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어느 일말상초  
병장 조현식   2009-01-16 16:00:35, 조회: 214, 추천:0 

웹진 공감 Pop in the sky에 연재되었던 글입니다.
저작권 관련해서 지금은 없어졌지만요. (웃음)

이 곳에 올립니다. 혹시라도 공감에 다시 재게시 된다면 삭제입니다. 이 점은 이해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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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 남행열차

그가 깼다. 꿈도 꾸었다. 전철의 멘트가 흘러나오는 4번 타는 곳의 길게 늘어선 철로 위로 수상쩍은 전철이 스윽 정차하는 꿈이었다. 가만 있어보자. 기차도 전기로 가던가? 아니야. 석탄으로 갈걸? 꿈의 내용은 빠르게 휘발되어 날아간다. 석탄, 석유? 에이 일단 씻자. 이래저래 바보가 된 머리를 부여잡고 그는 천천히 화장실로 향한다. 2박 3일을 무박 3일로 다 써버리고, 3일 만에 처음 따뜻한 물에 얼굴을 푹 담근다. 어디보자. 화장실에 고이 코팅해놓은 피부를 위한 세안법 종이를 펴든다. 종이에는 뜨거운 물로 모공을 열어주고 피지를 빼주고, 차가운 물로 담가주면 된다고 적혀있다. 안에 있는 노폐물을 빼주는 거라면, 3일간 그의 몸에 쌓인 노폐물은 눈에 보일 정도일거라는 상상을 하며 웃는다. 술과 담배 술과 담배 술과 술과 담배로 지냈는데 피지 대신 술이 줄줄 흘러나오면 어떻게 한다? 그는 어푸어푸 세수를 하고, 뽀송한 수건으로 물을 닦아낸다. 수건에 피지가 묻어있는 게 보이면 이상할 거야. 그는 바로 세탁기로 수건을 던져버린다. 터덜 방으로 돌아온 그가 털썩 침대에 눕는다. 그는 봄날의 고양이의 낮잠, 그 평화로운 졸림 같은 기분을 느낀다. 하지만 옷걸이에 걸려있는 그의 약복이 눈에 들어오자 그 좋은 기분은 얼마 가지 않았다. 선명한 세 줄의 오버로크. 이제 좀 남들 보기에 짬 좀 되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는 그렇게 말했었지만 병장들은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약복 사이로는 군번줄이 반짝인다. 일부러 훈련소 때 더 반짝거리라고 동전으로 마구 긁었던 군번줄이다. 멍하니 푸른 약복을 쳐다보는데 어머니가 부엌에서 크게 소리치신다. 준식아, 오늘이 복귀 날 맞지? 저녁은 먹고 갈 거지? 아차, 복귀... 

머리 어떻게 깎아줄까요? 짧게요. 특히 옆을 짧게요. 그러니까... 스포츠머리로 깎아주세요. 어머나, 요즘 학생들 같지 않게 왜 짧게 깎으려고 해요? 군인이거든요. 아, 군인이시구나.
묘한 웃음이 아주머니의 입가에 번진다. 차라리 군인이라고 말하지 말 걸 그랬다. 교칙이 엄한 S고등학교여서 그렇다고 말했다면 학생 가격인 5천원에 깎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잠시 자신의 경솔한 발언에 후회한다. 위잉 대는 분홍색 이발기계가 그의 옆머리로 돌진한다. 아주머니, 남자의 상징 구레나룻은 살려주실 수 없으신가요? 어머, 군인이 머리 길러서 뭐 하게요? 아주머니는 아저씨 같이 허허 웃으며 손에 쥔 이발기계의 돌진에 힘을 더한다. 아 내 구레나룻. 신병도 아닌데 순식간에 훈련병만큼이나 짧은 머리가 되어버린다. 
두상이 예쁘네, 얼굴도 어려뵈구. 어려 보인다는 말 자주 듣죠? 얼마나 남았어요? 15개월이요. 아이구, 많이 남았네. 그래도 금방이에요. 예 감사합니다. 지금은 싫어도 나중에 동안이 좋다니까. 예 감사합니다. 다 깎았어요. 그는 쉴 새 없이 감사하다는 말을 하다가 겨우 한 마디 던진다. 얼마에요? 7천원입니다.

