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어제의 나는 모르는 사람이다  
병장 고동기   2008-10-30 09:12:14, 조회: 249, 추천:2 


아침 9시, 시흥역. 주말 역전엔 무가지들이 없다. 이동하는데 한 시간쯤 걸릴 텐데. 가판대를 스윽 훑어보곤 무비위크를 고른다. 지갑에서 천원을 꺼려내려는데 이천원이란다. 올랐어요. 천원이 오른 주간지에는 더욱 열심히 하겠다는 글이 써있다. 지하철에 오르는데 괜스레 손해 본 기분이 든다. 지하철 출입문 쪽에 자리를 잡고 주간지를 펼친다. 천천히 기자들의 이름을 살피는데 신기주와 허지웅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잘못 골랐다. 순전히 내 잘못이지만 괜히 읽을 기분이 안 난다. 왜 비슷하게 네글자래가지고.

종각역, 반디앤루니스 10시 오픈예정. 직원들이 손님 맞을 준비에 바쁘다. 아직 10시가 안되었지만 문은 열려있다. 성급한 손님들이 책을 둘러보고 있다. 오픈하기 몇 분 전인가, 서점 안에 방송이 흐른다. 방송에서는 직원들에게 따라하라면서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한다. 직원들이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한다. 직원들 목소리에서 지루함이 묻어난다. 여기도 신입직원들은 열심히 따라 하겠지. 목소리 크게 안하면 혼도 나고 그럴까. 이 책 저 책 둘러보다가 결국 「2008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을 고른다. 올해 이효석문학상 수상작은 김애란의 ‘칼자국’이다. 책에는 수상작가의 자선작과 당선소감 같은 것들이 실려 있다. 계산대에 책을 내민다. 적립금 10,040원 사용하시겠어요. 아뇨.

정오 무렵, 청량리역. 전 좌석 매진. 주말이라서 그런지 사람이 많다. 한 시간 후에 출발하는 입석표를 끊는다. 창구에서 건네준 표에는 ‘할인금액 500원’이라고 쓰여 있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더니 배가 고프다. 다른 때는 칼로리발란스 같은 걸로 허기만 때웠는데, 이번엔 시간이 많이 남아 롯데리아로 간다. 처음에는 혼자 먹는 게 민망했는데, 이젠 익숙해서 그런지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나 나의 입은 허겁지겁, 바쁜 일이 있는 양 허겁지겁 햄버거를 집어먹는다. 치킨 한 조각을 두세점만 베어 먹고, 하는둥 마는둥 분리수거를 하고, 역사로 돌아간다. 입주변을 빠르게 닦아내고 롯데리아 같은 덴 안 갔다 온 사람인 양 한다. 앉을 자리도 없고 멀뚱멀뚱 TV도 보기 싫어서 컴퓨터를 하러 간다. 누가 땅바닥에 500원을 흘리고 갔다. 500원에 30분이다. 누가 흘린 돈으로 쓸데없는 짓만 하다 시간이 다되어 기차에 오른다.

청량리발 무궁화호의 4호실과 5호실 사이. 닫혀있는 출입문 쪽 계단에 자리를 잡는다. 얄미운 무비위크를 바닥에 깔고 책을 펼친다. 올해 수상작인 ‘칼자국’을 읽는다. 다시 읽어도 좋다. 그녀의 자선작인 ‘큐티클’을 읽는다. 좋다. 기수상작가인 박민규의 ‘낮잠’을 읽는다. 좋다. 내 뒤에 앉은 대학생들이 신경 쓰이지만 좋다. 날씨도 좋고 책도 재밌다. 궁둥이가 차갑고 허리가 아프지만 괜찮다. 나는 이런 옷을 입고 있지만 봐라, 책을 읽고 있다. 그것도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말이다. 이런 별 쓰잘데없는 기분들이 들었다 사라진다. 대성리와 강촌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고 종착역에 다다라서 나도 내린다.

입고 있던 옷부터 훌러덩 벗어놓는다. 기차에서 읽던 책은 종이가방 안에 그대로 있다. 탈퇴했던 성인사이트에 재가입 하니 준회원이다. 눈앞에 넘실거리는 훌륭한 정보들과 알찬 자료들은 정회원만이 볼 수 있다. 내가 왜 여길 탈퇴했을까!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24시간이 흐르면 자동으로 정회원이 되겠지만, 24시간 후엔 나는 여기에 없다. 성인사이트를 눈앞에 두고 존재론적 고민을 하다가, 어쩔 수 없어 익숙해져버린 살덩어리들을 보다가, 결국엔 술을 먹으러 나간다. 때마침 대학교 시험도 끝이 났다. 친구들이 모인 아르바이트 하던 술집엘 들러, 주인 누나에게 어색한 인사를 하고 술을 마신다. 그렇게 술을 마시다 장소를 옮겨서 또 술을 마신다. 여기 사장님이 중후한 멋이 있네. 맞어 맞어. 야 9만원만 모아서 나이트 가자. 짱구 형한테 전화해볼게. 바쁜가봐 안 받아. 돈 좀 더 내봐. 그래도 양주 정도는 시켜야지. 야 가자가자.

