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싸구려 소주를 마신다  
상병 김요셉   2009-01-12 15:15:58, 조회: 207, 추천:0 



술을 제법 마신 날이면 반쯤 꼬인 혀를 갈피없이 놀리며 수줍게 고백한다. 나는요, 이게 술이, 사실은 정말로 싫어요. 취해 지쳐 정신없는 것도 싫고, 속 아파 괴로운 것도 싫어요. 정말요. 그런데 있잖아요, 뻥이에요. 싫다는 거 다 뻥이에요. 너어무 좋아요. 이거 없이는 못 살 정도루요.
그 날도 그랬었다. 누군가가 가방에서 꺼낸 바카디 한 병을 보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벅찬 감격에 벌써부터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여, 홀짝거리던 맥주잔에 바카디를 벌컥 들이붓고는 행복에 겨운 목소리로 고백했었다지. 난 이게 술이, 사실은 정말로 싫은데. 아무런 대책없이 벌컥벌컥 들이붓다간 긴긴 술자리의 중반도 채 되지 않아서부터 뒤로 벌러덩 나자빠져있었던 주제에, 온갖 추한 꼴 다 보인데다가 하루 종일 술병에 힘없어 골골거리던 주제에, 다음날 동이 틀 무렵엔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우리, 소주 마셔요.
대체 어느 쪽이 진심이냐 정색하고 묻거든, 모르쇠로 일관해야지 별 수 없다. 정말로 그렇다. 나는 모르겠다.

술과 함께 한 날들이 그리 오래 전부터 시작되지는 않았다. 집에서부터 떨어져 나와 혼자 타향살이를 시작하게 된 스무 살 무렵부터 술을 입에 달고 살아왔다. 취해 있는 날이 멀쩡한 날보다 훨씬 더 많았고, 단 한 모금이라도 술을 입에 대지 않는 날은 거의 없었다. 하다못해 수업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라도 맥주 한 캔 정도는 사 마셨으니까. 술 때문에 수업에 들어가지 못했던 적은 손으로 꼽아보기 힘들 정도로 많고 아예 시험도 치루지 못한 적도 있다. 한 달 치 방세를 통째로 잃어버린 적도 있다. 정오 이전에 잡았던 모든 약속은 지키지 못한 약속이 되었다. 내가 술에 취한 채 저질렀던 일들이 대체 어떤 것들이였던가, 하는 고민 없이는 이십 대 초반의 - 지금을 포함한 나 자신을 전혀 설명할 수 없다. 반대로 술이 깬 말짱한 상태 동안에 했던 일들만으로 지금 이 무렵의 나를 설명하려 하면, 아예 그 기간 동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것들이 내 전부였고 내 전부이다. 물론이지만 취해 저질렀던 일들이 자랑스럽게 추억할 수 있을만한 것들일 리는 없다. 온통 부끄러울 뿐인, 대체로 지-랄같은 일들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술을 마셨는가. 왜 아직도 술을 마시는가.

한 번 마셨다 하면 끝장을 보는 편이다. 심지어 혼자 마시다가도 취해 꼬꾸라진다. 건전한 애주가의 태도가 아니다. 술이 건강에 해로움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술이 그다지 권장해 마실 만한 음료가 되지 못한다는 것, 아주 절실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까지 건전하게 잘도 살다가 타향살이를 시작한 이후부터 그렇게 술에 찌들어갔으니 어쩌면 너무 외로웠다 - 라는 변명이 통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도 나는 아주 많이 외로웠었다. 그러나 외로움의 극복 수단은 술 자체 보다는 술자리의 ‘분위기’라 할 것이 대체로 타당할 것인데, 북적거리고 시끄러운 술자리는 대체로 싫었다. 새내기 딱지를 달고 한참 외로움에 벌벌 떨 때야, 아무리 피곤하고 귀찮더라도 사람 좀 모였다 싶은 자리는 죄다 빠지지 않고 달려가 참석했지만 그 것도 한때, 이내 지쳤다. ‘같은 시간에 다수의 사람과 정신없이 관계 맺기’는, 안 그래도 관계 맺기와 소통하기에 크나큰 장애를 가진 나를 순식간에 만성피로의 상태로 몰고갔다. 게다가 술을 마심으로써 더 외로워지기도 했다. 여럿과 마셨건 혼자서 마셨건 취한 감정이란 공유하기 힘든 것이므로.
마시고 마시다 보면 그마나 있던 감정이나마 마비되어가기 마련이니, 그 감정들은 대체로 더러고 아픈 것들이라 ‘외로움’이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고로 그러한 감정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그랬다 - 라는 변명을 할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외로워 그랬다 - 라는 변명은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훌륭한 변명거리다. 외로움 - 누구나 알다시피 누구와도 공감하기 힘든 거지같은 문제가 아니던가. 그러나,

