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우리 집 강아지는 복슬 고양이  
상병 김무준   2009-01-16 12:18:30, 조회: 227, 추천:0 

그게 멋있는 줄 알았다. 복도를 걸으면 후배들이 허리 숙여 인사하고, 담배를 혓바닥에 비벼 끈 다음 침을 퉤 뱉어 기선을 제압하는 게 멋진 줄 알았다. 용이나 호랑이가 위엄 있게 상대를 노려보는 문신이 멋져 보였다. 남자라면 배때기에 칼 맞은 흉터정도는 있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가 아는 멋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폼에 살고 폼에 죽는 옛날 유행가처럼 살았다.

음. 형광등 하나가 나갔군.

사람들은 우리를 깡패나 양아치로 부르지만 건달과는 다르다. 자고로 건달이라 함은 자신의 소신이 있고 룰은 지키면서 살아가는 거다. 가끔 폭력적인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곤 하지만 이건 농사꾼이 낫을 들고, 어부가 그물을 드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우리 주먹으로 먹고 살아야하니까. 우리 밥 벌어 주는 건 주먹이고 멋이다. 어디를 가도 기죽으면 안 된다. 그건 내가 죽는 거다.

솔직히 잘나가는 조직의 잘나가는 건달은 아니다. 그래도 노력한다. 이십일 세기에 발맞추어 무식하게 주먹을 휘둘러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머리를 굴려야 사는 법이다. 옛날 책을 들고서 무위자연에 대해 생각한다. 음. 부드러움이 강함보다 낫지. 음. 그래. 세상 모든 것들은 쓸모가 있기 마련이야. 나처럼 그저 그런 건달도 있기에 세상이 잘 굴러가는 거다. 우리가 없으면 약국의 약사들은 어떻게 먹고 살고, 나이트의 사장들을 누가 지켜주나. 법이 지켜줄 수 없는 곳에 건달이 있다. 우리는 법을 대신해 동네를 수호하는 거다. 아무렴. 우리도 쓸모가 있기에 존재하는 거다.

삐걱- 사무실 문이 열린다.

행님예. 뭐하는교. 잉? 이기 므이고. 노… 노자… 뭐시깽? 뭔 만화가 이래 한자가 많노. 에이 보소. 햄요. 한자 적힌 만화보고 앉아 있다고 건달이 으데 똑똑해 빕니까. 한자 적힌 거 들고 있는다꼬 뭐 있어 보이는 줄 아나… 만고 만화책 본다꼬 큰행님 또 잔소리하지. 그냥 내랑 오락실이나 가입시다. 예? 아 괜찮은 데 하나 생겼다 아입니까. 어제 꿈에 돼지 나와스예.

무식한 놈. 채치충의 고전만화 시리즈다. 무릇 사람이 앞을 향해 더 나아가려면 스스로를 갈고 닦는 게 중요하다. 꿈에 족발 먹은 걸 돼지가 나온 걸로 해석하는 녀석을 보내버렸다. 보나마나 어제 큰형님께 수고비 받은 거 바다이야기인지 용궁이야기인지에 다 처박겠지. 그래도 개념은 있어 우리 구역 영업장에 가니까, 우리 식구 돈이다. 마당쇠 같은 놈. 돈 벌어다가 죄다 사행성 도박으로 날리니.

공부를 대충하면서 학교를 빼먹어가며 제일 바닥에서부터 시작했기에, 나는 나이에 비해서 경험이 제법 많은 편이었다. 팔년 째 건달 짓을 하고 있으니. 이 바닥 돌아가는 사정이야 대략 알고 있다. 건달이 사회에 기생해 사는 거라는 말. 어쩌면 맞을 지도 모르겠다. 근데, 내가 시작한 일은 아니다. 내가 나이트에 처 들어가 멀쩡한 가게를 뒤집고 보호비를 내놓으라 한 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예전부터 있었던 위험으로부터 구역을 수호하고, 그 대가를 받는다. 거기다 우리는 무이자 할부도 해주고, 다른 조직보다 싸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기름칠을 좀 해야겠는데.

