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청춘의 종언’ —2008년, 불안한 이십대를 위한 소고(小考) (2)  
병장 고동기   2008-12-12 17:15:08, 조회: 170, 추천:1 

4. 이십대의 세대적 무의식

김홍중 그 때문에 이십대의 냉소 앞에서 먹먹해지는 느낌이 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386세대의 냉소에는 약간의 제스처가 있는데 냉소하는 이십대 앞에서는 거의 대화가 불가능한 듯한 벽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뿌리에 저런 절망감이 존재하겠지요. 세대의 집합적 체험과 연관해서 최근에 제가 읽은 황지우 시인의 한 산문이 생각납니다. 2000년에 서울에서 있었던 국제문학포럼에서 발표된 「격류 위의 나뭇잎」이란 글에서 황지우는 ‘모더니티의 침전’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에게 모더니티란 자신의 육체에 가라앉아 있는 무엇이라는 거지요. 가령 자기 체험의 기저를 이루는 키치, 에세이들, 라디오의 팝송들, 이런 문화적 기호들이 시인의 내적 세계의 밑바닥에 고여 있다는 겁니다. 어려서 맡은 송진 냄새가 나는 제재소, 이런 것이죠.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황지우 시인이 지금 자신의 침전된 모터니티의 체험을 열거하면서 자기 세대를 호출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송진 냄새나는 제재소의 이미지 앞에서 눈을 감는 사람들은 모두가 같은 세대인 것이죠. 가령, 저에게도 그와 유사한, 침전된 하나의 이미지가 있어요. 제가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책을 중에 예컨대 『알프스 소녀 하이디』에 보면, 가난한 하이디가 꿈꾸는 부유의 상징으로 흰 빵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기억에, 하이디의 흰 빵이 찐빵이나 호빵과는 다른, 제가 그때까지 먹어본 빵과는 분명히 다른, 어떤 서구적이고 기름지고 풍요로운 음식들로 각인된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실체는 불투명하지만 매우 강력한 매력을 지닌 기호로 저에게 침전되어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제가 성인이 되어서 몇 차례의 술자리에서 이 흰빵 이야기를 했더니, 저와 같은 세대에 속한 사람들이 그 판타지를 공유하더라는 겁니다. 좀 과장되게 말하면, 하이디의 흰 빵은 우리 세대에게는 일종의 암호 같은 것인 셈입니다. 묘연한 근대, 빵으로 구체화되었지만 아직 현실화되지 못한 서구의 화신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쨌든, 계급과 세대의 차이가 이런 것이 아닐까 싶어요. 계급은 냄새나 맛까지는 잘 못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세대는 냄새까지, 물질과 감각까지 곧바로 내려가요. 골목길의 냄새를 아는 세대와 모르는 세대 사이에는 감각적 경계선이 그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계급은 의식의 문제지만, 세대는 무의식의 문제라는 거지요. 반드시 유년기와 연관될 필요는 없고 그 이후에 형성된 것도 좋은데, 이십대의 이런 세대무의식이 무엇일까 매우 궁금해집니다.
김현진 아까 세대의 무의식이라고 말씀하시는 게, 제 생각에는, 얘들이 그냥 걱정하다 세월을 다 보내요. 걱정, 근심, 염려, ‘아 어떡하지? 내 토익 점수’ ‘아, 어떡하지? 직장’…… 이렇게 아이들이 걱정, 염력, 이게 너무 커서 결국에는 무기력해지고 그런 것 같아요. 아까 헤드기어 말씀하셨잖아요? 아이들이 헤드기어를 쓰고 맞긴 맞았는데 그러면서 충격은 이차적으로 오는 거예요. 대신에 자기가 직접 맞은 것이 아니라 대리전을 했기 때문에 이 전투의 경험을 다들 엄청나게 오버해서 말하는 거죠. ‘나 죽을 뻔했어. 너 이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모르지?’ 도취해서 말하는 것도 있고, 팩트는 아닌데 뭔가 자기가 빠져서 하는 얘기로 아이들에게 공포감을 주는 거죠. 처음부터 공포감을 주려고 했던 건 아니라고 저는 믿어요. 자기가 고생한 나날들을 얘기하다보면 누구나 도취감은 생기니까. 그런데 얘들은 뭐가 진실인지 판별할 수가 없거든요. 왜냐하면 방탄복을 입고 맞았으니까. 아프긴 아픈데 ‘너 방탄복 입고 맞았는데 뭐가 아프다고 그래?’ 하니까 아프다고 말도 못 하고. 그러니까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짜인지 알 수가 없는 거거든요. 그러다가 사회에 나와 보면 ‘발랑 까져가지고……’ 하고 말하니까 더 구분을 못 하는 거예요.
