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짐승 이야기  
상병 김무준   2008-12-13 20:49:30, 조회: 205, 추천:0 

보고서를 받아들고서 끊기로 마음먹었던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나는 지난 십칠 년 동안 놈을 쫒았다. 그리고 마침내 삼년 전 추운 겨울 어느 날 놈을 잡는데 성공했다. 내 아버지는 놈을 잡은 그날 내게 고백했다. 아들아, 나도 너처럼 놈과 같은 짐승을 쫓고 있었다. 하지만 놈을 놓치고 말았단다. 놈은 영악한 짐승이다. 속지 말고, 이 아비의 잃어버린 세월처럼 늙어가지 말아라. 이 아비는 놈에게 정식 학명을 주기로 한 날에 놈을 놓쳤다.

아버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아버지. 아들은 당신처럼 실수하지 않을 겁니다. 삼년을 투자해 놈을 연구하고 학계의 동의를 얻어,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지원을 받기로 약속한 며칠 전에 놈을 놓치고 말았다. 젠장! 보고서를 넘기며 담배를 태웠다. 타들어가는 삼 점 삼인치의 담배가 연기가 되어 방안으로 퍼진다. 연기는 내 머리를 뒤흔든다. 어째서, 놈을 놓쳐버린 걸까. 

무심코 담배보루를 쳐다보니 한 갑이 빈다. 누가 가져갔을까. 사무실의 재떨이에는 내가 피우지 않은 담배가 구겨져있다. 어떤 새-끼가. 그때 창밖으로 빨간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뭐지? 붉은 무언가가 어둠을 살라먹으며 움직였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스트레스로 헛것을 보는 게 분명해. 다시 보고서를 읽었다. 놈은 짐승이었다. 멍하던 눈은 때때로 고양잇과의 맹수처럼 날카롭게 빛났고, 몸은 표범처럼 매끈했다. 단 한 번도 놈이 사냥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본능적으로 놈이 맹수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빨은 날카롭지 않았고 손톱을 숨길 줄도 몰랐지만 놈의 냄새가 내게 짙게 호소했다. 나를 죽이고 말겠다는 짐승의 몸짓을 읽었다. 저 짐승은 사냥을 즐기는 짐승이다. 놈을 잡기 위해 고양잇과 대형 맹수를 이십년간 연구했다. 놈은 짐승이다. 한반도에 얼마 남지 않은 대형 육식동물 중에서도 유일하게 존재하는 게 틀림없었다. 놈을 잡아야만 했다.

이제, 지난 세월의 노력을 보상받을 수 있는 기회가 왔거늘, 어떻게 놈이 사라졌을까. 어린 시절 놈을 처음 만난 이후로 무조건 이 짐승을 잡아야만 한다고 느꼈다.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신이 내게 내린 사명이나 다름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때였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놈을 잡아야만 한다. 내게는 사냥꾼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내 아버지가 그러했듯 내게도 사냥꾼의 피가 흘렀다. 무조건. 놈을 잡아야한다. 칠흑이 세상을 뒤덮은 밤. 짐승과 내가 마주했던 순간 짐승은 말했다.

“죽은 꿈의 그림자를 맡아본 적이 있나?”

놈은 짐승임에도 인간의 말을 할 줄 알았다. 단지 그 말 한마디뿐이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네가 나를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이 공포를 짓밟고 설 수 있을 것 같나? 아니, 넌 못해. 놈은 웃고 있었다. 날카롭지 않은, 허나 짐승의 것이 분명한 송곳니가 어스름한 달빛에 반짝였다. 나는 두려움에 질려 주저앉고 말았다. 놈은 나를 희롱했다. 그것은, 조롱이었다.

내 가슴을 뒤덮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놈을 잡아야만 했다. 그리고, 놈을 잡았다. 조금씩 상처 입은 유년 시절이 회복되고 있었다. 이 건방진 짐승을 세상 앞에 낱낱이 파헤쳐, 잃어버린 집안의 명예를 되찾아야 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받아야 했다. 구름이 걷히고 찬란한 달이 뜨는 날이 와야만 했다. 왜, 대체, 어째서, 무엇 때문에 놈을 놓쳤나!