그는 의식적으로 더 모자를 푹 눌러쓴다. 역전 같이 사람이 많은 곳에서 혹시라도 자신을 아는 사람이 나타날 것 같아서였다. 옆을 하얗게 돌려 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기껏해야 10mm 남짓 하던 머리카락 길이가 짧아졌을 뿐인데 머리 깎인 삼손도 아니고 그는 자신이 없어진다. 삼손이야 열심히 기도를 해서 다시 힘이라도 되찾았다지만 나는 언제쯤 힘을 되찾으려나, 그는 한숨을 내쉰다. 까끌한 짧은 머리에 계속 헛도는 모자의 감촉이 걸린다. 다시 모자를 고쳐 쓰고, 계룡 한 장이요. 속삭이듯 매표대 앞에서 말한다. 계룡 한 장 말씀이십니까. 이런. 작게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마이크로 크게 울리는 소리가 마음에 부끄럽게 들린다. 그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쳐다 보는듯한 착각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입석 밖에 없는데 괜찮으십니까? 네네,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낚아채듯 표를 가지고 4번 타는 곳으로 뛰듯 걷는다. 앞에 자신과 똑같은 공군 상병이 여자와 나란히 서서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고 있다. 멈춰선 그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뭐가 좋다고 여자애는 연신 옆의 상병에게 환하게 웃고 있다. 그의 눈이 슬쩍 얇아진다. 얼굴은 평범한데 미소가 유난히 예쁘다. 나도! 사흘 전에 이 에스컬레이터를 반대로 올라갈 때는 그녀와 함께였다구.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스컬레이터는 천천히 그를 아래로 밀어낸다.

목포. 목포 가는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타는 곳 안쪽으로 한 걸음 물러서주시기 바랍니다.

둘은 어디로 향할까? 같이 기차를 타고 짧은 휴가를 보내기 위해 바다로 가는걸까? 아니면 아쉬운 짧은 휴가를 끝내고 이제 곧 헤어질까. 헤어지고 만나고 하는 지난 1년이 그들의 모습 뒤로 겹쳐서 그는 다시 한 번 모자를 고쳐 쓴다. 모자에 신경 쓰는 머리 짧은 사람은 100% 군인이라니까. 백 번 맞는 말만 하고 있는 개구리 마크 선임의 말이 떠오른다. 이번엔 모자가 신경 쓰이는 건 아닙니다. 혹시라도 우는 모습을 보일까봐. 혹시라도 누가 볼까봐. 기차의 덜컹거림 속으로 그는 올라탔다. 차창 밖으로 아까 여자가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뒷좌석 어딘가 에서는 나와 똑같은 옷에 똑같은 모자를 쓴 남자가 손을 흔들고 있다... 그는 그 여자의 손 흔드는 모습, 밝은 웃음이 자꾸 그녀의 얼굴과 손과 웃음과 겹쳐 보여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아도 그의 귀에 울리는 기차의 복작복작한 웅성거림이 시끄러웠다.