우리는 로켓 펀치 제너레이션. 걱정하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어깨가 부서져라 부딪쳐야만 할 것인데, 그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고작 술이나 쳐 마셨다는건 나약하다, 뇌가 없어보인다, 돈을 땅바닥에 질질 흘리고 다니는구나 이런 한심한 놈 - 등의 혐의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어 보인다. 외로움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누군가는 엊그제 이상문학상을 받았고, 음악을 했다면 슈퍼스타는 되지 못했을 망정 적어도 악기 하나라도 제대로 다룰 줄 알게 되었을 것이며 하다못해 연애에 전념했다면 화려한 경력이라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너는 고작 술이고 고작 망가진 몸과 심각하게 붕괴된 통장잔고 뿐이냐.
외로움 때문이라는 변명은 버리도록 하자. 나라고 로켓 펀치 제너레이션이 되지 못할 이유가 있나. 중독에 가까운 음주 취향은 외로움과는 별개의 것이라 치고, 제법 로켓 펀치 스러운 변명을 찾아내 보도록 하자.

칸트는 대상과의 관계에서 얻는 만족을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비교고찰 한 바 있다. <판단력 비판>에서 칸트가 제시한 세 종류의 만족은 다음과 같다. ‘쾌적’, ‘선’, ‘미(취미)’.
대상의 본질적 개념과는 관계없이 대상을 통해 얻어지는 자극만으로 얻어지고 판단되는 만족을 ‘쾌적’이라 한다. 자극과 그에 대한 반응은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에 의해 발생하기에 쾌적에 대한 만족 역시 주관적, 감정적이며 사람들은 굳이 이 만족에 대해 객관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도 않는다. 이에 반해, 이성을 매개로 하여 대상의 개념을 파악하고 목적성을 부여함으로써 얻어지는 만족을 ‘선’이라 한다. ‘이성’이라거나 ‘목적성’이라는 단어의 사용에서 보듯, 선에 대한 만족은 쾌적에 대한 만족과 확연하게 다르다. 가령, 칸트의 예를 빌리자면, “건강이란 건강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직접적으로 쾌적한 것이다(적어도 신체적 고통이 일체 없다는 소극적 의미에서라도). 그러나 건강을 선한 것(좋은 것)이라고 일걷고자 한다면, 우리는 또한 이성을 사용하여 건강을 목적에 비추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예를 들어 건강이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든 일에 전념할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음주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만족이 쾌적과 선 둘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을 것이란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미리 말했다시피 나는 음주로 인해 겪는 고통 등 쾌적하지 못한 과정과 결과들이 싫다. 이성에 기초한 판단인 선에 대해서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어처구니없게도)그러한 이유 - 쾌적과 선은 분명히 아니다 라는 이유, 로 나는 내 음주 행위를 미적(취미) 판단에 의거한 행위로 판명하기로 했다. 끼워 맞춰보니 얼추 맞아 들어간다.

어떤 것이 아름다운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의 경우, (위의 두 만족에 대한 판단과는 다르게)우리는 그 사태의 현존이 우리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에게 어떤 중요성을 갖는지 또는 어떤 중요성을 가질 수 있는지 알고자 하지는 않는다. 이 경우 우리는 대상을 단지 관조함에 있어서 우리 자신이 어떻게 판정하고 있는가 하는 것만을 알고자 할 뿐이다. 내가 어떤 대상에 대해 아름답다고 말하기 위해, 또 내가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내부에 있는 이러한 표상으로부터 내가 부여하는 어떤 것일 뿐, 나로 하여금 대상의 현존에 의존하게 하는 어떤 것이 아님은 매우 분명하다.
또한 그것이 무관심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취미 판단은 쾌적에 대한 판단과 마찬가지로 이성적이기 보다는 주관적인 것이나 - 보편적 객관성을 가진다. 대상에 대한 욕구와, 자극을 통해 얻어지는 감각 없이 관조만으로 그것이 내게 만족을 준다면, 그것이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만족을 줄 것이다 - 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성적으로 타당하기 때문이다.

나는 술을 욕망하지 않는다. 술은 거기에 있고, 나는 관조적 입장에서, 어쩌다 보니 술을 접해 마셨을 뿐이다. 그런데 술은 내게 무한한 만족을 준다. 이 술로 인해 무슨 사태가 일어 날 지는 여전히 무관심하며, 여전히 관조적 입장에서, 마시고 마시고 또 마신다. 와, 만족스러워라. 이 만족의 근거를 나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심지어 그것은 ‘선’하지도 않다. 단지 ‘원래 그런거 아닌가’, ‘남들도 다 그렇겠지’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20년간 합리화를 하며 살아온 합리화의 달인 망언 김요셉 선생. 이렇게 결론 짓는다. 술을 마시는 이유는, 술이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응?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20:02:48 

 

병장 김민규 
  으악, 첫 부분을 읽으면서는, 아하 자전적이구나. 일단은 깔려죽지는 않겠어. 라는 생각으로 그간의 요셉님의 글들에 대한 자격지심적 인상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지독한 오판이었군요. 

