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첫글_시작(時作)노트와 송충이  
상병 강수식   2008-07-04 09:06:52, 조회: 212, 추천:2 

1.
이면지에다가 글을 쓰기 시작했었다. 줄이 쳐 있는 노트에 글을 쓴다는건 아무래도
줄 속에 글자들을 가둬두는 것만 같아 괴로워서였다.
그러나 이면지에 끄적여 놓은 글귀들 중 '와, 이건 정말 괜찮게 잘 썼네' 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부사수에 의해서 세절기에 갈갈이 갈려버리는 경험을
몇 번 하고 나서야 시작노트를 만들었다. 물론 줄이 쳐 있지 않은 낡은 갱지가
속지로 끼워진 노트였다.

시작노트를 사고 처음 페이지를 열었다. 첫 페이지에 무엇을 적을까 곰곰히 생각하다
노트 위에 To. 라고 적고, 맨 밑에 From. 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디로 보내는 것인지 도무지 적을 수가 없었다.
To.와 From사이의 공백이 눈 안에 가득찼다. 
굳이 적자면 To. 옆에 20~30년 후의 나, From. 옆에 스물 셋의 나, 라고 적을 수도 있겠으나
무엇때문인지 적지 못했다. 

결국 내 시작노트의 첫 페이지는 아직도 빈칸이다.



2.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나는 아무 학교에다 가도 반에 한명은 있을 법한 그런 놈이었다.
별명은 아웃사이더. 수업시간이든, 쉬간이든 마음이 내키면 십분이고 삼십분이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있는 나에게 친구들이 지어준 별명이었다.
어떤 친구들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폼 잡고 있네." 라고 비웃듯이
말하고는 했다. 하지만 나는 '폼'잡고 있는게 아니었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그 시간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수 많은 문장들과 단어들이 스쳐지나가고 물음표와
느낌표가 실처럼 엮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튼 그 날도 밥이 먹기가 싫어서 한참을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담배나 한대 피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어기적, 어기적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를 챙겨 학교 운동장 구석진 곳에 있는 수돗가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익숙한 자리에 앉아
담배를 꺼내 피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어디선가 사각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 참을 두리번 거리던 나는 내 발 끝에서
열심히 풀잎을 갈아먹고 있는 송충이를 볼 수 있었다.

녀석은 세상일 따위는 관심이 없다는 듯 먹성좋게 풀잎을 갉아먹고 있었다.
사각사각, 야금야금, 송충이가 밥을 먹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다.
'나는 밥 먹기가 싫어서 도망왔는데, 송충이 너는 살기 위해서 열심히 밥을 먹는구나.
내가 너무 배부른거야?'
혼자 생각하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문득 송충이를 삼켜보고 싶었다.
저 먹성좋은 송충이가 내 가슴속으로 들어온다면?

나는 진짜로 송충이를 집어삼킬 결심으로 막대기로 녀석을 쿡쿡, 찔러보았다.
녀석은 움찔 거리기는 했으나, 결코 도망가지 않고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열심히 풀잎을 갉아먹는 그런 녀석을 보다 더욱 먹고 싶어졌다. 나는 중얼거렸다.

"송충아, 내 가슴도 갉아먹어 주렴. 시간들, 후회들, 상처들, 아픔들... 다 갉아먹어주렴.
그럼 나도 더 이상 울지 않게 될테니."

이상한 것은 송충이에게 그렇게 말한 이후로는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정말 내가 송충이를 꿀꺽, 삼켜버렸는지. 
녀석은 어디로 갔는지. 도무지, 기억을 해낼 수가 없었다.


3.
그 이후 나는 수능을 봤고, 가고 싶던 학교에 떨어졌고 집 근처에 있던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로 여자친구가 생겼고, 동아리가 생겼으며
끊임없는 술자리가 생겼고 무엇인가 하고 있었다.
더 이상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문장과 단어들을 떠올리지 않았다.

어떡하면 동아리를 좀 더 발전시킬 수 있을까, 어떡하면 여자친구와 싸우지 않고
잘 지낼 수 있을까, 어떡하면 친구들과 이 아까운 시간을 좀 더 즐길 수 있을까,
어떡하면 잊지 못할 스무살의 추억을 만들 수 있을까, 이러한 것들이 내 고민의 전부였다. 

