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이번에도 당신입니까.  
병장 김무준   2009-04-02 23:26:05, 조회: 267, 추천:0 

아무래도 어렵겠습니다.

출판사는 한 달도 넘게 걸린 원고검토 결과를 간단하게 말했다. 어렵겠다는 이야기는 책으로 낼 수 없다는 말이다. 대놓고 노라고 말하면 될 것을 뭐 저리 어렵게 빙 둘러서 말하는지 모르겠다. 원고는 좋고 소재도 좋으며 주제도 좋은데, 책으로 내기는 힘들겠다. 뭐가 힘들다는 건지. 부족한 점을 말이라도 해주면 고쳐보기라도 하지. 이걸로 딱 백군데다.

출판사 백 곳. 말이 백 곳이지 보통 출판사마다 보름에서 한 달 정도 시간이 소요됐으니, 꼬박 이년 정도를 원고 보내고 검토 받고 했다. 수시로 공모전 투고하고. 처음에야 어디든 되겠지 해서 달려들었는데 한 열 곳 넘게 퇴짜를 맞으니, 나중에는 공모전에 투고하면서 출판사 두세 곳에서 원고검토 받았다. 그렇게 딱 백 곳이다. 대한민국 출판사란 출판사는 다 다녀보겠다고 마음먹었었다. 열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 없다는데 이거 도끼날이 애초에 썩어있던 건지 출판이란 나무는 넘어갈 줄을 모른다.

그동안 끊었던 담배도 다시 물었다. 출판사에서 언제 호출할지 모르니 제대로 된 직장을 얻지도 못했다. 출판사 입장을 이해는 한다. 뚜렷한 수상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국문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고졸 나부랭이의 텍스트를 뭘 믿고 책으로 만들어준다는 말인가. 몇 천만 원짜리 도박이라는 거 알고 있다. 에라. 차라리 이년 돈을 모아서 직접 책을 찍을 걸 그랬다. 시간은 바람처럼 날아갔고 나이는 스물넷이나 처먹었다.

고졸 학력 백수의 손에 들려진 건 퍽이나 많았다. 태권도 삼단 단증. 책 한 권 분량의 원고 하나. 전역증. 주민등록증. 각종 세금고지서. 따위였다. 아아. 살아있다는 사실을 서류상으로 증명할 물건들과 필요도 없는 게 가득. 고등학교를 졸업한지도 사년. 정말 쓸 만한 물건들만 남아있다. 얼마 벌지도 못하는 돈은 버는 족족 다 써버렸고.

몇 년째 계속되는 경기침체는 좀처럼 회복될 줄 모른다. 청년실업. 청년실업. 어떤 아저씨가 이 땅의 이십대를 팔십-팔만 원 세대라 칭한 게 언제인데 아직도 먹고 살기가 힘드냐고요. 꿈꾸며 먹고 사는 게 힘든 일이라는 거 잘 안다. 그렇지만 억울했다. 슈퍼마리오처럼 보너스 목숨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생각대로 하면 되도록 비비디 바비디 부하는 것도 아니라, 그저 보잘것없는 텍스트 책으로 내고 싶다는 거란 말씀입니다.

이젠 그만둬야겠다. 집으로 돌아와 창문을 열었다. 이미 해는 졌고, 나도 현실에 졌다. 밤하늘에 뿌려진 별은 반짝반짝 빛났고 땅바닥에 떨어진 꿈은 조각조각 부서졌다. 백 군데나 해보고 아깝지도 않냐. 아깝다. 미치도록 아깝고 서럽다. 이제 그만하려고. 최선을 다해봤으니까. 공모전이라는 것도 어차피 똑같은 출판사들에서 하는 거다. 이젠 그만하련다.

뭔가 심각할 정도로 울적해졌다. 편의점에 가서 하이네켄 다크를 샀다. 쌉쌀한 흑맥주가 먹고 싶어서. 퇴근시간이라 그런지 도로에 차가 가득하다. 사람들은 하루를 또 살아간다. 유명 여배우가 자살하건 더블유비씨에서 야구 대표 팀이 준우승을 거두건 스물 넷 청년이 출판사 백 곳을 전전하건 아무런 상관없이. 하루를 살아간다. 육십오억 인구에게는 육십오억 개의 삶이 있다.