BGM - Last Scene

기차에 올라타 열차 칸과 칸 사이의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돌린다. 촤악. 머뭇거리던 수도꼭지에서 힘차게 물이 쏟아진다. 기차의 어디에서 이 물이 튀어 나오는 것일까. 그는 궁금했지만 승무원에게 물어볼 정도로 대단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물 묻은 손을 대충 감색잠바에 닦아 털어냈다. 새마을호나 무궁화호나 입석들은 돈을 냈음에도 불편한 열차와 열차의 사이나, 화장실 앞이나, 출입문 계단에 걸터앉아 가야하는 처지에 놓인다. 할 수 없이 가방을 문가 한 켠으로 밀어놓고 문과 이어지는 짧은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주 잠시, 그의 머릿속에 새로 반듯하게 잡은 바지의 줄이 망가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지만 이내 뒤로 흘려보냈다. 무료한 표정들의 사람들이 무감각하게 서 있거나 앉아있으면서도 그들은 기차의 움직임에 제각기 몸을 흔들어댄다. 시속 새마을호km 로 목포를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들 사이의 연관성은 그 흔들림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갑작스레 방송이 흘러나온다. 이번 역 평택역. 평택역입니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에 놓아둔 가방을 다시 왼쪽 어깨에 걸친다. 사람들이 몇 명 내리고, 다시 몇 명 탄다. 열차 출발하겠습니다. KTX열차 관계로 5분 후 출발합니다. 그대로 열차는 평택에서 정차한 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슬쩍 열차 밖을 내다보니, 한 여자가 기차 창문에 손을 딱 붙이고 누군가와 입모양으로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요새는 커플이 너무 많아. 그는 답답해지는 마음에 다시 계단에 주저앉았다. 앉아 있는 옆쪽의 통로 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아까 여자와 같이 있었던 그와 똑같은 복장을 한 녀석이 슬쩍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 모습이 보인다. 힐끔 힐끔 쳐다보는데 어쩌다 눈이 마주쳐 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모르긴 몰라도 그 녀석이 자신을 비웃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삽시간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비웃어? 너라고 별 수 있을 것 같아. 너도 결국 똑같아 자식아. 저번 휴가 때 까지만 해도 나도 같이 손잡고 걸을 여자 있었고, 웃어주는 여자 있었어. 근데 다 똑같아. 너도 통계학의 패배자가 될 거다 짜아식아. 마음속에서 목까지 올라왔던 말이 다시 스믈 그의 뱃속으로 내려간다. 그녀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까의 여자가 저 녀석의 마음속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짠해진다. 빨리 털어내지 않으면, 힘들 텐데 이별 선배로서 조언해줄까? 그는 이별 선배라는 말이 좀 이상하다고 느낀다. 그러면서 자신의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의 끈을 애써 잘라냈다. 잘라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녀가 계속 머리에 맴돈다. 그가 헤어진지는 이틀 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그는 대학에 들어가 공부하고 술 마시고 잔디밭에서 엎어져 자고, 학점 잘 나오는 녀석 뒷담이나 까고 소개팅 해달라고 징징대다가 그녀를 만났다. 주민등록증 받고 처음 하는 연애였고, 고등학교 때랑은 다른 느낌이 그를 들뜨게 했다. 2년간 사귀었고 그도 군대를 가게 되었다. 여느 커플이 다들 그렇듯이 진주 훈련소 앞에서 울음바다가 되어 그는 기다리지 말라고, 그녀는 기다리겠다고 약속하고 14만 원짜리 커플링을 그녀에게 건넸다. 나 제대하면 다시 돌려줘. 2년 2개월. 길진 않다고 생각했지만 미묘하게 길었던 시간이었다.

이번 역은... 이번 역은... 천안의 명물 호두과자 있습니다. 천안. 김밥 있습니다. 뒤섞인 소리들의 그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갑자기 후임들에게 호두과자나 사줘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줌마, 얼마에요. 요새 환율이 올라서... 4천원입니다. 호두도 환율이랑 관계가 있나요. 글로벌 시대에 내수만으로 되는 장사 있나요. 거참 똑똑한 아주머니다. 결국 4천원을 건네고 호두과자와 교환한다. 후임들이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다. 매 번 얻어먹기만 했으니 좋은 선임의 모습도 보여 줘야지. 매 번 공중전화기 붙잡고 도통 놓을 생각을 않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니 마냥 부끄럽기만 하다.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지. 좋은 선임이 되어야지. 그래, 그래야지. 그는 연신 되뇌며 호두과자 봉지를 꼭 쥔다. 손에 느껴지는 온기와 향긋한 냄새가 그를 들뜨게 만든다. 