즐거웠다고 생각하면 즐거운 시간들이었으나, 그러면서도 나는 문득 외로웠었다.
아니 외로웠다가 전부가 아니라 외로웠고, 불안했고, 무서웠고, 답답했고, 울고싶었다.
내 앞에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 것인지,
지금 나는 무엇인지, 어디로 가고있는 것인지와 같은 생각들이 때때로 고개를 쳐들고
내안에서 커지기 시작할 때 마다 그랬다. 
그건 마치 달리기 선수가 기록을 위해 '시!작!'소리와 함께 미친 듯이 달려가다가 
결승점에 도달한 후 숨을 돌릴때야 비로소 푸른 하늘이 보이고,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럴때면 어느 순간 송충이가 생각났다. 
대게 술자리가 없거나, 약속이 없거나, 동아리 모임이 없거나 하는 한가한 날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송충이를 삼켰던가, 송충이가 내 가슴을 갉아먹었던가. 역시 답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성적표에 늘어나는 F의 갯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던 때, 
동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 성적표의 취득평점이 선동렬의 방어율을 찍었던 때를 기점으로
문득 기억이 되살아 났다. 
군입대가 얼마 안남을 때였고, 사람들과의 관계는 처음과는 달리
조금씩 사무적이 되어가고 있었으며 스물 즈음의 추억을 같이했던 혹은 하고 싶었던 친구들이
군대에 입대하기 시작했었고, 입에 달고 살던 술 때문에 몸이 망가질때로 망가지기 시작했었고
무엇보다도 내 군 입대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나는 그 때 송충이를 삼켜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내 가슴속엔 더 이상 어떠한 문장도
어떠한 단어도 남아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와 더불어 내 모든 감정들이 사라졌고
그로인해 더 이상 울게 되지 않을 것이라던 나의 예상은 완전히 어긋나버린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송충이가 지나간 시간들의 기억과, 후회와, 상처와, 아픔같은 것들을
갉아먹기 시작하자 그 공백으로 외로움과 두려움과 불안함과 공허함과 서글픔이 
빽빽히 차들어간 것이다.


4.
그리하여 내 시작노트는 내 가슴을 닮아 아직도 빈페이지 인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송충이가 내 가슴을 갉아먹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사각사각.

사람의 가슴속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수 많은 문장들, 단어들, 대화들이 그득
들어차있을 것이다. 슬픈 기억이나, 후회가 들어 있을 것이고 기쁜 기억이나
잊고 싶지 않은 추억들도 들어있을 것이다.
어쨌든, 가슴속에 들어있는 것들이 무엇이든, 그것들은 없어선 안되는 것들이다.
비록 정말로 잊고 싶고, 지워버리고 싶고, 송충이가 야금야금 갉아먹어버렸으면 차라리
좋겠다 싶은 것들도 결국엔 없애선 안되는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 주는 것이고 나의 문장과 단어와
표현을 만들어주는 것이므로. 그러한 것들 때문에 울 수 있다는 것, 아파할 수 있다는 것,
고민할 수 있다는 것이 나를 크게 해주는 것이므로.

시작노트의 첫 페이지에 무엇을 적을 것인가, 조금은 분명해졌다. 하지만 아직은 적을 수 없다.
문장들과 단어들과 표현들을 내 시작노트에 뱉어내다가 한 권이 가득채워졌을 때, 그리하여
내 안에서 사각거리는 송충이가 툭, 하고 시작노트 위로 떨어졌을 때.
나는 비로소 시작노트의 첫 페이지를 적을 수 있을 것이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9:55:07 

 

병장 박준연 
  아프리카에 스프링 폭스라는 산양이 있다고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집단으로 달리다가 벼랑으로 떨어져 몰사하는 어리석은 양이지요. 그 양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달리는 우리네 청춘과 닮은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글 아주 잘 읽었습니다..! 2008-07-04
11:24:34
  

 

병장 이재민 
  새로운 문학가의 등장이군요. 첫글 반갑습니다 2008-07-04
11:35:31
  

 

병장 이동석 
  저는 페드로 마르티네즈 전성기적 방어율이었지요. (웃음) 

스무살즈음은 너무 지긋지긋해서 죽어도 다시 안올아간다는 
김윤아의 말이 요즘 절절하게 와닿습니다. 