우석훈 90년대까지만 해도 미디어의 힘이 이렇게까지 크지 않았거든요. 영상, 이미지, 이런 분야가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등장하게 되면서 양식 자체가 변한 게 있고 그 과정에서 마케팅 세력이 굉장히 커졌다고 보이거든요. 사실 80년대나 70년대에는 학생들에게 전혀 돈이 없었죠. 특히 이렇게 마케팅의 대상이 아니었는데, 지금 이십대들이 십대이던 시절, 사실 부모들은 가난했을지 몰라도 사회적으로는 풍요했던 시기거든요. 그제야 처음으로 제대로 된 사회안전보장망 같은 게 들어오고 경제적으로 일만 불에서 이만 불로 넘어오던 시기이니까. 그 시기에 마케팅 세력이 매스미디어랑 결합하면서 집단적인 판타지 같은 걸 많이 만든 것 같아요.
김홍중 그 이후에 계속 나오는 세대들의 호명이 있지 않습니까? X세대, W세대, R세대…… 지금이 N세대까지 왔나요? 이런 것들이 전부 마케팅 용어 아닌가요?
김현진 제가 열여덟, 열아홉 살 때 ‘스무살의 디테일—티티엘입니다’ 그런 광고가 있었거든요. 휴대전화 같은 게 생기면서 그나마 부모의 경제력을 쓸 수 있는 아이들에게 그 사람들이 하려고 했던 얘기가 뭘까? 생각해보니까 스무 살에 돈을 써라, 결국 우리를 산 채로 발라당 벗겨먹었구나 하는 걸 이제야 깨닫는 것 같아요. (웃음)
백가흠 점점 자기 자신의 실체 자체가 매우 모호해지는 것 같아요. 실존 같은 거하고는 좀 거리가 있겠지만. 제가 요즘 어느 소설공모에 심사를 맡아 하고 있는데요. ‘이제 나는 완전히 세대라 갈렸구나’ 하는 걸 이번에 확실히 느꼈어요. 작년까지도 그런 생각은 안 들었거든요. 아까 판타지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소설들이 다 SF적인 걸로, 다 우주로 가는 듯해요. 소재나 주제가 우주와 연결되어 있어요. 이제까지는 그런 조짐이 간혹 젊은 소설가 중에서 별견되고는 했었거든요. 그냥 하나의 특징적인 개성 정도로만 파악하고 있었는데, 예로 『달의 바다』를 쓴 정한아씨도 있고, 젊은 축에 몇몇이 있기는 했지만 확연하게 트렌드로 드러나는 건 아니었는데…… 이번에는 이미 하나의 사회적인 로망으로 우주적인 상상력이 자리잡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구를 떠난 소설이라는 게, 결국은 사회나 정치적인 것들과의 결별처럼 느껴져서 좀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이미 깊숙하게 상처라고 알고 있던 것들이 글을 쓰는 이 젊은 친구들에게는 그다지 큰 상처가 아닌 게 아닌가? 그게 판타지와 결합이 되니까 그런 느낌이 많이 들었어요.
김현진 그 애들이 갈 데가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완전히 귀엽고 발랄하거나 이상한 안드로메다로 가버리거나. 정말 대기업에 편승하거나…… 그게 아니면 안드로메다로 가는 거죠. (웃음)
우석훈 저는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사회를 얘기하려면 사십대, 오십대 사회과학자나 그런 놈들이 다 버티고 있고…… (일동 웃음) 연애 얘기를 하려고 하면 능수능란하게 연애 얘기를 잘 쓰는 오십대들이 버티고 있고, 땅의 판타지는 이미 <반지의 제왕>으로 삼십대가 한번 해먹었고, 남은 건 우주밖에 없는 거죠.
백가흠 옛날을 생각해보면 우주, SF 판타지라는 건 현실과는 어쨌든 괴리된 이상적인 세계였는데 이제는 우주 자체가 땅 밑으로 내려와 있는 느낌이 들어요.
김현진 저는 선생님 말씀에 굉장히 공감이 가는 게, 제가 원래 전직이 온라인게임 개발자였거든요. 그런데 레벨을 올리려면 뭔가를 잡아서 경험치를 높여야 하는데 이미 사냥터는 누군가가 다 잡고 있는 거예요. 힘센 놈들이. 근데 ‘나 좀 잡자’ 하면 ‘야, 돈 내고 다 같이 하는 게임인데 네가 약한 걸 왜 우리 탓을 해?’ 그래서 캐릭터 나이는 먹어 가는데 아직도 레벨은 1이고. ‘이걸 어쩌지?’ 그러면 게임을 관둘 거냐? 그런데 온라인게임이야 관두면 되지만 현실에서 죽어버릴 수는 없잖아요.