옥상에 올라가 맥주를 마셨다. 흑맥주. 흑. 맥주. 흑. 흑. 오늘따라 무척이나 흑맥주가 슬프게 입에 감긴다. 꼭 흑맥주의 쌉쌀한 맛이 인생의 쓴맛 같아서. 잘근잘근 씹어버리자고 착착 감기는가보다. 제기랄. 이렇게 살고 싶었던 건 아니라고. 다 마신 맥주병을 집어던지려다, 혹여나 길 가던 누가 맞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 벌어지면 어쩔까 싶어 슬며시 내려놨다.

세상은 나에게 미필적 고의를 행한 걸까. 한 드라마 속 주인공이 슬프게 읊조리던 대사가 기억난다. 세상이 나를 버린 게 아니라, 애초에 세상은 날 가진 적이 없더라구. 그러게 말입니다. 스물 넷 청춘은 세상과 현실에서 버림받은 게 아니었다. 애초에 나를 가졌던 적이 없을 테니까. 니미이. 씨퍼얼.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쳐다본다. 아 쪽팔려라. 뛰어내릴까. 모든 게 덧없어 보인다. 별로 재미도 없고. 이제 뭐하나 싶기도 하고. 그러려니 하면서 살아가려니까 마지막 남은 한줄기 빛이 사라진 것 같아서. 아, 정말 모르겠다. 살아야하나 말아야하나 고것이 문제로다. 갑자기 문자가 왔다. 번호가 기억이 까마득하다. 어디서 많이 본 번호인데.

안녕. 잘 지내고 있니? 힘내렴. - 안드로메다에서.

으하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역시 외계인은 스케일이 다르다 이건가? 이제는 서른두 살이 되었을 누나가 보낸 문자였다. 이게 예약발송 해놓은 문자인지, 아니면 정말 안드로메다에서 날아온 문자인지. 아무렴 어때. 진지하게 삶을 고민하는 상황에 생뚱맞은 문자가 도착했다. 어명이오. 팍팍하던 삶에 유쾌한 문자가 도착했으니 이건 그래도 살아보라는 하늘의 계시요.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잠이나 자자 싶어서 방에 돌아왔다. 침대에 털썩 엎어져 잠을 청하려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제발 잠자려고 할 때는 건들지 말라고요. 무시하고 잠을 청하려는데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는 통에 잠이 오질 않았다. 문을 열었다.

키는 일 미터 구십 쯤 될까. 어두침침한 인상에 헨릭 빕스코브의 패션쇼에나 등장할 커다란 모자를 쓴 남자가 서있었다. 캐리비안의 해적에 나오는 해적들처럼 나 해적이오, 하고 온 몸으로 말하는 것 같은. 그런 남자가 서있었다. 장난하나. 문을 닫으려는데 남자가 문을 잡았다. 그래. 이번에는 무슨 소리를 하려고. 나 폴라리스 랩소디의 키 드레이번이오, 라고 하려고?

문 열어라. 이 아저씨가 미쳤나. 오밤중에 남의 집에 찾아와서 무슨 행패야. 놔요. 문 열어라. 아, 진짜 꼭지 돌게 만드네. 당신이 키 드레이번이라도 된다고 말하려고? 알고 있군.

그래 좋다. 안드로메다에서 온 문자건 예약발신을 걸어놓은 문자건. 누나의 문자가 도착한 건 좋다 이거야. 외계인도 모자라서 키 드레이번이라고. 또 엎어져서 잠들었나 싶다. 꿈이면 좋아. 상쾌한 꿈이라고 믿지 뭐. 문을 열어줬고 키 드레이번은 아무렇지 않게 방으로 들어와서는 신발을 벗지도 않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아. 아무리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어이가 없어서 키 드레이번을 째려봤다. 날카로운 눈매에서 카리스마가 철철 흘러넘친다. 소설 속 키 드레이번이랑 딱 맞네. 오스바아알! 하고 외치면 판박이겠네.

