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이력서  
상병 김요셉   2008-12-15 10:58:28, 조회: 186, 추천:0 


생소한 이름이지요. 처음 보시는 이름일겁니다. 그동안 가명을 썼거든요. 피치못할 사정이 있어서요.
하지만 그동안 썼던 가명을 대더라도, 아 이 사람이였구나, 하시는 분은 별로 없겠지요. 그 이름 그대로 두고 지금 이력서를 제출하더라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책마을 저어어 구석에 쳐박혀 지켜보기만 하던 회색분자라서요. 지금 찾아보니, 책마을 주민으로 입주한지 두 달이 다 되어 가는데도 겨우 두 개의 글 밖에 쓰지 않았더군요. [독서후기] 이 남자가 사는 법. [내글내생각] 당신의 근황.
댓글은 몇 개나 달아봤으련지 모르겠습니다. 세어보나 마나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겠지요.

지적 감수성이 뚝뚝 묻어나오는 씨크함과 허세없이 발랄함을 두루 갖춘 남자가 되는 것을 지향하거든요. 하지만 이 나이 먹도록 아직도 머리 속에 가진거라곤 지우개밖에 없는 남자에겐 너무나도 멀고 먼 지향점인지라, 입 굳게 다문 채 칼만 갈면서 살아온지 수 년 째. 칼 가는 시간 외엔 아무 생각 없이 히죽히죽  웃고 돌아다니며 소일하기를 수 년 째. 무딘 날로 사람들 앞에 나서기가 영 무서워서요. 요즘 사람들, 어디 삼천원짜리 맥가이버칼 들고가서 달려들어봤자 상대나 해 줍니까. 
이제와서 느닷없이 쓰던 가면 버리고 이력서를 제출하는 건 칼을 갈 만큼 갈아서일까요. 에이 설마요. 이십이년 묵은 게으름이 어디 간답니까. 칼을 가는 시간보다는 뜨거운 용광로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시원한 빙수라도 먹는 시간이 훨씬 많아서, 빙수 한 대접 먹고 돌아와보면 쇠는 다 식어 엿이나 바꿔먹을 고철덩어리로 변해있고, 그거 바꿔 엿바꿔 먹다보면, 음. 아무튼요. 앞으로도 한 삼십년은 용광로 옆에 붙어있어봐야지 싶은데요.
그렇다면 왜. 여전히 어설프고 무딘 칼 기세좋게 뽑아들고 이력서라니, 비장하게 이 앞에 선 이유라면야, 월요병에 끙끙 앓으며 접속한 책마을에 고스란히 남겨져있는, 지난 주말 동안 있었던 피튀기는 논쟁의 흔적 때문이지요. 아, 미리 말합니다. 뒷북 칠 생각 없습니다. 그 논쟁에 뛰어들어보자는 의도로 쓴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 이야기가 아니에요. 조금 다른 이야기에요.
뒷북 치고 싶어도 이 북이 무슨 북인지조차 잘 모릅니다.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댓글이 있었거든요. 이런 소모적인 논쟁은 필요없으니 그만하자는 투의 댓글. 안그래도 심각한 난독증으로 고생하는 이 장애우는 그 긴긴 논쟁을 다 읽어보자니 막막했던 차에, 소모적 논쟁이였다는구나. 얼씨구나 잘됐다. 대충 스윽 스크롤 한 번 내려보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정도는 알겠더군요. 박진감 넘치는 액션들 덕분에요.

