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지난 밤 이야기  
상병 김무준   2008-11-18 11:23:03, 조회: 172, 추천:1 

1.

어둠. 밤을 그리기 위해 만들어진 말일까. 검게 젖어버린 구름이 하늘에 짙게, 낮게 깔렸다. 처음부터 검게 물들어 있던 것 처럼. 어둡다.
푸름. 푸른 달빛이 어스름히 구름 사이로 내려왔다. 노란 달이 구름에 가려있다. 달은 노랗게 물들어 있지만 달빛은 푸르다. 모순이랄까. 아니면 지독하게 파란, 저 청청한 소나무 때문일지도 모른다.
숲은 푸른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둠에는 색이 없다. 하지만 이 밤은 어둠이 아닌 밤이기 때문에 푸르스름 할 수 있었다. 구름 때문이 아니라면, 저 나뭇잎 때문이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한(恨)때문이라거나."

뭔 날이 이렇게 덥담. 야밤에 구름이 깔렸으면 으레 쌀쌀한 바람이라도 불어올 만 한데 이상하게도 더운 밤이다. 파람이 도포자락을 털었다.

"상투를 틀지마는 제맘하나 못고쳤고
두루마기 걸쳤으나 지조 갖다 벗어버렸네
어허라 양반따위랴 좀 날리면 어떠겠냐!"

파람이 가락을 흥얼거리며 소매를 연신 펄럭였다. 하기사. 이상한 건 이 밤 말고도 충분히 많지.

"초가을 높바람에도 더운 밤도, 꼴에 양반이라는 나도 이상하고, 그 처자 또한 말도 안되게 이상하네 그려. 그렇지 않은가 삭?"

파람이 삭을 바라보았다. 삭은 늘 그렇듯 무심한 듯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

구름에 가려진 달이 보일듯 말듯 했다. 삭은 그 일이 있은 후 밤만 되면 멍하니 달을 바라보곤 했다. 파람은 자신의 괘를 믿었다. 분명 시간이 그를 길로 이끄리라.

"거 귀신이 곡할 노릇일세."

이틀사이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몇가지 생겼다. 하나는 이상한 처자를 만난 것이요, 두번째는 파람과 참삭이 이틀 째 똑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것이고, 세번째는 빌어먹을 기와집이 또 눈앞에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도통 보이질 않으니 원."

파람이 부채를 펴고 연신 길을 내다보았지만 무엇도 잡히질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말을 들었어야 했나.

'아이고 나으리... 그 길로는 아니됩니다요.'

이틀 전 산길을 넘어가려 주막에서 나서는데 주모가 둘을 불러세웠다. 몇년새 자그마한 고을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다.
고을에 사또가 부임하기만 하면 며칠 뒤에 재로 들어가 소식이 없다, 병졸들이 나서기만 하면 송장으로 돌아온다는 소문이었다.
기실 이야기는 소문일법 했다. 처음으로 사또가 죽었을 때는 사고이려니 했다. 두번째 사또가 죽었을 때는 우연이려니 했다. 소문이 떠돌았다. 도깨비에 홀렸네 처녀귀신의 짓이네 하는 소문이 돌았다.
제법 그럴듯한 소문이었다. 숲에는 고을의 어른이 사는 집이 있었다. 작은 마을의 선비였다. 푸른 소나무가 좋아 식솔을 데리고 자리를 잡은 선비였다. 두 딸과 아내와 함께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늙은 선비는 고을의 사또나 마찬가지였고 벼슬을 지낸지라 나라에서도 사또의 역할을 일임해 온 노선비였다.
그런 어른이 어느날 아침 싸늘한 주검으로 변했다. 노부부는 마당에 버려져 있었다. 집은 폭풍이 몰아친 마냥 너덜거렸고 농이며 이불이 박살났다. 두 딸들은 사라진 뒤였다.
작은 고을이고, 벼슬을 지낸 노선비가 가족만을 데려 살던 집이라 사람들은 산적이 집을 털었음이라 여기고 나라의 사또를 불렀다. 계속된 이웃나라의 전쟁통에 변두리 고을에도 간간히 산적떼가 나타나곤 했으나 나라의 벼슬을 지낸 노선비였으니, 나랏님도 새 사또를 보내 일을 처리하려 했으리라.
헌데 그 사또가 죽어버렸다.
처음에는 길을 몰라 짐승에게 봉변을 당했느니 했다. 두번째에는 흉흉한 소문이 소문으로만 돌았지만, 세번째 네번째에 이르러서는 사실이나 다름없는 소리가 되었다. 
산적떼가 고을로 내려온적은 한번도 없던데다 나라의 사또를 죽일만큼 담 큰 산적이 작은 고을에 올 리도 없었다.
그 무엇보다도 산적은 사람의 심장을 뜯어가지는 않으니까.