저흰 부킹 안 해요. 실컷 마시다 댄스타임이 되면 춤을 춘다. 또 실컷 마시다 댄스타임이 되면 또 춤을 춘다. 다시 또 실컷 마시다 댄스타임이 되면 또 춤을 춘다. 안에서 듣던 노래는 그 노래가 그 노래 였는데 밖에서도 듣는 노래도 그 노래가 그 노래다. 그 노래들을 들으면서 술을 마시고 춤을 춘다. 테이블 사이에서는 손목을 붙잡힌 여자들이 이리저리,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이리저리 끌려 다닌다. 댄스타임이 돼서 신나게 춤을 추는데 누가 내 어깨를 톡톡 친다. 반가운 마음에 뒤돌아보니 발 좀 밟지 말라면서 신경질이다. 이거 참 도도하게 춤들 추고 계신다. 진하게 화장한 여자들의 눈동자에서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린다. 싫다. 차라리 무대 위에서 섹시댄스를 추는 언니가 더 예쁘다.

밖으로 나와 시계를 보니, AM 05:48. 술 취한 몸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나도 집으로 간다. 방향이 같은 Y와 함께 걸어간다. 갑자기 Y와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답답하다 억울하다 이런저런 갖은 핑계를 대서라도 내안에 순진한 나에게는 자두라고 하고 Y와 자고싶은 생각이 든다. 정 안되면 키스라도 하고 싶다. 내겐 남은 시간도 얼마 없다. 한숨 자고 나면 다시 그곳으로 가야한다. 자고 싶다. 자고 싶다. 고민 고민 한다. 자고 싶다. 발정난 개 같다. 개같다. 결국에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Y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어차피 Y랑은 다시 만날 사이잖아. 괜찮아. 자위한다. 화장실에서는 소리가 날 것 같아 옥상으로 간다. 새벽 6시인데 별이 밝다. 날은 춥지만 술기운에 몸이 뜨겁다. 밤하늘의 별들이 보였다 말았다 희뿌옇게 보였다 흔들흔들 한다. 어차피 술도 먹었으니까. 잠도 더 잘 올테니까. 자위한다.

잠을 자고 일어났다. 불안해서 오래 자지도 못한다. 물병째 벌컥벌컥 물을 마시고, 1시간 알람을 해놓고 선잠에 든다. 알람소리에 깨어나 미역국을 두어 번 데워먹고 역으로 간다. 이번에도 좌석이 없다. 입석표를 사려는데 좌석이 하나 났단다. 통로 쪽 자리다. 옆자리에 아직 사람이 안탔다. 살며시 눈을 감는다. 기차가 정차할 때마다 감은 눈을 뜬다. 옆자리에 앉을 사람에게 신경이 쓰인다. 자리에 앉으려면 다리를 비껴줘야 하니까. 기차가 정차하면 눈을 뜬다. 네 번째 정차였나, 옆자리의 주인이 왔다. 나는 매너 있게 다리를 비껴준다. 청량리역에 내린다. 나는 이제 롯데리아에서 혼자 햄버거를 먹는 사람도 모르고, 500원을 주워서 컴퓨터를 했던 사람도 모르고, 통로에 앉아 쪼그리고 책을 읽던 사람도 모른다. 나는 오랜만에 고향에 도착한 사람인 양 들뜬 기분이다. 걸어가는 발걸음도 신이 난다.

돌아오는 종각역, 반디앤루니스. 「2007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을 고른다. 작년 이효석문학상 수상작은 박민규의 ‘누런 강 배 한 척’이다. 책에는 수상작가의 자선작과 당선소감 같은 것들이 실려 있다. 거대한 서점에는 직원들도 많다. 어제의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줄이 없는 계산대에 책을 내민다. 계산대도 참 많다. 적립금 10,290원 사용하시겠어요. 아뇨.

결국 다시 이곳에 왔다. 오는 길에 애들 주려고 초콜렛을 샀다. 아 이건 초콜렛인데 빨리 먹고 치우겠습니다. 그래 뭐 동기는 착하니까 놔두고 천천히 먹어도 된다. 하하. 나도 따라 웃는다. 하하. 뭐 별일 이라도 있겠습니까. 술만 먹다 왔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들을 주고받고 내 자리로 돌아간다. 뉴스에서는 한창 고시원 참사에 대해 보도중이다. 나는 그것을 보며 슬프고도 답답한 마음을 갖기도 한다. 어제의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곳에 있던 내가 그랬듯 익숙하게 샤워를 하고, 빨래를 널고, 옷을 갈아입고, 자리에 앉아 책을 읽는다.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너무나 익숙하다. 꺼내든 책은 권여선의 「분홍리본의 시절」이다. 접어뒀던 부분을 찾아 읽는다. 

