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칼  
일병 송기화  [Homepage]  2009-01-02 16:28:19, 조회: 184, 추천:1 

남자는 꽤나 유명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진짜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남자를 신선, 도사, 천사, 명의 등으로 불렀다. 하지만 남자는 자신을 그저 의사라고 불렀다. 
남자는 어릴때부터 병에 대한 지독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지난 날을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가 태어난 때는 지독히도 어려울 때였다. 그가 태어날 무렵에는 이상하게 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몇 년이나 그런 날씨가 지속되자 겨울에 얼어죽는 이는 줄었지만 작물들이 비쩍 말라죽어 식량확보가 어려웠다. 입은 줄지 않는데 식량이 줄어들자 인심이 흉흉해졌다. 남자는 배를 곯으며 자랐다. 그가 어느 정도 컸을 무렵 병이 돌았다. 온 나라를 휩쓴 질병이었다. 병에 걸려 죽는 이가 하루에도 여럿이었다. 그리 크지도 않은 마을에서 수십명이 죽어나가자 마을은 생기를 잃었다. 병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덮쳤다. 남자의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자는 열병을 앓다가 한쪽 눈을 잃었지만 살아남았다. 하지만 남자는 혼자가 되었다. 혼자가 된 남자는 힘겹게 자랐다. 이웃들이 매정해서가 아니었다. 그들도 죽을만큼 힘들었고 남을 도울 여유따위는 없었다. 남자도 그것을 알기에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대신 병을 원망했다. 병은 종류도 많았다. 썩어가는 시체들 사이에서 다른 병이 생기고 또 다른 병이 생겨났다. 사람들이 지저분하게도 죽어갔다. 남자는 병이라면 치를 떨었다. 남자가 태어난 나라는 흐지부지 사라졌다. 오죽 병이 강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으면 나라가 사라질 정도인가. 옆 나라들은 주인 없는 땅을 차지할 생각은커녕 자기네 땅으로 병이 들어올까 건드리지도 못했다. 넓은 땅이 버려진 채 황무지가 되어갔다.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을 받아들여주는 나라는 드물었다. 도깨비취급을 받으며 박대를 당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한참이나 자신의 출신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

“지독하군.”
자신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수많은 병을 마주한 그였지만 병이란 녀석은 얕볼 수가 없다. 잠시라도 숨을 돌리면 이렇게 새로운 녀석이 나타나는 것이다. 가뜩이나 더운 여름날씨에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달려드는 날벌레들도 짜증을 보탠다. 펄펄 끓는 열에 아이는 정신을 차릴 줄을 모른다.
“저, 제 자식은 어찌 되는건가요?”
아이의 부모가 걱정스레 묻는다.
“우선 지켜봐야겠으나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말을 내뱉으면서도 등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낀다. 열이란 것들은 무서운 병이다. 최대한 빨리 치료해야 한다. 치료가 늦어지면 낫게 하더라도 반병신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간신히 치료해 낸 자가 눈이 멀고 귀가 멀고 바보가 된 모습을 보면 슬프다. 힘들다. 그리고 또다시 병이란 놈에 대한 분노가 차오른다. 하지만 지금은 화를 낼 때가 아니다. 아이를 위해 상태를 냉정히 분석해야 한다.

