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질주
상병 김무준 2009-01-24 22:12:20, 조회: 86, 추천:2
-투다다다다다다
씨티. 텍트. 짱개. 우체부. 공통점이 뭘까. 같은 오토바이를 부를 때 쓰는 단어들이다. 정확한 명칭은 나도 잘 모른다. 빨갛고 하얀 스쿠터는 언제나 그렇게 불려왔다. 시속 육십 킬로미터 밖에 나오지 않는 오토바이지만 연비가 쏠쏠하다. 배달하기에는 딱 좋은 오토바이다. 싸다. 튼튼하다. 거기다 연비까지 좋다. 업주들에게 사랑받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맞바람이 불어온다. 손이 시려서 요즘은 운전대에 오토바이용 장갑을 달아줬다. 벙어리장갑처럼 생긴 보온장갑. 좀 쪽팔리기는 하지만 씨티타고 다니는 마당에 멋이 무슨 소용이랴. 간지나 가오를 챙기려면 돈이 많이 든다. 옷도 필요 없다. 가게에서 쓰는 앞치마를 두르고 체육복을 입으면 그만이다. 나는 고등학교 체육복을 아직도 입고 있다. 질기고 튼튼하니까. 쪽팔리지 않나? 생각해봐라. 나이 스물 둘 먹고 배달하는 게 쪽팔릴지, 씨티 타고 다니는 게 쪽팔릴지. 어차피 쪽팔리는 거 좀 더 웃기면 어떤가. 편하면 장땡이지.
나는 닭 집에서 일한다. 나는 닭고기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요즘 세상에 누가 닭고기 좋다고 닭 집에 취직 하냐고? 무식한 거 아니냐고? 진짜 쪽팔린 걸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소리다. 나이 스물 둘에 집에서 이태백을 부르짖으며 탱자탱자 놀거나, 학교 다니면서 하라는 공부는 하지도 않으면서 부모 돈 까먹는 게 쪽팔리는 걸까 아니면 닭이 좋아 공짜로 닭 먹고 싶어서 일하는 게 쪽팔리는 걸까. 웃기는 소리 하지마라.
달리는 게 좋았다. 달리면 바람이 귀를 넘어 지나가고 세상이 온통 흐리게 보인다. 나 혼자 다른 세상에 와있는 기분이 든다. 그럼 오토바이 집에 취직하는 게 맞지 않냐 묻겠지. 나는 달리는 게 좋았지 오토바이를 좋아한 게 아니다. 죽어라 빨리 달리고 싶었던 건 더더욱 아니다. 아직도 머리가 텅텅 빈 무식한 폭주족들은 마후라를 터뜨리고 거리를 질주한다. 내가 그렇게 개념 없는 인간은 더더더욱 아니다. 삶이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거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다가 적당히 타협하면 된다. 그럼 행복할 수 있다. 닭을 마음껏 먹을 수 있으면서도 열심히 달릴 수 있는 직장. 닭 집 밖에 더 있나.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고 남들 다하는 외식 한 번 한 적이 없었지. 입이 유별나서 그랬는지 나는 자장면보다 치킨이 훨씬 좋았다. 우리 집은 가난했다. 아버지는 술만 먹으면 어머니를 죽어라 팼다. 어머니는 그런 다음 날이면 나에게 치킨을 사주셨다. 씨-발 더럽게도 나는 어린 시절 치킨이 너무나도 좋아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렸으면 좋겠다고 가끔 바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자는 아버지의 목을 졸랐고, 어머니는 스스로 당신의 목숨을 끊었다.
그런데도 닭을 왜 좋아하냐. 전생에 닭고기를 못 먹어서 죽었던 기억이 있나보지. 아니면 치킨을 먹으면서, 의미 없는 인생에 한 줌 추억을 되새김질 하는지도. 어머니가 사주던 추억 속 치킨 맛은 나질 않지만. 열심히 먹다보면 언젠가 그 맛이 날 것 같아서. 이거 너무 식객스러운가? 낄낄낄. 그럼 어때. 나는 내 방식대로 사는 거다.
퇴근 후에는 번화가로 나간다. 나비가 고치를 뚫고 밖으로 나오듯 나는 새롭게 태어난다. 빰 빰 빠람 밤바라라 밤. 빰. 바밤. 빰빰. 빰. 클럽에 가 주시는 타이밍이라 이거다. 서면 닭돌이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하이탑 스니커즈를 신고 초초초슬림 스키니 팬츠를 입는다. 앤디 워홀이 프린트 된 티셔츠를 입고 형형색색의 팔찌를 찬다. 선글라스는 기본, 바가지 머리는 선택이다. 테크토닉 반주에 맞춰 팔을 찌르는 건 필수지. 이건 얼마 전까지의 내 모습.
