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우리는 하루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을 기억한다.  
상병 김무준   2008-10-07 15:26:08, 조회: 394, 추천:5 

우리는 하루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을 기억한다.
-체사레 파베제

1.
도망치듯. 자리를 나와 걸어가는 길에는 비가 내렸다. 죽이는 날씨지. 바람에 떠밀리듯 걸어갔다. 담배를 입에 문다. 이걸로 마지막이야. 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간다. 비에 젖은 아스팔트가 새까맣게 물들어 있다. 후우. 길게 연기를 내 뿜으며 담뱃재를 떨어뜨린다. 붉게 타오르는 재 덩어리가 젖은 땅에 뒹군다. 아마도 치익이라는 소리가 들렸겠지. 후욱. 매캐한 담배연기가 속을 긁는다. 아니. 뿜어져 나오는 건 타버린 내 가슴이겠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스쳐 지나가는 차들. 건물들. 모두 나와는 눈곱만큼 상관관계도 없는 것들이다. 아아.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 함께 존재한다는 정도의 우연적 관계는 존재하겠지. 다만 그뿐. 나는 지금 이 도시에서, 철저히 외롭다. 그 누구도, 아무도 나를 생각지 않는다. 소외된 영혼이 갈 곳은 없다. 다만 머리가 기억하는 곳으로 잠시 걸어가고 있을 뿐. 결국 영혼이 갈 곳은 없다. 잃어버린 길에서 무엇을 찾는 들 찾을 수 있으랴.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지독하게 외롭다. 외롭다. 슬프고 다시 아프다. 아무렇지 않은 듯 일어서고 주저앉는다. 이것이 나의 삶이다. 이것이 내 삶의 방식임을 노래해 몸을 흔든다. 어둠이 녹아내리는 끈적이는 이 도시에서 외롭게 서성인다. 이 외로움마저도 사랑할 수 있을 듯한 외로운 밤이니까. 담배를 아스팔트에 던진다. 이 도시에도 담배가 필요하다. 지금 당장.

2.
후드를 눌러쓴다. 기다리는 버스는 끝내 오질 않는다. 비가 내린다. 밤하늘을 뒤덮은 비들이 아스라이 떨어져 내린다. 딱. 딱. 딱. 라이터에 불을 댕기지만 흩날리는 비바람에 불이 붙질 않는다. 다시 기다린다. 기어코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숙이 빨아 당긴다. 이게 담배지. 멈춰선 건물들의 시멘트 외벽이 시커멓게 젖어있다. 어둠 일지도. 비에 젖은 게 아니라 어둠에 젖어있는 게 분명하다. 씁쓸히 웃는다. 비를 머금은 옷이 계속 아래로 땅으로 힘없이 늘어진다. 기분 나쁘군. 비를, 비 내리는 날을, 비 내리는 어두운 밤을, 비 내리는 어두운 밤의 담배를, 비 내리는 어두운 밤의 담배와 그 비를 맞기 좋아하지만 젖어버리는 것은 싫다. 툭. 툭. 젖은 옷을 털어보지만 깊숙이 스며든 빗물이 그렇게 쉽게 떨어져 나갈 리가 없다. 알고 있어. 무의미한 행위를 두어 번 반복하다 담뱃재를 털어낸다. 쉽잖아. 삐딱하게 선 채로 저 어둠 너머를 바라보지만 버스의 불빛은 보이질 않는다. 생각한다. 어쩌면 지금 이 시간에 출발하는 버스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냥 기다려 봤어. 버스 따위 포기해버리고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한다. 철퍽. 물웅덩이를 피하지 못하고 발 한쪽을 빠뜨리고야 만다. 차갑다. 비는 분명 따뜻함을 아는데도, 이상하게 차가이 내린다. 차가울 밖에. 절반 쯤 피다 만 담배를 던져버린다. 날아간다. 손을 떠난 담배가 아주 천천히 어둠을 사르고 바닥으로 향한다. 하나 둘. 떨어져 내리는 빗물이 바닥을 향하는 담배의 몸뚱아리에 스며든다. 도시를 밝히던 작은 불꽃은 서서히 시나브로 사그라진다. 뒹군다. 후드를 벗고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쓸어 올린다. 후두둑. 저 바닥끝으로 물방울이 사정없이 제 몸을 투신한다. 다시 쓴다. 머리를 정리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정리된 것은 없다. 하나도. 생각이 가랑비처럼 옷자락에 스며들고 머리를 파고들었다. 필요하다.