쉴 틈이 없었다. 끊임없이 공부했다. 병이라면 치를 떨었지만 또한 병에 대한 집착도 생겼다. 남자에게 병이란 단순히 치료해야 하는 질병이 아니었다. 일생을 걸고 상대할 적이었다. 그는 의사가 되었다. 온갖 병을 만나보았고 온갖 상처를 보았다. 큰 싸움이 있었던 곳을 찾아다녔다. 전쟁이 끝난 폐허는 남자의 전장이 되었다. 상처입고 소리지르는 부상자들을 찾아다니며 치료했다. 시체가 썩고있는 곳이면 전염병이란 놈이 나타나서 멀쩡한 사람들까지 데려가려고 날뛰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병이란 녀석들을 잡아 없애려 온 세상을 떠돌았다. 사람을 살린다는 것이 아닌 병을 죽인다는 것에 마음을 두었다. 병은 복수의 대상이었다. 세상에는 온갖 병이 있었다. 그래서 남자는 쉴 틈이 없었다.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떤 녀석인지 알아야 치료를 할 것인데 왜 아픈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아이가 의식을 잃고 있으니 본인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아이의 부모 또한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일터에 갔다 오니 아이가 쓰러져있더라고 울면서 반복할 뿐이었다. 별다른 외상이 없으니 몸 안쪽의 문제일 것이라고 의심할 뿐이었다. 병이 씌인 게 틀림없다. 무엇이 문제인가.
“혹시 근처에 비슷한 병에 걸린 자가 있나요?”
정보수집은 중요하다. 혹시나 전염병이라면, 혹시나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병이라면. 작은 힌트라도 좋다. 아픈자를 살려야 한다.
“아뇨, 그런 일 없어요.”
“아이가 이런 상태에 빠진 지는 얼마나 됐습니까?”
“오늘이 사흘째에요.”
심각하다. 이런 열로 사흘이나 버틴 것이 용하다.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야겠다. 병을 이기더라도 너무 오래 열을 앓았다. 정신을 잃고 사흘째라면 어딘가는 제 구실을 못하게 될 확률이 높다. 입술을 깨문다.
“혹시나 집안에 이런 병에 걸렸던 사람이 있습니까?”
부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대체 무슨 병이기에 이렇게 아이를 괴롭히는 걸까. 두 눈을 부릅뜨고 아이를 쳐다보지만 한쪽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남자는 한참을 떠돌았다. 없애버릴 병을 찾기 위해서 환자를 찾았다. 사람들은 남자를 성인이라 떠받들었지만 남자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다음 적을 찾아 떠날 뿐이었다. 그렇게 몇 년을 떠돌았다. 자기 자신도 병에 걸려 죽을 뻔 한 일이 여러번 있었다. 그렇게도 떠돌아 다녔기에 여러 병에 걸렸지만 떠돌다가 익힌 경험으로 자기 자신을 치료했다. 세상엔 병을 없애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었다. 약이나 침이 아니더라도 몸을 쉬게 하는 것 만으로도, 잠을 제대로 재우는 것만으로도 간단한 병은 낫게 할 수 있었다. 의술이 늘수록 남자는 자신이 강해진다고 느꼈다.

더위는 아이를 더욱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열을 식히려 천을 적셔 온 몸을 닦아도 금새 열이 치고 올라왔다. 아이의 몸에 벌레들이 달라붙는 것을 쫓아낸다. 하지만 벌레들도 아이가 반항을 하지 않는 것을 아는지 잠시만 틈을 보이면 아귀같이 달려들어 아이의 피를 빤다. 번뜩 생각이 든다.
“혹시 근처에 썩은 물이 고여있는 곳이 있습니까?”
더러운 물에서 태어난 벌레중에 태어날 때부터 병을 품고 있는 녀석이 있었을 것이다. 병의 씨앗이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녀석으로 벌레 한 마리에도 충분히 매달려 있을 수 있다. 벌레가 아이의 피를 빨 때 그 씨앗이 아이의 몸 속으로 들어가 싹을 틔웠으리라. 
“예, 얼마 전에 닭들이 죽어나가서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묻었습니다. 그런데 비가 오면서 흙이 쓸려나가고 그 물이 고여서 썩은 곳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짐작이 들어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 번 아이를 노려본다. 그의 생각이 맞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눈에 녹색 빛이 어른거린다. 자신이 병에 대해 정확히 파악할수록 빛은 뚜렷한 형태를 갖춘다. 아이의 몸을 칭칭 감싸고 있는 저것이 그가 상대할 병의 정체였다.
“병의 정체를 알았습니다. 이제 낫게 할 수 있습니다. 아이를 마당으로 좀 옮겨 눕혀주십시오.”
병을 낫게 할 방법을 알았다는 말에 아이의 부모는 허둥지둥 아이를 안아든다. 부모가 아이를 옮기는 동안 그는 자신의 짐 속에서 칼을 찾아 꺼낸다.

헤매면서 남자는 한 아이를 만났다. 부모도 없이 혼자 남아 떠도는 모습이 그의 어릴 때를 보는 것 같았다.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귀신에 들려 있어 부모가 자신을 버렸다고 했다. 자면서 자신도 모르게 돌아다니는 아이의 증상을 남자는 귀신이 아니라 병의 짓으로 파악했다. 남자는 그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병을 치료했다. 자신도 이리저리 떠도는 몸이라 평생 키우는 것은 무리지만 병을 고쳐 멀쩡한 몸으로 만들면 어디선가 받아주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남자는 아이를 치료하며 처음으로 병이 아닌 환자를 보았다. 자신이 치료한 환자의 집에 멀쩡히 나은 아이를 맡기고 돌아서며 남자는 자신이 복수를 위해 병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병과 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온 세상의 병들과 맞설 생각을 하며 떠돌던 남자는 한 대장간에 닿았다.

