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우리는 깜빡이는 녹색불을 건너야 하는가.  
병장 정병훈   2008-12-28 21:12:33, 조회: 246, 추천:7 

                                                                        <글을 시작하기 앞서서>

1. 글의 길이가 생각보다 상당히 깁니다. A4 6매 정도의 분량인 만큼 긴 호흡을 갖고 읽길 권장합니다.

2. 글 속에 사용된 명사 하나 하나 트랙과 의미를 부여한다면 글이 살아납니다. 살아 있는 글을 보여달라는 몇 분이 있는데, 글은 제가 살리는 게 아니라 읽는 사람이 살리는거겠죠. 제겐 능력 밖의 일입니다. 

3. 단편으로 쓰던 글을 짧게 끝을 내느라 조금 엉성한 짜임이 보입니다. 글을 쓰면서 몇몇 장치를 심어 놓기도 하고, 몇가지 단어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혹시 뭔 글인가 하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 우리는 깜빡이는 녹색불을 건너야 하는가. *


고요한 밤과 어울리지 않게 거리는 밝다. 지하의 주점 계단을 올라온 나는 차가운 밤공기를 받으며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나의 숨은 눈앞에 연기로 보이고 연기는 어디서 불어온 바람에 흩날린다. 꽤나 차가운 밤바람이다. 도대체 얼마나 술을 먹은 걸까. 정신을 다잡아 보지만 이미 취한 정신은 다시 몽롱해 진다. 젠장. 

횡단보도 옆에 선 신호등이 말없이 녹색 불을 깜빡인다. 건너가야 할 것 같은데. 지금 건너지 않으면 다신 못 건널 것 같은데. 깜빡이는 신호등을 바라보며 걸어간다. 깜빡이는 속도는 일정하지만 신호등으로 걸어가는 내 두 다리는 점점 속도가 빨라진다. 어느새 뛰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지만, 이미 신호등의 녹색불은 빨간불로 변했고 신호등 속의 사람형상처럼 나는 횡단보도 앞에 섰다. 멍하니 빨간불로 변한 신호등을 바라본다. 신호등 안은 따뜻 하려나. 옷도 안 입은 것 같은데. 바람도 찬데 추워 보이네. 지금 무슨 소리 하고 있는 거야. 신호등 속의 인간 모형은 말이 없다. 입이 없으니 말을 못하는 거겠지. 크크큭-. 혼자 말하고 혼자 웃는다. 

주점 앞에서 불던 바람이 신호등 앞까지 불어 온 걸까. 찬 밤바람에 옷깃을 다잡는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걸어간다. 꽤나 먼 거리를 갔었네. 젠장.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거지. 술을 먹던 주점까지 걸어가며 혼잣말을 던진다. 받아주지 않는 말은 허공에 뿌려 지고, 신호등 앞에 대기하던 밤바람에 또다시 흩날린다. 

주머니 속에 쉬고 있던 손을 놀린다. 담배 깎을 꺼내 뚜껑을 열고 담배를 찾는다. 뭐야, 돛대잖아. 젠장. 한 개비 남은 담배를 들고 입술에 올려놓는다. 다시 손을 놀려 라이터를 찾아 불을 밝힌다. 라이터와 만난 담배는 잔잔한 소리와 함께 타 들어간다. 긴 숨으로 담배 연기를 들이 쉰다. 폐부 깊숙이 자리 잡은 온갖 잡념을 태워버리듯 담배가 타들어가고, 연기가 몸속을 휘젓는다. 모든 상념을 태운 찌꺼기인 마냥 연기를 허공에 뿜어낸다. 휴-. 긴 호흡과 함께 허공에 뿜어진 연기가 어느새 뒤 쫒아온 바람에 흩날린다. 어느새 담배 한 개비를 몽땅 태웠다. 담뱃불과 함께 사라진 듯한 잡념이 다시금 머릿속을 지배한다. 젠장. 밤바람이 차다. 주머니 속으로 도망 간 손을 뒤로 한 채 다리는 다시금 주점 앞으로 몸을 움직인다.