BGM - 약속의 장소

밖으로 나와서는 왜 이리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것일까. 15개월 남은 날 중 3일이 후딱, 금방 지나가 버린다. 지금 그가 타고 있는 새마을호도 마찬가지로 부대가 있는 역까지 도착하는 데에는 호두과자 하나 사는 시간이면 충분했다. 와, 빠르다. 중간에 졸았던가, 잤던가? 유난히도 그녀가 호두과자를 싫어했었던 것을 기억해낸다. 그런 호두과자 말고, Walnut으로 만든 디저트라면 먹을 수 있어. 그렇다면 월넛으로 만든 투게더는 어때? 그의 유머는 적어도 그녀에게는 재밌었던 모양이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삐익. 우르르 약복을 입은 사람들이 내린다. 그도 재빨리 내린다. 멍하니 있었다가 역을 하나만 지나치면 그는 눈물을 머금고 부대로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1월의 추위가 기차에서 내린 그의 주위를 휘감고 슬쩍 스며들었다. 내리자마자 추운 것보단 천천히 그의 몸속에서 스며드는 한기가 유난히 시렸다. 아이고. 그는 재빨리 던지듯 표를 확인받고 흡연구역으로 달려간다. 착착 하는 라이터 소리와 함께 불이 켜진다. 치익. 후우.  예전에는 온통 흡연구역이었는데 지금은 영 피울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다. 갑자기 그의 아버지가 초청행사 때 그에게 넌지시 물었던 질문이 생각난다. 아직도 내무반에서 담배 피우냐? 아버지, 그런 시절이 있었어요? 그런 재미도 없이 무슨 재미로 군 생활 하냐. 재미로 군 생활하나요. 그런가.

불 좀 빌려주세요. 갑자기 옆에서 누가 치고 들어온다. 누군가 보니 아까 그 녀석이다. 실실 웃으며 미안하다는 듯 손은 뒷머리를 긁고 있지만 얼굴은 별로 미안해하는 얼굴은 아니다. 적어도 흡연구역에서는 라이터가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빌려주는 암묵적인 룰 같은 것이 있기 때문에 그는 군 말없이 그에게 불을 붙여준다. 만약 그런 룰이 없었다면 담배는 있는데 라이터가 없는 비극적인 상황에서 좌절할 사람들이 꽤나 많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까, 아까 기차 타시기 전에 여자 분하고 같이 가셨던 것 같은데. 그는 짐짓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그 녀석에게 말을 꺼냈다. 아, 같은 지역 사시나 봐요. 반갑다는 감정이 가득한 그 녀석의 목소리 톤이 올라가 그는 갑자기 부담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네.. 어쩌다 봐서요. 아, 걘 제 동생이에요. 아, 그렇구나. 네에.. 뭔가 극적인 걸 바랐던 그는 허무한 기분에 담뱃불을 두 번째 손가락으로 탁 튕겨 껐다. 같이 택시타고 가실래요? 아니요, 저는 됐어요. 그래요... 수고하세요. 늘어선 택시 중 하나에 올라탄 녀석이 빠르게 사라진다. 테일 램프의 붉은 빛이 어지럽게 사라진다. 맥이 탁 빠진 그는 벤치에 주저앉아 습관처럼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 좀 끊어.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그는 중얼거린다. 세상의 모든 남자 여자가 다 연인 사이로 보인다니까. 심지어 남매사이마저. 근데 내 문제는 아닌 것 같아. 이건 다 너 때문이야. 그러니까 담배를 끊으라니까. 소곤소곤 귓가에 그녀의 목소리가 새겨진다. 그녀는 항상 그의 모든 문제를 담배로 시작해서 담배로 끝내곤 했다. 그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하나도 실행하지 않았었다는 것을 생각해낸다. 갑자기 당장에라도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힌다. 다시 표를 끊고, 기차를 타고, 20년 동안 살아왔던 그 곳으로 가서 그녀를 다시 부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지갑을 열고 돈을 꺼내려다가, 휴가증에 쓰여진 복귀 시간이 눈에 들어온다. 상병이라는 글자도 눈에 들어온다. 요란스러운 차임벨 소리와 함께 상행선 기차가 역으로 들어온다. 저 열차를 타면? 그는 잠시 생각한다. 내가 그녀에게 돌아간다면?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곳으로 그녀를 불러낸다면? 그 다음은. 또 다시 복귀하는 나를 배웅하는 그녀의 손짓을 보게 되겠구나. 이번에 그는 담배를 비벼 끈다. 손에 쥔 호두과자는 어느새 차게 식었다. 