'차라리 길을 돌아 저 산으로 가는게 낫습니다요.'

주모는 남쪽이 아닌 북동쪽 산길을 가리켰었다. 산 두어개를 넘어가라는 뜻이었다. 눈앞의 길을 두고 바쁜 길을 돌아가라니. 파람은 콧방귀를 끼며 참삭을 데리고 재를 택했다.

'그 처녀귀신이 나으리 가슴팍까지도 뜯어갈지 모른데도 그러십니다!'

주모는 마지막까지 발을 동동 구르며 둘을 말렸다. 그 때 주모의 말을 들어 길을 돌아갔으면 가던 길은 갈 수 있었음을. 파람은 부채로 이마를 연신 쳤다.

"이틀이라니 이틀! 에라이……. 대체 언제까지 이 길을 헤매란 말인지 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앞으로 보름하고도 닷새 안에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이 걸음으론 턱도 없다.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주모의 말대로 도깨비 장난이거나, 처녀귀신의 농간일지도 몰랐다.

"저 빌어먹을… 흠흠. 저 아니꼬운 집을 또보내 그려. 어쩔텐가 삭. 묵어갈텐가?"

파람이 삭을 불렀다. 삭이 대답 없이 미소를 지었다. 입가의 상처가 흉하게 꿈틀거렸다. 눈빛에 어린 광기는 파람의 착각이 본 것이리라.
정말 빌어먹을 숲이요, 집이다. 파람은 고개를 휘저으며 그제의 처자를 떠올렸다.

2.

'길 잃은 나그네이십니까.'

처자는 하얀 소복을 입고 긴 머리를 풀고 고개를 숙인 채 두 사람앞에 서있었다. 동네 미친년 꼴이 이럴까. 새까만 머리는 산발을 해 허리까지 내려왔고, 초상을 치를 때나 입는 소복을 입고 둘을 마중했다.
거짓말처럼 더운 밤이 거짓말처럼 추워졌다. 처자의 몸에서는 오뉴월 내린 서리만큼 차가운 기운이 서려있었다.

'손님 앞에 이렇게 단정치 못해 죄송스럽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셔 이런 모습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해해 주셨으면…'

사랑방을 열어주며 처자가 말했다. 처자는 집 앞에서 부터 둘을 사랑으로 안내할 때 까지 푹 숙인 고개를 한 번도 들지 않았다.

'주모는 이 산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했는데, 집을 지키고 계신가 봅니다.'

처자가 고개를 들었다.
빨갛게 충혈된 두 눈이 보였다. 아주 잠깐 세찬 바람에 날리듯 머리칼이 사방으로 뻗쳤다. 처자는 붉어진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며 웃었다. 한참을 웃었다.

'도사이십니까?'

파람이 연신 부채질을 해댄다.

'설마. 그저 사연이 있는 것 같아 물어본 것 뿐입니다.'
'제 언니가 부모님을 죽이고 자신도 따라 죽었습니다. 저는 세사람 모두를 잃은 죄인으로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 해주시면 안될런지요.'

처자는 대답 없이 사랑을 나서더니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조용한 방 안에서 처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밤이 늦었습니다. 드릴 것은 없고 날이 밝는 대로 길을 떠나십시오.'

처자의 슬픔처럼 깊은 밤의 일이었다. 

3.

"객이십니까."

지난 밤 처자가 집 앞에 나왔다. 지난 밤의 처자가 죽은 사람 같았다면 오늘 밤의 처자는 산 사람 같았다.

"이거 또 봅니다 그려."
"무슨 말씀이신지?"
"어제인가 그제인가 이 집에 저희 둘이 묵어가지 않았습니까?"

처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처자는 고개를 저었다.
파람은 지난 밤의 이야기를 설명했다.

"제 동생의 원혼을 만나셨나봅니다. 제가 자느라 미처 나오질 못했는데 그런 일이 있었군요."
"원혼이라니요?"