주점 안은 꽤나 시끌벅적하다. 내 나이 또래의 대학생들이 서로 다른 듯 비슷한 이유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물론 그 이유에 나도 포함 되겠지. 화장실 갔다 온다더니 왜 이렇게 오래 걸렸냐는 친구의 말을 무시하고 내 자리를 찾아 간다. 소파에 몸을 던진다. 휴. 뭘까. 담뱃불과 함께 타들어갔다고 생각하던 잡념이, 잡념이 타고 남은 재 같았던 연기가. 허공에 버려진 담배꽁초와 담배연기처럼 사라지지 않고 다시 내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건. 젠장. 기분 나쁘네. 이유를 알 수 없는 나는 그날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셨다. 그것이 그 당시 상황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소주와 어느 정도의 맥주. 이십대의 젊은이들은 알칼리 환원수가 포함되어 몸에 좋다는 선전 따위를 하는 알콜물을 흡수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신나게. 주거니 받거니 하던 소주잔과 맥주잔이 합쳐지고 몽롱하게 취한 정신은 지구 밖으로 던져 버렸다. 우주를 방황할 내 정신을 뒤로 한 채 글라스에 맥주를 붙는다. 소주를 섞어서. 그럴 때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던 덩어리는 금세 사라진 듯 느껴졌다.

정신없이 화장실을 왕래하고 냉장고 문을 대문처럼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할 때 쯤 눈이 떠진다. 어. 이거 눈감고도 잘 움직이네. 투시력이 있는 건가. 크흐흐-. 혼자 중얼거리며 웃음을 머금는다. 눈을 감았을 땐 느끼지 못했던 모든 통증들이 고통을 몰고 온다. 머리에는 강력한 편두통이, 복부는 위궤양이, 항문에는 치질의 모습이, 온몸에는 몽둥이찜질이. 골골골. 몸이 골골하다. 젠장. 술 한번 먹었는데 이거 몸이 안 딸아 주네. 난 아직 꽃다운 이십대라고, 몸양반. 소리쳐 봤자 집안은 아무도 없다.

내 몸인지라 내 몸 먼저 이상 유무를 확인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동안 가족의 모습 또한 한번 생각하지 않은 내 자신이 꽤나 대단하다. 아빠는 일을 나가고, 엄마도 일을 나가신다. 형은 한창 공부한다고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오늘도 똑같이 그렇게 지내고 있겠지. 생각하는 나는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고 다시금 내 몸 상태를 살핀다. 아이고. 골골골.

그러나 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상의 모습을 찾는다. 두통도 한결 나아지고, 속 쓰림 현상도 개운한 국물에 풀린다. 욱신욱신한 온몸도 몇 시간 만에 다시 젊음 그 자체로 돌아온다. 훗. 역시 이십대는 이십대야. 아직 죽지 않았어. 풉. 받아 주지 않는 혼잣말은 총총걸음으로 현관문을 열고 엘리베이터를 타러 걸어 나간다. 그나저나 어제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술은 왜 그렇게 많이 먹고, 돈은 또 왜 그렇게 많이 쓴 거야. 아이고. 무슨 부자라도 된다고 미쳤지. 

속이 풀린 뱃속은 그새 음식을 넣어달라고 소리친다. 걸음을 옮겨 냉장고 대문을 열고 우유와 식빵, 딸기잼을 꺼낸다. 식빵에 잼을 발라 우유와 대충 저녁밥을 먹은 후 아침에 온 신문을 펼쳐 든다. 아침에 온 신문을 저녁이 되어서야 읽다니.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별 생각 없이 신문을 펼친다. 경제, 정치, 사회, 스포츠, 연예. 대충 훓어 보지만 좋아진다거나 좋다는 내용의 기사를 찾긴 쉽지 않다. 경제는 점점 나빠지고, 정치는 그들끼리 치고 박고, 스포츠, 연예는 온갖 루머로 골머리를 썩는 것 같다. 간혹 사회의 훈훈한 이야기가 전해지곤 하지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람. 쳇. 별 껀덕지를 얻지 못한 나는 신문지를 접어 폐지함에 던져 넣는다.

거실에서 내 방으로 돌아와 언제나처럼 컴퓨터를 부팅 시키고 인터넷 화면과 메신저를 띄운다. 어김없이 쏟아지는 무수한 정보는 내 말초신경을 자극한다. 그러나 그러면 뭐해. 단지 정보일 뿐이다. 메신저에도 특별한 대화 내용 없이 안부정도 물어보는 인사치례만이 있을 뿐이다. 시답잖은 술 약속만이 생길 뿐, 그 밖의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술에 된통 당한 그날은 또 다른 약속이 생기질 않길 바라는 마음에 황급히 메신저를 끌려는 찰라. 

