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우리 집 강아지 깽깽이. 왈왈.
병장 김무준 2009-02-11 02:36:43, 조회: 305, 추천:0
논설문은 제일 쓰기 싫은 텍스트다. 비평이 논설문과 비슷한 구조 혹은 논설문의 범주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논설문은 정말 쓰기 싫은 텍스트다. 왜냐고? 지껄여 놓으면 얻어맞으니까. 웹은 무한한 정보의 바다고 듣도 보도 못한 잡 괴수들이 날뛰는 무서운 바다다. 밖에서 비평이라는 잡문을 생산해 놓았을 때도 참 많이 얻어맞았다. 에라이-
나는 아직도 내가 생산한 텍스트에 쉽게 글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내게 ‘글’은 신성한 단어다. 이 글이라는 개념을 말로 어떻게 풀어야할지 참으로 난감하다. 글은 단순히 사전적 의미가 아닌 철학적 단어에 가깝다. 고대 철학자들이 형이상학적으로 본질을 풀어내려 한 일이 논리학과 수사학 등이라면 내게 있어 생각과 세계에 대한 해석과 본질을 이야기하는 것은 글이다.
스스로 글이라고 부르고 싶은 텍스트를 생산하기도 하나, 글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타인들이 전율이나 카타르시스 따위의 단어를 말하며 극찬이라면 극찬을 보낸 <구회 말 투아웃>을 글이라고 부르고 싶다. 허나 선생님 앞에서 지은 시를 읊듯이 부끄러운 게 사실이다. 쪽팔리기 싫어서 양질의 텍스트를 생산하고자 했다. 노력했고 인정받는 모양이다.
텍스트를 글이라 부르는 일 자체는 오롯이 생산자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무릇 세상일이란, 인간살이란 제 뜻대로 생각대로 의지대로 풀리지 않는 법이다. 글이라 부르고 싶은 텍스트가 두들겨 맞을 때도 있고, 이건 뭐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하기도 힘든 텍스트가 박수를 받을 때도 있다. 이 과정에서 현실적 괴리감이 탄생한다. 나는, 글을 쓰고 있는가?
맹세컨대 내가 말하는 글이라는 것을 써보고자 손가락을 놀린 적은 없다. 그저 놀리고 놀리다 보니 글이라 부를 만한 것이 나왔을 뿐이다. 더 좋은 텍스트를 생산하고자 정진했지, 더 좋은 글을 쓰고자 노력한 것은 아니다. 텍스트와 글의 차이? 나는 단어들로 이루어진 문장의 모음을 텍스트라 부른다. 텍스트는 지극히 객관적인 단어며 중립적인 단어다. 글은 생산된 텍스트의 이차 형태로, 타인 혹은 생산자가 타당한 이유와 근거를 바탕으로 그 속성을 부여하는 일종의 관념적 단어다. 다분히 한 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는 단어다.
작가는 예술품의 제작자 중에서도 특히 소설가를 일컫는 말이다. 시를 잘 짓는 사람에게는 시인이라는 단어가, 수필로 일가를 이룬 사람에게는 수필가라는 말을 붙인다. 셋 모두 텍스트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같은 직업적 용어다. 이 직업을 얻는 난이도를 설명하자면 시인이 가장 쉽고 소설가가 다음이며 수필가가 되기가 제일 어렵다. 무도에서 검도창조의 순으로 습득의 난이도와 파괴력을 설명하는 것과 비슷 하달까. 시와 소설과 수필 중 무엇을 쓰기 가장 어려우냐 말하면 나는 시라 답한다. 시가 가장 어렵고 소설이 중간이며 수필이 제일 쉽다. 쉬운 것으로 인정받기는 힘들기에 예부터 수필로 성공하려면 일가를 이루어야 했는가 보다.
내가 생산하는 텍스트는 과연 어떠한 문학적 범주에 들어가는가. 이 부분은 솔직히 답하기가 무척 힘들다. 나는 심심풀이와 자위적 이유로 손가락을 놀리는 경우가 많다. 생산된 텍스트는 시도, 소설도, 수필도 아닌 어정쩡한 형태가 되곤 한다. <우리는 하루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을 기억한다.>가 그랬고 후에 생산된 텍스트들이 그러했다. 이를 신춘문예에 내다 꽂으면 심사위원들이 거들떠보기나 할까마는, 심사위원의 손에 쥐어진다면 할배들 머리가 무척 아플 것이라 믿는다. 이건 시도 아니고 수필도 아녀. 소설도 아니고 글도 아녀.