약속한 대로 이제 그 논쟁 이야기 대신 다른 이야기 하지요. 이력에 대한 이야기요.
열 아홉 때 까지만 해도 왼쪽으로 생각하고 왼쪽으로 사는게 꿈이였습니다.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이 꿈이였고, 소수자와 약자를 위해 발언하는 것이 꿈이였습니다. 바꾸고 싶었고 저항하고 싶었지요. 부조리와 불평등, 옳지 않은 것들을 증오했습니다.
남들 한참 수능 준비할때 글을 읽었지요. 이상적인 무엇을 꿈꾸었고, 절대 저 무의미하고 폭력적인 경쟁 - 입시 전선에 뛰어들지 않고 비껴서 관조하겠다는 소심한 반항으로 당시 부당하다 생각하던 체제에 저항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쌍팔년도 식으로 '지적 허세뿐인 대학생이기보단 노동전선에 뛰어들어보자'며 공장이라도 들어갈 수 있을만한 용기까지 있을리는 만무하니, 뭐, 당연히 대학에 들어가고자 원서를 썼지요. 이 분들에게 배우면 훌륭한 왼쪽이 될 수 있겠구나, 싶은 서울 소재의 모 대학에 원서를 썼습니다. 그런데말이죠. 세 개나 쓸 수 있는 원서 중에 그 대학 딱 하나만 쓰기는 왠지 아쉽더라구요. 원서 쓰던 날 즉석으로 하나를 더 썼습니다. 놀기 좋기로 유명하다는 모모 대학으로요. 떨어져도 아쉬울 것 하나 없으니 인문계열중에 가장 강해보이는 과에다가 질렀지요.
아니, 그런데 이게, 둘다 덜컥 붙어버린겁니다. 대기번호도 받지 않고 깔끔하게.
고민과 번뇌의 과정은 생략하고 다들 예상하실 수 있으실만한 결론. 놀기 좋다는 바로 그 대학으로 갔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든지간에, 쨌든 멋지게 배신당한거죠.
저 자신에게요. 제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을 저버리고, 고집이건 아집이던 10대의 마지막을 가득 메우고 있던 신념을 저버리고 - 이하 생략. 쓸데없는 이야기잖아요.
그 후로 이어지는 여전히 쓸데없는 이야기들. 술마시기 바쁘더라. 골방에서의 지적 논쟁이건 광장에서의 투쟁이건 다 부질없어 뵈더라. 정신 놓은 채 취해 돌아다니다 보니, 웃다 아프다 정신없다 보니 시간은 잘도잘도 흘러가더라.

그 이후로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는 말하기 부끄러워요. 씨크함도 허세없는 발랄함도 없다는건 분명합니다만. 그래도 한때 보잘것없고 유치하지만 신념이랍시고 칼을 갈아보던 때의 습성이 아주 조금은 남아있어서 언뜻 진중한 구석이 남아있기도 한데요,
왼쪽이 흔히 그렇듯 투쟁적인 데가 있어서 말이죠. 언제 어느때건, 그것이 부당하건 아니건 큰 일이건 사소한 일이건간에, 그것을 (사회적, 정치적)운동 - movement 로 비약시키는 경향이 있어요.
왼쪽이 흔히 그렇든 이상적인 데가 있어서 말이죠, 단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운동 - movement가 사회를 움직일 수 있을 거라는 케케묵은 낙관주의를 아직까지도 가지고 있어요.
되도록 입다물고 사는건 그 때문이지요. 내가 하는 사소한 말 한마디가, 그것이 작은 의지 작은 관점이라도 담고 있다면 특히나 여러 사람을 앞에 두고 있어 순식간에 공론화 될 수도 있는 상황이라면야 어떤 단체 혹은 집단 어쩌면 사회를 움직일 수 있을 만한 시발점이 되어버릴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한 마디 말을 하더라도 가볍게 하겠어요. 이도저도 아닌 어설픈 주관으로 말하기 보다는 다물고 있거나, 정말 한없이 가볍고 어느 한 구석도 편협되어질 가능성이 없는 말만 하는게 더 나을거라는 판단이지요.

약속을 살짝 어길게요. 나쁜남자라서요. 하하.
그 논쟁 말이죠. 책 마을에서 어떤 주제에 대해 충분히 공론화 시키실 수 있으실만한 분들이 박진감넘치게 한 판 붙으셨더군요. 자격을 가지고 논하는게 아니니 이 점은 절대 오해하지 마시길. 
그동안 공론화의 한 축을 부담하고 계시던 분이, 방금 전의 이 논쟁도 불러일으켜 공론화시키셨던 분이, 그리고 여전히 발언하고 계시던 분이, '소모적 논쟁은 그만하자'라고 하셨더라구요. 비판하자는거 아니니 이 점은 절대 오해하지 마시길.
초점은 '그만하자' 가 아닌 '소모적 논쟁'입니다. 소모적이라니, 평소 답지않게 투쟁심을 가슴 속에 품고있던 저를 짜릿짜릿 백만볼트 전기로 자극하는군요. 예. 바로 위에서 말했다시피, 저는 다수를 대상으로 발언되었다면 그 무엇이든 소모적인 것은 없다는 믿는 사람입니다. 도대체 그것이 어떻게 소모적일 수 있다는 것인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이력서를 제출해요.
당신의 '이것은 소모적이다'라는 작은 발언 하나가, 무기라고는 문방구 맥가이버칼 하나밖에 가진 것 없어 벌벌 떠느라 용광로를 떠날 줄 모르던 애송이마저 지금 여기로 끌어냈으니, 당신의 '이것은 소모적이다'라는 발언조차도 소모적일 수는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력서라기보다는 비장한 출사표 비슷한걸 멋지게 내던져보고 싶지만, 에이. 그건 저처럼 부족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내던져 주시겠지요. 불특정 다수의 당신들이요.
당신들, 나와서 증명해 보시지요. '소모'마저도 진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진정 소모적인 것은 없다고, 책마을이 지적 토론의 장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우리네 삶이 소모적이기 보다는 고민과 열정과 의지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정도는 된다고, 증명해 보죠 어디 한 번.
그리고 이 증명을 지켜 볼 사람도,