내가 건달이 되기 전에도 건달들은 있었다. 건달은 내 직업이다. 다만 약간 불법적인 일을 하고, 불법적인 경로로 돈을 번다. 그렇지만 높으신 분들도 뇌물을 받고, 사람들을 쥐어짜잖아? 그 사람들은 합법적이니까 나쁘지 않고 우리는 폭력을 사용하면서 불법적이니까 나쁘다는 건 모순이다. 사람들은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는 걸 좋아한다.

어려운 글은 읽기가 힘들어 주로 만화를 자주 보는 편이다. 한자로만 된 책은 읽기가 힘들다. 그리고 그냥 책보다 만화가 재밌다. 채치충은 참 좋은 사람이다. 나 같은 건달도 고전을 공부하며 옛 성인들을 만날 수 있게 해주다니. 고개를 끄덕이며 길을 걷는데 무언가 나를 따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음? 요즘은 원한을 살 만한 짓을 한 게 없는데 누구지. 육감을 박박 긁는 녀석을 제압하려고 재빠르게 뒤로 돌았다.

뭐하는 새… 응? 아무도 없다. 내 나이 스물 둘. 숱한 전쟁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에헴. 육감 덕분이다. 슬슬 현역에서 물러날 때가 되었는지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는데 누군가 다리를 쓰다듬었다. 으아아악.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누가 내 몸을 만지는 건 정말 싫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게 뭐시깽? 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다리에 몸을 비비고 있다. 은퇴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고양이 한 마리에 흠칫거릴 정도면 이 바닥에서 물러나야지.

넌 뭐니. 꾀죄죄한 것이 도둑고양이구만 사람이 무섭지도 않나. 읏차. 녀석을 들어 올려 눈을 바라보는데 양 눈이 짝짝이다. 노랗고 파란 색으로 빛나고 있다. 오 신기한데? 눈이 짝짝이인 고양이도 있나? 녀석은 꼭 개처럼 혀를 내밀고 있다. 이 고양이 새-끼가 어딜 감히 건달에게 메롱을 날려. 녀석을 내려놓고 손을 탈탈 털었다. 부둣가의 비린내가 손에 붙어버렸다. 만화책을 둥그렇게 접어 겨드랑이에 끼고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짜식 험난한 삶을 살겠구나. 어딜 가나 외톨이는 외로운 법이다. 

녀석이 졸졸 내 뒤를 쫓아온다. 혀를 쭉 내밀고 따라오는 게 꼭 날 놀리는 것 같다. 아. 고양이 한 마리에 열 받는 건달이 되었다니 나도 다 죽었구나. 

인마. 가. 쉭. 쉭. 가라구. 얌마. 훠이. 워. 으베베. 앙. 자꾸 따라오면 사무실 빡구 한테 개밥으로 줘버린다. 따라오지 말라고. 에에? 안가? 이 엉아는 영도를 주름잡는 건달이란 말이다. 확 잡아다가 껍질을 쫙 벗겨서 소금 팍팍 뿌린 다음에 창자를 촥 뽑아다가 줄넘기를 하고 빡구 밥으로 줘버릴라. 어쭈? 그래도 따라온다 이거지?

부둣가에 쭈그리고 앉아서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녀석에게 연기를 내뿜었다. 후욱. 켈켈켈. 인마 그러게 따라오지 말랬지. 물끄러미 녀석을 바라보는데 왠지 옛날 생각이 났다. 가족도 갈 곳도 없는 외톨이. 중학생이 뭘 알겠냐마는 동네 건달들이 너무 멋져보여서 계속 따라갔다가 흠씬 두들겨 맞았다. 어린애가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맞았겠냐마는 나는 며칠을 따라다녔고, 깡이 좋다는 말과 함께 지금의 큰형님을 만났다. 그냥 멋져보였다. 형님의 넓은 등이, 당당한 걸음걸이가, 시원스러운 욕이 다 멋져보였다.

이 녀석도 내가 멋져 보이는 걸까. 하긴 이 동네에서 나만큼 멋진 건달은 없지. 고전을 읽으며 철학적 사고를 하는 건달이라. 캬. 얼마나 멋진가. 우리나라에 이런 건달이 또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주둥이를 뽑아버릴라. 녀석이 내 등을 보며 지난날 내가 그랬듯 무언가를 느낀 건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좀 기특한데?