5. 이십대는 말할 수 있는가?

김홍중 지금 말씀들 하시는 과정에서 이십대의 체험이 어떤 방식으로 재현되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사실 어떤 세대든지, 낡은 표현을 쓰자면, 즉자적인 형태로 남아 있기도 하고 대자적으로 변화하기도 합니다. 지식사회학자 카를 만하임이 1928년에 세대에 대한 중요한 사회학적 논문을 쓰는데, 여기에서 그는 세대를 일종의 사회적 위치(social location)로 규정합니다.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출생 코호트(cohort)집단 같은 거죠. 그런데 이들이 격렬한 사회변동의 과정에서 세대의식과 공통의 언어와 감수성을 구비하게 되면, 만하임의 용어로, ‘실제 세대(actual generation)’로 변모합니다. 실제 세대는 스타일과 의식을 갖춘 본격적인 사회집단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제까지 한국사회의 주요한 청년 세대들은 즉자적 계급으로서 자신들을 설립시키는 데 성공해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즉자적 세대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세대가 정치적으로 주체가 되는 체험이 있거나 예술적인 차원에서 소위 ‘예외적 개인’들을 배출해서 세대의식을 표현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즉, 세대가 자신 고유의 언어를 가지고 ‘말하는 집합적 주체’여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지금의 이십대에게는 이 두 가지가 모두 막연합니다. 이들에게 가령 386세대가 공유하는 87년이 있는가? 혹은 297세대의 서태지가 있는가? 잘 모르겠어요. 말하고 듣고 말하는 구조적 위치를 갖는 것이 가야트리 스피박이 이야기하는 ‘말하는 주체’라면, 이십대는 박탈된 세대지만 만약 그들 고유의 언어를 모색하고 그 모색을 위해 싸우고 있다면 이십대의 미래를 사실 어두운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십대가 언어를 상실한 세대라면 문제는 좀 심각한 것이 아닌가요?
우석훈 지금 이십대와 가장 비슷해 보이는 세대로 독일의 ‘회의적 세대’라는 개념이 있는데요. 이 사람들이 상당히 불행한 사람들인데, 히틀러 때 유겐트를 경험하게 됩니다. 집단 트라우마를 가졌고, 하버마스가 여기에 대표적인 사람이에요. 이탈리아에서는 에코도 여기에 살짝 포함시킬 수 있긴 한데, 에코는 좀 어렸고요. 여덟 살인가에 그랬으니까. 그때 십대를 보냈던 이 사람들이 50년대, 60년대가 지나면서 상당히 두려워진 거예요. 왜냐하면 독일은 유겐트를 조직했으니까. 그리고 자기는 전범이 아니었지만 누군가가 와서 ‘너 전범이었지? 하면 전범인 거거든요. 근데 그 비슷한 때에 프랑스 사람들은 레지스탕스의 기억이 있잖아요. 이를테면 뻥을 치더라도 자기는 무얼 하다가 걸렸다던가, 자기는 안 했더라도 그런 걸 동일화를 시키는데, 독일에서는 그런 것들을 못 가졌던 것 같아요. 그 사람들이 50년대, 60년대를 보내면서 굉장히 회의적으로 되는데, 어떤 정치적인 변화를 얘기하지 않아요. 우파냐 좌파냐, 보수주의냐 아니냐를 얘기하지 않는 이 세대를 회의적 세대라고 했는데, 이 사람들이 끝내 불행하게 된 것이, 이 사람들이 사오십대가 되어서 지도층이 됐을 때 68이 터졌거든요. 그리고 68세대가 주도권을 가지고 나니까 그냥 영원히 회의적으로 말아먹은 세대가 되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게, 이를테면 이십 년 텀이라서 지금 다섯 살, 여섯 살짜리들이 이십년 쯤 지나서 터질 수도 있는 거거든요. 독일에서는 아까도 말씀하신 것처럼 세대라는 게 그때그때 많이 나오거든요. 사람들을 놓고 보면서 자기 얘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도의적으로도 맞고…… 그 다음에 이런 얘기를 하라고 하는 건 안 좋다는 생각이 들어요.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면 처음에는 이상한 얘기를 막 할 거거든요. 그래도 계속 말을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 게, 어디에선가 정리가 되지 않으면 이 불행이 굉장히 오래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1000유로 세대』랑 제가 쓴 것을 비교해본 게, 사실은 이십대 내에서 힘들어 죽겠다고 나온 거거든요. 그런데 보니까 일본도 이십대들이 말을 안 해요. 하류지향이나 워킹푸어에 대한 분석들도 일본에서는 학자들이 했고, 이게 서양과 동양의 차이냐, 아니면 사실은 다른 사회구조가 있는 거냐, 정치경제적으로 다른 구조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동양사회라는 특수한 문화적인 구조인지, 그건 제가 구분을 잘 못하겠는데, 어쨌든 한국과 일본은 아직 세대 내부에 대변자가 잘 없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덩어리‘취급을 받는 거고요.