청춘을 날로 먹는 사람 어디 없나요? 
좀 배워보게요. 2008-07-04
11:36:24
 

 

일병 이동열 
  준연님께서 말씀하신 스프링 폭스와 비슷한 쥐도 있지않나요? 
(이름이 레밍이었던가...?) 

아무튼 새삼 저도 입대전에 무얼했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대하고 나가서도 청춘이라고 할 수있을련지(땀) 2008-07-04
12:21:01
  

 

상병 강수식 
  병장 박준연 // 그런 산양이 있나요? 오늘 처음 들었어요(웃음) 시작노트에다가 고이 적어놨다가 나중에 찾아봐야겠습니다. 좋은 이야기 감사해요(웃음) 2008-07-04
12:55:18
  

 

상병 강수식 
  병장 이재민 // 문학가라는 호칭이 부담스럽네요. 하하. 아직 부족하고 혼자서 끄적이는 어린아이랍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릴께요(꾸벅) 2008-07-04
12:55:52
  

 

상병 강수식 
  병장 이동석//스물 이때쯤은 다들 방황하는 시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청춘이라는 그러겠지요. 정말 김윤아의 말대로 너무 지긋지긋한 시기였지요. 그래도 지금 다시 시간을 준다면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데.. 이동석님은 어떠신지(웃음) 2008-07-04
12:56:59
  

 

상병 강수식 
  병장 이동열//그런말이 있지요. 여자는 대학에 막 입학한 스무살 시절이 꽃피는 시절이고, 남자는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할때가 꽃 피는 시기라고. 근거없는 말이긴 하지만 왠지 동감하고 싶은 말입니다. 청춘은 나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는게 아니라, 먹는 마음에 달린거라고 생각합니다. 언제까지나 청춘으로 살고 싶네요(웃음) 2008-07-04
12:58:16
  

 

병장 황인준 
  글 좋아요(웃음). 
첫 글 부터 요렇게 멋있게 시작하셨군요. 
저도 언제 쯤 이런 글다운 첫글을 올릴 수 있을런지.. 

청춘, 떠올리면 아련하고도 가슴 한쪽이 아려오는 그 순간들이 
그래도, 혹은 그래서 더 좋기도 한 것 같네요. 2008-07-04
13:24:44
  

 

상병 강수식 
  병장 황인준 //여기 계신분들은 내공이 장난아니더라구요. 조금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듭니다.(웃음) 황인준님의 글도 기대하고 있을께요. 청춘이 아련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삼십년이 지나면 더 많이 아련하고 가슴 한쪽이 아려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도 지금은 청춘의 끝자락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테니까요.(웃음) 2008-07-04
13:42:32
  

 

병장 이태형 
  잘 읽었어요. 
스프링폭스가 제가 기억하는 그 동물이 맞다면 아마도.. 

풀을 뜯어 먹고 있다 -> 옆의 있는 놈이 무슨 이유에서인지(포식동물의 위협이건 미쳐서건 뭐건간에) 달린다 -> 달려가는 놈이 앞에 있는 풀을 다 먹어버리면 자기는 굶어죽는다 -> 그래서 안 뺏기려고 달린다 -> 달리는 놈들이 점점 많아진다 -> 나중에는 자기네들이 왜 달리는지 아는 놈은 없다 -> 그렇게 수만마리가 달린다 -> 장애물(강이라던가 낭떠러지라던가) 나타난다 -> 선두에서 멈춰봤자 뒤에서 충돌하여 그렇게 죽는 놈들이 부지기수 

이거일거에요. 
서적에서 이 녀석을 빗대어 많은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허허. 

가지로! 

ps. 세절인가요 쇄절인가요? 정확한 단어가 뭐지? 둘 다 한컴 사전에는 존재하지 않네요. 2008-07-04
16:21:25
  

 

병장 이동석 
  전 스무살로 다시 돌아가면 
여동생들을 정말 많이 만들어놓을꺼에요. 고등학생부터 유치원 다니는 아이까지. 
(음?) 

사실 스무살로 돌아가면 바꾸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지만, 후회되는 시간도 너무 많지만 
입궁을 다시해야한다는 생각에 눈물이? (이것도 아닌데?) 