에이. 어디가세요. 궁 생활 뭐 별 거 있다고, 여기서 떠나면 어디가서 무얼 하면서 놉니까.
같이 놀아요. 놀아주세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20:03:25 

 

상병 정근영 
  첫번째 독자가 저로군요 
환영합니다 요셉님 
주말간 몰아쳤던 폭풍이 다시 책마을을 불타오르게 했군요.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셉님의 글, 앞으로 지켜보겠습니다. 

가지로- 2008-12-15
11:07:03
  

 

병장 양 현 
  그렇죠. 우리들의 이야기마냥 저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더블디(D.D)는 GoBack아닌 고백을 들이마시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에 사정 없는 사람 어딧냐고, 다들 말못할 사정 많고 있고 그러는거라고. 맞아요. 이거 보니 이력서. 출사표. 요셉님은 더블디를 아시나요. 누가 그들을 아나요. 어라라? 2008-12-15
11:10:22
  

 

병장 이동석 
  다시 인사드릴께요. 이번엔 본명이 맞으시겠죠? 
그런데, 계림동 학교라면 어디를 말씀하시는거죠? 
(계림동에 관한 글은 썼지만, 계림동은 모르는 망나니 이동슥) 2008-12-15
12:49:53
 

 

병장 김민규 
  제가 느끼기에 어제의 '소모'는 주제 자체에 대한 평가의 차원이 아닌 대화에 임하는 각 개인들의 태도의 문제였다고 생각되는군요. 애초부터 주제는 흐릿했고 초점은 명확하지 않았는데 억눌려 숨어있던 감정들이 터져 나오면서 엉뚱한 효과가 도출되었다고. 

생각은 하나 적기가 몹시 망설여져 쓸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키보드를 누르고 있는 제 자신이 너무도 못마땅해서 말이죠. 사람에 대한 기본 가치도 지켜주지 못한 저 자신이. 2008-12-15
13:20:41
  

 

병장 김민규 
  글이 다 무어며, 논리가 다 무엇입니까. 저는 또한번 비관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2008-12-15
13:22:28
  

 

상병 김요셉 
  현 / 저도 몸만 다 컸지, 지적 수준으로 보나 뭘로 보나 아직 원숭이라지요. 흐흐 

동석 / 광주고 나왔습니다. 광주고가 어디붙어있냐면. 흐음. 음. 음. 어디더라...벌써 가물가물하네요 허허헛 

민규 / 마음껏 못마땅해하시고 마음껏 비관하세요. 비관해야 마땅합니다. 그 태도들에 대해선 말이죠. 그리고 여기 남아서, 책임지세요. 수정하세요. 바꾸세요. 
폭력적인 변증법이 판치는 시대는 지나갔으니까요, 비관도 잘못된 소모와 부족한 개인들의 사사로운 감정들까지도 모조리 포용해 이끌어 가야 하는 것이, 그러한 풍속을 갖추어 나가는 것이 책마을이라는 작은 공동체에서나마 우리가 지향해 나가야 할 방향이 아닐까 해요. 2008-12-15
14:35:07
  

 

상병 김형배 
  여기서 비관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잘 모르겠네요. 선임한테 물어볼수도 없는 노릇이고, 2008-12-15
14:46:33
  

 

상병 김요셉 
  형배 / 그 분의 비관이 아니라, 민규님의 스스로에 대한 비관 같은데 말이죠. 2008-12-15
14:51:58
  

 

상병 김형배 
  민규님이 무엇을 못마땅해 하는건지요? 비관은 뭐고. 으허- 머리가 돈다. 2008-12-15
14:56:55
  

 

상병 김무준 
  개인에게는 충분히 소모적일지도 모르죠. 깽깽이의 텍스트에서 조차 무언가를 얻어가는 경우가 있겠지만, 깽깽이에게는 지극히 소모적이었을 뿐입니다. 냠. 

그나저나, 혹시 와우 얼라이언스이신가요? 용광로가 촵촵 와닿네요. 2008-12-16
10: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