처자는 둘을 사랑방으로 이끌어 술상을 차렸다.

"마을에서 저희 집에 얽힌 소문을 들으셨을 테지요."
"그…렇지요."
"소문은 무성하지만, 실은 동생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른 겁니다."

처자는 장화, 처자의 동생은 홍련이라 했다.
하루는 아버지가 장화에게 배필을 소개해 주었다. 혼기가 꽉 찼던 지라 많은 양반 집안이 그러하듯 어릴 때 부터 맺어준 사내와 결혼을 하게 되었고 장화는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장화 두 사람 모두가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장화의 배필은 홍련의 연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동생이 결혼을 막기 위해 부모님의 목숨을 빼앗고 뒤늦게 후회해 자신도 뒤따랐다?"
"흑…"

한참을 울던 장화는 머리를 들어 목의 상처를 보여주었다.

"동생은 저마저 죽이려 들었습니다. 저는 도망쳤고, 부모님은 명을 달리했지요. 속죄의 의미로 저는 이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허허…"
"밤이 늦었습니다. 여인네 혼자 사는 집인지라 드릴 것은 없고, 날이 밝는 대로 떠나주시어요."

장화가 소매로 눈 언저리를 두어번 찍더니 방을 나섰다.
팔짱을 끼고서 술상을 노려보던 파람이 입을 열었다.

"누구의 말이 참이라 생각하나?"

참삭은 방 구석에 앉아 일어날 생각을 않았다. 으레 그렇듯 단검을 손에 들고서 던졌다 받았다를 계속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노릇이야. 동생은 제 언니가, 언니는 동생이 부모를 죽였다 말하니."

참삭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분명한 건 어제 그년은 죽은 년이고 오늘 이년은 산 년이라 이거지."

파람이 병째 술을 들이킨다.

"내일은 숲을 벗어나 길을 잡아야 하는데, 걱정이네 그려. 우선은 눈을 붙임세."

파람이 벌러덩 누워 갓끈을 푸는데 천장에서 시퍼런 것이 내려왔다.

"죽기 싫으면 당장 나가시오."

지난 밤의 처자였다.

"산 자면 천장에서 솟을 리 없고. 죽은 자면 꺼지… 흠흠. 사라지시게."
"나가. 이 집에서 나가."

소름끼치도록 날카로운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두 사람의 입에서 입김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조용히 염라대왕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지 어찌 산 자 앞에 나선단 말이냐!"
"나가란 말이다!"

-쿠당탕

장화가 문을 발로 차다시피 열며 사랑으로 들이닥쳤다.

"이것아. 네가 이럴 때가 아니다. 왜 이러는 게야."
"닥쳐라! 부모님을 죽이고 나를 죽이고도 이 집에 붙어있을 이유가 있느냐?"
"홍련아!"
"요망한 년. 내 혼이 닳아 썩어 문드러진다 해도 나는 이 집을 떠날 수 없다."

장화가 두 사람의 팔을 잡아끌었다.

"도망쳐요, 우리!"

그 순간,

"헛!"

참삭이 칼을 들어 장화의 목을 그었다. 순식간이었다.
이어 장화의 목덜미를 잡아 담벼락에 내리 꽂았다. 
먼지와 함께 담이 내려 앉았다.

"……."

무너진 담벼락 아래 처자는 온데 간데 없고 피투성이가 된 구렁이 한마리가 뒹굴었다.
파람은 참삭을 한 번 노려보고서 부채를 펼쳤다.

"쿨럭. 네놈, 어떻게…"

구렁이는 사람의 말을 내뱉었다. 참삭은 구렁이를 보고 비릿하게 웃고 돌아서 방으로 들어갔다.

"킬킬킬. 내 저년의 영혼과 네놈들의 영혼만 먹을 수 있었다면, 용이 될 수 있었거늘…"

파람은 말이 없었다. 멍하니 구렁이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내 한은 없다. 내 서방을 죽인 원수놈을, 놈의 심장을 씹어먹었으니. 킬킬킬. 쿨럭."

4.

"그러니까, 구렁이의 복수다?"

