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취하고 싶은 어느 날  
상병 김무준   2008-12-26 21:05:43, 조회: 231, 추천:0 

우리 언제쯤 다시 만나서 술 한 잔 할 수 있을까. 수화기 너머 녀석이 그리움이 묻어나는 말투로 내게 물었다. 글쎄… 아마 이제 평생 없지 않을까. 생각했다. 우리가 다시 만나 얼싸안고 거나하게 취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제는 살아가야 할 자신만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중이니까. 설마 그렇기야 하겠어? 녀석의 말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으리라. 그럴걸. 그리고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래, 우리 다 군대 갔다 올 때쯤에는 너 이탈리아가고 없겠네. 계획대로만 일이 진행된다면 나는 이 나라를 떠나 밀라노에 있겠지. 정말 그렇게 된다면…

열 명 남짓한 우리는 모두 같은 학원 출신이었다. 모두 조금씩 다른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공통점이라면 한 동네에 산다는 정도랄까. 아, 술을 무척이나 좋아했구나. 우리는 중학생 신분에도 당당히 놀이터에서 소주를 깠고, 아파트 옥상에서 삼겹살을 구워먹었다. 여름이면 동네 계곡에 놀러가 목숨을 건 다이빙을 해댔고, 주말이면 당구장이며 피씨방을 쏘다녔다. 아파트에서 축구며 깡통차기, 고성방가를 해대던 탓에 늘 욕을 먹었다. 그래도 우리는 함께였다.

고등학생이 되며 우리는 찢어질 수밖에 없었다. 각자 부모님들의 욕심은 우리의 키만큼이나 달랐고, 공부를 잘하던 녀석들은 부산의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곤 했다. 몇몇 친구들은 실업계를 선택하거나, 학교를 그만두기도 했다. 나는 집이 싫다는 이유로 기숙사 학교를 택했다. 우리는 좀처럼 쉽게 모일 수 없었다. 그래도 주말이면 삼삼오오 모여서, 놀이터가 아닌 술집을 뚫고 소주를 들이켰다. 여전히 안주는 일인분에 이천오백원짜리 생고기거나, 삼겹살이거나 했지만. 함께 밤늦게까지 술을 먹고 찜질방에서 꼬장을 피울 줄 알았다.

결과는 부모님들께 신나게 깨지는 일이었지만, 우리는 놀 수 있을 때 놀았다. 그리고 수능을 쳤다. 한 동네에 모일 수 있던 녀석들은 전국으로 흩어져 버렸다. 우리의 꿈처럼 우리가 가는 길도 달랐으니까. 나는 대학에 가질 않았고, 돈을 벌었고, 이제 술값을 낼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모일 수 없었다. 누구는 시험 때문에. 누구는 학교가 멀어서. 만날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제일 먼저 입대의 스타트를 끊었다. 입대를 며칠 앞두고서 우리는 모였다. 부산대 앞 한 술집에서 그렇게 비싸고 바쁜 녀석들이 죄다 모였다. 삼겹살이던 안주는 그럴싸한 일식 코스로 바뀌어 있었고, 자리는 따끈하게 덥혀져 있었다. 파마를 하거나 염색을 한 녀석들도 있었고, 나는 머리를 밀고 스크래치를 넣어뒀다. 하지만 술은 바뀌지 않았다. 소주를 깠다. 축하주인지 군주인지 뭔지를 만들어 주었다. 소주 세병을 양철 냄비에 붓고 나는 원샷을 했고, 처음으로 택시에서 되새김질에 실패했다. 제기랄.

올해 일월쯤이었을까. 힘겹게 모두가 다시 자리에 모였다. 우리는 답지 않게 대운하가 어쩌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니 따위의 이야기를 나눴다. 입대라는 현실적 문제 앞에서 과연 무엇이 현명한 선택인지 고민했다. 우리는 처음으로 술을 모두 비우지 못했다. 그 비싼 조니워커 한 병으로 이 리터에 가까운 폭탄주를 만들었으면서, 반도 마시지 못했다. 우리는 슬픔과 현실에 만취해 있었으니까.

더 이상 몰래 술집을 드나든다거나, 주민등록증의 번호를 파 나이를 속이는 짓 따위를 할 수 없다. 우리는 훌쩍 커버렸다. 조금 후에는 스물 둘이라는 명찰을 가슴에 단다. 대학의 간판이 능력을 판단하는 잣대가 될 테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연봉과 직업으로 꺽다리와 호빗이 정해지리라. 나는 친구들 앞에 당당히 술 값 계산을 하지 못 할 테고, 그 계산서를 다른 누군가가 들고 있겠지. 어쩌면, 그 술자리조차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천 팔년의 술자리가, 우리의 마지막 술자리일까. 나는 아마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점점 현실에 치이다보면 우리가 우리의 꿈에 가까워질수록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줄어들겠지. 슬프고 아쉽지만 인정할 수밖에. 이제,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손에 쥔 것을 버려야 함을 알고 있다. 움켜쥔 손으로 꿈을 잡으려든들 어떻게 움켜쥘 수 있을까.