녀석을 들어 옆구리에 끼고 동물병원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앞니가 빠져 혀가 계속 나와 있다는 건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거겠지. 기왕 데려가기로 마음먹었으면 춥고 아프고 배고픈 건 없어야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춥고 아프고 배고픈 건 안다. 고럼 고럼.
의사선생님은 아가씨였다. 호오. 의사아가씨가 되는 건가?

이거 영양실조 같은데요? 역시 애가 좀 배가 고파 보이더라고. 근데 이상한 게… 응? 뭐? 생긴 건 터키쉬 앙고라인데, 오드아이는 가끔 나올 수가 있거든요. 뭐? 오드 뭐? 오드아이요. 눈 양쪽 색깔이 다른. 아 그래? 병-신이 아니었던 거네? 그렇…죠. 이상한 건 검은 색 터키쉬 앙고라는 처음 봐요. 원래 얘들은 털이 흰색이거든요. 털도 길잖아요. 그래? 일단 영양제 챙겨 주시면서 밥 잘 먹이시면 영양실조는 해결 되겠는데… 털은. 음. 가끔씩 와주실래요? 몸에 이상이 있는 건지도 모르니까요. 그래. 근데 고양이가 왜 이렇게 더러워요? 주웠어. 네? 길에서 주워왔어. 걸어가는데 따라오더라고.

아가씨는 풉 하고 웃었다. 내가 그렇게 웃긴가? 하긴 건달이 옆구리에는 고전만화를 끼고 시커먼 고양이를 주워오니까 웃길 만도 하겠다. 근데 초면에 비웃는 건 실례지 않나? 아, 정말 현역에서 은퇴할 때가 온 건지도 모르겠다. 이래 뵈도 눈빛 한 방이면 허접 쓰레기들은 그냥 나가 떨어졌는데. 좋지 않다.

보기보다 좋은 분이시네요.

응? 이 아가씨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동물병원도 보호가 필요한가. 구역상으로는 우리 구역이니까 해 줄 수는 있는데. 하긴 내가 좀 좋은 놈이기는 하지. 나는 애들 패도 절대 면상은 깨질 않는다. 애들도 집에 가면 지네 식구가 있는데 죽빵 털려서 오면 얼마나 쪽팔리겠어. 파이프나 야구 빠따는 써도 사시미는 쓰질 않는다. 베인 상처 꿰면 아프잖아. 피 철철 나면 조금 무섭기도 하고.

그 후로 몇 번 동물병원을 오갔다. 고양이는 강아지로 부르기로 했다. 그게 뭔 해괴한 이름이냐고? 내 맘이다. 채치충으로 부르려다가 그러면 채치충씨가 너무 슬퍼할 것 같아 강아지로 지었다. 채치충은 발음하기도 힘들잖아. 채. 치. 충. 무슨 벌레 이름도 아니고. 녀석 하는 짓이 꼭 개 같아서 강아지라 부르기로 했다. 빡구는 하도 동네 개들을 후리고 다녀서 빡구라 지었는데, 개 같다고 개새-끼라 부르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녀석은 많이 건강해졌다. 털도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게 가끔 바리깡으로 고속도로를 내주고 싶을 정도로 예쁘다. 수컷이래서 땅콩 떼야 된다기에 땅콩도 떼 줬다. 솔직히 땅콩이 뭔지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졸지에 녀석은 불알도 없는 놈이 되어버렸다. 미안하다 아지야. 엉아가 대신 잘 돌봐주잖니. 배고파서 궁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렴.

하루는 우리 나와바리에 웬 핏덩이들이 몰려와 깽판을 부려서 한바탕 한 일이 있다. 대가리 같은 놈이 도망가기에 괘씸해서 쫓아갔더니 사시미를 빼 들었다. 이 씨-발라마가 어디서 개수작이야. 너 인마 그거 안 내려놓으면 피똥 싼다? 녀석은 무모하게 칼을 휘둘렀고 나는 녀석을 잡아다가 죽지 않을 정도만 때려줬다. 해치지 않아요. 내 생활신조다. 건달은 이유 없이 사람 패면 안 된다. 근데 정신 못 차리는 놈들은 좀 패야 된다. 그래서 팼다. 당분간 움직이면 아플 것 같아서 핏덩이 구역에 가서 상처를 핑계로 몇 푼 뜯어왔다. 나 쉬는 동안 우리 아지 사료 값은 있어야 하잖나.