장화와 홍련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어린 까치를 살리기 위해 구렁이를 죽인 적이 있었고, 그 구렁이가 복수를 위해 언니를 죽이고 언니의 몸을 빌었다는 이야기었다.
구렁이는 자매의 아버지를 설득해 홍련의 연인과 혼약을 맺게 해달라고 떼를 썼고, 첫날 밤을 치르는 날 심장을 뜯어갔다.
갑작스런 흉사에 누명을 쓰게 된 집안은 풍비박산 났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화병으로 앓아 누웠다. 다 죽어가는 노부부 앞에 구렁이는 모습을 드러내 복수를 끝내고 홍련이까지 죽인 후에는 고을 사또들 까지 제 욕심을 위해 삼켜왔다.

"내친 김에 용이 되려고 했군."

홍련은 이야기를 마치고 사라졌다.
두 사람이 어둠을 안주 삼아 술상을 다 비울 때 까지 홍련은 나타나지 않았다.

"복수는 완성되었네. 노 선비가 구렁이의 남편을 죽여 그 집안을 박살냈듯, 구렁이는 부부와 그 딸의 사랑까지 씹어 삼켰으니…"

날은 밝아졌고, 안개는 걷혔다. 이상하리 더웠던 날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맑아졌다. 길이 보였다.

"이제 감세. 갈 길이 머네."

파람이 도포자락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참삭은 말 없이 파람의 뒤를 따랐다.
길을 걷다 말고 파람이 물었다.

"궁금한 게 있네."
"……."
"어떻게 자네는 장화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

참삭은 침묵을 지켰다.
한 참을 걸었다.
참삭이 머리칼을 들어 뺨을 보여준다.

"이게 보이나?"

오른 입술 끝에서 시작 된 상처는 귀 밑까지 이어져 있었다. 상처는 흉하게 꿈틀거렸다.

"강한 의지가 담긴 상처는 쉽사리 지워지지 않아."
"장화의 목에 난 상처만을 보고 알았단 말인가?"

참삭은 머리를 두어 번 쓸어 넘겼다.
해가 재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붉게 물든 노을이 지난 날의 일들을 뒤덮는 듯 했다.
참삭의 하얀 머리칼이 핏빛으로 빛났다.
참삭이 말했다.

"지독한 슬픔을 겪은 이는 눈물 조차 흘릴 수 없지."

파람은 더이상 묻질 않았다.






뱀발. A/S 따위는 없음. 절대로. Never.
뱀발 둘. 원래 이런 게 아니었는데 귀찮아서 차 포 다 떼고나니 왠 잡문이 나왔다는.
뱀발 셋. 동화쓰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뱀발 넷. 아 정말 못썼다. (자괴감)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3:57:24 

 

일병 배지훈 
  잘쓰셨는걸요! 예전에 KBS에선가 옛날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각색해서 응모하고 그 응모작은 현역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이 평가해주는 프로그램을 보고 응모했을때 생각이 무럭무럭나는군요... 참삭과 파람이 우리 옛 이야기와 엉켜서 좀더 많이 돌아다녔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데... A/S는 없다고 하시니, 다음 모델은 어떠신지요 무준님?(하하) 2008-11-18
12:49:22
  

 

상병 김무준 
  30쪽 분량을 10쪽으로 줄이다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그리고 원래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 소재거리로 옛 이야기를 따왔을 뿐입니다. 
하암. 재밌게 읽으셨다면 다행이네요. 2008-11-18
13:06:08
  

 

병장 정병훈 
  무준님의 마지막 단어 '자괴감' 을 보고 자괴감을 느끼는 1人 추가합니다. 
재밌네요. 흐흐흐 2008-11-18
14:15:50
  

 

일병 김예찬 
  느낌 좋은 단편입니다. 왠지 이 작품을 인트로로 동일한 무준님의 옴니버스 단편 모음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2008-11-18
14:16:46
  

 

상병 김무준 
  그래도, 안써요 이사람들. 2008-11-18
15:43:59
  

 

병장 정병훈 
  크하하. 그냥 웃지요. 2008-11-18
16:04:00
  

 

병장 이동석 
  오- 재밌는데요? 이런 시리즈로 연재하셔도 괜찮을듯? 2008-11-18
18:04:06
 

 

상병 이우중 
  에이~ 재밌는데 좀 더 써주세요. 흐흐 2008-11-18
19:31:09
  

 

병장 김낙현 
  아, 말머리가 잘 못 된건가요? 2008-11-18
23:36: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