글이라는 단어를 판단하는 이성은 문예비평을 바탕으로 확립된다. 이성은 내가 생산한 텍스트가 결코 글이 될 수 없음을 부르짖으나, 감성은 그래도 가끔 글이라 부를 만한 텍스트가 있지 않느냐며 이성에 매달려 떼를 쓴다. 생산한 텍스트를 보면서 이것이 문예비평을 바탕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를 판단했을 때, 나는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대체 이게 무언지 나도 몰랐으니까. <구회 말 투아웃>과 <얼음마녀 이야기>가 그랬다. 소설이라기에는 생략된 도구가 너무나 많다. 둘 모두 서술에 적을 두었지 예술적 묘사를 곁들인 게 아니다. 꼭 말해보자면 소설 범주의 형식을 많이 따르고 있지만, 여전히 정의내리기는 힘들다. 그래서 쉽게 글이라 부르지를 못한다. 현재까지 확립된 할배들의 문학이론으로 공부했고, 공부한 사실을 바탕으로 내 텍스트를 객관적 시선에서 바라보았을 때 나는 답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이성적, 이론적 부분에서 글이라 부르지 못할 텍스트를 생산하는 나는 과연 글을 쓰고 있는가. 답할 수 없다. 이성은 여전히 아니라 말하나, 감성은 대답을 회피한다. 이전에는 스스로를 글쟁이라고 부르곤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생산한 텍스트 앞에 한 없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고 글쟁이를 대체할 만한 적당한 단어를 찾았다. 그지 깽깽이에서 깽깽이를 따왔다. 마침 늑대처럼 살아가고 싶기에 깽깽거리는 소리가 와 닿기도 했다. 나는 스스로를 글쟁이보다는 깽깽이라 소개한다. 글쟁이는 글을 재주로 삼아야 하는데, 나는 텍스트를 재주로 삼지 글을 재주로 삼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텍스터 따위의 신조어를 만들자니 그건 또 아니다 싶어 아직도 나 자신을 깽깽이라 부른다.
다시 작가란 무엇이냐. 성스럽게 느껴지는 절대적 단어 ‘글’을 쓰는 경지가 극에 달해 ‘예술’로 평가받는 이들이 작가라 믿는다. 이건 믿음이다. 종교에서 신을 믿는 행위와 비슷한 사고의 과정이기에 나는 믿음이라 표현한다. 예술이란 무엇이냐. 미의 창작 및 표현이다. 미는 무엇인가. 이것을 몰라 아직도 예술가들은 미학을 탐구하며 철학자마냥 예술을 위해 힘쓴다. 나는 그들처럼 숭고한 의지를 바탕으로 텍스트를 생산하지 못했다. 나는 예술을 하는 것도 예술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문예비평이론을 접한 후로는 단 한 번도 타인에게 나를 ‘작가’ 또는 ‘비평가’라 소개해 본 일이 없다. 이는 평생의 업으로 글을 선택한 이들에게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니 그렇게 드문 행동은 아니라 본다. 경지가 극에 달하기는 개뿔 부끄러움이 극에 달해 항상 쥐구멍이 있다면 대가리를 처박고 싶다. 에라이.
스스로를 작가라 표현하고, 자신의 텍스트를 소설이라 말하며, 글이라 부르는 이들을 만난다. 내가 만나는 많은 이들은 문단에 등단하지 않은 아마추어들이다. 친분이 깊은 것도 아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주저해왔다. 대체 당신네들이 왜 작가이며 소설가냐고. 개념을 아주 안드로메다에 처박는 것도 모자라 화장실 변기통에 넣고 물 내렸냐고. 아나 씨-발 그럼 세상에 개나 소나 전부 다 예술 하게? 니들이 부르는 글과 소설을 들고 세상 어느 곳에 찾아가도 오오 예술이다 찬양할 이는 아무도 없다고. 눈이 먼 봉사들에게 찾아가 왕 노릇을 하고 싶은 거냐고. 속에 천 번도 만 번도 넘게 삼켰다. 술자리에서는 뉴웨이브 문학을 업으로 삼은 자칭 ‘작가’들에게 퍼붓기도 했다. 이 양반들아. 당신들이 어디를 봐서 소설가고 작가냐.
