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최장집 교수 고별 강의 '한국 정치와 나의 정치학' pt.1  
일병 김예찬   2008-08-12 11:43:23, 조회: 267, 추천:1 

지난 6월에 최장집 교수님의 고별 강의가 있었지요. 촛불 시위로 인하여 정치에 대한 관심이 한창 뜨거웠던 때였고, 때마침 교수님이 촛불 시위에 대하여 쓰신 글이 논란거리가 되어서 상당히 시기적으로 흥미로운 강연이었을텐데, 신분이 신분인지라 참석하지 못한게 상당히 아쉬웠습니다. 마침 강의에 참석할 수 있었던 친구가 제 안타까움을 짐작하고 고별 강의 요약문을 편지로 보내줘서 아쉬움을 갈음할 수 있었는데, 이걸 또 타이핑해서 군대에 있는 다른 동기한테 보내주는 도중에 이왕이면 책마을 분들도 관심 있으신 분들이 있으면 한번 읽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올려 봅니다. 중간 중간 제 코멘트도 조금 섞여있습니데... 하나하나 지우기도 귀찮아서 같이 올립니다. 평어래서 좀 죄송하긴 합니다만..

1. 내가 이해하는 정치와 정치학

1) 정치를 보는 나의 관점

덴마크의 정치이론가 벤트 플리비어는 그의 저서 <<합리성과 권력>>에서, 자신의 이론과 경험적 연구는 덴마크의 중소 도시 앨보에 기반한다고 밝히며, 마키아벨리가 토스카나에 지역적 기반을 두고 저술 활동을 펼쳤던 것에 비교하였다. 마키아벨리나 벤트 플리비어의 경우처럼, 나에게 있어서 앨보, 혹은 토스카나라고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한국, 그리고 서울이다. 서울은 내게 있어서 정치를 이해하고, 현실 정치에 이론적 또는 학문적 방법으로 개입하게 되는 지역적 산실이다. 즉, 내가 현실을 말하고 대면하는 창구가 바로 서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한국-서울을 정치학의 출발점으로 삼는 최장집 교수님의 관점은 ‘지금, 여기의 정치학’이라는 측면에서 한국의 정치 현실을 파악하는데 의미를 가지기도 하지만, 중앙 정치 분석에 치우쳐 한국 정치 시스템의 말단을 구성하는 지방적 특색을 간과하게 되는 한계를 가지기도 한다. <<88만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 박사가 본인의 블로그를 통하여 최장집 교수님의 정치 이론이 가지는 한계에 대해 지적한 적이 있었는데, ‘지역 토호’의 개념이 엄존하는 한국의 지방 정치 상황을 예로 들며 “최장집 교수가 아무리 정당 정치의 회복을 주장하더라도 ‘지역 토호 - 지역당 - 건설회사- 골프장’의 연계가 지방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한국 정치의 정상화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요지였다. 제목은 기억이 안나지만 경남 지방의 신문 기자가 마산 지역의 토호들에 대하여 분석한 책이 있는데.. 한국 지역 정치의 현실에 대해서 생생하게 알 수 있는 책이니 나중에 검색해서 알려주겠음.

정치 현상에 있어서 시작점이자, 그 이유가 되는 것은 바로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갈등은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인간 행위의 출발점이다. 따라서 갈등은 세상 어디나 보편적으로 편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 갈등으로부터 개인적/집단적 이익과 목표를 추구하기 때문에 폭력과 권력은 정치 현상의 핵심으로 등장한다. 이 폭력과 권력을 수단으로 해서, 한 사회의 안정과 개인적/집단적 복리를 실현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정치 현상은 이중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이중적이라 함은, 이성이 지향하는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경우에도 폭력이나 권력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이를 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 현상은 상극하는 인간 행위 사이에 매우 위태롭게 걸쳐져 있다. 예를 들어 전쟁과 평화 모두, 현실 정치 상황에서는 권력에 의해 선택되는 것이다. 이처럼 양날의 칼과 같은 권력은, 그 유용성 때문에 더욱 잘 다스려야 하는 것이다. 권력은 지배와 피지배, 자유와 억압 등을 추동하는 동력인데, 이는 언어/담론을 매개로 이데올로기를 통해 스스로를 은폐하거나 정당화하는 자기 방어적 기능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에 의한 이데올로기 비판은 권력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 정치의 핵심 개념을 권력으로 보고 권력의 이중적인 속성을 견제해야 한다. 따라서 정치에 대한 學인 정치학의 중요한 가치 역시 권력에 대한 견제/비판의 기능이어야함. 

