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에헤라 디야
병장 김무준 2009-03-09 14:37:49, 조회: 135, 추천:0
가운데에 말을 놓고 왼쪽에 실을 다시 오른쪽에 실을 묶어 아래 마음을 받친다. 가운데에 있는 말을 줄이고 또 줄여 마음을 바탕으로 한 글자를 올리면 사모할 련戀이라. 좌사우사중언하심左?右?中言下心으로 마음을 전했다는 고사는 지금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마음 심心위에 말씀 언言을 적고 양 옆에 적을 사?를 붙여두고 사모할 련戀이라 부른 것은 글자 그대로 세상 수많은 단어 중 고르고 또 고른 소중한 단어를 만들기 위함이었을까.
스물한 해를 살아오는 동안 많고 많은 여인네를 만나왔다. 이 여복女福이 어디서 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거기다 여복女福이 여복艶福이었으니 그야 말로 복이었다. 스치면 미남이라는 말은 종종 들었지만 거울을 봐도 이 얼굴이 잘생긴 얼굴은 아니다. 그렇다고 집안에 돈이 많다거나 능력이 출중해 여인이 따르는 건 더욱 아니었다. 아무리 여인네 마음은 갈대라지만 바람도 없는 데 흔들리는 갈대가 어디 있겠는가.
무튼 남자라는 게 본능에 충실한 짐승인지라 까닭 없이 주변에 미인이 따르면 개념을 놓기 마련이다. 아가씨가 무엇 때문에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지 추측하는 과정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본인도 모르는 매력이 있는 건 아닌지 거울을 들여다본다. 허나 답을 찾을 수 있으랴. 당장 거울에 비친 모습에서도 답이 나오질 않는데. 미인이 따르는 현상이 자신의 매력 덕분이 아니라 말 그대로 복이라는 걸 깨닫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무릇 유능한 사냥꾼이라면 먹잇감을 어떻게 잡을 수 있는가보다는, 과연 본인의 능력으로 잡을 수 있는 표적인지 확인부터 할 테다. 남녀가 만나고 정을 나누는 과정을 어찌 사냥에 비유하겠냐마는 그냥 그렇다고 해두자. 이 잡을 수 있냐 없냐의 문제를 고민하다보면 잊기 십상인 것이 있으니, 과연 잡을 마음이 있냐하는 거다. 의意가 있어야 행行할 수 있고, 행해야 취取할 수 있다는 명제는 오랜 세월 입증된 진리다. 만고불변의 법칙. 뭐 그런 거.
외로워도 슬퍼도 시린 옆구리를 채우는데 마음에도 없는 여인네를 품에 둔들 그게 해결될 수 있을까. 가끔 연애가 하고파지면 여인네들을 두루 살펴보며 꼭 확인하는 것이 있으니 마음을 줄 수 있냐는 거다. 아무리 곁에 두고 매일을 본들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오죽했으면 오스카 와일드가 “남자란 그가 어떤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한 어떤 여자와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비꼬았을까.
마음을 고백했던 이들과는 거의 항상 연애를 할 수 있었다. 세상에, 삶에 진정한 애愛란 오직 하나라는 말에 공감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 사람이 그 유일한 하나를 쉽게 찾을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찾고, 찾고 또 찾았다. 이 마음이라는 놈이 참 간사해서 이 아가씨를 만날 때도 없으면 죽을 것 같고, 저 아가씨를 만날 때도 미칠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다반사. 슬프게도 굳게 믿었던 마음은 매번 깨어져왔다.
모든 남자가 늑대일 리는 없겠지만, 스스로 늑대가 되고 싶어 발버둥치기 때문일까. 이따금 달을 보면 괜히 지나간 여인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추억이라는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으면 자연스레 자신에게 물음을 던진다. 마음을 고백했던 모든 이들을 과연, 정말로, 사모思慕했었는지.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네들을 그리워함을 보면 응당 그러했노라고 답할 수 있겠지만.
오늘도 그런 날이다. 저 달에 시린 마음을 비추어 그리운 이들의 얼굴을 다시 가슴에 새기고 보면 깎여나간 마음 사이로 사모했던 혹은 사모하는 이들의 얼굴이 새겨져 있음을 확인케 되지만. 떨어져나간 가슴 조각이 땅바닥에 뒹굴면 그제야 널브러진, 흩어진 마음을 밟고 서있음을 발견한다. 외로움과 고독에 쓸쓸한 밤바람을 맞는다. 조용히 눈빛을 빛내며 달을 바라본들 늑대가 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말이다.