강아지를 데리고 사료를 사러 동물병원에 갔다.

어디 다쳤어요? 뭐 그냥 좀 긁혔어. 좀 봐요. 꺄악. 이러고도 병원에 안 가면 어떡해요! 그냥 긁힌 건데… 수술. 수술해야 해요. 엥? 상처 봉합해야 한다고요. 에이, 귀찮게 뭐 하러 해. 여기 동물병원이잖아. 이래 뵈도 의사라고요. 동물 고치는 면허 있는 거지 사람 고치는 면허 있는 건 아니지 않아? 위급 상황 시에는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요! 아 나 안 해. 시끄러워요!

한 차례 씨름 끝에 결국 공짜로 꿰매기는 했다. 좀 아픈데 이 아가씨 돌팔이 아냐? 치료비를 주겠다하니 괜찮단다. 역시 이 아가씨도 뒤가 구리긴 구린 모양이다. 돈 받았는데 내가 신고하면 잡혀갈 테니까. 의사들도 야매 같은 불법적인 애들 많다던데. 역시. 뒤가 구린 거야.

왜 강아지랑 나한테 잘 해주냐고 물었다. 그러니까 좋은 사람 같아서란다. 아가씨도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 테다. 어딜 봐서 좋은 사람이라는 거야. 여자들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사람이랑 똑같이 아픔이나 슬픔, 외로움을 느끼는 데 그런 걸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란다. 뭐 아픈 사람 지나치는 건 의사가 할 짓이 아니라나?

모르겠다. 나는 가방끈도 짧고, 책을 많이 읽었다지만 건달일 뿐이다. 여자라고는 나이트에 일하는 여자들 밖에 모른다. 아가씨가 나한테 왜 잘해주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나 어릴 때 집을 나갔고, 아빠는 배 타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내게 사랑이 뭔지 가르쳐 준 사람은 없다. 큰 형님은 내게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 줬다. 그래서 배운 대로 살아가고 있다. 근데 아무도 사랑을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가만히 방에 앉아 뉴스를 틀었다. 강아지를 품에 안고 뉴스를 보다 강아지에 물었다. 야. 이게 사랑일까? 근데 그 아가씨는 의사고 나는 건달이잖아. 이게 진짜 사랑이면, 사랑해도 되는 걸까? 아 진짜 채치충씨는 왜 사랑에 대한 만화는 그리질 않는 거야.

스포츠 뉴스가 시작되었다.

오늘 저녁 롯데 자이언츠의 모 투수가 구회 말 투아웃 상황에서 무리하게 공을 잡다, 낙하 시 충격으로 목뼈가 부러져 중태에 빠졌습니다. 롯데 자이언츠는 이 날의 승리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되었지만 축포를 터뜨리지는 못했… 이게 뭐지? 어… 어…? 어? 응? 이러면 안 된다. 이건 아니다.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어, 나다. 진짜냐? 아니, 나도 뉴스보고 알았어. 어디야. 알았다.

아지를 옆구리에 끼고 집을 나서는데 이 새-끼가 내게 말을 걸었다. 병신이라고.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4:02:19 

 

병장 이우중 
  잘 읽었습니다. 
오쿠다 히데오의 닥터 이라부 시리즈 중 한 편이 생각나네요. 
'공중 그네' 수록작이었던가, 기억은 잘 나질 않지만 아무튼 그래요. 허허.. 2009-01-16
12:25:37
  

 

일병 송기화 
  음? 뭐죠, 이렇게 나오시면 또 이어질 것 같잖아요.(웃음) 
자꾸 기대하는 건 싫은데, 흐응. 2009-01-16
12:26:56
  

 

상병 김형태 
  하루에 하나씩 좍좍 잘 뽑아 주십니다.멋지세요 
이제 매일매일 기다리게 생겻군요 2009-01-16
12:36:07
  

 

병장 이동석 
  두둥- 
건달이 스물둘이라길래 음? 했는데 결국 연관이 있군요. 허허. 