정치학은 현실로부터 떨어질 수 없는 정치 현상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갈등적, 파당적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이러한 정치학의 성격 때문에, 모두에게 지지받을 수 있는 학문이란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그런 정치학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정치학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흔히들 학자는 정치나 사회 현실에서 거리를 두고 학문의 진정성,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고 이야기하곤 하는데, 만약에 정치학자에게 그러한 요구를 하게 된다면 오히려 그것은 진정한 정치학을 포기하라고 하는 말일 것이다.
물론 정치학은 경험적 현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 된다. 이성적인 과학적/객관적 시각으로 정치를 구성하는 것들을 분석할 수 있기 때문에 학문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천이성이 작용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현재 한창 촛불집회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처럼 현실은 언제나 불타고 있다. 이것은 정치학의 현실 참여성, 파당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정치학은 경험적 현실을 다룰 뿐 아니라, 사회나 공동체적 삶의 구성요소로서 규범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윤리학을 포함한다 할 수 있다. 이처럼 정치학이 다루는 범위는 무척 넓은 것이고, 본인 역시 정치학은 매우 어려운 학문이라는 것을 언제나 느끼면서 공부하고 있다.

-> 정치학의 경험적, 파당적, 규범적 성격. 고별 강의가 6월 중순에 이루어진 만큼 당시 중요한 사회적 현안이었던 촛불시위를 예로 들면서 정치학의 파당적 성격을 이야기한다. 한국 정치학계의 대가로서 평생 수많은 책을 쓰고 번역하며 한국의 정치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DJ 정부 출범기에 현실 정치에 참여하고자 했고, 그 이후로도 끊임없이 정부에 대한 비판과 한국 정치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며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 교수님다운 듯...


2) 나의 정치학에 대한 자평

나는 정치학자로서 학문적/지적으로 현실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뤄왔다고 생각한다. 과거 권위주의시기, 민주화 시기, 그 이후의 민주주의, 그리고 현재의 촛불시위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현실 문제에 대한 접근은 긴장의 연속이었고, 또 많은 비판자들을 대면하게 되는 기간이었다. 나의 현실 비판적 정치학의 내용을 되돌아보면, 맨 처음 해방 이후 이데올로기적 양극화 시기 민중에 초점을 두고 있다가, 권위주의의 구조와 성격에 대한 탐구, 그리고 권위주의의 수혜구조로부터 배제된 노동문제, 권위주의 하에서 지역적으로 배제된 호남 문제 등을 다뤄 왔다. 그리고 최근 민주주의의 제도화와 특정 형태의 제도화가 만들어낸 사회 경제적 결과에 대한 평가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관심의 변화는 당시의 정치적 현실과 맞닿아 있다. 또 이러한 작업들은 당시의 정치적 지배 세력과 갈등을 빚는 방향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내게는 한 때 운동권 정치학자, 때로는 친북좌경, 또는 점잖게 좌파(진보) 정치학자 등의 라벨이 붙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학자로서 한 시기를 끝내는 시점에서 스스로를 되돌아보았을 때 내가 정말로 급진적인가를 스스로 되묻게 된다.

-> ‘당시의 정치적 지배 세력과 갈등’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DJ정부 인수위원장으로 최장집 교수님이 거론되자 조선일보에서 최 교수님께 친북좌경의 딱지를 붙이고 맹공을 퍼부었던 사건이 있음. 이를 계기로 안티 조선일보 운동이 시작되고 진보적 지식인들이 조선일보 비판을 통하여 많이들 떴다. 조희연 교수 등 이른바 진보 진영 학자들과 ‘진보 대논쟁’을 통하여 당시 방향을 잃어버렸던 진보 세력과 참여 정부를 비판하고 나섰고, 이 때문에 노무현 정부와도 계속해서 갈등을 빚었는데, 노무현 대통령 본인이 직접 최장집 교수님의 비판에 반론해서 시끄러웠던 일이 있었다. 