한사람, 한사람 마음의 방으로 찾아가 그리움을 선물하고 나면 모두들 필요도 없는 외로움을 한 덩이씩 안겨준다. 에이, 이런 거 필요 없으니 어허 넣어두라고 손사래를 쳐도 순방巡房을 끝내면 슬픈 부자가 되어있다. 항상 그리움은 외로움이, 외로움은 슬픔이 됨을 알기에 사양하고 또 사양했거늘. 여인네들은 마음속에 방을 빌려놓고 지배인에게 쓸쓸한 외로움을 방세삼아 지불하는 모양이다.
그러다 때때로. 슬픔과 아픔과 그리움과 외로움과 쓸쓸함이 사은품처럼 줄줄이 딸려오는 날에는 그 무게에 짓눌려 땅바닥에 철썩 깔리고 만다. 이런 젠장. 버둥거려도 빠져나올 수 없다. 바위처럼 쌓인 감정의 탑 아래서 씁쓸히 외친다.
진정한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면, 사랑했던 적 없었다면, 어쩌면.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9:19:55
병장 손정훈
Corea New shcool 제비쓰딸 탄생이군요. 켈켈켈.
여복이 여난이 될지 그대로 복이될지 모른다더라두요. 난이 안되길 항상 바랍니다. 복 많은 분들은요 2009-03-09
14:58:33
상병 윤경석
오늘따라 햇살에 몸을 내주고 앉아서 담배피는데 괜히 쓸쓸해지고 몸이 축 늘어지는게.. 쩝.. 그저 흐르는 바람 따라 내 마음도 흐르는거 같고- 뭉쳐서 뿜어나오다가 흐트러지는 담배 연기처럼 처음처럼 굳건한 마음도 흐트러지는거 같고.. 괜히 쓸쓸하다..?
근데 왜이렇게 난 여복이 없지..? 나도 너처럼 호감형인데..(울상) 2009-03-09
15:03:22
병장 김무준
꺄하하하하하. 요즘 니가 웃을 일을 많이 만들어 주는구만. 봄바람이 폐에 슝슝 들락거려서 허파에 바람이 찼나보지. 글쎄다, 스스로 호감형이라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그럴 땐 그냥 담배나 피는 게 최고지. 2009-03-09
15:08:49
상병 차종기
흐응 , 에헤라 디야 , 2009-03-09
15:28:26
상병 김치곤
왠지 어디선가 들었던 구절이 생각납니다. 아마 라디오에서 들었던 것 같은데...
여자의 마음은 단칸방과 같아서 그 속에 연인을 들였다가 이별하면 내보내고
남자의 마음은 호텔과 같아서 그 속에 연인들을 하나 하나 넣어놓는다나요.
어째서 옛기억을 돌아보면 외로움만 쌓여가는지 모르겠습니다(한숨)
[일상이야기] 테스터스초이스
병장 김무준 2009-03-13 00:06:38, 조회: 256, 추천:0
후배는 타로 점을 핑계로 깽깽이에게 고민을 상담해왔다. 깽깽이는 복채로 라면을 받아 챙기며 아주 친절히 장장 이십 분 동안 고민을 들어줬다. 워낙에 후배의 고민을 잘 알고 있기에 주로 깽깽이가 말하고 후배가 듣는 입장이었지만. 어디 상담이라는 것이 상대에게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놔야 하는 것이던가. 그래도 연애를 많이 해봤다면 해본지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요지는 마음이 흔들리는 만큼 상대에게 최선을 다하라는 거였다. 그렇게 이러쿵저러쿵 연애에 관한 잡담을 나누다, 깽깽이의 예를 들어주며 옛 연인이야기가 나왔다. 엄. 그러니까. 그 아가씨에게는 굉장히 아프고 슬픈 기억으로 남았을지도 모르지만, 깽깽이에게는 감사하고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는 추억이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받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 어디 흔한 일인가. 아가씨는 시원시원하고 털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고등학교 일학년 때부터 이유도 없이 깽깽이와 친해졌다. 믿기지 않겠지만 깽깽이는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다. 특히 이성에게는 더 심했기에 친하게 지내는 아가씨가 별로 없었다. 그래도 아가씨가 따르는 건 지난 잡설에서 지껄인 여복 따위라 해두자. 이유야 어찌되었건 아가씨와 깽깽이는 우정을 나눴다. 이성 사이에 우정이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 회의주의자지만, 그 때는 정말 남자와 여자 사이에도 우정이 존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들판에 뒹구는 양 마냥 순진했다고 하자.