요즘은 클럽이 지겨워 좀 점잖게 놀기로 했다. 새까만 라이더 재킷을 입고, 검은색 청바지를 입는다. 부츠를 신고 까만 선글라스를 쓴다. 머리에는 약간 웨이브를 넣었고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자고로 멋진 남자란 트렌드를 나만의 것으로 소화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담배를 손에 들고 무작정 거리를 걷는다. 가끔 번호를 물어오는 아가씨들도 있다. 훗. 내가 좀 매력적이지.
너무 막 사는 거 아니냐고? 웃기지 마라. 뭐가 잘 사는 건데? 이름 있는 대학에 들어가서 의사나 판사 변호사가 되는 거? 사년 내내 죽어라 고생해서 대기업에 입사하는 거? 공무원? 교사? 안정적인 직장? 단란한 가정? 지-랄마라. 돈을 얼마를 벌든 자신을 위해 쓸 줄 알고, 그것이 무엇이든 제대로 소비할 줄 알면 멋지게 사는 거다. 내가 행복하면 장땡이지.
그래 맞다. 나는 낮과 밤을 다르게 사는 이중적인 인간이다. 그렇다고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거나 여자를 후리고 돌아다닌 다거나 하는 건 아니잖아. 나는 누구에게도 그 따위로 살지 말라고 욕한 적 없어. 그럼 나도 욕 들어먹을 만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니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이고 그 기준은 누가 정했지? 나는 속도감을 즐기지만 규정 속도를 어기지는 않는다. 여자를 좋아하고 노는 것을 좋아하지만 미성년자는 건드리지 않고, 강제로 여자를 취하는 일도 없으며, 놀기 위해 빚을 낸 적도 없다. 우리 아버지처럼 여자를 때린 적은 내 중요부위를 걸고 맹세하건데 절대 없다.
집으로 돌아왔다. 단칸방 전세금 이백만원에 월세가 삼십인 이 집은 혼자 살기에 딱 적당하다. 좁은 것도 아니고 넓은 것도 아니다. 필요한 건 다 있다. 침대. 컴퓨터. 티비. 냉난방이 가능한 에어컨. 부엌. 샤워부스. 밥솥도 냄비도 전부 다. 냉장고를 열어 하이네켄 한 병을 꺼냈다. 하이네켄엔 치킨이지. 가게에서 가져온 치킨을 안주삼아 술을 마신다. 이것이 내 소소한 행복이다. 잠이 온다. 곯아 떨어졌다.
다시 고등학교 체육복을 입고 출근했다. 오늘은 수요일이다. 분명 도라에몽에게 전화가 올 것이다. 왜 도라에몽이냐고? 고등학교 시절부터 녀석은 통통했다. 둥글둥글한 게 인상이 퍽이나 좋았다. 집에만 가면 없는 게 없었다. 최신 게임기에 컴퓨터, 만화책에 맛있는 것 천지였고 돈도 많았다. 나는 만화에서 본 도라에몽이란 별명을 녀석에게 붙여줬다.
도라에몽은 삼년 째 집에 틀어박혀있다. 일본에서는 히키코모리, 우리나라에서는 은둔형 외톨이라 하던데 정확한 명칭은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외톨이든 어쨌든 친구는 친구니까. 고등학교 시절에는 갈 곳 없는 나를 늘 재워줬다. 언제나 배부르게 해줬고, 언제나 내 고민을 들어줬고, 언제나 함께 있어줬다. 녀석은 내게 아버지이자 형이고, 동생이자 친구였다. 내가 힘들 때 나를 도와줬으니까, 녀석이 힘든 지금 내가 도와주는 거다. 이게 도와주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매번 같은 시간에 전화가 걸려오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전화가 오지 않았다. 가게에는 아프다고 구라를 치고 나왔다. 체육복을 입고 담배를 피면서 녀석의 집으로 갔다. 요즘 들어 녀석이 이상해지기는 했다. 투수의 사고가 일어난 다음부터다. 닭 값을 주겠다고 그 먼 거리를 뛰어 병원으로 오지를 않나, 동창회에 가자고 꼬드기니까 네 시간 만에 넘어오질 않나. 네 시간을 쥐어 패도 집 밖으로 나오지 않던 녀석이 네 시간동안 설득했더니 밖으로 나왔었다. 이건 놀라운 변화다.
초인종을 눌렀다. 녀석이 핼쑥해진 얼굴로 나를 맞았다. 며칠 사이에 몸무게가 꽤 많이 줄어버린 모양이다. 쓰레기를 뒤져보니 밥을 많이 굶은 모양이다.