자신이 생산한 텍스트를 글이라 부르는 일을 생산자의 몫이다. 하지만 이 일은 생산자 스스로가 자신의 텍스트가 예술의 목적으로 생산되었으며, 나는 예술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 때 사용할 수 있다. 예술은 타인이 평가한다. 지금 나의 텍스트가 먼 훗날 세월이 흘러 예술로 평가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그림이 예술이 되지는 않았다. 모든 음악이 예술이 되지는 않았다. 모든 글이 예술이 되지도 않았다.
나의 주장은 일구어 놓은 밭이라곤 쥐뿔도 없는 깽깽이의 지껄임이다. 하지만 스스로 작가랍시고 글을 생산한다고 떠들어대는 작자들의 작태를 보면 짜증이 솟구친다. 참을 인 세 개면 살인도 면하리라 했거늘 더 이상 참으면 내가 죽을 것 같아 내뱉어 본다. 이 초딩같은 양반들아, 자네들이 생산한 텍스트가 대체 어딜 봐서 시고, 소설이고, 수필이며 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자네들 스스로를 작가라 부르는고?
내가 절대 고통에 취해 정신이 나간 것은 아니다. 버뜨. 이 텍스트 역시 깽깽거리는 개소리임은 분명하다.
뱀발. 내가 하고자 하는 말들은 대부분 아래에 다 있으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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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구회 말 투아웃- 8. 자유 [6] 상병 김무준 2009/01/23 3 309
[연재] 구회 말 투아웃- 7. 바람소리 [11] 상병 김무준 2009/01/21 1 348
[연재] 구회 말 투아웃- 6. 동창회 [10] 상병 김무준 2009/01/19 1 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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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9:17:48
병장 구현회
무언가 가슴속이 시원해지는듯 하네요.
저도 종종 '자칭'예술가분들을 보며 혀를 차던 기억이..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웃음) 2009-02-11
02:42:49
병장 김용준
모...깽깽거리는 개소리임은 분명하다는 것은 알겠네요. 끌끌끌.
Ps. 무준씨의 불평?, 불만?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제가 이상한가요? 흐흐. 2009-02-11
02:53:38
병장 김무준
개소립니다. 2009-02-11
02:55:05
병장 정병훈
글쓴이가 개소리라고 말하는 이 텍스트에 가치는 무언가요?
개인적으로, 글, 작가, 문학등에 대한 가치관이 없던 제게 이 공간에서의 글생산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줬습니다. 수많은 글을 생산하면서 엄청나게 부족한 제 모습을 찾았고, 그로인해 미친듯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느꼈죠. 글은 아무나 쓰는게 아니고, 작가는 아무나 하는게 아니다.
저는 개인을 글쟁이라고 말은 하지만, 의미상으로 무준씨가 말하는 깽깽이와 이음동어일겝니다. 제제 작가라는 말은 너무나 먼 당신이기에,
그런 의미에서 모든 부분이 동감이지만, 석재씨의 글과의 관계는 잘 잡히지 않습니다. 2009-02-11
07:17:14
상병 김요셉
석재씨의 글과의 관계라기 보다는, '답변과 해명을 기다립니다.'라는 제 요청에 뜬금없이 무준씨만 나서 친절하게 답변을 해 주신 듯 합니다. 무준씨는 굳이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말이죠. 뱀발 밑에 참조로 달아주신 텍스트들과 그 외 그동안 꾸준히 생산해주신 글 들 속에서 충분히 답변해 오셨지 않나요. 하하.