그러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천재지변이 발생하는데, 그저 친구로만 생각했던 이 아가씨가 깽깽이에게 마음을 고백해오는 사태가 벌어졌다. 사실 처음만난 그 날부터 깽깽이를 짝사랑해왔다나? 오. 이런 지쟈스 크라이스트. 아가씨는 이목구비도 뚜렷하고 생각은 열려 있었으며 행동에는 거침이 없는데다 몸매까지 죽여주는 완벽에 가까운 여인네였다. 문제는 남자보는 눈이 없다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연애를 시작했다고 생각한다면 자그마치 경기도 오산이다. 깽깽이에게는 이미 다른 아가씨가 있었으니까. 그 곱고 아리따운 마음 사뿐히 즈려 밟아주기에는 뭣해서, 여인네들이 주로 써먹는 방법을 택했다. 친구가 좋겠다는 잔인한 소리. 아아, 이 핑계에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으니 상대에게는 희망을 심어줄 수 있으나 후에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게다. 어쩌겠나. 친구로는 더없이 좋은 사람이었는데, 양다리를 걸칠 정도로 양심에 털 난건 아니었으니까. 서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적정선을 찾아 타협했다 둘러대련다.
만나던 여인네와 이별한 뒤, 추운 어느 겨울. 아가씨는 다시 깽깽이에게 마음을 고백했다. 엉엉. 슬퍼라. 꼬박 이년을 짝사랑했단다. 아리땁고 쭉쭉빵빵한 아가씨가 이년을 깽깽이만 바라봤단다! 어쩌란 말이냐 흩어진 이 마음을. 깽깽이는 이번에도 아가씨의 마음을 돌려보냈다. 다른 아가씨를 만나기에는 이별의 상처와 떠나간 이가 너무도 컸으니까.
아가씨는 울면서 이제 자기를 봐주면 안 되느냐 물었다. 깽깽이의 마음에 살고 있는 그녀가 죽도록 부럽고 밉다는 말과 함께. 지금 생각해보면 참 못할 짓이었지만 깽깽이는 아가씨를 달래줄 수 있어도, 받아줄 수는 없었다. 마음에도 없는 아가씨를 받아주는 건, 그 마음을 매몰차게 거절하는 일보다 더욱 잔인한 일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다 몇 달 지나 중국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중국 맥주는 싼데다 도수까지 높다. 칭다오 맥주에 고량주를 섞어 폭탄주를 해먹고는 어째 저째 기분 좋게 취해 호텔을 누비고 있었다. 학생신분으로 일탈이 무슨 말이냐고 묻지는 말라. 우리는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도의 중국어를 할 수 있었고, 착한 중국인들께서는 싼 값에 술을 제공했으니까. 타국에서의 음주니 위법은 아니지 않나? 아님 말고.
반쯤 눈이 풀려 호텔을 돌아다니는데 아가씨에게 잡혀 들어갔다. 잡혀간 게 맞다. 다른 여자들이랑 술 먹었으면서 자기랑은 한 잔 안하냐고 묻는데, 차마 양심에 찔려 거절하지는 못하겠더라. 술김에 아가씨를 어째 해보려는 개수작은 절대 품지 않았다. 짐승을 자처하는 깽깽이라도 그 정도로 굶주리지는 않았다. 어이 자네, 거기 돌멩이는 내려놓지. 일상이야기라고!
다른 커플과 함께 술을 마시다 이야기를 나누고자 방을 나왔다. 잡혀갔으니 탈출한 거라고 해두자. 죽을 만큼 피곤했고, 술은 취했고, 잠은 오는데, 이야기는 들어줘야겠고, 깽깽이는 아가씨의 눈물에 약하니. 호텔 복도에 앉아 달을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깽깽이의 팔에 dd 감겨오며, 눈물을 흘리는 아가씨가 밑도 끝도 없이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엄청나게 피곤했고, 술은 취했다. 시끄러워 죽겠는데 차마 손으로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건 너무 잔인하니까. 그래서 입으로 입을 막았다. 더헙. 그게 더 잔인한 일이라고? 그냥 취해서 그랬다고 해두자. 술 취한 남녀가 어두침침한 복도에서, 방으로 들어가 자네들이 상상하는 므흣한 행위를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고. 피 끓는 청춘… 미안하다. 이쯤하자.
