은 편은 아니라서 일을 잘 못했다. 더운 날 조금만 힘든 일을 하면 쓰러지곤 했다. 이 집의 주인은 어차피 일도 못하는 녀석이라며 자기 딸의 장난감으로 날 선물했다. 나의 주인은 나를 정말 가족처럼 여겼다. 덩치가 더 큰 나를 남매로, 오빠로 생각해 주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난 장난감이었다. 아무리 진짜 친구처럼, 가족처럼 함께 놀아도, 나의 주인에게 작은 생채기라도 나는 날에는 난 죽도록 맞아야 했다. 하룻밤을 꼬박 숨어서 덜덜 떤 날도 많았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오빠, 동생으로 살 수 없어?"
"그럴 수 없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잊었던 걸까. 어떻게 내 신분을 잊고 감히 주인님에게 건방지게 굴었던 것일까. 그동안 왜 주인어른은 나를 그저 묵인했던 것일까. 알 수가 없었다.
"난 네 주인이야?"
내 주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울음을 참고 있는 듯 했다.
"예, 저의 주인이십니다."
그녀는 작은 나무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자 뚜껑의 무게에 의해 억지로 눌려있던 종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오늘 그린 그림이었다. 아니 그보다 훨씬 많았다. 내가 쓴 종이보다 몇 배는 많은 종이들이 그 몸의 일부에만 잉크를 묻힌 채 쏟아져 나왔다. 왠지 무엇이 그려져 있는 지 알 것 같았다. 난 오늘 사슬과 자물쇠를 그렸다. 다른 종이들도 같은 것이 그려져 있을 것 같다. 상자 속에 넣었던 주인의 손에는 얇은 칼이 들려나왔다. 칼집도 없이 손잡이까지 하나로 이루어진 칼이었다. 아, 가족놀이의 끝은 이런 건가? 이대로 칼을 맞아야 하는건가? 피해버려도 될까?
아.
그녀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몸이 굳은 것은 노예로써의 본능일까, 아니면 그동안 만들었던 오라비의 정 때문일까. 난 칼날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칼이 내 몸을 꿰뚫을 때, 아프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저 눈꺼풀이 지독하게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제발, 이젠 기억해내지 마."
눈을 떴다. 아, 또 쓰러졌던 건가. 얼마나 지난거지? 오늘이 몇일이지?
"괜찮아?"
여동생이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다. 또 걱정시킨 건가. 이래서야 오빠로써 체면이 살지 않는다.
"응, 미안."
"기억나?"
"아니, 어쩌다가 쓰러졌는지 아무 기억도 없네. 하하하."
"바보같은 오빠."
동생의 말이 어색해서 헛웃음을 짓는다. 쓰러지기 직전의 기억은 있을 법도 한데 늘 아무런 기억도 없다. 날짜를 묻는다. 어제의 기억이 없는 걸 보니, 이틀은 쓰러져있던 것 같다.
걱정하는 여동생의 얼굴 뒤로 멋대로 꽂혀진 책장의 책들이 보인다. 얼룩이 잔뜩 묻어있다.
덧. 대장장이-칼 시리즈, 생각해 둔 것은 이게 끝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아무래도 생각한 대로 쓸 자신이 없어서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었는데, 아쉽더라도 쓰자. 라고 써버렸습니다. 역시 아쉽네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9:03:15
병장 이충권
이런이런 마지막 이라니 아쉬운데로.. 잘 읽었어요.
다른 내용을 기대하면서 휘리릭. 2009-01-13
18:42:29
병장 이동석
으어어, 이건 뭐 울컥하네요. 2009-01-13
20:29:20
병장 이동석
정말 그동안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뭐 기화님은 언제나처럼 다시 돌아오실테지만. 2009-01-13
20:30:10
병장 김민규
허........ 2009-01-14
01:35:21
상병 차종기
이번엔 무얼 벤거죠? 뭐지뭐지뭐지 2009-01-14
10:21:25
병장 이동석
노예였던 자신의 기억-을 벤거겠죠. 그리고 여동생의 펫-으로.
아 이 슬그머니 스며드는 비극적 전율이라니. 2009-01-14
10:29:03
병장 김민규
이건 전혀 다른 이야긴데, 전에 XTM에서 봤던 영화중에 하이카라 걸의 性的 유희라는 게 있었거든요. 어마어마한 귀족 집안 딸내미가, 아버지와 여 하인의 무언가를 보고, 자기랑 어려서부터 같이 자라온 남자 하인(동갑내기쯤?)과 그것을 흉내내 보다가 결국은...
몰라요, 아잉 2009-01-14
10:57:16
일병 송기화
충권님/ 이번 칼 이름은 안지어주시나요(웃음)
종기님/ 동석님의 설명이 맞답니다. 기억이에요.
동석님/ 펫-으로 빙고!
민규님/ 아잉. 2009-01-14
10:5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