택시! 2정문 앞으로 가주세요.




BGM - Fix you

그는 다시 복귀해 근무하고 작업하고 축구하고, 후임들에게 소개팅 해달라고 칭얼대다가 또 밖으로 나왔다. 뒤돌아보는 시간은 밖이나 여기나 항상 빠르다. 남은 시간이 느린 게 문제였을 뿐이지만. 여전히 그는 상병이고, 딱히 달라진 것도 없는데 일말상초의 기억이 1년 전 이야기처럼 희미하게 다가온다는 것이 다르다면 달랐다. 술집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이제 병장만 달면 끝이지. 라고 말하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남은 기간을 정확하게 밝힐 수는 없었지만 그냥 그렇게 얼버무리고 말았다.

공군이면 게임하지? 뭔 소리야, 전투기를 몰지. 바보야, 무슨 병사가 전투기를 몰아. 아마 수송기 이런 거나 몰걸? 아냐, 새 쫓을 걸?

다 틀렸다고 말하며 그는 맥주를 한 컵 들이켰다. 수송기 이런 거라니... 니가 수송기 타 봤냐? 아주 자기들 좋으실 대로 말씀들 잘 하시네요. 주워들은 비행기 기종을 죽 나열하자 친구들은 그에게 감명 받은 눈치다. 좀 하는데? 이정도야 기본이지. 술이나 마시자. 하지만 그는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다. 갑자기 뜬금없이 자신을 은근 치켜세워주면서도 그들이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것. 그것이 고마우면서도 어색해서, 친구들 모르게 재빨리 영수증을 계산하고 밖으로 나왔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자기들끼리 전공이니 교수님 이야기 하는 친구들은 그에게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했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가 술집 밖으로 나왔다. 문에 단 종이 딸랑 하고 울렸다.

어라? 그의 눈에 환상처럼 그녀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술을 먹었더니 이상하네. 다시 보니, 역시 그녀다. 다가갈까 하다가 그의 발이 멈췄다. 그녀의 바로 옆에 또 다른 발 두 개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설마 그녀의 오빠는 아니겠지. 그는 조심스럽게 좋은 쪽으로 생각한다. 어쩔까. 술을 잔뜩 먹어 벌게진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가기는 싫다는 마음이 그의 발을 자꾸만 멈춰 세웠다. 다리가 불편한 사람마냥, 그는 머뭇머뭇 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다가가는 만큼, 그녀는 더 빨리 남자와 앞에서 걸었다. 서로 걷고 걷다가, 그녀가 한 모퉁이로 돌고 나서 그는 그녀와 남자를 놓쳤다. 그녀가 어디로 간 것인지 궁금해졌지만, 더 이상 따라가지 못했다. 자신에게는 외박 한 번 주기인 6주 사이에 그녀에게 정말 많은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한다. 또 그 많은 일 중에는 그녀의 새로운 사랑을 찾는 일 또한 포함되었을 수도 있었다고 기억을 곱씹어본다. 내려다 본 땅에 익숙한 모양의 반지가 떨어져 있었다. 그가 힘겹게 허리를 굽혀 반지를 줍는다. 주웠다 생각한 반지를 슥 지워본다. 반지는 사라지고 웬 돌멩이가 손에 잡힌다. 술에 취했나보다. 웃었다. 