내가 그동안 말해 온 것이나, 내가 중시하는 정치학의 가치, 학문적/이론적 정향과 기질 등 여러 측면에서 자평해 볼 때, 한국적 현실에서 나 스스로가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는 것에는 수긍하지만, 급진적이라는 평가는 잘못된 것이다. 특히 인민(민중)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운동의 정치학”은 내 학문적 정향과 잘 맞지 않는다. 민주화 시기나, 그리고 그 이후 과정에서 계속 운동을 강조하고, 열정을 부추기는 것은 내 기질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할 역할도 아니라 생각한다. 아마도 나의 관심은 “레짐의 정치학”이라 부를 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어떤 제도와 제도적 실천이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발전시킬 수 있는가, 어떻게 민주정치가 사회 구성원들의 사회 경제적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문제를 접근할 때도 어떤 파당적 관점에 나의 관점을 고정시켜 보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갈등과 권력의 관점에서 사회에 들어와 있는 모든 사회 세력들, 특히 전체 사회에 대해 지도력을 갖는 사회세력과 헤게모니의 역할을 중심에 놓고, 사회 전체의 정치적 힘의 배분을 이해하는 방법에 초점을 두고 있다.

-> 앞서 말한 ‘진보 대논쟁’에서, 계속하여 ‘거리의 정치, 운동의 정치’를 통하여 진보 세력에 새롭고 뜨거운 활력을 공급해야한다는 조희연 교수의 주장과, 제도적 관점에서 사회의 진보에 기여할 수 있는 정당 정치의 회복을 이야기했던 최장집 교수님의 진보에 대한 서로 다른 방향의 제시. 최장집 교수님의 ‘레짐의 정치학’은 이러한 관점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을듯. 파당적 관점이 아닌, 갈등과 권력의 관점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이후 베버와 관련하여 다시 나타난다.


이러한 나의 정치학에 대한 관점을 6월 항쟁 이후 한국 정치의 최대 문제가 되고 있는 현재의 촛불집회의 사례에 비춰서 이야기해보겠다. 촛불집회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두 가지 정치학, 내지는 정치관이 서로 경쟁하고 있다. 하나는 보수적 정치학으로, 현재 이명박 정부의 안정을 위협하고, 보수적 개혁 프로그램을 좌초시킬지도 모를 대규모 시위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나타난다. 다른 하나는 낭만주의적/이상주의적 정치학이다. 이는 대체로 진보파의 관점을 대변하는데, 여기서 운동은 좋은 것, 즉 운동이 민주주의에 기여하는 측면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운동의 정치학’이라 부를 수 있다. 더 많은 운동을 요구하는 반면에 제도 정치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대의제 민주주의를 우회하거나 넘어서는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의 확대를 통한 어떤 이상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선망이 나타난다.
나는 위의 두 관점 모두를 수용하지 않는다. 나는 기본적으로 운동을 민주화 이후 제도적 실패, 즉 민주주의가 제공하는 제도적 장치들 - 즉 선거, 정당, 자율적 결사체, 참여. 대포와 책임의 원리 - 의 실패가 낳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정당정치의 복원 내지는 활성화를 중심으로 한 대의제 민주주의의 제도 강화, 그리고 이를 통해 운동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 점에서 나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현실에서 우리가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체제라고 생각한다. 권위주의 시기에 노동을 연구했고, 민주화 이후 제도와 정당을 고민하는 것 역시 이러한 대의제 민주주의에 중점을 둔 관점과 맥락에서이다.

-> (촛불 시위에 대한 부분은 코멘트 삭제) 이처럼 촛불 시위에 대한 논평과 같이 교수님이 끊임없이 새로운 정치적 현상에 대하여 부지런하게 분석하고, 또 이런 분석을 통해서 한국 정치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끊임없이 새롭게 확장해 나가는 모습을 느낄 수 있다. 흔히들 많이 읽는 최근의 저작들 - <<위기의 노동>>,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민주주의의 민주화>> 등 - 만 살펴보더라도 교수님의 한국 정치 현실에 대한 고민이 단지 제도 정치라는 하나의 차원이 아니라 정치/사회/경제적인 다원적 접근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른바 ‘대가’라고 불리는 학자도 이렇게 지적 성실성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면 항상 스스로 반성할 수 밖에....