김홍중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말을 하는데 다른 세대들이 그 언어에 대한 주파수를 갖고 있지 않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우석훈 너무 작게 분화하면서 소멸되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십대의 또래집단은 대여섯 명 정도 되는 소그룹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저희 또래는 술을 마셨다 하면 스무 명 정도가 마시거든요. 학회에서 마시든 동아리에서 마시든 간에 스무 명이 마시면 왔다갔다 하는 게 정신이 없잖아요. 근데 지금은 대여섯 명 정도의 집단인데 그 집단도 상대적으로 폐쇄적이고, 탈정치화된 상태 같습니다. 그 내에서는 얘기하는데 이게 하나의 목소리가 되어서 운동이 되거나 그런 게 아니고…… 힘들면 힘들다고도 말을 해라 하는 건데, 개별적으로 물어보면 힘들다고 그래요. 그런데 집단적으로 물어보면 ‘우리는 괜찮아요’ 그러고.
백가흠 얘기를 한다는 건 사회,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얘기들일 텐데, 그렇다면 아까 얘기했듯이 일단 정치주체로서의 의식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꼭 이십대만의 문제를 아닌 것 같거든요. 제가 삼십대 중반인데 오히려 대학을 다닐 때만큼 그다지…… 그냥 살려고만 하다보니까…… (일동 웃음) 실은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저도 요 근래에 들었어요. 근데 그걸 어디에다…… 그 대상 자체도 모호하고, 그리고 실은 이번 선거 이후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보다도 제가 정말 큰 충격을 받은 건 서울시 교육감 선거였거든요. 진보진영의 후보가 떨어진 다음날 저는 처음으로 그를 지지했던 당의 당원이 됐어요. 하나 또 한 일은 기아플랜이라고 기아 어린이 돕는 걸 후원하는 게 있는데, 그 두 개를…… 가장 쉬운 일을 한 거지요. 그냥 떨떠름한 마음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지나고 보니 저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 사회에 대해서 불만족스러움을 얘기한 건 처음이었거든요. 그렇다고 따진다면 저보다 어린 세대들은 더 힘들지 않을까, 대상 자체가, 어디에, 누구에게 얘기해야 하는지 모호하지 않을까, 그게 더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요. 일단 저만 놓고 보면 소설 말고는 단 한마디도 얘기를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저는 74년생인데 그때는 정말 운동 끝 무렵이었거든요. 게다가 지방 학교를 다니니까 갈 데도 없고 만날 술 사주는데 찾아다니다가…… (일동 웃음) 학교에 오래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런 형들밖에 없고. 근데 군대 가기 전에, 거의 운동 끝무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도 작파하고 철거싸움 하는 데 따라다니고 그랬어요. 제게 주로 술을 사주던 형들이 흔하던 민족민주계열이 아니고 다분히 원전주의에 입각한 이들이라서, 따라다닌 곳도 그냥 하는 데모가 아니라 생존에 관련된 것이어서 굉장히 무섭기도 하고 겁도 나고 그랬었어요. 지금의 죽전휴게소 뒤에 벽산아파트가 들어선 곳이었는데, 어느 젊은 엄마가 아기 업고 고속도로에 뛰어들어 길을 막을 정도였으니까. 끝내는 망루에서 떨어져 아주머니 한 분도 돌아가시고…… 그때는 굉장히 열정이 있었다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것도 좀……
우석훈 그때 취직은 될 수 있었을 텐데…… (일동 웃음)
백가흠 취직이 될 수 있다는…… 어떻게 보면 그런 것도 있었던 것 같아요. 문예창작과를 다녔는데 그때 유행한 말이 ‘정말 갈 데 없으면 방송작가라도 하지 뭐’ 그랬었어요. 그때 방송작가의 수요가 엄청나게 늘고 있었거든요.
김현진 얼마 전에 한 명 자살하고 그랬잖아요. 그 높은 SBS 건물에서……  
백가흠 그런 보루라도 있었으니까 학교 안 다니고 그런 것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그때는 굉장히 할 말이 많았다고 생각했는데 지나보니까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나. 