혹시. 복귀 마지막 날 내가 그녀를 만났다면 끝까지 따라갔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아냐. 누구에게랄 것 없이 그는 혼자 변명했다. 그리고 그녀가 과연 그녀가 맞는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괜히 술 취해서 스토커 취급 받을지도 몰라. 그가 발걸음을 돌리는데 순간 땅이 그에게 다가왔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아버린 그는 다시 일어나는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곤혹스러웠다. 그녀가 보면 어떻게 하지? 순간 그의 생각보다 더 빠르게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참으려 이를 악물어 봤지만 눈물은 계속 쏟아지고, 제발 멈춰라 속으로 되뇌어봐도 도저히 멈추질 않았다. 그는 밀려오는 감정에 휘말려 울어버렸다. 마냥 울었다. 눈물과 눈물 속에, 1년 후에 받았어야 할 그녀의 반지가 섞여 떨어진다. 






거리의 사람들은 제각각의 일들로 그의 옆을 부산히 지나가고, 부대와는 다른 도시의 시끄러운 밤이 점점 커져만 갔다. 그의 울음은 어수선한 발자국 소리에 들리지 않는다. 그의 목에 걸려있던 줄이 찰락, 흘러내렸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4:06:30 

 

상병 김요셉 
  여담이지만, 얼마 전에 꿈에서 콜드플레이의 공연에 갔었어요. 꿈이였으니까 당연히 가장 앞 자리. 콜드플레이의 코 앞. 콜드플레이는 마지막곡으로 fix you를 부르고는, 가사 없이 연주만 길게 늘여 계속하면서, 무대에 설치된 스크린으로 어떤 영상을 보여줬어요. 슬픔, 추락, 우울, 피폐한, 환멸, 뭐 그런 이미지가 담긴 영상을요. 
영상을 보면서, 연주를 보면서,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쓰러져갔지요. 저도 쓰러졌구요. 

무슨 이런 꿈이. 2009-01-16
16:05:02
  

 

일병 송기화 
  공감에서 봤던 글이군요. 
노래와 정말 엄청나게 잘 어울렸었는데, 글만 읽으니 또 새롭군요. 
잘읽었습니다. 2009-01-16
16:10:35
  

 

병장 조현식 
  노래는 기본적으로 기획하셨던 병장분이 저한테 노래를 세가지 적어주시면, 제가 한 100번정도 계속 들으면서 글을 쓰는 방식이었죠. 두번째 가리온 노래는 제가 가리온을 좋아해서 들어갔지만요. 

새로운 경험이었고, 돈도 벌고, 좋았었는데 저작권이 걸려서 꽈당했습니다. (웃음) 2009-01-16
16:16:47
  

 

상병 김형태 
  아.. 
현식씨가 거기 현식씨군요 
이글 정말 좋았는데 

콜드플레이 공연 저도 꼭 가고 싶은데, 
정말 다른 노래도 않고 fix you만 라이브로 들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콜드플레이 엘범 노래가 다 좋더군요 2009-01-16
16:31:20
  

 

병장 이우중 
  와우. 공감에서 참 잘 읽었는데 댓글을 못달더군요 거기는. 

그나저나 허락도 없이 현식님의 글을 훔쳐서 저 밑에다가 댓글 달았는데.. 허허. 2009-01-16
16:31:31
  

 

병장 이동석 
  여담이지만, 얼마 전에 꿈에서 텔레토비 언덕에 갔었어요. 꿈이었으니까 당연히 텔레토비는 없고, 소녀시대와 원더걸스와 카라가 뛰놀았어요. 그 세계엔 딱 스무명이 정원이라는듯, 저를 포함해서 딱 스무명만 있었던거죠. 

그들은 각기 돌아가며 공연을 하기시작했는데, 마지막으로 소녀시대의 Gee-가 나올차례였어요. 그런데 전 그 노래를 아직까지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그 노래는 너무나 아름다웠어요. 뭐랄까, 낭만주의 시대의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트라이앵글 연주가 반주로 깔리는 굿거리장단의 유로비트 랩-같은 거였어요. 