깽깽이는 무려 아가씨를 번쩍 들어 방에다 데려다주었다. 술에 취했는데 그게 되냐고? 그냥 그렇다고 해두자고! 쨌든 침대에 눕혀주고 떠나려는데 이 아가씨가 선수다. 목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당했다. 에, 므흣한 소설이 목적은 아니니 여기까지만 이야기하자. 그리고 며칠 뒤 학교로 돌아왔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다.
개념은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린 개념을 찾으러 떠날 동석철도 구구구는 없었으므로 책임을 져야만 했다. 깽깽이는 도시적이고도 양심적인 남성이었기에 책임을 졌다. 아가씨의 친구가 호텔방에서 실시간 라이브로 깽깽이와 아가씨의 애정을 목격했는데, 책임을 지지 않으면 쉽게 말해 머리만 달랑 남겨놓고 화단에 심어질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회상은 이쯤에서 끝내자. 그 시절 깽깽이는 정말 사랑받았다. 돌이켜 보건데 깽깽이가 사랑하지 않는 이에게 그토록 깊은 사랑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아가씨는 그저 깽깽이의 자는. 아니지. 조는 모습을 보고도 행복을 느낄 정도였다. 으헤헤. 지금 생각해봐도 참으로 많이 사랑받았다. 그랬다는 거다. 그러나 우리는 이별했다. 이유인즉슨 깽깽이의 자유를 아가씨가 옭아매려 했기 때문이다. 깽깽이는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자유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늑대 같은 삶을 꿈꾸는 이에게 구속은 곧 죽음이었으니까.
이별 뒤, 깽깽이는 아가씨에게 남은 정마저 떼려 잔인하게 노력했다. 잔인해졌다. 눈물로 매달리는 아가씨를 매몰차게 떠나보냈다. 적어도, 그것이 이별에 대한 예의라고 믿었으니까. 아가씨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음에, 우리의 우정이 결국 영원한 것이 아니었음에 슬프고 또 슬펐다. 항상 미안했지만 결코 깽깽이의 속마음이나 미안함을 말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흐른 뒤. 미안함을 이야기했고,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은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
후배의 상담을 끝내고 자리에 누워 과거를 회상했다. 누군가에게 깊게 사랑받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서로 사랑하지 않음에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수많은 이별을 경험하고 나서야, 아아. 만약 그 때 아가씨에게 마음을 주었더라면 행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고민해본다. 고민해본들 버스는 이미 떠났고, 누구도 오지 않는 정류장에 쓸쓸히 남아있을 뿐이지만.
아가씨가 대학에 진학하고 날로 아름다워지기에 이런 상상을 하는 건 아니다. 결코. 절대. 정말. 진짜. 네버. 깽깽이는 차갑고도 시크한 도시남성이니까. 흘러간 만남에 후회하지 않는다. 그것이 스스로의 선택이었기에. 어떠한 결과가 따르건 선택의 끝에 주어지는 결과는 오롯이 본인이 감당해야 할 부분이다. 다시 이렇게 사랑받을 수 없을지라도. 후회는 없다.
지금 만나는 우리 아가씨가 깽깽이의 이런 짓거리를 본다면 아마도 쌍 싸다구를 왕복으로 박태환 마냥 후려갈겨줄 지도 모르겠다. 뭐 어떤가. 남자들끼리 이야기인데. 그래도 한줄기 남은 양심은 있어 이별을 준비하고는 있지만.
왠지 연애를 하고 또 하면서, 철없던 시절의 순수함을 잃어가는 요즘이다. 만남의 과정에 돈과 시간을 따지게 되었고, 상대가 나를 얼마만큼 사랑하나 나도 모르게 재어보고 있다. 그 때는. 글자 그대로의 사랑을 주거나 받거나 하곤 했는데. 이제는 사랑의 크기를 재려한다. 사랑은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닌데도. 사람들은 사랑을 하면서도 비교하고, 흔들리고, 이별한다.