"이십대를 어떻게 생각해?"

뭔 헛소리야. 이십대. 이십대는 내가 이십대지. 이십대가 어떻냐고 지금 내게 네가 묻는 거야? 엑스박스를 찔러 죽일 기세의 화살표를 진정 시킨다. 이십대를 어떻게 생각 하냐는 친구 놈의 시답잖은 질문에 그래도 대답은 해 줘야 할 의무감에 답장 버튼을 누른다. 새로 띄어진 창은 나의 대답을 바라는 커서가 깜빡깜빡 인다. 나의 답은 무엇일까. 아니, 너의 답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적어도 생각 없이 물어볼 정도로 한가한 질문 같진 않았으니까.

"이십대는, 젊음과 열정. 패기의 종합체가 아닐까. 풉- 왜 그렇게 진지한 거야?"

그럴듯하군. 젊음과 열정, 패기. 꽤나 있어 보일 듯 한 얘기야. 내 이미지가 조금 좋아지겠지. 이러다 날 좋아하면 어쩌지. 훗. 그래. 네 말이 정답인거 같아. 정말 멋져. 내 스타일이야. 깔깔깔. 젠장. 이딴 혼잣말은 개나줘. 오랜 시간 답장이 오질 않았다. 금방 나가려고 했던 나는 혼자만의 머쓱함을 즐기고 있을 무렵, 그녀의 답장이 도착했다.

"젊음과 패기와 열정. 알겠어."

뭐야. 이런 찝찝한 듯 한 답장은 오랜만인데. 뭔가 물어봐 주길 원하고 있어. 멋쟁이로 보이는 것은 둘째 치고 이건 뻔 한 얘기한 네 녀석에 대한 콧방귀를 담고 있는 듯 하잖아. 우상은 물론 이건 정말 개나주라는 듯 한 답장인걸. 휴. 

"하하하. 그냥 보편적으론 그렇다는 거야. 글쎄,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 건. 조금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아?"

째깍째깍. 시간은 흘러가지만, 답장이 없다. 이건 뭔가 실망을 해도 크게 실망을 한 게 분명해. 쪽지를 새로 다시 보내 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것만큼 구질구질하고 소심해 보이는 모습 또한 없기 때문에 다시금 엑스박스를 표적으로 화살표를 옮겼다. 딸-. 마우스를 누른 상태에서 그녀의 답장이 왔다.

"이상한 걸까. 내가 이십대이고, 네가 이십대인데. 이십대가 무엇인지 물어보는 게 이상한 걸까. 초등학생이 무엇이고, 중학생 고등학생이 무엇이고, 넓게는 인간이란 무엇이고, 좁게는 나란 사람은 무엇일까 생각하는 게 이상한 걸까. 문득 생각이 나서. 물어 본거야. 혹시나 해서."

"그럼 그렇게 고민이 많은 네 의견은 어떤 거야."

"글쎄 나도 아직 잘 모르겠어. 우린 어디서도 이십대란 무엇이다라는 걸 배우지 못했으니까. 적어도 초등학생 때는 초등학생이 무엇인지, 어떤 건지 뭘 해야 되는지 뭘 바라보며 가야되는지는 쉽게 배우고 알 수 있었잖아. 그 외에 다른 것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이상해. 지금은 그냥 답답해.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그래, 덩어리야. 덩어리 같아. 근데 그 덩어리가 뭔지 모르겠어."

"아. 고민이 많구나. 갑자기 나도 궁금해지는걸. 나도 생각해 볼게. 뭔지 발견하면 우리 서로 알려주자."

쳇. 얼른 도망쳐야지. 그게 뭐라고. 이십대가 뭐든 내가 무슨 상관이야. 얘가 얼굴은 반질반질 귀엽다만, 생각하는 건 아주 애늙은이였구나. 더 얘기 했다가는 내가 이상해지겠는걸. 아유. 얼른 대화를 끝낸 나는 메신저의 머리에 위치한 엑스박스를 화살표로 겨냥해 충격을 가한다. 이내 움푹 페인 엑스박스는 사라지고 메신저는 죽는다.