심지어 전 그들의 무대도 의상도 보지 못했어요. 흰티에 청바지, 개다리 춤이란건 들었는데, 보질 않으니 더욱 환장할 지경이었거든요. 그런데 꿈속에서 소녀시대는 그 어느때보다도 아름다웠어요. 마치 68년의 파리에서 날아온듯한 혁명적이게 시퍼런 색의 펑퍼짐한 청자켓과 청바지-그런 마치 70년대 명동의 멋쟁이들이 미니스커트 단속을 피해 급히 껴입은듯한 바스라질것 같은 청춘의 아슬아슬함과 시대에 대한 절망과 절대 굴하지 않는 저항정신이 아로새겨진 그 조다쉬 청바지였던거에요. 그런데 조다쉬가 70년대에도 있었나요? 

그 청자켓 안엔 소녀시대는 기본기에 충실하다는걸 표현하는 문구가 새겨진 흰티-베이직 하우스, 세장에 만원-를 입고 걸음마만 떼면 세상 어느 누구라도, 남녀노소 가릴것 없이 모두가 사랑하는 그 춤- 아카페라고 밖에 할수 없는 전인류의 사랑을 듬뿍 받아온 예의 그 개다리춤을 추는거에요, 손으로는 머리를 빗어넘기면서. 저건 그러니까 제가 초등학교때 삼촌이 사준 꼬마 양장을 입고 할머니의 칠순잔치때 췄던, 그 춤이었어요. 전 왠지 슬픔에 젖어 울음을 터뜨렸고 (할머니는 아직 건강히 잘계십니다만) 

소녀시대는 청자켓을 집어던지고 베이직 하우스- 세장에 만원이 붙은 태그를 출렁이며 저에게 달려왔어요. 그리고 전 벨트를 풀고... 

무슨 이런 꿈이. 2009-01-16
17:36:22
 

 

병장 이동석 
  암튼 어서 뮤직뱅크를 봐야겠군요. 이번에도 소녀시대를 못 보면 (사실 지난주 금욜에 평소에는 보지도 않던 뮤직뱅크를 처음부터 끝까지 봤지만, 결국 소녀시대는 나오지 않았고, 그날 밤 보일러와 수도관이 터져버렸어요. 주말엔 그거 가느라 소녀시대를 못보았구요.) 전 차라리 동방신기를 좋아하렵니다. 그 놈들은 왜 이렇게 자주 나오는건가요. 젠장. 2009-01-16
17:38:36
 

 

병장 이동석 
  그런데 내가 왜 현식님의 간만의 글에다 소녀시대 이야기를 하고 있지? 2009-01-16
17:38:56
 

 

병장 박찬걸 
  현식님도 여기셨군요. 아 몰랐어요. 이 글 보고 완전 공감해가지고 우와 이거 뭐 노래랑 너무 잘 맞는데 하면서 들으면서 글 보고 또 들으면서 글 보고 그랬었는데 흐흐. 2009-01-16
20:18:23
  

 

병장 박찬걸 
  이거 다음편도 재밌었는데 여기 주인공이 다음편 주인공한테 호두과자를 던져주더군요. 어찌되었건 두번째 글도 정말 재밌었어요. 여기다가도 그런거 올려주심 안될까요? 2009-01-16
20:21:42
  

 

상병 김예찬 
  하지만 소녀시대는 1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뮤직뱅크에 출연하지 않았으니 동석님이 슬퍼했겠군요. 주말에는 볼 수 있으시겠죠? 2009-01-17
11:54:03
  

 

병장 이동석 
  끝내 소시를 못봐서 술을 K... 2009-01-17
13:20:17
 

 

병장 김민규 
  쌉싸름하네요. 많은 것들이 지나갑니다. 
고맙습니다. 2009-01-19
01:3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