'깽깽이'라는, 무준씨의 스스로에 대한 호칭이라거나 글 쓴다는 사람들이 자신의 글을 낮추어 부르는 부정적 어감의 대체명칭들은 어쩌면 글을 읽고 쓰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어떤 로망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생산해 낸 무엇보다 더 나은, 정말 글이라 불러야 할 만한 어떤 것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 혹은 사실 때문에, 정말 진짜배기 글을 위해서 자신이 생산해 낸 글은 그보다 훨씬 못한 것이라 미리 단정하고 낮추어 들어가는거지요. 그렇지 않나요. 저는 그래요. 저는 평생 가도 글 못씁니다. 흐흐흐 2009-02-11
08:36:09
병장 김민규
글이라는 지칭, 작가라는 호칭이 쉽게 쓰일 수 없음에 공감합니다. 포스트모던이고 탈가치이며 자기개성의 시대라지만 몰가치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한없이 부족하고 덜떨어지지만 그렇기에 시도하고 찾아보며 추구해야 할 것이겠지요. 자신의 한계에 대한 명확한 인정은 분명 필요한 일입니다.
개인적으로 뱀발은 없었던게 더 낫지 않나 싶습니다. 그것이 개념의 설명을 위한 주석이 아닌 이상에야, 꼭 그 권위에 기대어 말하는 것 같거든요. 순수하게 의견 자체로 논의되고 해석되어야 할 일입니다. 2009-02-11
09:03:30
상병 장형순
김민규//
"포스트모던이고 탈가치이며 자기개성의 시대라지만 몰가치가 될 수는 없습니다."에서 환호 한번 하고, "한없이 부족하고 덜떨어지지만 그렇기에 시도하고 찾아보며 추구해야 할 것이겠지요. 자신의 한계에 대한 무한한 연장은 분명 필요한 일입니다."라고 월리를 심어 봅니다. 2009-02-11
11:39:16
병장 김민규
형순/ 소인배의 제한적 사고를 무한히 확장시켜주시는 센스에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흐흐.
맥락을 생략하고 짧게 적으니 추구에의 의지가 단촐하게 쪼그라들고 말았군요. 개인적으로 자주 생각하는 주제인데, 자기 자신을 알고 그 한계를 인정할때라야만이 실질적 발전이 동반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실은 뭣도 아닌데 이미 자기 머릿속에서는 자뻑 프로이트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프로이트까지는 아니어도, 설령 내공을 좀 갖고 레벨이 좀 된다고 할 경우에도, 그것에 도취되어 자기를 객관화할 수 없다면, 다른 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래 인간이니까 완성형이 아니어도 좋으나 그런 의지마저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패배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뭐 그게 이 소인배의 자화상이라는 말은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아시리라 믿습니다. 흑 2009-02-11
13:00:27
병장 김도환
음...윗분들 댓글보다가 살짝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이건 정말 순수하게 몰라서 질문 드리는거니, 수고스러우시더라도 답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신의 레벨을 알고 있고, 자신의 글을 타인에게 내보일 어느정도의 가식과 겸손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자만은 하지 않으나 당당하게 보이는게 낫다고 생각하시나요? 전 요즘 이 문제로 머리 싸매고 있거든요. 2009-02-11
13:13:32
병장 김무준
설명 하기도 힘들군요. 요셉씨의 말대로 깽깽이는 짖고 또 짖었습니다. 설명조차 귀찮기에 어차피 보지도 않겠지만 악당 시리즈에서의 참고에 구회 말 투아웃 시리즈를 넣었습니다. 구회 말 투아웃 시리즈에서 한 편만이 답변에 해당할까 하다가, 깽깽이가 생각하는 글이란 이런 모습이다 대변하고 싶어 통 째로 해놓았습니다. 일일이 링크를 거는 법은 모르기에 그냥 던져놨습니다.
권위에의 해석? 적당히 합시다. 자꾸 권위니 귀족주의니 눈곱만큼의 상관관계도 없고 의도도 없는 부분을 섞어 깽깽이를 해석하려 든다면 그냥 사라지겠습니다. 2009-02-11
14:42:15
병장 김민규
답지않게 정색은. 근데 보는사람이 완벽한 오독과 오해를 하고 있다 해도, 그 개체수가 1이 아닌 이상은 생각해볼 여지야 있는 것 아닐까요. 뭐, 그놈의 귀족론, 도대체 실체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심심하면 붙잡고 늘어지기는 하는데, 저도 무척이나 신경쓰입니다만
정말로, 의도하지 않은 효과를 불러올 수 있음을 말하려 한 것 뿐입니다. 더군다나 배경지식이 깊지 못할수록 (사실은 그렇다면 의당 더 많은 배경을 알고 나서 논의에 임하는 것이 폭을 넓힐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겠으나, 그래서 무준씨는 일단 좀 읽어보고 이야기하라고 이야기한 것이지만, 옹박형님을 좋아하지 않는 소녀들이 모두 신화는 없다를 읽고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것처럼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기에) 무준씨 블루칩 리스트를 보면서 '아, 저 정도는 되어야 하는건가, 역시 난-' 하는 자격지심에 빠져들수 있다는 것이죠.