그러니까 우리는 꿈을 위해 추억을 마시며 쓰린 속을 달래야한다. 소주 대신 흘러버린 시간과 지나간 추억을 마실 줄 알아야한다.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워야하고, 그 성장통을 딛고 꿈을 향해야한다. 녀석들은 알고 있다. 모두의 자리에서 힘겹게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다시 모여 술 한 잔 할 날이 오겠지. 그때는 꽃등심 이쁜걸루다가 소주 한 잔 들이키지 않을까.

눈이 내린다. 산타가 없다는 건 이미 예전에 깨달았다. 그렇지만, 혹여 산타가 있다면 녀석들의 꿈에 거한 술자리를 마련해 줬으면 좋겠다. 그리움에 쩔쩔매고 있을 녀석들의 마음에, 우리의 우정은 변함이 없음을 새겨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좀 더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가 좀 더 힘낼 수 있도록.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4:00:10 

 

상병 김지웅 
  군에 안가는 제 친구도 제가 입대를 할때 이런 말을 했었어요, 
너희들이 전역하면 우리가 예전처럼 이렇게 다시 놀 수 있을까? 
저는 걱정말라며 입대를 했죠, 허나 이제 스물셋이고 미래를 봐야할 나이인지라, 

정말 꿈같은 이야기죠, 잘읽었어요, 무준홀릭, 가지로- 2008-12-26
21:10:17
  

 

상병 정근영 
  무준씨, 아직 궁에 계신가요? 29일에 정모하신다더니 설탕은 언제 가시는 겁니까, 허허 

무준씨의 글을 읽다보면, 무준씨 나이에 걸맞지 않은 회의주의와 자조가 많이 보이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이건 굳이 무준씨가 어리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저도 이렇게 말할 자격이 있을만큼 오래 산 건 아니니까요(저랑도 한 살 밖에 차이가 안나는걸요) 

요 몇달간 흥미롭게 무준씨의 글을 지켜본 결과, 글에서 보이는 회의만큼이나 쌓아온 경험도 많은 것 같아 무척 놀랍고, 또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남의 삶을 자신의 잣대로 함부로 평가하는 건 너무도 어리석은 짓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제가 보기에는 이뤄놓은 것도 없이 22년 동안 멍-때리고 있던 저보다는, 어린 나이에도 겁없이 세상을 향해 돌진한 당신이 부러울 따름이거든요. 조금 더 자신에게 자신을 갖고, 관대해지셔도 되지 않을까 싶어요. 

처음에는 '책마을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입이 너무 건방진거 아냐?' 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제는 그것마저도 좋아져버렸어요. 
이런 쿨함과 시니컬함이 무준씨 글의 매력이거든요(남자 취향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길)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웃음) 2008-12-26
21:28:20
  

 

상병 서영일 
  20대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글 같습니다. 2008-12-26
22:46:26
  

 

병장 방수현 
  제가 이번에 나갔을 때의 느낌이 많이 베어있는 듯. 

예전엔 그저 얼굴만 봐도 즐거웠던 친구들과의 술자리 였는데. 
각자 앞길을 걱정하는 모습에 잠시나마 막연했거든요. 
저도 이제 마냥 정신놓고 있을 때는 아닌가 봅니다. 
그래,잠시 쉬어가자, 후엔 지금보다 더한 행복으로 
술잔을 부딪히고 있을테디. 

그나저나 무준님은 예나 지금이나 글이 썩지 않는듯. 2008-12-26
23:20:12
  

 

상병 최재성 
  정말 공감하는 글이네요. 

저도 생각해보니 친구들이랑 안본지 오래됐는데, 참 이글을 보면서 

예전일도 생각나고 사고도 많이 쳤던 생각이 나네요. 

친구들이 보고싶네요. 2008-12-27
02:22:24
  

 

상병 강정희 
  많이 공감 가네요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데 
그래서 더 그리워지네요 2008-12-27
05:25:15
  

 

병장 박윤수 
  20대니까요. 아, 근데 뭐랄까. 저도 입대전에는, 다시는 이렇게 할 수 없으리란 아쉬움에 몸부림쳤는데, 막상 궁생활하면서, 꼭 그렇게 모여야만 즐거운건 아니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주 보지 못해도, 더 멋진 친구가 되어보자고, 친구에게 말해보았습니다. 

아웃 오브 안중 아웃 오브 마음 이라지만, 친구니까요. 헤헤. 2008-12-27
09:39:24
  

 

상병 김예찬 
  갈수록 참석하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지 고민하게 되는 술자리들이 늘어나는게 너무 슬픈 요즘입니다. 2008-12-27
13:46:12
  

 

상병 이지훈 
  어쩌면 처음 술을 마신 그날에 비해 재미있는 일보단 고민하는 일이 많아지는 친구들과의 술자리이지만.....그립네요 2008-12-28
00:51:23
  

 

상병 장순호 
  저도 무척이나 동감하는 글이네요. 

저는 생각을 바꿨어요.우리의 시즌1이 끝나고 시즌2를 시작하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으로. 

시즌2에는 시즌1보다 멋진모습으로 다시 모이기로. 

생각하기 나름 아닐까요? 2008-12-29
14:4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