뭐야. 완전 찝찝하잖아. 그냥 확 꺼버렸어야 하는 건데. 괜히 있어 보이려고 얘기하다가 기분만 찝찝하네. 이십대고 뭐고, 이젠 할 게 없네. 뭐라도 해야 될 것 같은데 뭘 해야 하려나. 좀 전의 혼잣말이 열어 두고 간 현관문 사이로 찬 밤공기가 들어오는 걸 이제야 느낀다. 뭐야. 혼잣말이 손이 달렸나. 문을 열고 다니고. 으하하. 나날이 늘어가는 유머 감각에 감탄할 틈도 없이 반사적으로 옷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검은 나이키 트레이닝 바지에. 검은색 오리털 잠바. 검은색 MBL모자를 눌러 쓰고 신발장 앞에 섰다. 신발장 문을 열어 신발을 쭉 훑어본다. 손은 이미 검은색 코르테즈에 가 있지만 말이다. 신발을 거머쥔 손이 신발을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발을 신발 속에 안착 시키고 문을 닫고 복도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다가선다. 

공기가 낯설지 않다. 이십년 동안 살아오면서 느꼈던 매 년 그날의 그 공기향이다. 숨을 크게 들이 쉬어 본다. 스흡-, 파. 헛 참. 질소 70%, 이산화탄소 10%, 산소 7%, 아르곤 3% 그 외의 여러 가지 화학물로 이뤄진 공기가 향기를 갖고 있다니. 그것도 매년, 매달, 매주, 매일, 매시, 매분, 매초 그 향기가 바뀐다는 게, 아니. 그것이 언젠가 맡아 본 향기라는 것이. 아니. 그 향을 통해 뭔가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일전에 읽은 적이 있던 것 같은데. 추억을 기억하는 공기. 훗. 어째껀 밤공기가 차갑다. 주머니를 찾아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손을 뒤로하고 어디로 걸어가는지 모르는 내 다리는 움직인다.

수많은 자동차들이 거리를 내달리고, 수많은 가게가 즐비한 공간을 가로질러 내가 걸어가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을 가로질러, 흐르는 시간을 바탕으로 다리를 움직인다. 앞으로 직진한다. 계속 앞으로 직진한다. 그러다 길이 막히면 그대로 돌아간다. 돌아가다 같은 길이 나오면 우회전을 한다. 왜. 우린 오른쪽이 좋은 쪽이라 배웠기 때문에. 오른쪽으로 직진한다. 다시 직진하다 횡단보도가 나오면 건너지 않고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 걸어간다. 몇 개의 횡단보도. 몇 개의 신호등을 지나친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어디로 걸어가고 있는 걸까. 여긴 어디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시간은 12시를 가리키려 하고, 눈앞엔 한적한 도시의 밤거리가 보였다. 그 많던 사람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많던 자동차도 모습을 감췄다. 네온사인으로 밝게 빛나던 거리의 모습 또한 보이지 않는다. 사라진 사람과, 시간 속에 나는 적잖이 당황 했다. 뭐야, 정신없이 걷다 보니 얼마나 걸었는지, 어딘지도 모르겠네. 참나. 술 먹지도 않았는데, 정신 놓고 다니네. 거리는 한적하고 4차선 도로 가장자리로 듬성듬성 가로수가 심어져 있다. 가로수 보다 듬성듬성 가로등이 새워져 있고, 거리는 검은 색의 밤빛에 가로등의 오렌지 빛이 합쳐져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길은 곧게 뻗어 있고, 몇 개의 횡단보도와 신호등만이 눈앞에 보일 뿐이다. 

차도 사람도 없다. 나와 가로수와 가로등만이 그 거리에 서 있다. 쳇. 시간이 이렇게 됐나. 12시 정도면 사람들이 잘 걸어 다니지 않긴 하지만, 오늘은 유난히 많이 걸어 다니지 않는 게 이상할 뿐, 그 이상의 생각도 없다. 목적 없이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가기 위해 돌아 서 걸어간다. 

한참을 걸어갔을까. 익숙한 공기에 적잖이 당황을 한다. 언젠가 맡아 본 듯한 느낌의 공기. 뭐, 언젠가 맡아본 공기 따위 생각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춥기도 하고, 얼른 집에 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다. 한참을 걸어가는데, 눈앞에 신호등과 횡단보도가 보인다.

자동차용 신호등은 빨간불에서 녹색불로 이동하기 위해 노란불이 켜져 있다. 사람용 신호등은 자동차용 신호등이 녹색불이 켜짐과 동시에 녹색불이 들어왔다. 뭐야. 차도 없고, 사람도 없는데. 신호등 아저씨 혼자 일하고 있잖아. 그런다고 돈 더주나. 쉬엄쉬엄 하세요. 크크큭. 되지도 않는 혼잣말에 실소를 머금고 계속 걸어간다. 두세 발쯤 걸어갔을 때 쯤, 신호등의 녹색 불이 깜빡 깜빡 거린다. 