칸트가 나오고부터, 압권입니다. 아, 본문 죽어. 
그냥 깔려 죽을래요. 남발같기는 한데 이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가지로 2009-01-12
15:24:00
  

 

병장 김민규 
  그리고 눈을 두번 세번 돌려서 같은 문장을 다시 읽고 읽고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만큼 저의 글읽기는 협소하고 가벼운 것이라, 머리 들이박고 다시 읽어 보렵니다. 으악 2009-01-12
15:24:47
  

 

병장 안재현 
  쉬운듯 하면서 이 어려운 글을 누가 해석좀 해주실분??하하 좋네요 소주에 대한 해석... 2009-01-12
15:26:48
  

 

상병 차종기 
  글을 읽다보니, 어엇 이거 알코올 중독이잖아 , 위험한데,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건 알코올 중독자의 글은 절대로, 네버 ! 될수 없으므로 요 생각은 패스. 

그리고 싸구려 소주가 어딨어요 ~ 소주는 다 똑같은 소주지. 이상하게 소주는 질을 따질수가 없더라구요. 후후. 

덧붙여서 여럿과 마셨건 혼자서 마셨건 취한 감정이란 공유하기 힘든 것이므로. 요 문장이 너무 맘에 들어요 , ! 2009-01-12
15:30:26
  

 

상병 차종기 
  맘에 드는 문장이 있으니까, 저도 외칩니다. 
가지로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2009-01-12
15:31:17
  

 

상병 김요셉 
  사실 이건 극단적인 헛소리에 가깝습니다. 헛소리 한 번 지껄여보자 작정하고 쓴 글에 가깝거든요 - 사실 제가 쓰는 글 중에 헛소리 아닌게 몇 개나 될 지 의문스럽지만요. 흐흐흐. 

충분히 진지한 고민이 담긴 헛소리 - 가 테마였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저도 칸트까지 소환해버리곤, 대책없이 무너졌어요. 으으. 칸트를 불러드린건 역시나 오판이였고, 성급히 마무리 지었어요, 깔려 죽기 전에. 자칫하단 '숭고'까지 갈 뻔 했다는...헙. 

민규님이 두번 세번 돌려 반복해 읽을 만한 문장은, 아마 칸트의 문장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문장일 겁니다. 때문에 협소하고 가벼운 것이라 자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걸 그렇게 자책해버리시면, 칸트가 얼마나 서운하겠어요. 2009-01-12
16:37:55
  

 

병장 이동석 
  음, 칸트 인용에 일본어의 향기가 느껴져요. (하긴 우리나라 학술서적이 뭐 그렇지유) 그래서 제 이 난독이 시작된겁니다. 난 잘못되지 않았어. 우하하하하 

(읽고도 뭔 소리인줄 당최 모르겠다는 미쳐가는 시민 A (25세)) 2009-01-14
11:05:01
 

 

병장 이동석 
  전 이해하지 못했을때는 절대로 가지로-를 외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가지로-를 외친글을 모두 이해했다는건 아니고, 

어쨌거나 저의 가지로-는 소중하니까요. 
좀 더 보고 외칠께요. 2009-01-14
11:06:29
 

 

상병 김요셉 
  우리나라 학술 서적이 뭐 그렇지유. 흐흐흐. 읽기의 과정을 건너뛰고 곧바로 수용의 과정으로 넘어갈 수 있을 정도의 고난도 스킬이 필요 합니다. 흐흐흐 2009-01-14
11:18:20
  

 

상병 김요셉 
  그리고 인용한 칸트의 개념을 '굳이'이해하고자 하는 분이 있다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설명해 드릴 용의는 있으나, 에이. 이해하려 하지 마세요. 그게 중요한게 아니거든요. 요는, 술은 아름답다고...... 2009-01-14
11:20:30
  

 

일병 권홍목 
  나는요, 이게 술이, 사실은 정말로 싫어요. 취해 지쳐 정신없는 것도 싫고, 속 아파 괴로운 것도 싫어요. 정말요. 그런데 있잖아요, 뻥이에요. 싫다는 거 다 뻥이에요. 너어무 좋아요 

의외로 술먹고 추한짓좀 해본사람으로서 이렇게 공감갈수가 없네요 허허 2009-01-14
11:30:36
  

 

일병 김유현 
  으아 바카디. 


쾌적과 미의 차이는, 관조의 여부. 인가요? 2009-01-25
01:01:39