2. 나의 방법론과 이론적/철학적 기반

1) 현실지향적 연구와 대위법적 비교연구

나는 미국의 정치학자인 아담 쉐보르스키가 사용한 “방법론적 기회주의”라는 말에 어울리는 사람일 것이다. 연구에 있어서 어떤 특정의 방법론을 고집하지 않는다. 흔히들 나를 “구조주의적 접근/방법론”을 취하는 사람으로 분류하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자면 한국 노동자의 정치 성향 연구나 지역주의에 관한 연구에서는 합리적 선택이론의 분석적 방법론도 수용했다. 이처럼 나는 연구에서 다루는 문제 상황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 그에 적합한 방법론을 선택하고 있다. 방법론은 말 그대로 방법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마키아벨리나 벤트의 예처럼, 정치학자는 특정 사회와 시대적 배경을 경험적 탐구의 대상으로 하고 그로부터 이론을 도출해낸다. 나는 현대 한국 사회와 한국 정치를 학문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는 두 시기로 구분 될 수 있는데, 민주화 이전 시기의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것과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와 사회에 관하여서 이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내가 본격적으로 민주주의를 공부한 후 쓴 첫 번째 책이다. 민주주의에 관한 나의 공부는 한국의 민주화 과정과 정확히 병행한다. 한국의 정치 현실을 따라가면서 그를 통하여 공부를 해온 것이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연륜이 짧다고 할 수도 있겠다. 여기서 나의 방법론적 특징이 발견된다. 나는 이론이나 방법론을 먼저 생각하고 한국 정치와 사회를 보기보다, 한국 정치와 사회에서 내가 문제라 여기는 것을 먼저 생각하고, 그것을 따라가면서 이론적으로 공부했다. 사실 경험하지 않은 현실을 연구하는 것은 드물 뿐 더러 스스로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것들에 내가 정치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이전에 가졌던 관심들이 접맥되었다. 특히 미국 유학 이전에 가졌던 유럽의 학문과 문화 - 철학, 역사, 문학, 음악 - 에서 배웠던 영향들도 상당히 지속되었다. 그러다보니 나 스스로의 공부는 별로 체계적인 것이 못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즉, 현대적인 방법으로 정치학을 했다기 보다는, 80년대 이전까지 유지되었던 전통적인 방식의 공부를 했다고 할 수 있다.

-> 사족이지만 교수님의 ‘전통적 방식의 공부’는 다방면의 ‘인문사회적 교양인’을 키워내던 해방 이후 대학 사회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요즘과 달리 대학생들이 시대적 고민을 짊어지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 시대에 ‘공부’를 했던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거나 당시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들에서 읽어낼 수 있는 대학생들의 모습은 정말 초인들이 따로 없다. 일제 강점의 영향으로 일본어는 거의 모국어 수준이고 어지간한 책은 영문 원서로 읽어내는 것도 기본 사항에다가, 문학 청년은 불어를, 열혈(?) 청년은 독어를 우리네 영어 쓰듯이... 비단 외국어의 문제뿐만 아니라 지적 열정 역시 오늘날과는 비교할 수 없는 듯. 김우창 교수님의 청년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해외 학술 서적의 일어 번역판이 대학가 서점에 들어온다는 소문이 돌면 서로 먼저 예약하기 위해 경쟁하듯이 달려갔다는 후덜덜한 일화도 있음. 아마존만 가면 거의 모든 책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시대를 사는 우리는 할 말이 없어짐..