깜빡 깜빡 깜빡.

뭐지. 신호등의 깜빡임은 일정하지만 내 발은 무엇에 이끌리는 듯 점점 빨라지더니, 어느새 저 멀리 서있는 신호등을, 바닥에 눌려 있는 횡단보도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를 하고 있다. 잠깐. 지금 뭐하는 거야. 신호등은 그 다음에도 녹색 불을 밝힌다고. 이봐. 왜, 뭐 때문에 그렇게 뛰어 가는거야. 본인에게 물어 봤자 대답이 없는 건 당연하다. 그대로 전력 질주로 조금씩 신호등과의 거리를 좁혀 나간다. 깜빡깜빡

그래. 어제 술을 먹고 미친 듯이 달렸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땐 건너지 못했잖아. 이렇게 뛴다고 건널 수 있을까. 그때도 못 건넜는데 지금 뛴다고 건널 수 있을까. 근데 뭣 때문에 뛰는 거야. 그깟 신호등 조금 기다리면 다시 녹색불은 켜지는데. 알 수가 없었다. 어떠한 동기도 느낄 수 없는 신호등 따위에 내 두 다리가 미친 듯 움직이다니 말이다. 얼른 합리화를 시켜야 했다. 그래. 젊음의 패기와 열정. 메신저에서 그녀와 나눴던 얘기를 끌어와 시답잖은 이유를 만들었다. 모르겠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과 젊음의 패기와 열정이 무슨 상관관계를 갖는지 알 수 없지만, 그것 밖에 이유가 없는 걸 한탄할 여유까진 내게 없었다. 

미친 듯한 뜀박질 덕분인지 이번엔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기 전에 횡단보도에 도착했다. 숨을 고를 시간도 없이 횡단보도를 다시 전력질주 했다. 이제 이 횡단보도만 지나면, 미친 듯 뛰어서 신호등 앞까지 오고,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던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참이다. 흰색과 회색의 굵은 직선이 연속해서 나열 된 횡단보도를 성큼성큼 건너가고 있었다. 그래. 건너가고 있었다. 건너가고 있었는데. 

신호등은 어느새 빨간 불로 바뀌어 있었다고 한다. 교통사고였다고 한다. 나는 뺑소니차에 치여 나뒹굴었고 차는 도주했다고 한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신호등을 급하게 건너려고 했을까. 깜빡이는 녹색불이 무엇 이길래 내게 동기부여를 한 것인가. 멈춰서 기다릴 필요는 없었을까. 숨 돌릴 시간조차 없었을까. 갖가지 생각이 들지만, 이미 몸속에 갇힌 생각은 슬프다. 뺑소니 사고 때문에 전신 마비를 갖게 된 나는 생각하지만 움직일 수 없다. 이것이 내가 그토록 바라던 모습일까. 

메신저로 이십대에 대해 물어보던 친구는 정신병원에 들어갔다고 한다. 자꾸만 이상한 소리를 하기 때문이라는데, 그게 이십대에 대한 물음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이십대에 대해 물어 보는 게 이상한 것인가 하는 또 다른 물음이 생긴다. 그게 이상한 것일까 하는 것 말이다. 어째껀 그녀는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녀의 덩어리에 관한 이야기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얘기가 되었다.

그날이 있은 후로 내 가슴속에도 덩어리가 살기 시작했다. 아. 물론 그 덩어리는 원래부터 덩어리라고 불리진 않았다. 얘기하자면 길겠지만, 간단히 가슴속의 어떤 답답한 것을 통틀어 말한 게 덩어리이다. 언제부터 생겨난 건진 알 수 없지만, 어떤 짓을 해도 이 덩어리는 떨어지질 않았다. 덩어리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어떤 날은 이 덩어리라 불리는 놈이 혹시 암은 아닐까도 생각해 봤다. 그래. 모든 부위에 암은 생길 수 있는 거라고 배웠잖아. 내 정신에도 암이 생긴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정신암’이라 불러야 하나. 크크큭- 실없는 혼잣말에 다시금 실소를 내뿜는다. 하지만 금세 웃음을 멈춘다. 사실은 꽤나 진지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는 그때 나름대로의 덩어리가 있었던 걸로 생각한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이 덩어리는 꽤나 커졌고, 이십대가 된 지금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덩어리는 분명 좀 더 단단해지고 거대해졌다. 그렇다고 조기 발견을 통해 제거할 수 있는 것 또한 아니었으며, 이 덩어리를 성장하게 한 원동력 또한 발견할 수 없었다. 