소사 홍석기나 소사 김예찬, 소사 김동욱의 개인적 발언이 반드시 개인적인 의미만을 지닐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로, 필진 김무준의 한 마디가 오늘 가입한 누군가보다 큰 영향력을 가질 것임은 굳이 강박적으로 부정해야 할 일은 아닌 듯 합니다. 차라리 그대를 향해 주어진 그 기대감으로 건설적 제안에 힘쓰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노선이야 그대의 판단의 몫이죠. 내글 폭주냐, 보론 폭탄이냐, 댓글의 과작이냐, 그 무엇이든간에요. 2009-02-11
15:01:50
병장 김민규
아참, 이 글에 달린 리플에 대한 감상만은 아닙니다. 책가지의 그 글에 남긴 리플과 연계해서 두들겼습니다. 2009-02-11
15:02:26
병장 김무준
무덤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는 군요. 조금씩 조용해 지는 걸 보니. 하암. 2009-02-11
15:09:44
병장 정병훈
개인적으로 끝을 정리하고 무덤으로 들어가길 바랍니다. 2009-02-11
15:47:09
상병 장형순
귀족이라 불리는 이유를 인정하고 부끄러워 하지 말라니깐요. 귀공자가 될 기회에요. '귀족론'에 대한 감상으로, 책가지에 있던 최도현님의 '나는 왜 클레에 열광 하는가.'에 발췌되어 있는 글을 다시 가져와 봅니다
“명예라는 말은 동시에 의무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 사회의 엘리트들이 국가를 지배하면 그 나라는 견고해질 것입니다. 최고 계층은 항상 자신의 명예에 대해 생각하며, 그 명예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때로 바람직하지 못한 때도 있을지 모르지만, 구성원들을 항상 굳건히 결합시키는 역할을 하며 나라를 견고하게 안정시킵니다. 그것은 정신적으로도 유익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더욱 유익하지요. 그러나 노예들, 즉 이 계층에 속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피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권리의 평등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처럼 실행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유익한 방향이지요. 그러나 모든 경험에 비추어 판단하건데 도처에서 (즉 유럽에서) 권리의 평등화가 이루어지면 동시에 명예심의 감소, 이에 따른 책임감의 감소가 생겼습니다. 이기주의가 이전의 공동체적 이념과 자리를 바꿨고, 모든 것이 개인의 개별적인 자유로 분해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개인의 자유를 느낀 사람들은 공동체적 의식이 없기 때문에 결국은 모든 사회의 결합력이 분실되었고, 그렇게 되니 모처럼 얻은 자신의 자유조차 지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귀족의 특성은 유럽의 귀족 정신과 다릅니다. 우리나라의 귀족 계층은 특권을 상실한 오늘날에도 명예와 상류 사회, 과학, 고상한 사상 등의 수호자라는 모습으로 이 시대 엘리트 계층으로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계층이 이미 개별적인 신분 계급의 테두리 안에 머무르지 않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이미 사상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 계층에 들어가는 문이 열려 있었지만, 이제 그 문을 완전히 개방할 시기가 온 것입니다. 명예와 학문, 용감한 행동 등의 분야에서 공을 세운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에서는 누구에게나 최고 계층의 한 사람이 될 권리를 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 계층은 저절로 이전 같은 특권을 가진 계급의 의미가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 이 시대 최고 엘리트들의 모임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 계층은 새로운 의미로, 아니 완전히 혁신된 면모로 계속해서 유지될 것입니다.” 그러자 공작이 언성을 높이면서 화를 냈다. “그렇게 되면 그게 무슨 귀족 계층이겠습니까? 당신이 구상하고 있는 것은 무슨 공제 조합원들의 비밀 모임 같은 것이지, 귀족 계층이 아닙니다.” (F.도스토예프스키, p.384, ≪미성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