밥 굶었어? 난 녀석과 육 년을 만나면서 말하지 않아도 대화가 통하는 경지에 달했다.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몸무게 얼마나 줄었는데? 이십 킬로? 끄응.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 한 달도 되질 않아서 이십 킬로가 빠졌다면… 건강에 이상이 생겼을 거다. 도라에몽에서 진구가 되었다. 아무리 로봇이라도 얘는 사람이니까 아프겠지.
병원가자. 녀석이 고개를 젓는다. 병원 가. 녀석이 다시 고개를 젓는다. 아, 이 답답한 인간아 그러다 굶어 죽는데도? 녀석이 또 고개를 젓는다. 쥐어 패서라도 데리고 갈까 하는데, 녀석이 입은 옷으로 눈이 간다. 유니폼. 유니폼을 입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우리가 입었던 유니폼을 입고 있다. 멍하니 유니폼을 바라본다. 유니폼… 유니폼이라.
도라에몽은 크기가 절반 쯤 줄어든 얼굴로 답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라에몽은 실어증 때문에, 자기가 말을 하고 싶어도 으어- 으어하는 소리밖에 내질 못한다. 얼마나 답답할까. 굉장히 말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짓는 표정이다. 뭘 말하고 싶은 걸까. 녀석이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뭘까. 고민하고 고민하다 짐작하는 것을 힘들게 입 밖으로 꺼냈다.
설마 야구하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니겠지.
녀석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였던가. 도라에몽처럼 실실 웃어줬던 게. 집에 틀어박힌 지 삼년 만에 보는 웃음이다. 그동안 이 놈이 웃는 걸 볼 수 없었다. 롯데가 경기에 이겨도, 치킨을 갖다 줘도, 어떤 농담을 해도 웃는 경우가 없었다. 그런 녀석이 웃었다.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지나간 추억이 필름처럼 떠올랐다.
녀석은 내게 알 수 없는 우정을 줬다. 그게 우정이라고 믿는다. 녀석과 나는 서로 정 반대방향에 서 있는 사람이었지만 꼭 자석이 반대쪽에 끌리듯 서로를 알아봤던가 보다.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것을 받는 일에 굉장히 서툴렀다. 지금도 그렇다. 그런 내게 우정을 준 녀석이다. 오타쿠면 어떻고, 뚱땡이면 어떠며, 정신병자면 어때. 친구는 친구다. 내가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한다는 신념아래 몇 년을 녀석을 챙겼다.
이제는 내가 녀석을 도와줄 차례다. 그동안 내가 해준 것이라고는 치킨을 배달한다거나, 쓰레기를 버려준다거나, 잔소리를 하는 것 정도 밖에 없었다. 녀석을 도울 수만 있다면. 녀석이 다시 예전처럼 웃을 수 있다면. 좋아. 야구? 다시 하지. 누군가를 위해 내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할 수도 있어. 나는 아버지 같은 인간이 아니니까.
해. 야구. 해. 해. 해. 우씨. 하자고.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4:04:23
일병 이영경
읽다보니 전에 슬쩍 읽었던 글과 이어집니다!
건너뛰어넘은 글을 다 챙겨봐야겠습니다.
어째서인지, 히키코모리가 나오니 더 끌립니다. 2009-01-24
22:44:15
상병 김무준
구회 말 투아웃부터 시리즈로 이어지는 텍스트 입니다. 2009-01-24
23:06:33
일병 이영경
김무준님/ 넵, 구회 말 투 아웃부터 다 읽고 왔습니다.
댓글을 볼 때마다 "무준님, 무준님" 하던 이유를 알게 되었어요.
다음번 이어질 이야기도 "좋다" 라고 판단해버릴 글들이었어요. 2009-01-24
23:47:57
병장 고은호
"돈을 얼마를 벌든 자신을 위해 쓸 줄 알고,
그것이 무엇이든 제대로 소비할 줄 알면 멋지게 사는 거다. 내가 행복하면 장땡이지."
"오타쿠면 어떻고, 뚱땡이면 어떠며, 정신병자면 어때. 친구는 친구다."
공감 100% 되네요.
이렇게 확고한 자기 신념으로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에고고... 2009-01-25
09:33:25
병장 이동석
단칸방 전세금 이백만원에 월세가 삼십인 이 집은-
이거 보증금 아닐까요?
암튼 눈 아파도 술술 읽히는게 이번에도 글 잘 나왔군요. 흐흐. 건필 건필! 2009-01-27
01:15:11
상병 김무준
전월세를 함께 쓰는 집도 있더이다. 탈퇴되는 바람에 수정할 수도 없군요. 쩝. 2009-01-27
12: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