먼저 이야기했듯이, 나는 한국의 정치적 사례에 초점을 맞추어 정치학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지방(local), 그것도 변방의 정치학도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것이 내가 “두터운 서술”을 선호한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언제나 비교의 방법을 사용한다. 한국의 문제를 설명하고 서술할 때 나는 반드시 직접 비교의 준거를 갖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비교를 염두에 두고 한국 문제를 설명한다. 즉 세계의 다른 나라들의 유사한 사례들과 직간접적인 비교의 방법을 취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한국의 사례를 보편적 맥락에 위치시키려고 시도한다. 그것은 또한 역으로 다른 나라의 사례들을 한국의 맥락에서 재해석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부분에서 나의 학문적 성향과 방법은 결코 민족주의적이거나, 향리적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방법론의 개념으로 구분 할 때, 나는 한 가지 사례를 두텁게 분석하지도, 아니면 여러 사례들을 가볍게 파헤치지도 않는 중간 입장이라 할 수 있다. 
나의 비교분석은 대위법적이다. 한국 사회를 서술할 때, 또는 어떤 주제를 말할 때, 반드시 하나의 현상/사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비교의 준거와 대위법적으로 대화를 시도한다. 마치 교향곡에서 두 개의 음율 사이의 대화에 비견될 수 있다. 한국 사회에 초점을 두되, 비교의 방법을 중심으로 하기에 나의 비교 준거의 관심도 변해왔다. 예컨대 권위주의 시기에는 라틴아메리카, 민주화 이후 시기에는 독일의 바이마르공화국과 2차 대전 이후 서독 정치의 제도화, 프랑스의 3,4 공화국, 19세기 중후반 잭슨 대통령 시기 이후의 미국 민주주의의 전개 등으로 이어졌다.

-> “두터운 서술”의 대표적인 예로... 14세기 중반 몽타이유라는 남프랑스 랑그독 지방의 알비-카타리파 마을에 대한 종교 재판 기록물을 통하여 중세 농민들의 삶을 재구성한 <<몽타이유>>를 들 수 있음. 14세기 중반 몽타이유 마을이 텍스트로 완벽하게 재구성되었음..
대위법적 비교연구에 대해 부연하자면, 연구에 있어서 두 가지 이상의 사례를 유사한 관점에서 비교분석하여, 한 사례를 통하여 다른 사례의 은폐된 부분을 추측해내고, 또는 한 사례의 특징이 개별적인 것인지 보편적인 것인지 파악할 수 있는 다이내믹한 연구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교수님께 [민주주의론] 수업 들을 때도 미국 정치 제도의 형성기와 그로 인하여 등장한 미국 정치의 위기에 대한 텍스트들을 통해서 현재 한국 정치 제도의 변천사를 비교 분석하고, 또 한국 정치의 위기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었고, 어떤 제도적 개선을 통하여 극복해야 하는지 강의하셨는데 이런 수업도 대위법적 비교 연구와 상통하는듯.

2) 나의 정치학의 두 철학적 기반 : 독일 관념론과 영미 경험주의

내가 사회현상, 특히 정치 현상을 볼 때는 두 가지 철학적 전통에 기반하고 있다. 하나는 독일의 관념론 철학, 특히 신칸트학파의 경우이다. 그것은 이론적(순수) 이성과 실천 이성간의 구분과 대립을 극복하려는 철학적 프로젝트이다. 그러나 나 스스로는 칸트로부터 하버마스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시도들이 성공했다고 보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적 전통에서 영향을 받은 막스 베버의 세례를 받았다. 베버는 사실과 가치를 구분하고, 독일의 이성주의적 전통과 낭만주의적 전통(이성에 대한 회의)의 접합점을 제공했다.
다른 하나의 철학적 기반은 미국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만큼, 영,미,프랑스의 경험-분석적 방법과 홉스-로크-토크빌 등의 자유주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철학적 조류에서 나는 정치 현상을 물리적 힘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을 배웠다. 현실주의(realism)/물질주의(materialism)적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유주의의 전통을 통하여, 정치에서 갈등이 가지는 중요성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하여 정치에 있어서 덕(virtue), 도덕(morality), 그리고 공동체적 가치 등의 도덕적 접근이 우선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더 나아가 권력/갈등을 제어하는데 있어서 ‘내적 통제’ - 유교 철학이나 도덕, 윤리적 접근 - 보다는 ‘외적 통제’(삼권 분립과 같은 제도적 견제)를 강조하는 논리를 갖추게 되었다.