아, 그리고 보니 채치충- 씨가 대만사람인가 그런데, 암튼 대만에도 궁을 무조건 가야하는 제도가 있어서, 궁에서 그린 사랑이야기- 정확히는 부부이야기-만화가 있답니다. 침상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손전등으로 비추면서 그렸다네요. 허허. 

간만에 듣는 이름이라 무지 반갑네요. 허허. 2009-01-16
12:37:38
 

 

상병 차종기 
  어엇- 연관이 있었어, 둘은 친구였나, 그나저나 글 중간중간에 있는 뭐시깽이 
자꾸 눈에 들어 오는 건 왜일까요 2009-01-16
13:33:08
  

 

병장 홍석기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사무실에 고이 모셔 둔, 녹차티백과 커피믹스는 삼 일째 돌아오지 않고 있다. 싸늘한 겨울. 녹차와 커피는 필수인데, 밑에 애들 싸그리 동원해서 먼지 하나까지 털어내어 봤어도 없다. 그것도 삼일째. 삼일이면 집 나간 고딩도 돌아온다는데. 

결국 그놈의 티백과 믹스를 사기 위해 길을 나섰다. 동네 아줌마들의 눈치가 예전같지 않다. 듣자하니 근처 숲에 있던 오두막이 박살 났다는 것이다. 경찰 조사에 의하면 TNT류의 폭발이라고 했단다. 지나가던 아줌마가 한 마디 한다, 어유, 무시라. 요즘은 폭탄까지 쓰나보네...어느새 우리 파와 라이벌파가 오두막에서 집단 난투극을 벌이다 우리 애들 중 하나가 TNT를 투척했다, 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이 사람들아, 누가 한적한 숲속에서 맞장을 뜨겠냐, 라고 반론하고 싶지만, 왠지 지금 분위기로는 먹혀들 것 같지 않았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니까. 

포기하고 사무실로 발걸음을 돌린다. 세상이 나를 제외한 채 회전하는 듯한 기분.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의 연속. 문득, 강아지가 보고 싶어졌다. 그 맑은 눈동자가. 그러한 상상을 하며 거리를 걷고 있는데, 누군가 

저기요 2009-01-16
13:41:09
  

 

일병 송기화 
  선생님, 말씀 좀 합시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웬 노인이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머리는 언제 감았는지 파뿌리 같고, 옷 입은 꼴은 몹시 남루해 흡사 거지꼴이었다. 그는 누군지 알 길이 없어 위아래로 노인을 살피다 잔뜩 경계하고 돌아서는데 노인이 이제는 옷자락을 잡고 다시 여보, 말씀 좀 합시다. 했다. 거칠게 손을 뿌리치고 왜 그러십니까, 노려보니 노인이 선생님, 선생님은 오늘 죽소. 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오늘 죽는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잠깐, 이거 어디에서 읽은 것 같은 내용인데? 
표절이다- 하루살이 표절이야- 

석기님이 시작하실 줄은 몰랐어요.(땀) 2009-01-16
13:57:59
  

 

병장 이우중 
  아니,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날 아주 홍어X으로 보는 거냐. 어린 애한테 해도 씨도 안 먹힐 소리를 지금 내게 하는 이유가 뭐냐. 정도의 의미를 가진 말을 논리정연하게 하려고 했는데 입에서 나오는 거라곤 나, 참, 아니, 허, 그게, 지금, 말도, 아니, 진짜, 하... 


그러자 노인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2009-01-16
14:29:08
  

 

일병 송기화 
  혹시 사회 유기체설이라고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사회는 마치 유기체와 같이 작용한다는 건데, 실은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진짜로 유기체인 겁니다.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 같나요? 그러니까 다시 한 번 설명하자면 사회 계약이고 뭐고 간에 이 사회는 자신의 의지, 뭐 거대하다면 거대한 의지겠죠. 아무튼 스스로가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환자분 같은 경우는 이 사회 구조 내부에서 존재할 의미가 없다. 정도의 판단 하에 사회에서... 말하자면 지워져 가는 겁니다. 네, 요새 그런 분들 좀 있는 것 같던데 말이죠. 이해가 되시나요 이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조금전엔 하루살이였다가 이번엔 서른네번째 남자라니. 마치 악몽같았다. 