다시. 창밖으로 무언가 스쳐지나갔다. 분명 뭔가가 있다. 이 늦은 밤 연구실을 찾아올 불청객이 누굴까. 불 꺼진 연구실 창밖에 누군가 돌아다니고 있다. 라이트를 손에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한 손에 보고서를 들었다. 다시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어떤 새-끼야. 차가운 공기가 내리깔린다. 코트를 걸쳤다. 사무실 밖 복도로 걸어 나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불빛이 스치는 자리에 어둠이 타들어갈 뿐이다.

무언가, 공기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들을 수 있었다. 거대한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다. 발끝에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공포가 그림자처럼 발목을 잡고서 끈적끈적하게 엉겨 붙는다. 한 줄기 식은땀이 척추를 따라 흘러내린다. 발을 옮길 수 없다. 라이트의 불빛이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한다. 제기랄. 라이트는 이내 꺼지고 말았다. 탁. 탁. 탁. 탁. 탁. 라이트를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가 복도에 울린다. 다행히 불빛이 살아났다. 무언가, 있다. 천천히 등을 돌려 앞을 비춘다. 발가락 같은 것이 언뜻 보인다. 창문에 양 발을 대고서, 창 밖에 누군가 나를 들여다보고 서있다.

휘몰아치는 공포의 바람에 라이트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덜덜덜 담배를 든 손이 떨린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가져가 깊게 빨아 당긴다. 떨어진 라이트가 창밖을 비춘다. 놈이 내가 피는 담배를 들고서 날카롭게 빛나는 눈으로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웃고 있었다. 보고서가 힘없이 떨어졌다. 지금 놈을 잡아야한다.

라이트에 떨어진 보고서가 비쳐졌다.













『학명 : 미분류
예명 : 김무준(武俊) 혹은 다연(多娫)
서식처 : 대한민국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부산 부근 및 경남지방에 주로 출몰하는 것으로 보아 한반도 남부 전체에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추정나이 : 스물한 살로 추정되나, 판독 결과 약 십육 세와 이십칠 세를 왔다 갔다 하는 다소 광범위한 연령의 모습을 나타냄.
몸길이 : 178cm로 추정되나,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180cm정도 됨으로 예상됨.
무게 : 가장 최근 생포해 무게를 측정한 바로는 64kg대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나, 먹이분포와 계절에 따라 ±2kg 정도 차이가 있음.
특징 : 동물계 척추동물문 포유강의 짐승으로 갯과와 고양잇과를 오가는 신종 생물로 정의를 내리기 힘든 습성을 지님. 겉모습은 인류에 가까우나 여러 가지 자료로 판단해 볼 때 새로운 과의 짐승으로 연구해야할 필요성이 다분함.』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3:59:14 

 

병장 이동석 
  어마, 이 짐승. 

한번 잡아보고 싶은 짐승이긴 하군요. 껄껄. 물론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을것도 알고, 갇혀있을바에 죽어버릴지도 모르는게 

묘하게 제가 잘 아는 짐승이랑 닮아서요. 허허. 2008-12-13
21:10:39
 

 

상병 김무준 
  櫛이라 외치고, 즐이라 읽습니다. 2008-12-13
21:17:05
  

 

병장 이동석 
  낄낄낄, 무준씨는 쉽게 떠나진 않을것 같군요. 2008-12-13
21:37:07
 

 

상병 김태원 
  그러게요. 밧데리도 아직 세 칸이시고(웃음) 아 물론 저도... 2008-12-13
22:33:54
  

 

상병 이지훈 
  多娫 

왠지 멋진걸요. 무슨 의미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단순한 한자 뜻풀이보다 뭔가 더 있을 것 같아서요 흐흐 2008-12-14
00:48:02
  

 

상병 김무준 
  많을 다多에 빛날 연娫 입니다. 많이 빛내서 밝게 살려고요. 2008-12-14
00:56:11
  

 

병장 양 현 
  어머, 짐승. 

...이런 맙소사. 으하하. 그래도 재밋네요. 저도 이런저런 보고서를 생각하고 써보긴 했는데 이건 보고서라기보다는 논문이 되어버리더라구요. 이게 뭐시깽... 2008-12-15
09:3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