과거는 결코 돌아갈 수 없기에 추억이 되곤 한다. 추억을 곱씹으며 밤을 보낸다. 그래, 그럴 때도 있었지. 하지만 후회는 없다. 우정이든 사랑이든 선택지는 무수히 많다. 수십 개가 넘는 선택지 중에 하나를 골랐을 뿐이다. 결과가 슬프든 힘겹든 모두 감내해야할 것들이다. 최선의 선택을 했었기에 후회하지 않는다. 누구도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돌아가고 싶을 때는, 달을 보면 된다. 그리고. 앞으로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뱀발. 일박이일 찍고 왔습니다. 배 아파 죽겠습니다. 그래도, 얼굴에 떡칠하는 마지막 밤이었기에 비를 맞으며 공사로 돌아오면서도 실실 웃었습니다. 예. 갈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뱀발 둘. 드래곤라자 3,4,5를 구입. 목표로 한 전질 구매까지 앞으로 세권!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9:20:11
병장 박장건
사람마다 연애에 관련된 내용은 다들 진심 하나쯤은 품고 있는 것 같네요. 클클..오오, 드래곤 라자~..괜찮은 선택입니다. 하핫 2009-03-13
00:54:01
병장 김동균
경기도 오산이구만유 -
낄낄
제게는 유망주가 있어요
아주 참하고 아리따운 유망주가
흐흐 2009-03-13
01:47:08
이병 이지우
아~아아 사랑받고 싶어라 2009-03-13
04:20:09
상병 송형근
커피이야기인줄 알았어요. 전 맥심이 더 좋아요. 응?(땀땀)
[얼개] 내일을 위하여
병장 김무준 2009-03-28 19:09:12, 조회: 222, 추천:0
평소 문학을 자주 소비하는 편은 아니다. 최근에 읽은 것들 이래봐야 김미월의 <서울 동굴 가이드>, 원재훈의 <모닝커피>, 기욤 뮈소의 <사랑하기 때문에>,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 박민규의 <카스테라>, 무라카미 류의 <러브&팝> 정도. 소설을 읽을 때는 보통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다. 마지막으로 읽은 것이 무라카미 류의 <러브&팝>. 일본의 원조교제와 원조교제를 통해 변화를 겪는 고2 소녀의 이야기였다.
문학을 소비하며 소름이 돋는 감각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던가. 김미월과 원재훈, 박민규의 소설에서도 느낄 수 없던 희열을 느꼈다. 짜릿한 무언가가 온 몸으로 퍼져가는 느낌. 오쿠다 히데오를 통해 일문학에 좀 더 개방적인 자세를 갖게 되었지만, 한국의 현대문학에서 느낄 수 없던 것을 일문학에서 느낄 수 있었으니 굉장한 아이러니였다.
그러다 문학이라는 단어를 가만히 머리로 그려보았다. 새로이 생성되는 텍스트는 개인의 사고와 사유에 의해 생산되고, 이는 읽는 이를 통해 문학으로 다시 태어나곤 한다. 문학은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에 의해 탄생하는 것이기에, 현대문학이라 일컬어지는 텍스트들은 현실을 오롯이 반영하기 마련이다. 무엇이 현대문학임을 명확히 제시할 수는 없지만, 최근 읽은 것들 중 다수가 이론을 통해 학습한 현대문학의 특징을 갖고 있었다. <서울 동굴 가이드>와 <카스테라>그리고 <러브&팝>이 그랬다. 책상에 앉아 <러브&팝>의 마지막장을 덮고는, 텍스트에 반영된 현실을 글쟁이의 눈을 빌려 바라보며 문학의 본질을 유추해봤다. 과연 문학이란 무엇인가.
대부분의 식자들은 현상을 풀어내는 표현과 그 방식 자체를 통해 텍스트의 객관적, 이론적 미를 판단한다. 세대를 거치며 확립된 일정한 미美를 할배들은 문학의 예술성이라 말한다. 그럼 그렇게 아름답지 못한 텍스트는 문학일 수 없을까. 모든 텍스트는 타인을 통해 문학으로 재탄생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문학이란 생산자를 넘어 타인을 통해 텍스트를 초월한 새로운 산물로 재탄생한다고 여긴다. 읽은 이가 텍스트에서 미美 즉,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문학이 아닐까.
어떠한 현상은 인간에 의해 현상 그 자체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변하고, 소설가는 이 현상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텍스트를 사용해 아름답게 표현하려한다. 독자는 생산된 텍스트를 읽고 소설가의 눈을 통해 현상을 바라보게 되며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하나의 현상은 두 번 정도의 해체를 겪게 되는데, 독자가 텍스트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이 평가에 따라 텍스트의 문학성이 부여되는 것이라 믿는다. 글쟁이가 바라본 현상에 대한 해석이, 텍스트를 통해 타인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문학이리라.