-> 교수님은 스스로 이야기하는 자신의 정치학에 있어서 분기점인 ‘민주화’ 이후 독일 관념론과 영미 경험주의의 철학적 전통 중 영미 경험주의에 가까운 관점을 가지고 정치이론을 전개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본문 중 ‘정치에 있어서 덕, 도덕, 그리고 공동체적 가치와 같은 도덕적 접근’에 대한 부정적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고 나오는데, 이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초판과 개정증보판의 비교를 통하여 확연히 느낄 수 있음. 초판 저자 후기는 ‘공화주의’ 개념을 한국 정치 현실에 대한 화두로 끌어내며 정치에 있어서 virtu의 회복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개정증보판에서는 이 부분이 대거 삭제되었음. 이 때문에 강유원 박사가 리뷰에서 많이 아쉬워했다고... 아무튼 삭제한 이유를 들 때 현재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서 공화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시기가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아마도 개정증보판이 나오는 시점과 맞물려 교수님의 다른 글들에서도 권력에 대한 견제 역시 시민 사회에 대한 기대보다는 시스템적 견제를 강조하는 쪽으로 성향이 바뀌었던 것 같음.

3) 사회과학의 철학에 있어 두 이론가/철학자에 대한 나의 태도 : 마르크스와 베버

마르크스는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의 조건에 살고 있는 한, 이를 수용하든 아니든 대면할 수 없는 이론가이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자본주의 생산체제의 총체성을 드러내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총체성을 이해할 때 그 체제의 부분적 작동과 특성이 더 잘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과학에 있어서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론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지적할 수 있다.
 체제에 대한 궁극적 부정을 전제로 한 혁명적 실천이론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론과 실천이론 간의 연계가 분리 될 수 없다. 따라서 그의 이론 스스로는 學으로서 온당한 평가가 힘들다. 그리고 민주주의, 정치와 같은 인간 행위의 자율적 공간이 허용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은 ‘이성의 프로젝트’일 수밖에 없다.
 그의 이론은 필연적으로 혁명적 열정을 불러옴으로써 이론으로서만 고립시키거나, 절제하는 것이 지난하다.
 현실 동구 사회주의 체제의 실패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와 권력 집중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함으로써 체제의 붕괴를 면치 못한다.
 이성이 도출한 이론의 절대화로 세속종교의 수준으로 변질하여 버렸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나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르크스를 자본주의 체제의 특성이나 작동원리를 해명하는 이론으로 제한하여, 그로부터 추출한 요소들에 집중해 발전된 이론가들에게는 큰 영향을 받은 편이다.
예를 들어,
 쉐보르스키와 엘스터 : 합리적 선택 이론을 통한 이른바 분석적 마르크시즘. 마르크시즘의 명제들을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도록 이론화하고 부분이론으로 분해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원래의 마르크시즘이 지녔던 혁명적 성격은 지니지 않고 있다.
 그람시 : 지배와 억압의 기능으로서 이데올로기와 문화의 역할을 조명하여, 원래 이론의 유물론적 내용을 전도시켰다. 정치의 변혁적 역할을 열고 현실에 있어서 큰 설명을 가지게 해주었다.
 프랑크푸르트 학파 : 바이마르 시기의 사민주의 이론가들, 오토 키르히하이머, 프란츠 노이만, 헤르만 헬러, 그리고 최근의 하버마스까지, 마르크스의 계급갈등이론과 베버의 관료화이론과 도구적 합리성, 그리고 칸트-신칸트학파의 이성의 역할을 중심으로 한 관념철학 등을 취합한 절충적 비판이론


개인적으로 학자로서의 나는 마르크스보다는 베버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철학은 합리성과 비합리성, 이성주의와 낭만주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사실과 가치의 구분 등, 상극하는 요소 사이의 불안정한 균형 위에 서있다. 그는 마르크스에 대립하는 자본주의 발전의 일반 이론을 발전시켰고, 자본주의 시장체제 - 관료제의 발전에 의한 국가의 강화 - 를 파악할 때 정당과 정치의 역할 등을 체제 발전의 과정 위에 위치시켰다. 베버가 말하는 근대화-탈신비화는 자본주의발전을 매개로 합리적, 법적 권위의 패턴을 발전시키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 같은 지배적, 일반적인 과정에 저항하는 힘은 카리스마적 리더십이다. 카리스마는 자본주의 합리화에 반하여, 새로운 자유와 창조의 가능성을 여는 힘이다. 정치의 리더십은 시장 경제의 합리화의 압박에 저항하는 새로운 힘을 제공한다. 이 점에서 경제와 정치의 역할은 상호견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베버와 나의 일치점은 근대화-합리화에 대한 이중적 태도라 할 수 있다. 정치적 리더십에 대한 기대와, 이성에 대한 회의주의와 이성의 프로젝트에 대한 거부 역시 이러한 관점이라 할 수 있다. 현실주의적, 실용주의적, 그리고 회의주의적 정치관 역시 베버의 관점인데, 이성주의가 작용하는 것이 아닌 권력과 폭력을 다루는 현상으로서 정치를 이야기한다. ‘목적윤리’가 정당화될 수 없는 ‘책임윤리’의 영역으로서의 정치라 할 수 있다.