김현진 거침없이 이야기를 한다는 게 거의 블로그인데, 그 기본 정신이 개인 대 개인의 소통이거든요. 영향력 문제가 아니라 간단히 봐서 이십대들한테 지면, 즉 발언대가 없어요. 제가 여기에 왜 불려왔냐면, 물론 잡문 쓴다고 많이 까이지만 그래도 지면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인데…… 물론 이십대 여자 소설가야 있겠지만 뭔가 사회참여적으로 얘기를 하고 그런 잡문을 쓰는 사람이 없거든요. 그렇다면 제가 무슨 독보적이라서 여기에 왔냐, 그게 절대 아니라, 심플하게 보면 일단 위에서들 안 비켜줘요. 자기들 먹고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한 달에 삼십만원, 이런 건 쟤네들한테 절대 못 내주죠. 그러니까 훈련받을 틈이 없는 거고. 저 같은 경우에는 계속 청탁이 오는 게, 잘 써서 그런 게 아니라 마감을 맞출 수 있어서예요. 십오 매 쓰라고 하면 십오 매 쓰고, 이렇게 고쳐라 하면 딱 한 다음에 몇 시간 안에 다시 보내줄 수 있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다들 그게 안 되어 있으니까. 우석훈 선생님 말씀대로 옹알이를 할 수 있는 타임이 있어야 하는데 십 년 전에는 무가지, 웹진 같은 걸 통해서 이십대가 그런 옹알이를 할 수가 있었던 것 같아요. 기업들이 스폰서도 해주고. 근데 그게 돈이 안 된다는 걸 십 년 동안 철저하게 깨닫고 나니까 훈련된 개체만 써먹겠다는 거죠. 저 같은 경우는 앞으로 살아남을지 아닐지 모르겠지만 되게 운이 좋은 개인적인 개체였던 거고, 아이들은 기회 자체를 박탁당하는 거죠. 그것도 이해가 가는 게, 편집자는 자기도 먹고 살아야 하는데 원고를 내일까지 못 맞추면 안 되고. 그런 식으로 해서 모든 기회가 자꾸 없어져가는 것 같아요.
우석훈 제가 보기엔 대학 내 신문 같은 게 예전에는 큰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혹은 문학회 같은 것도 큰 역할을 했던 것 같고요. 어쨌든 이런 장치들을 통해서 많은 대학생들이 나름대로 습작기를 보내고, 결국 대학을 졸업하기 전 혹은 졸업하는 시점에 공식적으로 작가로서 혹은 창작자로서 데뷔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이 습작기를 박탈당한 셈이지요. 사실은 취직시험을 준비하는 동안에…… 그것이 무엇이 됐든지 간에 영화를 하고 싶은 사람들은 영화를 준비하는 시간이 될 거고요. 그런 습작기를 가질 수 있었던 시간들이 사라지고 나니까 공부는 굉장히 많이 했는데 모두가 똑같은 지식을 갖고 그러니까 엄청 점수가 인플레 되는 거죠.
김현진 저 같은 경우에는 에세이를 쓴다거나 단문이든 뭐든 훈련을 받은 게, 세게 얘기하면 돈이 가르친 거거든요. 당장 돈이 입금이 안 되면 생활이 안 되는데 글이 거지같으면 입금이 안 되니까. 그런 걸 어릴 때부터 배운 건데 이런 것이 불운한 일이기도 하고, 그런 기회가 없었던 아이들을 생각하면 행운이기도 하고요. 되게 복잡다단한 인생인 것 같아요.
김홍중 예. 저는 그 부분은 생각을 못 해봤는데 두 분이 말씀하신 것이 아주 현실적으로 가슴에 와 닿네요.
우석훈 저는 이십대 후반과 삼십대 초반에 글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2말 3초라고 부르는데요, 생각보다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끔 이런 사람들을 출판사와 연결시켜주기는 하는데, 그런데 출판사 얘기는 그런 거예요. 얘기는 재밌고 하고는 싶은데 문장이나 이런 게 너무 훈련이 안 되어 있으니까 난감하다는 거거든요.
백가흠 그런데 그런 걸 배울 기회가 없는 것 같아요.
김홍중 두 가지 생각이 듭니다. 우선, 말하는 주체는 스피킹(speaking)의 주체이지 토킹(talking)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상징계에서 의미있는 위치를 갖고 있느냐의 문제라는 것이죠. 옹알이나 푸념은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토킹이지 스피킹은 아니라고 규정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이십대가 토킹의 방식으로 말을 해도, 가령 블로그나 사적 담화를 통해서 말이죠. 그것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스피킹이 되지 못할 가능성이 있죠. 그 점을 지적하신 것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체험의 집합성인데요. 가령 우리가 무엇을 말할 때, 그 말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 사실은 세대적으로 공유되는 체험인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386세대의 거의 마지막 학번입니다. 후배들이나 학생들에게 ‘그때는 말이야’ 하고 나오는 체험담의 내용 중에 실제로 제가 한 것은 별로 없어요. 다 훔친 거예요. 세대적 체험의 저장고가 있어서 온갖 상징과 기억과 행위들이 거기 있잖아요. 아마 그걸 가장 잘 훔치는 사람들이 소설가들일 거예요. 잘 훔쳐서 더 풍부하게 만들어서 되돌려 주죠. 그래서 사실은 정치적, 예술적 체험이 풍요로운 세대의 일원이라는 것은 행복입니다. 지금 이십대가 공유하는, 혹은 앞으로 그들이 공유하게 될 이 상징의 저장소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들어 있는 걸까 궁금합니다. 그걸 알기 위해서는 역시 그들의 문화적 표현물들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만……