어쨌거나 이러한 주관적인 소견을 떠나 문학이라 인정받는 텍스트든 아니든, 구색을 갖춘 현대텍스트가 추구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현실의 반영이다. 소설가는 소설을 쓰면서 현상을 주관적 혹은 객관적으로 해석하고 타인에게 대화를 시도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당신은 어떻소?’랄까. 독서는 글쓴이와의 대화고, 최근 읽은 세 권의 현대문학으로 세 사람과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현실과 문학에 대해 해골을 굴려봤다.
김미월은 <서울 동굴 가이드>를 통해 혼자가 되어가는 청춘들을, 박민규는 <카스테라>로 사회의 현실과 젊은이들의 흔들리는 자아를, 무라카미 류는 <러브&팝>으로 원조교제와 청년들에 대한 물음을 그렸던 모양이다. 그렇게 느꼈으니까. 세 사람의 눈을 통해 본 한국과 일본의 현실은 그다지 썩 아름답지 못했다. 자본과 현실에 꿈을 상실하고 흔들리며 방황하는 젊은 세대를 볼 수 있었다. 김미월이 해석한 청춘은 ‘고립’이었고, 박민규가 해석한 청춘은 ‘방황’이었으며 무라카미 류가 해석한 청춘은 ‘상실’이었다.
세 소설가는 소설이라는 텍스트의 형태로 자신들이 파악한 현실에 대해 물음을 던졌다. 무라카미 류의 문제제기는 일본사회에 던지는 것이었을 테지만 우리네 현실과도 비교적 맞아떨어진다. 나름대로 청춘에 대해 <구회 말 투아웃>이라는 조잡한 텍스트로 의견을 제시해 두었지만 세 사람의 물음에 대한 답은 여전히 어려웠다. 아직 제대로 된 답을 찾지 못했으니까. 현상을 파악하기는 했는데 이 제시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다시금 텍스트를 생산해야할까? 아니면 고개를 돌려 내가 가진 목표를 향해 아무렇지 않듯 살아가야 할까? 아니면 변화를 꾀해야할까?
사실 답은 결정해두었다. 앞으로 몇 년간 우리세대가 처한 현실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정했으니까. 몇몇 이들과 함께 우리가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소통의 장을 마련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를 위해 잡문을 책으로 만들어보기로 결정했고, 실행에 옮기는 중이다. 이제는 자기만족의 목적에서 조금 더 나아가서, 우리 밥그릇을 찾는 행동을 해보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문학의 예술성과 문제제기 사이의 갭에 대해 고찰해 보았는데, 과연 ‘나’라는 주체를 통해 해석한 현상을 타인에게 보여주며 예술적 미美를 추구해야하냐는 것이었다. 박민규의 <카스테라>를 보며 굉장히 답답했다. 하도 주변에서 박민규 박민규 노래를 불러대기에 한국문학의 희망이 대체 무언지 확인코자 소설을 읽었는데, 이 텍스트 자체가 학문적으로 아름답고도 충격적일 수는 있을지언정 과연 많은 이들에게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느냐는 물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난해했다. 소설은 시가 아니다. 산문이라는 보통의 문장을 통해 일구어지는 것이 소설이라면, 지나치게 비유적으로 전달하려는 바를 숨길 필요가 있을까.
원태연 시인은 비슷한 고민을 했던 모양이다. 결국 그는 학계와 문인들 사이에서 인정받지 못했고, 아직도 시인이라는 직업을 얻지 못했다. 박민규가 포스트 모더니즘적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을 때, 경제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고 이십대는 팔십-팔 만원 세대가 되어버렸으며 청년들은 꿈을 상실케 되었다. 예술이 밥 먹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예술도 결국 인간이 존재하고, 인간이 여유를 가질 때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당장 먹고 살기가 급급해졌는데, 소수를 위한 예술이 날로 아름다움을 더해간다면 그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일까. 이 예술론이 다분히 왼쪽으로 치우치게 보일지는 몰라도.
소위 인정받는 현대문학이 직설적으로 문제에 접근한 경우는 보지 못했다. 박민규의 소설이 평단과 학계의 찬사를 받고 각종 문예지에서 다루어졌던들 열 사람을 붙잡고, 박민규라는 소설가를 알고 그의 소설을 읽어보았냐고 묻는다면 몇 명이 그렇다고 답할까. 결국 문학은 더욱 외로워지고 있는 게 아닐까. 문학이라는 것. 이제까지 문학이라 불려오던 것 말이다. 이 땅에서의 문학. 입시와 할배들에 의해 학문화된 문학은.