-> 마르크스나 베버나 내가 공부가 얕아서 별로 할 이야기가 없음. 게다가 특히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누구나 공부도 많이 했고... 내 주변 사람들이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교조적이거나, 혹은 낡았다고 생각하거나 너무 극단적으로 갈리는 경향이 있음.. 아마 한국에 그람시의 이론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것이 최장집 교수님이었고, 그 후 그람시의 수용을 두고 학계에서 재미있는 논의들이 많이 일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그때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 해서 조금 아쉽다. 베버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목적윤리’와 ‘책임윤리’를 언급하는데, 정치적 의도의 순수함 보다는 그 의도가 낳은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임. 베버에 의한 영향은 교수님이 요새 계속 정당 정치의 회복에 대해 강조하는 것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을 듯.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8:34:34 

 

병장 이동석 
  잘 먹겠습니다. (꾸벅) 2008-08-12
12:50:55
 

 

상병 김태현 
  최장집 교수님이 어느 대학에 계셨나요?? 2008-08-12
13:31:46
  

 

병장 허학종 
  안암골입니다~~ 
최장집 교수님의 글이나 명성은 익히 접해왔으나, 실제 저서로 깊게 만나뵌 것은 
군대 와서 <어떤 민주주의인가>가 처음이었습니다. 현 한국사회에서 마치 공기처럼 당연히 내 주위 어디서나 느낄 수 있을 듯한 '민주주의'에 대해, 처음으로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바라볼 수 있었던 기회였습니다. 앞으로 다른 저서도 봐야 할듯.. 
괜시리 '후마니XX' 에서 나온 책들도 관심가지게 됬고요.. 2008-08-12
13:46:38
  

 

상병 김태현 
  헉..우리학교 교수님을..몰랐네..들어본거 같기도 하고.. 
부끄럽네.. 2008-08-12
13:56:28
  

 

상병 이동열 
  저는 다행스럽게도 마지막 강연에 잠깐 참석했었습니다(웃음) 
다른 약속도 있어 전부 참석은 못했지만요... 
강의록이라도 받아와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다시 읽게되어 반갑기는 하네요 
강의를 직접 못 들은게 정말 아쉽습니다... 제가 저학번인지라(울음) 

蛇足. 안암골 분들 많이 보이시는것 같아 왠지 반갑습니다(웃음) 2008-08-12
14:03:03
  

 

상병 김태현 
  전 06국제어문인데~~ 혹시 06?? 2008-08-12
14:07:04
  

 

일병 김예찬 
  저도 한 과목 밖에 수강해보지 못했지만 최장집 교수님의 수업은 이 것이 마에스트로의 수업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일단 시험 문제 자체가 포스가 넘쳤고.. 다만 수업에 적응하기 전에는 엄청난 졸음을 이기기 힘든 수업이었죠.(땀) 2008-08-12
14:42:00
  

 

병장 김원택 
  길다. 우선 지금은 볼 여유가 없으니 나중에 봐야 겠음. 2008-08-12
15:07:09
  

 

병장 이동석 
  컥, 소화를 못 시키긴 한 모양입니다. 
절반 뚝 떼서 삼키고 댓글 다는데 튕겨서 날아갔군요. 껄껄.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해서 한참을 떠들었으나 
날아간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규정도 규정이지만, 내용이 쓰면서도 지리멸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암튼, 코멘트 참 적절한듯 합니다. 
지웠으면 큰일날뻔. 크크. 

다 먹고 제대로 소화해보겠습니다. 2008-08-12
20:29:31
 

 

병장 이동석 
  다 집어삼키긴 했습니다만, 소화제가 필요하겠습니다. 역시, 

최장집 교수의 강의를 못들어본건 아쉽군요. 2008-08-13
09:4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