3.
바다로 향했다. 모두에게는 그리운 어떤 장소가 있기 마련이다. 바다는 마음의 고향이다. 어릴 적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자랐기 때문일까. 산에서 자란 이는 산을 그리워하고 바다에서 자란 이는 바다를 그리워한다 했던가. 어느새 몸은 머리를 팽개치고 저만치 바다를 향해 달렸다. 지하철 출구를 벗어나 익숙한 거리를 걸었다.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이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하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가랑비. 흩날리는 가랑비일 것이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거리를 걷는다. 바다 향. 바다 향이 저만치 앞에서 쏟아진다. 길게 늘어진 수평선 위로 어두운 구름이 짙게 깔린다. 달빛은 이 어둠을 뚫지 못했다. 바람 따라 흔들리는 가로등 불빛만이 노랗게 타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백사장에는 대리석인지 시멘트인지 모를 물체가 깔렸다. 아무렴 어때. 익숙하게 길을 찾았고 자리로 향했다. 이름 모를 호텔 뒤편에는 몇 개의 벤치가 놓여 있다. 다시 담배를 꺼내 물고 바다를 바라본다. 조용한 파도소리가 바다를 적신다. 매번 앉는 자리에 같은 담배를 물고 다른 내가 앉아있다. 건물이 변하고 거리가 변하고 사람이 변해도 바다는 변함이 없다. 저 멀리 불을 켠 배들이 수평선을 오르내린다. 나는 혼자이지 않았다. 나는 홀로 앉아있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이 다이겠지.

4.
바다를 본다. 쓸려 내려간 모래가 다시 이 바다로 돌아오려면 수년의 세월이 걸릴까. 아니면 단 하루면 충분할까. 땅에서 마른 빗물이 하늘로 올라 다시 지상으로 내려오는 데에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고개를 젓는다. 이 비가 다시 바다로 내린다 해도 나는 담배 피는 법만 알고 있을 테니까.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3:56:07 

 

병장 주해성 
  어두운 밤의 담배로 요약될 수 있는 이노센트 블랙이라는 게임이 생각나는군요. 잘 읽었습니다. 2008-10-07
15:45:24
  

 

상병 김태환 
  그래도 금연합니다. 2008-10-07
16:21:10
  

 

병장 전승원 
  짧은 글이 마치 나레이션 처럼 머리에 박히는 군요. 한 문장 하나하나가 장면 하나하나씩을 상상하게 만들어 주고 있어요. 너무 잘 읽었습니다. 2008-10-07
16:26:34
  

 

병장 김태형 
  비..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와 닿네요. 

그리고 비 오기 전의 뜨듯하고 습함도 문득 생각나는군요. 
이미지의 표현이 잘 되어있어서 제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네요~ 

잘 봤습니다!! 2008-10-07
17:26:39
  

 

병장 윤한철 
  글을 읽으면서 글귀 하나하나가 눈앞에 
보이듯 하네요 

잘읽었습니다 2008-10-07
17:47:35
  

 

병장 이동석 
  방금 짐 자무시 <커피와 담배> 보는데 담배피고 싶어 죽는줄 알았더니, 
이 글도 담배를 당기게 하는군요. 

금연이 좋은건 한대쯤 펴도 상관없다는거지. 2008-10-07
20:24:34
 

 

상병 김무준 
  방금 더헉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본인이 쓴 글에도 추천이 가능하군요. 아 뻘쭘해라... 2008-10-07
20:44:26
  

 

병장 이동석 
  그렇다면 속죄의 의미로 좋은글 볼때마다 추천을 과감하게 해주세요. 허허. 2008-10-07
21:02:11
 

 

상병 김동욱 
  습한 우울, 담배의 로망이 듬뿍 들어나는군요 크크 2008-10-07
23:21:05
  

 

병장 고동기 
  아. 이거. 참. 담배 피우고 싶어지는 글이다. 2008-10-08
14:54:59
  

 

병장 이현송 
  담배를 피우지는 않지만 그 느낌을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좋아요. 2008-10-09
09:50:09
  

 

병장 문두환 
  누구나 책마을에 처음 얼굴을 나타내면 그가 좋은 글을 써도 조금은-묻히는 느낌이랄까요. 이제라도 저는 

가지로! 2009-01-11
15:07:45
  

 

병장 이동석 
  무준님은 언제나 뭔가 손해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우리는 갑자기 나타난 그의 새로운 언어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가지로-외치는 것도 잊어버렸습니다. 

가지로- 2009-01-12
21:1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