문제제기 따위는 학자들에게 맡겨도 된다고 지껄이는 글쟁이가 있다면, 이봐 그러지 말고 이리 와서 엿이나 처먹지 그래? 라고 답해주고 싶다. 때로 사람들은 이성적 외침에 이끌리기보다 감성적 호소에 고개를 끄덕이는 경우도 있다. 텍스트를 통해 대중을 움직이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함께 대화해보자 외치고 싶기는 하다. 우리세대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당신들도 이십대였던 때가 있지 않느냐고.
어떻게 우리의 문제를 이야기해야할까. 별로 배운 것 없는 머리로는 소통을 이끌어낼 자신이 없다. 우석훈씨처럼 각종 통계가 포함된 세련된 어조로 말할 수도 없고, 박민규처럼 예술적이라 평가받는 텍스트로 대화를 시도할 수도 없다. 하지만 나는 글쟁이로 살고 싶다. 글쟁이는 글로 말해야한다. 문학도도 아닌, 글처럼 보이는 텍스트를 생산하는 허접한 깽깽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손가락을 놀리는 것 밖에 없다. 그리고 이 잡다한 텍스트들이 타인을 통해 내가 생각하는 문학과 같은 무언가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밖으로 나가 차디찬 현실과 마주하게 되더라도, 나의 텍스트를 통해 누군가 다시 일어서고 나아갈 수 있기를. 황야를 향해 떠나간 늑대들처럼 고독을 씹으며 나는 늑대들을 따르려한다. 주인을 따르는 개가 아니라 현실과 싸우는 늑대가 되기 위해, 오늘을 산다. 그리고 내일을 살아갈 것이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9:20:56
병장 김무준
부득이하게 책마당에 텍스트를 게시하게 되었습니다. 게시물 이동이 가능하면 내글/후기로 옮겨주셨으면 합니다. 2009-03-28
19:17:00
병장 김민규
문득 얼개들을 연재게시판의 <앞으로의 논의>에 함께 묶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사실은 시즌2에서 먼저 읽고 왔는데, 다시 읽어도 절절합니다.
'현실이 초현실보다 더 허구같고, 죽음이 삶보다 더 삶 같은 미친 현실의 초현실속에서, 우리의 언어가 시대를 경청하고 그것에 맞서며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서 리듬을 타고'(김승희, 서강대 국문과 교수) 달리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꿈꾸며 외치고 싶습니다. 이 허구로 가득찬 fake leverage 금융경제의 몰락은 진정으로 필연적으로 예정되었던 수순이 아닌가 싶군요. 떠들어댑시다. 시끄럽게 한번 짖어봅시다. 황야로 나아가 거친 목소리로 그르렁대며, 모래바람과 맞서 그 너머의 꿈을 향해봅시다.
워우- 2009-03-28
19:40:13
병장 이지훈
헛. 댓글은 쉽사리 달아지는 건가요? 잘 봤습니다. 오호 시즌2에도 올라와 있는건가요. 뭐 다행입니다 여기에도 올려주셔서. 흐흐
무준님 덕분에 문학에 대해 많은 것들을 배우고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군요. 지금까지는 뭐 그냥 재미있게 읽는 것 뿐이었습니다만. 2009-03-29
14:37:03
상병 김태완
함께 묶으면 딱 맞겠군요. 김무준님의 생각과 서강대 국문과 교수님의 생각이 똑같으니 말이죠. 사실 우리같은 청년들은 경제가 어렵다 하면 '그런가 보다.. 이런, 취직이 어렵겠구나' 같은 생각만 하지 우리 경제 살리기에 보탬이 되기위해 내가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은 안하죠. 아니 못하죠. 일단 내가 안정되지 못하니까요. 저도 그렇습니다. 입궁하고부터는 아예 경제에 대해 관심을 끊었습니다. 밖과의 단절로 인해 그것이 표면적으로 닿지 않을 뿐 아니라 여기서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까닭입니다. 어찌하다 변명을 하게 됐는데, 우리 청년들에게 정말 그런 여유가 없는 것은 진실로 사실입니다. 봉사활동은 그럼 여유가 있어야 할 수 있느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더 봉사를 안하더라 라고 반박하신다면 그럼 글로써 비판하는 것 이외에 취직도 못한 청년들이 경제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집단데모? 집단데모를 누구를 향해 합니까? 경제가 나쁜것에 대해 무작정 대통령이나 국회에다 하시겠습니까? 아무 대기업에다 찾아가서 똑바로 하라고 외치시겠습니까?