의사는 경추 신경이 눌려서 얼굴의 잔신경과 경추 이하의 모든 신경이 마비가 되었다고 했다. 눌린 신경은 잘린 신경과는 다르게 조금의, 아주 희박한 재생률을 보인다고 했다. 몇 천명 중에 신경이 되 살아나거나, 간단한 움직임 정도는 할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된 사람도 보인다고 했다. 이 작은 희망에 내 남은 삶의 전부를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은 우울해 지기도 하지만, 왠지 그 모든 것에 응어리 져 있던 덩어리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아, 물론 그렇게 단단하게 굳어있던 덩어리가 모두 사라지진 않았지만, 조금은 유화 된 거 같다는 얘기다. 물론 덩어리의 크기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그 덩어리가 작아진 것 같다고 느끼는 것 조차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른다. 

이십대의 덩어리는 다시 삼십대의 덩어리가 될 것이고 삼십대의 덩어리는 사십대의 덩어리가 될 것이고. 오십 육십 칠십대의 덩어리가 될 것이다. 살아가면서 몇 번의 신호등을 건너가게 될 것이고, 몇 번의 교통사로를 당하고, 몇 가지의 작은 희망에 목숨을 걸기도 할 것이다. 미친 듯 한 이야기가 하나의 진리가 될 것이고, 어떤 작은 일에도 힘쓰며, 앞으로 나가길 바랄 것이다. 담배가 생각날 때가, 제자리에 쪼그려 앉고 싶을 때가, 아무 생각 없이 술을 먹고 싶을 때가, 정신을 놔버리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어떤 것에서도 이유를 찾지 못할 때가 있을 것이고,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이유를 찾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알 수 없다. 그것에 대한 아무것도. 그 어떤 것에 대한 어떠한 이유도.

나는 재활 치료에 힘썼다. 그녀를 만나 물어 볼 것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물어 보고 싶어 하는 그것이다. 나보다 몸이 편한 당신이 그녀를 만나 답을 전해 줄 것을 바라도 될까.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20:10:49 

 

상병 김지웅 
  음 읽느라 진뺏네요, 그냥 한마디하죠, 
이 한마디가 답일수도? 아닐수도, 그건 병훈님이 판단하는거겟죠? 후후 

웰컴, 2008-12-28
21:45:20
  

 

병장 정병훈 
  /지웅 
웰컴 투 마을. 읽느라 진 빼게 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으허. 이런 글을 쓰는게 요샌 재밌네요. 답을 말씀하시는데, 혹시 위에 대한 답을 말씀하시는건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 답이란것이 웰컴이란것이라면. 음-. (복잡) 어째서 웰컴인지- 

신호등과 횡단보도. 오른쪽. 덩어리. 이십대. 정도가 키워드가 되겠습니다. 거기에 깜빡이는 불과 신문 메신저 등이 소소하게 쓰였구요. 뭔 소린가 하는 분도 있을지 모르지만, 글을 쓸때 이것들을 생각하며 썼다는 얘기입니다. 의미부여 까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2008-12-29
12:12:02
  

 

병장 김민규 
  드디어 내 안에 사는 불의 정체를 알았군요. 정신암-이었어요. 이십대의 덩어리로군요. 망할 녀석 2008-12-29
12:29:23
  

 

병장 김민규 
  찬바람 부는 2008년의 막바지, 오늘따라 유난히 이놈의 덩어리는 단단하게 굳어져 저의 모든 회로를 마비시키고 있어요. 이건 유망주가 키르키즈스탄의 비스켓인지 비시켓인지로 오후 두시 비행기로 떠나기때문도 아니고, 어제 ex와 아무렇지도 않게 통화하다 전화기를 집어 던져버렸기때문도 아니예요. 말그대로 정신암-입니다. 2008-12-29
12:31:16
  

 

병장 정병훈 
  추천은 뭐밍. 풉- 
이 글에 대해서도 얘기 하고 싶은게 몇 가지 있긴 했는데, 다들 이렇게 토해내 주지 않으니 민규형이랑 놀아야겠군요. 히히 2008-12-30
13:45:28
  