백가흠 아까 나왔던 얘기들이 반복되는 것 같기도 한데요. 기성세대가 가진 공통분모로서의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이라든지 사회 안에 행해지는 부조리 같은 것들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도 IMF이후에는 와르르 다 사라졌다고 생각하거든요. 분명 사회적으로 안아야 할 짐들이 개인에게 모두 나누어졌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친다면 집단화해서 서로 나눌 수 있는 분모 자체가 사라진 것이지요. 개인의 삶 자체가 힘들어지니까 겨우 공통적인 것들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들이 결국 소비 형태라든지 문화 취향…… 그것은 다 흘러간 기억들 속에서의 유년기의 문화 취향이겠죠. 이런 것들밖에는 서로 주고받는 것들이 없는 것 같은 느낌도 들고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80년대, 90년대에 걸쳐 문학이라는 큰 틀에서 이어지던 주제분모들이 굉장히 소수의 분모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다시 말하면 문화적 소비형태의 공통적인 취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문학이 소비되고 생성되는 것으로 바뀐 것 같아요. 문학적 주제에 있어서는 많이 좁아질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래서 누구나 즐길 수는 없는 문학의 소비형태로 변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고요.
김현진 공감이 가는데요. 우리 또래는 ‘옛날에 말야’ 하면서 ‘그때 2000년대 초반에는 강남역에 가면 딱 폴로 체크 가방에다 면바지에다 워커 신은 아이들, 아니면 페라가모 바라로 두른 아이들, 딱 둘밖에 없었지’ 이런 얘기를 할 때만 재미가 있는 거예요. 그 외에는 할 얘기도 없고.
백가흠 예를 들면 정이현 박민규 같은 작가들의 소설이 그런 취향적인 볼모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들을 택해서 문화적으로 성공적인 사례를 남긴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김현진 왜 이십대가 주체로서 말하지 않냐 하는 질문을 최근에도 많이 받았는데요. 시켜줘야 말을 하지…… 지금의 윗세대들이 먹고살기 바쁘다보니까 아까도 지면을 안 내주는 사람들처럼…… (일동 웃음) 당작 먹고살기가 너무 힘드니까 밑의 아이들을 길러야겠다까지 안 되는 거죠. 인간적으로 이해가 가요. 그러다보니까 전승이 절대 안 되는 게 이십대의 문제인 것 같거든요. 저 같은 경우에도 사실 회사 다니고 글 안 쓰고 사는 게 백 배 속 편한데, 부채감이 있잖아요. 그래도 저는 요상하게 활로를 뚫어서 그나마 ‘안 되겠다. 내가 대리로 계속 나불거리기라도 해야겠다’는 부채감 때문에 계속 잡문을 쓰고 있는 건데, 그런 기회조차 없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니까.
우석훈 최근에 일본 문학이 한국에 어떻게 수용이 됐는지 관심이 있어서 살펴보니까 90년대 중반에 일본문학이 무지 많이 들어왔더라고요. 저는 일본문학을 잘 몰라서 그때는 그게 다인 줄 알았어요. 근데 우리나라에 들어온건 일본문학 중에 사소설이라는 장르이고, 책방에 rkqhslRKr mrjt 말고도 굉장히 많고, 사소설은 요만큼이더라고요.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이것만 들어온 거예요. 그런데 다른 데를 가보니까 진짜 딱딱한 『문예춘추』같은 류의 책들도 있고 저쪽에는 프로문학도 있고 굉장히 다양한 게 일본문한인데, 그중의 한 모퉁이만 우리나라에 들어온 거니까. 그때 실제로 우리나라가 사소설에 끌려간 거냐. 아니면 딜리버리 하는 사람이 잘 팔게 만들어서 자기 실현명제처럼 된 거냐. 보니까 일본에서 엄청나게 많은 것 중에 이것만 들어오고 그것이 확대 재생산되다보니까 굉장히 좁게 수용한 셈이지요. 그런데 따른 부작용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6. 자기 계발하는 이십대