아쉬워요. 한 열 다섯쯤으로 돌아가서 
정말이지 신나게 학교다니고 싶은데, 요새 입시지옥보면 당최 학원만 다니다 스무살 먹을것 같고? 

이거참, 
그냥 오늘을 살아야겠네요. 하하. 2008-07-04
16:28:28
 

 

일병 김종훈 
  병장 이태형// 세절이 맞지 않나 싶습니다. 미세하다는 의미의 '細' 자로. 2008-07-05
13:10:15
  

 

상병 강수식 
  쇄절.. 수정했습니다.(웃음) 오늘 또 하나 배웠군요. 주말인데 시간도 안가고 
아, 정말 죽을 맛입니다. 
요새 고등학생들 보면 불쌍하지요. 


아는 동생들이 몇 명있는데 
(남여공학에 여자가 반이 넘는 고등학교를 나온지라. 제가 2학년때에는 저희 반이 
남자 7명에 여자가 31명 이었죠) 
가끔씩 고등학생들 이야기 들으면 정말 불쌍해요. 
정말 진정한 배움은 책 속에 있는 것 뿐만이 아니라 
사람들한테서 배우는 것도 많은데.. 

근데 여동생이라 함은.. 
나중에 배우자를 말씀하시는건가요?(웃음) 
아마 시간이 훨씬 지나면 여동생들이 여보가 될만한 
그런 나이차가 아닐까요?(웃음) 2008-07-05
17:47:53
  

 

병장 이동석 
  아,,, 그,,, 저,,, 

여동생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웃음) 
저 고1때 초등학교 다니던 옆집 소녀는 
칠년뒤 상큼한 광고모델이 되었더라는 (쿨럭) 

칠년전으로 돌아가야됩니다. 

그건 그렇고 참 좋은 학교 나오셨네요. 
남자 7명에 여자 31명이라니 
그런 좋은 학교는 어떻게 하면 갈수 있는겁니까. (하하) 2008-07-06
16:06:21
 

 

상병 박찬걸 
  음? 그 상금한 광고모델이 누굽니까? 

여튼 고등학교랑 대학교만 생각하면 아쉬운 날들이 하루 이틀이 아니죠. 
그때 좀더 뭐라도 해볼껄. 이거 해볼껄 하는 아쉬움들이 마음속에 한가득... 2008-07-06
17:39:28
  

 

상병 강수식 
  병장 이동석 // 시골 학교였지요. 반이 4학급 밖에 안獰楮. 
하지만 여자가 많아도 안 좋은 듯.. 이미 여자에 대한 환상이 
너무 많이 깨져버렸네요(흐윽) 
남여공학이 가고 싶어서 무조건 선택했던 학교입니다. 
한국교원대학교부설고등학교 라고(땀땀) 
아마 우리나라에서 이름이 제일 긴 고등학교이지 않을까 싶네요(땀땀) 

하긴 철 모르던 옆 집 여동생이 흐뭇하게 되는 일이 빈번하긴 하죠. 
저는 어릴때 맨날 저희 집와서 쟤 옆에서 자고 장난치고 하던 
어린아이가 어느 날 보니까 
다방 언니가 되었다는..(으응?) 

하하하하하(땀땀) 2008-07-06
20:05:45
  

 

병장 이태형 
  그 상큼한 광고모델이 대체 누굽니까!!!(버럭) 2008-07-07
15:41:42
  

 

병장 이동석 
  컥 이글이 아직도 댓글이 달리는군요. 

클린 앤 클리어 모델 선발대회 붙었고 
자그마치 제 동생이랑 사이좋은 세상 일촌이에요. 하하. 
저랑은 봐도 아는척도 안하는 사이구요. 하하. 
(눈물) 

소녀시대 윤아는 아니구요, 
윤아 옆에 있던 처자중에 한명. 
(윤아 나오는 씨 2008-07-07
17:59:34
 

 

상병 강수식 
  에이그 안타까워라(울음) 
미리 친해지시지 그랬어요(웃음) 
누군지 알 것 같아요! 

저는 같은 가게에서 라이브하던 누나가 
어느 순간 앨범을 내고 활동하더라구요. 
윤도현의 러브레터에도 나오고 
와, 그런거보면 길이 생기는건 한순간인가봐요(웃음) 2008-07-08
08:36: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