“형, 내가 오늘 신문에서 봤는데 젊었을 때의 나는 내가 아니라는 주장을 담은 책이 나왔다는 거야. 그 책을 사야겠어. 그 책에 따르면 젊었을 때의 나는 내가 잘 아는 사람일 수는 있어도 나는 아니라는 거야. 형은 이 말이 이해가 돼?”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던 상섭이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그러니까 그게 무슨 개소리냐 하면, 젊었을 때의 나를 지금의 나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는 거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거야, 두 사람은. 저자가 어떤 근거에서 그런 주장을 펴는지 나도 궁금해.”

책을 덮는다. 이곳에는 정해진 시간이, 똑같은 옷이, 주기적으로 제공되는 일정한 식단이, 규정되어진 예측가능한 일들이 일어나고 또 일어난다. 일관된 모습들의 사람들이다. 마음만 먹으면 천사 같은 사람도 될 수 있고, 맨날 웃기기만 한 사람도 될 수 있고, 멍청하고 무능력한 쓸모없는 사람도 될 수 있다. 어차피 2년 남짓한 기간이다. 계약연애를 하는 것 마냥, 제자를 떠나보내는 인자한 선생님 마냥, 그냥 그럴 수 있다는 거다. 그저 가끔씩 마주치게 되는 선택의 순간에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잊고 싶은 기억은 잊어버린다. 버리고 싶은 기억도 버려 버린다. 어제의 나도 버려 버린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모르는 사람이다. 정말 모르는 사람이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8:24:38 

 

상병 양순호 
  하지만 적립금은 기억하고 있네요. 2008-10-30
09:28:24
  

 

병장 이동석 
  무빅 가격이 올랐고, 프리미어랑 헷갈렸을 뿐이고, 
난 선형적이라는 말을 하고 싶고, 사실은 그 사전적 의미만을 알 뿐이고, 
동기님의 첫 내글 내생각이고, 사실 그건 별의미가 없을 뿐이고, 
어제의 동기님을 동기님이 모를 뿐이고, 난 타타타를 부를 뿐이고-네가 너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와하하하 웃을뿐이고 

나도 저 위엣글을 쓴 순간의 나를 잘 모를뿐이고, 2008-10-30
09:56:45
 

 

상병 양순호 
  그런고로 세상은 요지경이죠. 2008-10-30
10:21:43
  

 

병장 문두환 
  하다못해 손금을 봐도 혹여 새로운 것을 발견할 것 같은 기대를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곳은 시간의 바람이 멈춰버린 듯 머리카락 하나 바뀌는 것 같지 않은, 
바깥에서의 생활이 무한반복기계나 고장난 레코드 기계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같은 
지리-한 것이었고 단벌신사의 찌질함이 곧잘 보인다고 해도 그때는 차라리 그 지리함을 선택했기에 심정적으로는 나았던. 

이건 그저 여담인데 예전에 '무가지'에 대한 글을 한 번 썼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 당시의 무가지는 지금처럼 다양해서 골라잡는 재미는 덜해서 그랬는지 
Metro와 The Daily Focus 두 개가 가장 많이 읽혔었는데. 
첫 원고라서 그런지 애정은 듬뿍 담아 넣었지만, 흐흐. 

촌장님 다음 주민탐방 대상자로 동기님 어떤가요. 2008-10-30
10:33:02
  

 

병장 고동기 
  아침 메뉴가 미역국이네요. 생일 날인데 운도 좋습니다. 
저를 탐방대상으로 긁어봤자 미역국밖에 안나올겁니다. 어허허. 2008-10-30
10:43:08
  

 

상병 김남우 
  모르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은 아닌 것, 분홍 리본으로 자알 묶어 혀 아래 숨겨둬야지요. 2008-10-30
10:53:21
  

 

병장 이동석 
  동기님, 생일을 축하드리옵니다. 옴마니밤매옴. 

생일기념으로 주민탐방 할까요? 흐흐. 2008-10-30
11:49:15
 

 

병장 문두환 
  /동기 

잘됐네요. 전 미역국 좋아하는데(여기 부대찌개 가게에서 파는 것 말고요). 흐흐. 다들 원하시는 것 같은데. 음음. 2008-10-30
12:09:46
  

 

일병 배지훈 
  주간지의 가격상승이란 똑같은 경험, 프리미어도 1500원이더군요. 그놈의 마지막 한장과 신기주기자만 아니면 프리미어도 안볼텐데 말이죠. 

어제의 동기씨를 모르는 걸까요, 어제의 동기씨는 아는데 오늘의 동기씨를 모르는 걸까요 2008-10-30
12:35:47
  

 

병장 고은호 
  매일 매일 똑같은 일과 속에 
변해가는 것은 나 자신 밖에 없내요. 

하지만 그 변화라는 것도 언제부터인지 변한 것인지 아닌 것인지 아리송 하기 까지 하니...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밝게 행동해야지. 
노력해야지. 

라고 해도 가끔씩은 갑갑하네요. (웃음) 2008-10-30
13:25: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