김홍중 대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호기심이 생겨 인터넷서점에 들어가서 키워드에 ‘이십대’라고 적어봤어요. 2008년에 나온 책들 중에 ‘이십대’라는 단어가 들어간 대표적인 것들이 다음과 같이 검색되었습니다. 나카지마 다카시의 『20대, 공부에 미쳐라』, 정영주의 『20대, 미쳐야 살아남는다』, 이동조의 『대한민국 20대, 공모전에 미쳐라』, 크리스틴 해슬러의 『20대, 정답은 없다』, 장지영의 『20대 성공하는 습관에 미쳐라』, 이지성의 『20대, 자기 계발에 미쳐라』, 김의경의 『대한민국 20대, 펀드 투자에 미쳐라』, 정영순의 『여자20대 명품 인생을 준비해라』, 이중 제가 읽어본 책은 하나도 없어서 이 책들에 대해 논평할 자격은 없지만, 명백한 것은 한 두권을 제외하고는 전부 자기 계발서 라는 사실입니다. 서동진 선생님의 좋은 연구를 통해서 드러난 대로, 사실 자기 계발 담론의 소비자가 이십대에 국한된 것은 물론 아닙니다. 자기 계발 담론이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의 가장 대표적인 장치라는 점에서 말이죠. 그런데 이십대가 자기 계발서를 읽고 있는 모습은 조금 안쓰럽고 민망한데가 있어요. 처세라고 하지요? 이십대라는 것은 사실 세상에 어떻게 처해야 하느냐, 세상과 어떻게 화해하고 기능적으로 세상과 손잡느냐를 생각하기 이전에, 너무 고답적인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과 불화하는 시기가 아닌가요? 적어도 그런 이십대를 보면 생명력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십대가 자신들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때 사실은 사회의 미래가 존재하는 것이라 봅니다. 왜냐하면 예기치 않은 변화가 그 무모함에서 올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자기 계발하는 이십대가 미래를 늘 생각하고 준비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회의 미래가 없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에도 일종의 폭력성이 있습니다. 자기 계발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자신과의 관계를 설정할 수 있는 윤리적 대안이나 사회적 프로그램이 마땅히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자기계발하는 이십대, 어떻게 보십니까?
김현진 제가 그런 걸 너무너무 싫어해서 작년에 반(反)자기 계발서를 내자 했더니 인터넷 서점에 자기 계발서로 분류되어 있더라고요. (웃음) 그래서 되게 좌절을 했는데…… 그야 어쩔 수 없는 거고. 근데 아이들이 그걸 왜 자꾸 보냐면 선생님도 전에 비슷한 말씀을 하셨지만 그게 부적 쓰는 것보다 돈이 적게 들거든요. 심리치료보다도 돈이 적게 먹히고. 그리고 읽으면서 빨리 읽을 수 있으니까, 일종의 마스터베이션 같은 거예요. 책 한권 다 읽었다는 위로도 느낄 수 있고. 사실 책 같지도 않은 책이죠. 그걸 계속 읽으면서 저는 안쓰러운 게 뭐냐면, 이걸로 돈을 벌어가는 건 결국 저자랑 출판사밖에 없는데 지하철 이런 데서 부표처럼, 구명부표처럼 이런 걸 들고서 ‘나는 자기 계발하고 있어’ 하는데, 그거라도 없으면 죽어갈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읽는 것 같아요
백가흠 그건 경쟁구도가 만들어낸 출판사의 자기 마케팅 같은 것 아니에요?
우석훈 자본의 전략이라는 말을 쓰면 그렇게 해서 길들이는 게 사회를 통치하기가 제일 쉬운데, 너무 길들여버려서 신상품이나 아이디어를 만드는 창의성까지 죽여 버리는 상태가 아니냐 하는 거죠. 길들이는 건 좋은데, 그래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계속 내야 자본주의사회 내에서 한국 자본이 살아남는데, 그 아이디어의 원천이 대개는 십대나 이십대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그런데 너무 길들여서 싹 죽이고 나니까 십 년 이래로 한국자본주의에 신(新) 성장동력이 없다고 얘기를 하잖아요. 근데 그게 사실은 이십대 연구진이나 문학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통치는 쉬워졌지만 시스템 자체가 죽는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김현진 그 책의 내용들이 전부 협박이거든요. 한 줄로 요약이 돼요. ‘너 그렇게 살다가는 죽어’ 이 한 줄로 요약이 되는데……
백가흠 저에게 있어 자기 계발서라고 하면…… 금방 생각이 난 건데 오규원의 『현대시작법』정도. 정말로 결국 나를 계발시켰는데……
김현진 (웃음) 그건 아주 우아한 자기 계발서죠. 그런데 그런 건 뭔가 구체적인 지식을 주잖아요. 그런데 이런 건 허상을 알려주는 거예요. ‘그렇게 살다가는 죽어’ 하면서…… 대개는 허상이면서 뻔한 얘기잖아요. 열심히 살아라,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 회사에 가면 열심히 일해라, 언제나 웃는 얼굴로 있어라. 그런 얘기로 책을 만든 다음에 돈을 받고 팔아먹어요.
우석훈 제가 삼 년 전부터 십대용 경제입문서를 써달라는 부탁을 많이 받았거든요. 그런데 안 쓴다고 하니까 계약금이 막 올라가서 이천만원까지 올라갔어요. 그래도 십대용 경제입문서는 안 쓸 생가이에요. 십대에게 경제에 대한 지식이 필요할까요? 저는 십대는 경제에 대해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십대는 경제를 공부할 게 아니라 문학이나 문화나 예술이나 이런 걸해야 사실은 좋은 거죠. 이십대도 저는 거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거든요. 원래는 사람이 심심해야 공부를 하잖아요. 들입다 심심해야 책도 보고, 그때 새로운 생각들을 많이 해요. 심심할 수 없는 틈을 안 만드는 사람은 비생산적이거든요. 그런데 불안하니까 심심한 걸 못 참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전문지식이라든가 예술이나 문화가 들어갈 자리를…… 예를 들면 지금 십대 어린아이들에게는 어린이 경제부터 시작해서 경제의식을 시스템으로 해서 넣거든요. 그러면 그 자리에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다거나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거나 스포츠를 하고 싶었다는 걸 치워버리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 것처럼 이십대가 꿈꿀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걸 지금 자기 계발서가 파고들어가니까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도, 책 살 수 있는 돈도 똑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면 암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김현진 자기 계발이라는 것이 부정적인 형태이기는 하지만, 그나마 자기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자기 계발서들이 성공을 보장하고 있지만, 사실 자기 계발서 읽고 실천해서 성공한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는 것과 같은 거죠.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를 연상시키는, 텔레비전 보면서 러닝머신 위를 뛰는 사람들이, 모두가 몸짱이 되지는 못하잖아요. 헬스클럽에 큰 거울이 있잖아요. 거기에 비치는 것은 결국 언제나 이상적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몸이에요. 판타지가 거기서 만들어졌지만 또 바로 그 공간에서, 그 거울에서 깨질 수 있는 거죠. 깨진 판타지로부터 스스로에게 되돌아오는 차가운 시선에서 문학이 시작한다면, 자기 계발서는 매우 역설적인 방식으로, 문학에 입문을 시켜주는, 넓은 의미에 문학교과서, ‘나쁜 문학’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웃음) 그런데 그걸 하다가 좋은 시절 다 보내고…… 삼사십대가 되어서 깨달을 텐데 그럼 그 시간이 너무 아깝잖아요.
백가흠 삼사십대가 되면 또다시 자기를 계발할 또 다른 계발서를 찾아가겠죠. (웃음) 뭐 하러 자꾸 그렇게 계발을 해야 하는지. 정권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아요. 개발 좋아하는 정권의 마케팅이 아닐까요? 
김현진 그러다가 선생님이 말씀하신 회의적 세다가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가 있어요.
우석훈 사실 사람에게는 즐겁고 행복한 기억이 필요하잖아요. 그걸 뒤늦게라도 사회적으로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것보다 재밌는 게 있으면 그걸 보라도 해도 안 볼 텐데……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12-14 14:56)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3:00:32 