투정을 한번 부려봤습니다. 왠지 김무준님의 글이 경제에대한 정보력도 부족하고 일상생활 하기에도 바쁜 저같은 사람에게도 경제에 대해 문제가 있을 시 손놓고 구경만 하지말고 여러차례 문제제기를 하라는 것 같아서요. 그런말이 있죠. 니 앞가림이나 잘해라. 전 경제는 자기 앞가림만 잘하면 괜찮아 질 거라 생각합니다. 문예인이 아닌 이상 맡은 일만 열심히 하면 그것이 바로 경제성장에 한 몫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문예인에게는 면죄부를 주시기 바랍니다.
본론으로 들어가 문학가나 타예술인들이 경제에 무관심한 경우가 많은 점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부터 예술은 배고픔을 동반했고 경제가 어찌됐든 그들은 생계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으니 그럴만도 하죠. 그치만 독고장군처럼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앞뒤를 못보는 예술인은 그리 보기좋지 않습니다. 초현실주의적 예술을 하는 사람도 몸은 현실에 있습니다. 내 실체는 세상에 있고 세상은 나와같은 실체들이 살고 있습니다. 내가 잘못된 무엇인가를 바로잡는데 힘을 보탤 수 있다면 이는 실체들의 세계에서 내게 내려진 축복입니다. 꼭 내가 열정을 쏟는 세계에만 빠져있는, 타세계에서 축복을 찾으려는 사람의 모습은 흡사 게임중독자와 비슷합니다. 이들은 주위사람들이 힘들어도 보이지 않습니다. 소수 혹은 자신을 위한 예술가와 게임중독자를 비교하는 것은 잘못된 비유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둘다 다른 세상속에 살면서 주위를 살피지 못하는 점이 같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자기만의 예술세계 구축도 좋지만 국가적으로나 많은 국민들이 어떠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면, 각 예술계에서 일하는 예술인들은 그들만의 개성적인 문제제기로 문제해결에 박차를 가하는게 더 바람직하겠습니다. 내가족, 친지 그리고 나를 위해서라도 부조리한 현실에 일침 하나씩 놓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009-03-29
15:38:03
병장 김민규
써놓고 시즌2에만 올리고, 여기에 올릴까 말까 망설이던 글이 있는데, 태완님의 리플을 읽고 비로소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표현상의 조율이 다소 필요해서 좀 다듬어봐야겠군요. 2009-03-29
16:07:19
상병 김태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2009-03-29
16:18:36
상병 이기범
자기 앞가림만 한다고 경제가 잘 돌아갈까요. 그럼 지금 경제가 바닥으로 떨어진 것은 개개인의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일까요. 작금의 현실에 닥친 문제는 그런 것 보다 더 큰 틀에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뭐 사실 구체적인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쨋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안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논의와 소통으로 모색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장場을 열어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은 방법적인 측면에서 볼 때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고 텍스트, 문학도 그 중 하나일 수 있을 것입니다.
문예인은 부조리한 현실에 일침을 놓아야 하고 비문예인은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길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예인은 그저 화두를 던져주는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뿐 이라고 썼지만 그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지요) 개개인의 역할을 충분히 소화해 내고 나아가 끊임없이 소통에 참여해야 합니다. 방법을 모색해 보아야 합니다. 뚜렷한 문제가 있는데 그것을 의식하고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이 열심히만 살아가다보면 분명 바뀌는 것은 없을 터이고 찾아오는 상실감은 산과 같을 것입니다. 현실은 점점 더 어려워 지겠지요.
물론 가지고 있는 짐이 너무 무거워 그것을 감당하기에도 벅찬 입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억지로 소통을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내 할일만 해내면 충분하다는 생각은 자칫 이기주의(약간 비약이 있는것 같군요 달리 단어가 떠오르지 않네요)로 번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끊임없는 소통이 이루어질 때 좀 더 나은 대안이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 2009-03-30
13:51:28
상병 정근영
좋군요.
'구회말투아웃'이 꼰대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외쳐봅시다.
무준씨도 18일에 뵙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