마당에서 남자를 기다리던 부모는 남자가 길쭉한 칼을 꺼내오자 깜짝 놀랐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칼은 병만 베어내는 쇠붙이입니다.”
언젠가 우연히 들른 대장간에서 그는 이 칼을 얻었다. 자신이 베어야 하는 병의 정체만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단칼에 베어버릴 수 있는 최고의 도구였다. 
“제가 괜히 도사라고 불리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는 불안해하는 부모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별명까지 들먹였다. 이미 그의 눈에는 아이를 괴롭히고 있는 병의 정체가 또렷하게 보였다. 아이의 몸에 들러붙어서 길쭉한 촉수를 흔들거리고 있는 요괴였다. 요물의 촉수는 아이의 눈을 향해 뻗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아이가 눈을 잃기 전에 서둘러 칼을 휘둘렀다. 칼이 지나간 아이의 몸에서는 검은 액체가 흩뿌려졌다. 마당의 흙이 검게 얼룩졌다.
“저 검은 것이 병의 정체입니다. 저것은 불로 태워버리는 것이 좋을 겁니다. 이제 아이는 한숨 자고 나면 나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다행이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열병이 눈에까지 퍼질 뻔 했다. 병에 의한 것이지만 이미 몸에 이상이 생겨버린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다행이었다.
“어서 아이를 들여놓지 않으면 감기에 걸리겠습니다.”
웃으며 말한다. 부모는 그 말을 듣고서야 허겁지겁 아이를 깨끗한 천으로 두르고 안아든다.
“그러면 전 이만.”
부모가 사례를 한다며, 밥이나 먹고 가라며 옷깃을 잡지만 정중히 사양하고 걸음을 뗀다. 그런 것보다 아이가 아무 탈 없는 것이 그에겐 큰 보답이었다. 아이의 부모가 돈 꾸러미를 억지로 쥐어준다.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 끼 식사 할 정도의 돈을 헤아리고 나머지는 돌려준다.
“아이가 깨어나면 배가 많이 고플겁니다. 맛난 거라도 해서 먹이세요.”
이번에야말로 돌아서서 걷는다. 아직도 몹쓸 병에 시달리고 있는,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9:01:56 

 

병장 김민규 
  어허, 이거 또 닿고 닿아 한바퀴 돌면 대장간으로 돌아가는건가요. 충권님은 이번엔 무슨 이름을 저 칼에 붙여주실지. 

그나저나 촉수물이라니, 막판에 좀 뭔가 야시꾸리한 이미지가 연상되어서 말이예요. (도망) 2009-01-02
16:39:36
  

 

일병 송기화 
  민규님/ 아, 아마 저 대장간은 당분간 자주 찾아갈 것 같아요. 
그리고 촉수물이라니욧!!!!! 하..하악?!(도망) 2009-01-02
16:44:21
  

 

병장 이우중 
  오오- 그 대장간에서 나온 칼이로군요. 아래 글에 댓글은 안 달았지만 기화님 글 모두 다 잘 읽고 있는 거, 아시죠?(웃음) 2009-01-02
17:18:15
  

 

일병 한성용 
  초... 촉수!!! 2009-01-02
17:18:25
  

 

병장 김민규 
  흐흐흐, 다들 촉수에 민감한 거였어...(음흉) 2009-01-02
22:39:50
  

 

상병 양동민 
  수십개의 촉수가 한 여자를 묶(후략) 2009-01-02
22:51:31
  

 

병장 김도환 
  마치 천일야화 같다고 느낀건 저뿐인가요 (웃음) 


굉장히 재미있게 보고있습니다. 


저로서는 이런 글들을 쓰시는 분들을 보면 너무나도 부럽군요 (울음) 2009-01-03
06:32:09
  

 

병장 배승택 
  대장장이의 홍보마케팅의 비법은? 2009-01-03
10:20:44
  

 

병장 이동석 
  우어어어어어어어어 

기화님은 정말이지 보석같은 글을 남기시는군요. 이런. 2009-01-04
18:07:41
 

 

병장 정영목 
  추천 날립니다. 

가지로는 시리즈 전체를 올려야 할 것 같아요. 2009-01-05
08:28:51
  

 

상병 차종기 
  저도 칼 갖고 싶습니다,, 
대장간 약도라도, 쪽지로,, 2009-01-05
09:01:15
  

 

일병 권홍목 
  저도 댓글은 일일이 안달지만, 볼때마다 멋져요! 2009-01-05
16:1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