나를 왜 불렀지. 좋아요, 키 드레이번. 당신이 키 드레이번이건 미친 코스프레 중독자건. 비슷하다는 건 인정해야겠네. 나는 당신 부른 적 없어요. 거짓말하지마라. 네가 나를 강하게 불렀다. 뭔 고양이 관에서 튀어나와 풀 뜯어먹는 소리야. 요즘 계속 출판사 i아 다닌다고 당신 따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고. 거짓말이군. 눈빛은 진실을 말하고 있어.

거 참. 이웃집 고양이가 찾아와 보세요, 내가 당신의 잃어버린 냐옹이입니다 하고 말을 걸어와도 이것보단 덜 우습겠다. 미친개에는 몽둥이가 약인데 이 양반을 두드려 패자니 외려 얻어맞을 것 같아서 관뒀다. 냉장고에서 소주를 한 병 꺼냈다. 아무리 꿈이라 해도 제정신으로는 못 견디겠다. 소주 한 병을 단숨에 비웠다. 미친 세상. 미쳐 돌아가는 나. 미쳐봅시다.

나는 모르겠는뎁쇼. 불렀다고 해도 딱히 이유가 있어서 부른 건 아닐 걸. 나는 당신처럼 살고자 노력했고, 죽으려 진지하게 고민하는 날 당신이 나타났으니까. 어쩌면 마음 한 구석에서 그래도 살고 싶다고 부르짖었는지도 모르지. 살기로 결정했으니까 그냥 가요. 훠이. 키 드레이번이고 나발이고 알아서 잘 살 테니까 가보세요.

키 드레이번이 당장이라도 죽일듯한 표정으로 노려본다. 무섭다. 온 몸의 털이 쭈뼛쭈뼛 서는 느낌이다. 이영도가 작중 인물을 잘 만든 건지, 아니면 환상 속 키 드레이번의 모습이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던지. 꿈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아아. 초우주적인 경험을 또 해보는구나. 아스트랄한 경험인데. 키 드레이번이 침대에서 일어섰다. 올려다봐야 하잖아. 목 아프다고.

알겠다. 그럼, 묻겠다. 네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오스발은 어디 있나.

이 수박 씨 발라먹을 개 아이만큼 시베리안 허스키가. 장난하나. 소설 속에 나오는 오스발이 어디 있는지 물으면, 소설 속으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해주리? 나한테 그걸 왜 묻냐고! 대체 이놈의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온갖 쌍욕을 퍼부어주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한 대 맞을 것 같다. 죽일지도 몰라. 오스발. 오스발이라. 소설 속에서 키 드레이번은 마침내 오스발을 만나지 않던가?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데.

오스발 따위 안드로메다에 가면 있겠죠. 안드로메다. 안드로메다라. 왜 보통 잃어버린 것들을 보면 안드로메다에 가 있잖아요. 내 머리통의 개념이나. 이십대의 청춘이나 미래라든가. 소식 끊긴 누나. 이런 것들. 안드로메다에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군. 알았다. 에, 안드로메다까지 어떻게 가려고요. 은하철도 구구구라도 타고 갈 거라고요? 잘 알고 있군.

키 드레이번은 떠났다. 잠에서 깨면 정신병원에라도 가봐야겠다. 이건 중증이다. 무슨 쌍팔 년도 개그도 아닌데 키 드레이번이 은하철도 구구구를 알 리가 없잖아! 이런 꿈을 꾼다는 건 분명 정신 상태에 문제가 있다는 거다. 아침에 병원 가서 의사라도 붙잡고 털어놔야 속이 시원해지겠지. 병원 다닐 돈도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살아가는 건 미친 짓이야.

피곤이 쏟아졌다. 하아. 이제 좀 자야겠다. 맥주에 소주를 마셨더니 속에서 폭탄주가 생성되는 느낌이다. 숙취에 시달릴지도. 침대에 눕는데 또 누가 문을 두드린다. 씨버얼. 이런 조옷 같은 세상. 조옷 같은 꿈. 뭐냐고. 어쩌자고. 이번에는 또 누구냐고. 방문을 열고 고개를 내미니. 까만 정장을 입고 선글라스를 쓴 흑인이 서 있다. 당신, 또야?