 

병장 양 현 
  김현진 저는 선생님 말씀에 굉장히 공감이 가는 게, 제가 원래 전직이 온라인게임 개발자였거든요. 그런데 레벨을 올리려면 뭔가를 잡아서 경험치를 높여야 하는데 이미 사냥터는 누군가가 다 잡고 있는 거예요. 힘센 놈들이. 근데 ‘나 좀 잡자’ 하면 ‘야, 돈 내고 다 같이 하는 게임인데 네가 약한 걸 왜 우리 탓을 해?’ 그래서 캐릭터 나이는 먹어 가는데 아직도 레벨은 1이고. ‘이걸 어쩌지?’ 그러면 게임을 관둘 거냐? 그런데 온라인게임이야 관두면 되지만 현실에서 죽어버릴 수는 없잖아요. 

우와. 나 한눈에 확 들어와버렸어요. 이거 멋진데요. 중간중간 나오는 것들도 멋지구요.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에서 저런 장면이 있었나요? 뭐 이런 이야기가 있었나요? 역시 출력해서 봐야 하는군요. 대충 슥슥 보려고 하니까 어렵네요. 어려워요. 역시 동기님은 나빠요! 책마을의 나쁜남자 동기님! 2008-12-12
20:14:31
  

 

병장 이동석 
  아놔 또 아마추어같이 댓글을 날려버렸군요. 
다시봐도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을 정리하기가 어려워요. 인기가요, 뭐 그딴거 이제 고만 보고 생각좀 해야겠군요. 내일은 묵념하며 글 하나 꼭 써야지. 

지금 꼭 소주를 마시고 있어서도 아니고, 슬슬 졸려서도 아니고, 담배를 계속 펴대서도 아니고, 그저 토킹이 아닌 스피킹-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으아아악. 저는 슬슬 이가 갈립니다. 형편없어요. 우리는 덩어리가 아니라고, 말할 지면-을 꼭 만들어야겠어요. 누가 쥐어주고 말고 그딴거 필요없이, 내가 만들겁니다. 2008-12-13
02:57:18
 

 

병장 김태형 
  여기 아마추어 하나 더 있군요. 댓글을 날리다니.. 


우리 세대는 대여섯명이 모여서 쪼잘거리는게 고작인 세대라는게 맞는 말 같습니다. 이삼십명이 모여서 담론 - 그게 설령 실현 불가한 허상이라 할지라도 - 을 나눠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게 지면이 없어서인지 공간이 없어서인진 모르겠지만은요. 

집단자체의 개성이 없어서 하나의 덩어리로 치부되기보다 개개의 색깔이 너무 다양해서 덩어리로 취급하지 않으면 감당을 할 수가 없어서 그렇게 부를 수 밖에 없도록 이십대가 변모해갔으면 좋겠네요. 다양성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 원동력-아이디어가 생기는 것일테니까요. 


지면이나 공간은- 누군가가 만들기보다 우리가 만들어야죠. 비록 문화적/사회적 토양은 대학사회에서 조차도 지면이나 공간을 만들만한 기반이 땅속에 묻혀버린 상태일지라도 말이죠. 2008-12-13
09:36:44
  

 

병장 김민규 
  뭐 하러 자꾸 그렇게 계발을 해야 하는지. 정권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아요. 개발 좋아하는 정권의 마케팅이 아닐까요? 푸하하하햨컄컄 2008-12-13
17:18:28
  

 

상병 김무준 
  우석훈 

제가 삼 년 전부터 십대용 경제입문서를 써달라는 부탁을 많이 받았거든요. 그런데 안 쓴다고 하니까 계약금이 막 올라가서 이천만원까지 올라갔어요. 그래도 십대용 경제입문서는 안 쓸 생가이에요. 십대에게 경제에 대한 지식이 필요할까요? 저는 십대는 경제에 대해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십대는 경제를 공부할 게 아니라 문학이나 문화나 예술이나 이런 걸해야 사실은 좋은 거죠. 이십대도 저는 거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거든요. 원래는 사람이 심심해야 공부를 하잖아요. 들입다 심심해야 책도 보고, 그때 새로운 생각들을 많이 해요. 심심할 수 없는 틈을 안 만드는 사람은 비생산적이거든요. 그런데 불안하니까 심심한 걸 못 참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전문지식이라든가 예술이나 문화가 들어갈 자리를…… 예를 들면 지금 십대 어린아이들에게는 어린이 경제부터 시작해서 경제의식을 시스템으로 해서 넣거든요. 그러면 그 자리에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다거나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거나 스포츠를 하고 싶었다는 걸 치워버리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 것처럼 이십대가 꿈꿀 수 있는 공간네 대한 걸 지금 자기 계발서가 파고들어가니까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도, 책 살 수 있는 돈도 똑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면 암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아. 슬픕니다. 슬퍼요. 2008-12-13
21:15:45
  

 

병장 이동석 
  하나하나가 아프고 슬퍼죽겠습니다. 이도 갈리고, 갑자기 더 무력해지는것도 같고- 

저는 정말 아무것도 쓰지 못하겠습니다. 2008-12-13
21:34: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