하지만 노인의 말은 끝이 아니었다. 2009-01-16
14:36:00
  

 

일병 이상훈 
  "내가 무얼 좀 해보려고 하니 만냥만 꾸어주시기 바랍니다." 2009-01-16
15:03:59
  

 

병장 김민규 
  혼란에 빠졌다. 조선 시대도 아니고, 갑자기 만 냥이라니. 뭐 하는 사람이지? 노인은 내가 어리둥절할 사이도 없이, 주머니에서 내 지갑을 낚아채더니 만원짜리 두 장을 집어 냉큼 달아나는 것이었다. 

"아니, 만 냥이라며, 왜 두 장을 가져가는 거요?" 

아무리 건달이라지만, 상도덕은 있다. 예를 들자면 명절을 앞두고 구역을 돌 때는 미수금이 있어도 깽판은 치지 않는다든가, 정말 더럽게 없어보이는 종자들이 우리 땅바닥에 짱박아도 일단 며칠은 내버려 둔다거나 하는 것이 그렇다. 그런데 저 노인네, 돈 가져간 것도 황당한데, 만 냥이라고 해 놓고는 이만원을 냉큼 집지 않는가. 

"어, 만 냥은 뭘 좀 하는데 써야겠고, 만 냥은 밥 좀 먹읍시다. 내가 배가 고파서. 그럼 삼 년 후에 보겠소" 

하도 당당한 태도에 픽, 하고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저걸 포를 떠, 다구리를 놔? 바닥에 가래침을 퉤, 뱉고 소리를 빽 지르려는데, 이미 노인은 저 멀리 사라지고 없는 것이었다. 2009-01-16
15:15:05
  

 

병장 정병훈 
  이사람들 은근히 릴레이를 즐기는군요. 낄낄낄 이런 모순덩어리들- 2009-01-16
15:25:50
  

 

병장 김민규 
  그게 왜 모순덩어리죠? 2009-01-16
15:27:00
  

 

일병 송기화 
  노인은 사실 이 바닥에서 굴러먹을 데로 구른 베테랑이었다. 
손주네 집에 가는 길이 왜 그리도 복잡한 지 가는 버스를 몰라서 택시를 타고 가야겠는데 불쌍한 노인 좀 도와달라는 레파토리로 행인들에게서 조금씩 모은 돈으로 손주를 아는 집으로 이사시킨 것은 이미 전설이었다. 

언제까지나 비굴한 구걸 연기를 할 수는 없지. 하며 허생과 김선달을 롤 모델로 삼아 당당한 태도를 갖는, 이 바닥에서 알아주는 기인이었다. 2009-01-16
15:32:01
  

 

병장 이우중 
  그리고 노인은 결코 무리를 지어 작업하는 법이 없었다. 
지하철에서 장님 행세를 하며 앵벌이하던 할멈과 깔깔이, 그리고 아이까지- 의 비참한 죽음을 바로 옆에서 목격하고는 그런 집단에 소속되는 것에 정나미가 떨어져버린 까닭이었다. 

그래서 그는 활동 무대를 지하에서 지상으로 옮겼고, 소시민은 언제나 도전자를 비웃는다지만 그러고 보면 노인의 도전은 멋들어지게 성공한 셈이었다. 2009-01-16
16:36:20
  

 

병장 김민규 
  여기까지가 내가 알아낼 수 있었던 정보의 전부였다. 그나마도 막내 몇 녀석을 족쳐서 구역 안 삐끼들은 다 털어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분명 노인이 우리 구역을 마음대로 들락날락하며 영업을 하고 있는건 확실했는데, 정확히 무슨 사업들을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앵벌이 외에도, 삼천 원 짜리 밤까는 가위라든가 천원짜리 귀도리같이 별 얄구진 물건들을 파는 듯도 했고, 누구의 말로는 소매치기도 겸한다고 했지만, 그것이 전부인지, 다른 무엇이 더 있는지는 미궁이었다. 
내 지갑에서 이만 원을 털어간 것도 부족해서 구역 안 영업이라니, 해운대 박노자를 호구로 보나, 울화가 치밀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 정보원에게로부터 흥미로운 소식이 들어왔다. 
노인이 패밀리마트 앞에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온 몸에 각설이 분장을 한 채로, 꽹과리를 두들기면서. 2009-01-16
16:4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