안녕하십니까. 안녕 못 해요. 유감입니다. 됐어요. 놀라셨을 겁니다. 또 윌 스미스 씬가요? 잘 아시는군요. 또 라니요? 아니 뭐 그렇다고요. 맨인블랙 투라도 찍으시나요. 그건 전에 찍었습니다만. 그럼 쓰리를 찍나 봐요. 세 번째 홍보영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만, 그것 때문에 방문한 건 아닙니다. 설마 내 폰에 도착한 문자가 진짜 안드로메다에서 날아와 불법 송신된 문자이기에 조사를 하러 방문했다고 하시려고요? 맞습니다. 눈치가 빠르시군요. 제가 좀 미쳤거든요. 그렇습니까. 

꿈이다. 분명 꿈이다. 안드로메다에. 키 드레이번에. 은하철도 구구구에. 맨인블랙에. 윌 스미스에. 조지 루카스도 울고 갈 대박 큰 꿈이네. 이걸 텍스트로 옮겨 단편 공모라도 제출해봐? 에이 됐다. 보나마나 개소리네 훑어보지도 않고 넘겨버릴 텐데. 다들 그랬으니까. 그럴 테지. 그렇다고 해두자. 윌 스미스는 이것저것을 묻기에, 그저 아무것도 모른다고 딱 잡아뗐다. 이럴 땐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는 게 최고다. 윌 스미스는 협조에 감사하는 말과 함께 다시 은빛 막대를 꺼냈다.

저기요. 말씀하십시오. 그거 기억제거 광선 기계 판매도 가능한가요? 글쎄요, 어떻게든 구하려면 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요즘 이베이에는 없는 물건이 없으니까요. 한 번 찾아봐야겠네. 하지만 과연 사람들이 기억제거기 따위를 이베이에서 찾으려 들까요? 흐음. 혹시나 모르죠. 세상에는 외계인도 있는 마당에 그런 거 찾는 지구인이 없을 까요. 하긴, 그렇기도 합니다.

번쩍하고 빛이 뿜어졌다. 윌 스미스는 이번에도 당신의 기억에 외계인 따위는 없으며, 도라에몽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지 않아 다행이지만 이십대 청춘을 그따위로 허비하고 사는 건 여전하다며 악담을 퍼부었다. 인생 그 따위로 살지 말라는데 뺨을 후리려다, 흑인들이 신체적 능력이 굉장히 우수함을 깨닫고 관뒀다. 하아. 나도 좀 똑바로 폼나게 제대로 살고 싶습니다.

외계인이라는 게 있는 걸까. 하암. 잠이 쏟아진다. 미친 꿈들을 상대하려니 영 몸이 피곤하다. 꿈이니까. 꿈속에서라도 자자. 침대에 쓰러지다시피 누웠고 잠에 빠졌다. 누나는 꿈속의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안드로메다를 여행하고 있었다. 은하철도 구구구에 탄 키드레이번과 윌 스미스를 보고, 조지 루카스가 그걸 찍는 장면을 봤다.

아침에 일어나 정신병원에라도 가야겠다 싶어 옷을 챙겨 입다 말았다.

방 바닥에는 키 드레이번의 커다란 발자국이 남아있었으니까.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9:21:32 

 

병장 김민규 
  아저씨 여기 처음처럼이요. 
아니요, 참이슬 말고, 씨원 말고, 처음처럼 한병 주세요. 
캬, 쥑이네. 근데 홍합탕 안줘요? 2009-04-02
23:31:45
  

 

상병 김형태 
  아수라 발발발 아수라 발발발 2009-04-02
23:45:54
  

 

병장 이동열 
  첫 문장때문에 가슴이 덜컥했군요. 낄낄 2009-04-03
08:17:06
  

 

상병 권홍목 
  아아아... 저도 덜컥했는데 
계속 읽다보니 안도감이 들면서 낄낄낄 2009-04-03
08:27:15
  

 

병장 윤영준 
  자유호의 선장과, 은하수를 건넌다던 은하철도 구구구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