 

병장 김민규 
  조회수랑 추천은 꾸준히 올라가는 것 같은데, 왜이렇게 다들 말씀들이 없으신지. 쓰면서 좀 시원해지는 듯 하다가 다시 고독해지는 순간이라고 할까요. 흑흑 2008-12-30
13:59:09
  

 

상병 김요셉 
  덩어리. 
저는 언젠가, 그것을 덩어리라 하지 않고 '구멍'이라 한 적이 있는데 말이죠. 찬바람이 솔솔 들어와 시리디 시린, 가슴 한 구석에서부터 시작해 점점 커져서 심장을 몸통을 정신을 한 사람을 모두 집어삼키고는, 마침내 도시를 한 '시대'를 통째로 집어삼켜버리는 구멍. 

그러니까, 그게 - 그 구멍이란것들 들여다 보던 때는 아주아주 외로울 적이였고, 외로운건 그때나 지금이나 별 다를 바 없으나 

왠지 참 좋은데요 이거. 병훈님 부탁 때문에서라도, 그녀를 만나 답을 전해 주려면 재활 치료에 힘써야지요. 흐흐 2008-12-30
14:27:51
  

 

병장 정병훈 
  음, 그래요. 다들 가슴속에 하나씩 같고 있더군요. 저는 그것을 '덩어리'라 불렀고, 민규씨는 그것을 '불'이라 불렀고, 요셉씨는 그것을 '구멍'이라 부르는. 
결국 우리는 모두 '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 거란게 핵심이라 생각합니다. 음. 구멍도 괜찮은 소재 같은데요? 그거 제게 파시겠습니까?(웃음) 나중에 한번 써보던가 해야겠군요. 

그 외의 자세한 얘기는 쪽지로 보내드립니다. 찾아가는 서비스. 정막장 2008-12-30
19:13:16
  

 

상병 김용준 
  먼저 진심으로 방깁니다. 하하하. 

음...저는 먼저 '목적 없이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가기 위해 돌아서 걸어간다. ' 이 부분이 유난히 눈에 띄더라고요. 흠...모랄까? 목적 없이 걸어온 길에의한 후회 정도랄까요? 그리고...이 글 읽으면서 뜨끔하더군요...제가 친구들에게 '20대는 무엇이라고 생각해?'이런 류의 질문을 툭툭 내뱉곤 했거든요. 사람들은 몰 진지하게 생각하냐, 애늙은이, 그저그런 답을 말하곤 했죠. '덩어리'...전 그냥 마음병으로 규정했거든요. 몸과 마음이 아프고 힘드니까 이런 생각이 드는구나...해서요. 그런데 이 글을 보니 마음병이라고 보기는 힘든거 같아요. 아,,,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네요. 역시 병인가요? 후후. 

Ps. '몇 번의 교통사로를 당하고'에서 교통사고겠죠? 하하하. 저도 쩜 찾아와주세요! 후후. 2008-12-31
11:06:34
  

 

병장 정병훈 
  PS. 방깁니다. -> 반깁니다 겠죠? 하하하. 

개인적으로 용준님의 글 읽기 방식은 제가 좋아하는 방식과 비슷합니다. 적어도 저는 문학작가진 않지만 그런 장치를 숨겨 놓고 싶은 욕망을 감출수가 없어 이것저것 설치를 하는데, 그걸 찾으려고 하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몇몇 분들은 결국 병이라고 하더군요. 
정신암이라는 표현이 꽤나 괜찮은 표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2008-12-31
16:20:27
  

 

상병 김용준 
  너무 급하게 Boss의 눈치를 보며 쓰느라...크헉- 그렇습니까? 후후. 저는 글을 쓴 작가의 의도와 생각을 찾고 싶어서입니다. 대부분의 작가분들이 자신의 의도와 생각을 넌지시 던지지만 정작 찾는 사람은 별로 없거든요. 그냥 읽고말뿐...(제 주위에는요.) 그래서 더욱 더 찾고 싶어하는지도 몰라요.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싶다라고 해야하나요? 후후. 욕심쟁이 같군요. 

음...역시 병인가요? 히히. 2009-01-02
09:34:13
  

 

병장 정병훈 
  이건 추천이 7개인 이유가 뭡니까. 2009-01-06
10:0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